한국 사회가 강박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 『강박증 의무의 감옥』, 드니즈 라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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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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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책과 관련해 어떤 글을 쓸 수 있을까? 책을 읽는 중에, 또한 정리하는 가운데 계속해서 떠올랐던 질문이었다. 특정 증상을 다룬 책이라는 특수성을 넘어 해당 증상을 겪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글이 될 수 있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생각해 보면 ‘강박’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 있어 ‘우울’과 더불어 상당히 익숙한 증상적 표현이었기에 이러한 고민을 떨쳐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강박증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특정 사고나 행동을 떨쳐버리고 싶은데도 시도 때도 없이 반복적으로 하게 되는 상태(1)를 일컫는다.

설명처럼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증상이 심각한 경우도 있겠으나, 일반적인 경우 특정 상황이나 조건에서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가 있고 이럴 때 ‘강박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특히나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우리나라는 사회적으로 증상을 위한 조건이 잘 형성되어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 이런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한 스카이캐슬의 서글픈 절규는 이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의 핵심을 전달한다.

“나 그냥 엄마 아들이면 안돼요?”

부모의 욕망에 종속된 자녀가 내뱉는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 그것은 강박증 환자가 증상을 통해 요구하는 주체의 진리이다.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 속에서 아직도 전근대적 교육 방식에 발이 묶여 그것이 매우 심각한 문제임을 알면서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목을 맬 수 밖에 없는 현실. 그렇게 공부의 목적, 이유는 상실된 채 단지 좋은 점수를 만들어내기 위한 기계로써 지식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야 말로 강박증이 경고하는 우리의 서글픈 현실인 것이다.

‘자녀는 부모의 증상’이라는 표현은 프랑스 정신분석가 돌토의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부모의 거울’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증상이라는 표현이 훨씬 문제적으로 당시 이 발언으로 프랑스 사회가 발칵 뒤집혔다고 하는 것이 이해가 간다. 저자인 드니즈 라쇼 또한 프랑스의 정신분석 학자로 현대 철학의 주요 참조점으로 거론되는 라캉의 정신분석을 통해 강박증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이해로 우리를 이끈다. 이 책이 중요한 것은 무려 24년 전에 쓰여진 책(1995년, 한국에는 2007년에 번역됨)임에도 아직까지 강박증의 병인에 대해 뇌내분비학적 또는 매우 소극적으로 불우한 가정환경이라고 하는 마치 질병의 근원을 스트레스로 돌리는 것과 비슷한 수준의 이해에 머무르고 있는 것에 정확히 대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정신의 진실에 있어 특별한 정신분석학, 그 가운데서도 이를 대표하는 두 학자인 프로이트와 라캉을 주요 참조점으로 상세히 파헤친 이 책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였다.

1. 강박증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무언가를 반복적으로 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 ‘강박적이다’라는 표현을 쓰곤 한다. 어떻게 보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을만한 증상이지만, 한편으로 프로이트를 오랫동안 매달리도록 이끈 가장 어려운 증상이기도 했다. 무언가를 만질 때 장갑을 끼고 만진다거나 손을 매우 자주 씻는 등 주로 청결함과 관련되어 있는 강박증상은, ‘무언가를 과도하게 반복하고자 하는 경향’ 탓에 사실상 무한대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이런 특성 때문인지 책에서는 강박 증상 자체에 대해서는 그다지 구체적으로 묘사하진 않고 주로 증상의 특징들만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어, 마치 강박증 주위를 나선형으로 돌며 실마리를 풀어 나간다는 느낌을 준다. 시도 때도 없이 발생하는 불안에 직면한 주체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만의 방법을 찾아낸 증상, 즉 감당할 수 없는 불안에 압도되어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강박증 환자가 처한 현실이다. 한편으로 자신의 증상을 전혀 알지 못하는 정신병자와 달리 강박증 환자는 이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괴로움을 있는 그대로 느끼며 같은 행위를 반복하는 시시포스의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언급되는 불안에 대해서는 이후 원인에 대한 논의에서 다루기로 하고 강박증상의 특징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좀 더 들어보자.

1.1. 모순 속에서 고뇌하는 주체

책의 제목처럼 강박증 환자는 ‘의무’라는 갑옷을 입고 현실세계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그의 독특한 내면세계의 결과로 먼저 저자가 밝히는 것은 강박증 환자를 사로잡고 있는 갈등 체계이다. 강박증 환자의 관념 세계는 양 극단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순진하고 순수한 세계와 불순하고 타락한 세계가 그것이다. 타협될 수 없는 극단의 모순 속에서 주체는 첫 번째 세계의 투사가 되어 한사코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는 두 번째 세계에 저항한다. 강박증상의 이면에는 그러한 갈등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109) 강박증 환자는 두 심급 사이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주체이다. 이상적 자아 혹은 거울 이미지라는 심급과 전능성을 수단으로 욕망의 경제를 규제하는 대타자라는 심급 사이에서 말이다…. 강박증 환자는 우리에게 그가 대타자로부터 받는 명령은 모순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돌려주어야 한다/돌려주어서는 안 된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대타자는 주체에게 법을 규정하는 타자로서 아이에게 있어서는 최초로 법을 전달하는 주체인 어머니를 의미한다. 결국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 자아에게 명령하는 어머니의 모순된 메시지 때문에 갈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강박증 환자가 행하는 의무는 명령 또는 금지 자체가 아닌 제3의 것(강박적 사유 또는 행위)을 야기한다. 그것만이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수수께끼 속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수단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1.2. 방어하는 주체

따라서 그의 갈등은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다’는 거부의 정식으로, 곧 증상 뒤에 숨겨진 메시지로 환원된다. 명령을 통해 수행해야 할 어떤 것이 다시금 금지되었다는 메시지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강박증이 무언가에 대해 반복적으로 거부하는 것은 곧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방어’라는 프로이트의 해석은 강박증에 대한 인식을 이전 시대와 구분하게 해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45) 강박증은 모든 종류의 접근하기 혹은 붙잡기 시도에 대한 일종의 방어이다. 즉 타자에 대한 방어가 아니라 대타자의 향유(jouissance de l’Autre)에 대한 방어이다. 우리는 강박증 환자가 자신을 방어하는 것으로부터, 어떤 사물 혹은 어떤 사람을 방어하는 것, 그리고 [그 어떤 사물 혹은 어떤 사람을] 방어해야 하는 의무로 이행하는 것을 본다. 방어란 그러한 의무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방어는 심리 장치의 구조화, 그리고 환상과 욕망의 구조화에 참여한다.

2. 강박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감당할 수 없는 요구로 인한 불안에 압도되어 이를 방어하기 위해 구성한 증상(타협형성), 그것이 강박증에 대한 1차적 병인 해석이다. 불안을 야기하는 상황은 환자마다 다양하겠지만 그것에 있어 공통된 주요 원인은 하나의 지점으로 귀결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이다. 이는 강박증 환자의 상담 사례를 통해 드러난 매우 일관된 진술이었다.

(66) 원칙적으로 금지는 아버지에 의해 발화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어머니가 행사하는 금지에 대해 논하고 있다. 왜 우리는 어머니의 금지에 주목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심지어 아버지가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사회에서도, 그리고 어머니가 특히 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회에서조차도 어머니는 아버지의 금지를 매개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중시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환자들이 ‘어머니의 법’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강박증 환자는 이러한 어머니와, “너는 내 욕망 말고 다른 것을 욕망해서는 안 돼”라는 그녀의 결정에 종속된 채 남아있게 될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자녀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 어머니에게나 같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환자의 어머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욕심인지 진정으로 자녀를 위해 하는 요구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왜곡된 의도는 사랑하는 자녀가 살기 위해 증상을 선택하도록 몰아붙이게 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드러내 놓고 자신의 욕망을 살라고 하진 않았을 터, 우리가 자라면서 익숙하게 들어온 ‘다 너 잘 되라고 하는 거야’라는 표현으로 교묘하게 위장한 채 자녀들의 선택을 제한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어머니의 모든 욕망이 강박증을 유발하도록 이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세상에 강박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을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머니의 어떤 욕망이 아이를 강박증이라는 증상에 몰두하도록 이끌었을까?

2.1. 아이를 상상적으로 소유한 어머니

2.1.1. 애도의 실패

불안은 주체를 안심시켜주는 대상이 부재할 때 생겨난다. 어머니에게 있어서는 10개월 동안 사실상 한 몸으로 지내고 있던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융합되어 있던 아이가 분리되는 최초의 순간은 건강한 여성들에게는 기쁨으로 더 크게 다가오지만, 융합의 정도가 강한 어머니는 그녀의 나르시시즘을 붕괴시키는 위협(상징적 거세)으로 감각되어 태어난 아이에 대한 애착을 강화하도록 이끈다. 결국 상실을 감당할 수 없는 어머니의 애도 실패가 이를 보상받기 위한 길로서 아이를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과도한, 때론 집착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랑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주어진 좌절을 인정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아이와 융합되어 있을 때의 행복감을 떠올리며 그 세계를 현실 속에서 회복하려고 하지만 이는 영원히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녀의 욕망은 계속해서 커져가기만 할 따름이다.

2.1.2. 과도한 자극 (유혹)

상실로 다가온 아이의 탄생, 그리고 이를 보완해 줄 현실의 불충분성, 게다가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용인되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인식 속에서 어머니는 안심하고 아이에게 헌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아이가 대접을 받는 것 같지만 실상은 어머니의 욕망에 의해 조종당하는 것으로, 그렇기 때문에 아이는 사랑에 대해, 정확히 말하면 (아이는 알지 못하는) 사랑을 빙자한 어머니의 요구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된다.

저자는 프로이트와 본인 내담자 사례를 소개하며 이를 증언하고 있는데, 쥐 인간의 경우 유모가 행한 성적인 유혹에, 다른 사례에서는 다양한 남자들을 만나며 그들의 부족함을 낱낱이 털어놓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아이에게 이해되지 않는, 다른 말로 언어화에 실패한 강렬한 자극은 당시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진 못하지만, 그의 내면에서 처리되지 못한 채 계속해서 상기되면서 ‘알 수 없는 불안’을 야기한다. 강박증상은 이처럼 올라온 불안을 쫓아내기 위한 해결 방법으로 점차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37) 성적 사건, [더 정확히 말하면] 성 이전의(pre-sexual)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사건이 주체에게 발생하는데, 그는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엄밀한 의미의 성적 감정을 갖지 못하며, 외부에서 [자신에게로] 들어온, [수동적으로] 겪은 이러한 경험을 통합하지 못한다. 이 경험에 대한 사전 준비가 없기 때문에 이 경험은 주체에게 경악감(Schreck)을 불러일으킨다. 그 장면은 그 경험이 생겨나는 순간에 억압 대상이 되지 않는다. 억압은 두 번째 시기에 비로소 발생한다.

2.1.3. 자극의 갑작스러운 금지

어머니가 제공하는 향유는 본래부터 금지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에게 제공된 쾌락은 갑작스럽게 거둬질 수 밖에 없었고 아이에게 남겨진 상흔은 욕망과 처벌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게 된다. 쥐 인간에게는 유모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보는 것뿐 아니라 만지는 것까지 허용됐으며, 다른 유모의 경우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감옥에 갔다고 하는 위협이 함께 전달되었다. 한편 어머니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남성들의 이야기를 들은 아들은 그것을 듣는 자리 자체가 불편을 야기하게 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의 욕망, 또한 어머니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아버지, 그리고 그녀가 만나는 다른 남성들에 이르기까지 남성이라고 하는 자신의 성적인 존재와 위치 모두가 위협으로써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와 같이 강박증 환자가 처한 상황을 ‘자아의 발달이 리비도의 발달을 시간적으로 앞선다'(2)고 하는 정식으로 요약해 낸다. 즉, 때 이른 쾌락이 아이를 조숙하게 (무언가를 알고 있지만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는 상태) 만들어 자아가 상대적으로 발달하게 되는 반면, 주어진 자극이 아이의 성적인 충동으로 인한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제공된 것이었기 때문에 의미로 와 닿지 않았던 자극과 이에 대한 금지의 처벌적 신호가 아이로 하여금 어떠한 대상을 붙잡을 수 밖에 없는, 강박증의 활성화에 발을 내디딜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38) 프로이트는 자신이 밝혀낸 것을 다음과 같이 몇 마디로 정리한다. 성인이 어린아이에게 행한 조기의 유혹[은], 미래의 억압의 조건[이다]. 쾌락적인 성적 활동. 억압과 억압된 것의 복귀는 여기에서 이상하고 불안한 기분의 형태로 발생한다. 프로이트는 그 장면에서 “그[쥐(39)인간]의 미래의 신경증의 핵과 모델을 동시에” 보았다.

2.2. 아버지를 무시하는 어머니

아이를 불안하게 하는 것, 어머니의 요구 그것은 곧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즉, 프로이트 이론에 있어 핵심적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곧 근친상간 금지의 법을 무시하도록 아이를 이끄는 것이다. 어머니의 아버지를 향한 만족되지 못한 욕망은 아버지를 원망하는 것을 넘어 무시하는 것으로 나아가고, 갈 곳을 잃은 욕망의 물줄기는 다른 대상을 찾도록 이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미래를 담보하고 있는 나의 아이를 선택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필연적인 결과이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어떻게 차지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그 지점에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아이는 어머니의 상상적 팔루스가 아닌 얼어붙은 가상(3)으로 머뭇거리게 된다. 어머니의 모순된 요구란 바로 이런 것이며 그녀의 결여의 자리를 아버지가 차지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녀에게는 ‘요구된 금지’로써 불안을 넘어 죄책감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66) 어머니가 아이를 자신[어머니]의 욕망의 원인 – 대상으로 생각하게 될 때 아이는 자신[아이]을 어머니가 아버지를 멀리 떼어놓게 되는 원인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아이는 이러한 칙칙한 관계 속에 무언가 문제점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를 무시하는 어머니의 태도들의 예란 이런 것들이다. “식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지하실에서 뚝딱거리고 있는 사람”, “어린애를 혼자 똥 닦게 내버려두는 사람”, “아이들이 다 잠들었을 때 집에 들어오는 사람”이라고 비난받는 사람(4) 말이다.

2.2.1. 법의 소유자

어머니에게 있어 아버지는 ‘믿을 수 없는’ 존재다. 그녀가 보기에 남편은 자신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정의 법을 세울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법을 세우는 데까지 나아가고 이를 실행한다. 이를 국가에 비유하자면 입법부와 사법부가 하나로 합쳐지게 되는 것으로 우리는 독립이 유지되지 않는 권력, 개인의 욕망의 도구로 사용될 뿐인 법이 자녀로서의 국민들을 얼마나 무기력하게 만드는지 정말이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아버지를 무시하는 어머니란 거세되지 않은 어머니, 즉 자신의 욕망의 한계를 받아들이지 못한 어머니로 그 정도가 심할 경우 아이로 하여금 ‘정신병’을 유발할 수도 있는 지극히 개인적 편의에 따르는 법이기 때문에 아버지의 기능이 반드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75) 정신병에서는 [어린아이와 어머니의] 융합적 관계와 개인적인 법의 설립이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신경증의 경우와 달리 정신병에서 어린아이는 어머니의 육체와 구분된 주체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어머니의 전(76)능성에 전적으로 종속되어 있다. 아버지의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어머니의 전능성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욕망은 결코 아버지라는 참조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아이의 욕망은 상상적이고 원초적인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제한되어 있다. 요컨대 대타자[어머니]의 욕망의 유일하고 독특한 대상, 즉 대타자의 상상적 팔루스가 되고자 한다. 정신병자는 신경증자가 절대적으로 방어하고자 하는 향유 – 그리고 신경증자는 이 향유의 불가능성을 보증받기를 원한다 – 에 사로잡혀 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이 라깡이 아버지 이름의 배척이라는 개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다.

2.2.2. 그녀가 실제로 바라보는 곳

앞서 인용한 문장은 정신병에 대한 설명이다. 하지만 어머니에게 ‘완전히’ 종속된 정신병 환자 – 아버지의 이름이 완전히 배척된 – 와 달리 강박증은 신경증의 일환으로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데, 여기서 아이에 대한 요구의 진정한 의미가 드러난다. 즉, 아이가 필요한 이유는 아버지에게 당신이 무능하고 실패했다고 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정신병과의 핵심적인 차이는 여기에서 비롯된다. 어머니의 욕망은 아버지라는 참조점을 여전히 가지고 있으며, 그의 이름, 그의 자리가 완전히 배척된 것은 아닌 상태인 것이다.(5) 결국 저자가 르클레로(S. Leclaire)를 통해 인용하는 강박증의 진정한 상황은 이렇게 완성된다.

(77) 르클레로(S. Leclaire)는 [강박증의] 진정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1) 어머니는 무언가를 기대한다. 2) 즉 아버지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78) 무언가를 기대한다. 3) 그러나 아버지는 그녀에게 그것을 주지 않는다. 4) 그리하여 어머니는 내[어린아이]가 그것을 자기에게 준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고자 한다.(6)

어머니는 아직 아버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2.3. 무능력한 아버지

어머니는 상상적으로 소유한 아이를 통해 실상은 아버지를 바라본다. 아이 또한 어머니의 요구가 자신을 향할 때 그를 해방시켜줄 대상으로서 아버지를 바라본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향한 두 사람의 요구에 침묵하며 이들의 갈등을 멀리서 지켜만 볼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신을 어머니의 욕망의 도구로 내버려둔 아버지에 대해 아이가 가질 수 있는 상징은 그의 ‘무능력함’ 뿐이 된다. 아이로부터 어머니를 ‘빼앗아’ 사로잡혀 있던 주체가 비집고 나올 수 있는 틈을 만들어 줘야 함에도 연약한 아버지는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 뿐 아니라 심지어 그 필요성조차도 알지 못한다. 이렇듯 (실재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상징적으로는) 매우 희미하게 존재하는 아버지의 나약함은 도리어 아이의 탈출을 가로막는 거대한 바위가 되어 어둠의 공포 앞에서 이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자신만의 보호막, 이른바 강박증이라는 증상을 구축하도록 돕는다. 저자의 설명을 빌자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의 증상 형성을 그렇게 ‘공모’하는 것이다.

3. 강박증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앞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결국 원인 제공자였던 부모가 바뀌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아버지를 향한 기대를 포기하진 않았지만 만족되지 않아 자녀를 통해 이루려는 어머니의 욕망이 반드시 좌절(거세)되어야 하고, 아버지는 그녀의 욕망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이를 자신에게로 돌릴 수 있을만한 힘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강박증 환자에게 있어서 상징적 어머니의 죽음, 이상적 아버지의 실재적 경험, 강박증으로 이끄는 불안의 경향성을 조금씩 직면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그의 내면을 조직하고 있는 구조를 바꿔야만 한다. 하지만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이 어떻게 동시에 그런 변화를 만들어내고 또 이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원인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는 진정한 치료의 시작이지만 정신적 증상의 경우 종교적 회심의 수준이 아니고서는 혼자서는 결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물론 정신분석가의 책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저자의 해법은 결국 ‘정신분석 상담’을 통해서 이뤄지게 된다. 인지치료, 정신과 치료 등이 아닌 정신분석 상담인 이유는 증상의 원인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주체를 통해 내면의 질서를 재구축하는 오랜 여정을 거쳐야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캉의 병인론은 바로 그 점에서 아주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현대 철학자들이 사회 문제를 다룰 때 한 개인의 욕망의 문제를 다뤄야만 전체 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라캉은 기본적인 참조점이 된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이런 행동에 대해 매우 혹독한 평가를 내려왔다는 것은 저자가 책을 쓰게 된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정신분석 상담을 통해 강박증 환자는 어떻게 증상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3.1. 언어를 통한 환상의 재구축

무엇보다도 어머니 욕망의 활성화를 거부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강박증상에 몰두하는 환자를 이해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를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치료를 위한 신뢰의 기본적인 출발점으로 이를 통해 환자는 안심하고 자신의 과거 문제를 상담의 현실 속으로 드러낼 수 있게 (전이) 된다. 환자가 이야기하는 모든 내용은 무의식에 기록된 고통의 표현으로 한결같이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러한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일반적인 치료는 섣부르게 교조적 방식의 메시지를 줌으로써 있는 자리에서 곧바로 어머니의 재현을 마주하게 만드는, 그렇게 함께 그은 출발선을 지워버리는 꼴이 될 뿐이다.

(175) 치료 시간에 R.V. 는 분석가에 의해 ‘입양’되고 싶은 소망을 표현했다. 그에게 분석 공간은 그가 구성했던 모든 개인사를 가로질러 ‘살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것’이 태어나는 장소로서 기능했다. 그가 끊임없이 숙고하기를 잊어버린 짧은 순간 동안에 그는 그가 어렸을 때 즐겼던 장난들을 음미할 수 있었다…. (177) 분석을 통해 그는 개인사 중 일정 부분을 구성할 수 있었다. 그는 신중하지만 끈질긴 전이 관계의 도움으로 오랫동안 그것[개인사의 구성]에 몰두할 수 있었다.

(330) 태고적 일화를 말로 표현한 후 그녀의 불감증은 더욱 완화되었다.

흔히 여성적 대화방식으로 통용되는 공감의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 격앙된 감정을 누그러뜨리는, 달리 말해 불안함을 달래는데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환자의 이해되지 않는 환상과 그에 대한 표현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듣는 이의 논리 체계를 허물어 뜨리는 경험이 되어 혼란을 넘어 분노를 야기할 수 있다. 환자의 환상은 자신의 믿음, 곧 원시적 해석에 대한 믿음 때문에 존재 자체에 대해 죄의식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이를 재해석할 수 있도록 함께 기다려주는 시간이 결정적으로 필요하다. 그렇게 잔잔하게 함께 머무는 가운데 가만히 있는 것만이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님을, 움직이는 것이 위험한 것이 아님을 스스로 느낄 수 있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메시지를 전해줄 수 있어야 한다.

3.2. 분열된 주체 속 욕망의 출현

환자가 억눌려 있던 강도만큼, 얼마가 될지 모르는 지난한 과정을 통해 주체는 자신이 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끊임없이 부정해왔던 공포의 지점과 조금씩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신의 환상을 지배하고 있는 어머니의 욕망에 맞설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일생동안 융합된 관계에 있었던 어머니를 끊어내고 스스로를 광야로 내모는, 나를 근본적인 소외의 지점으로 내모는 연습을 시도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상상 속 어머니의 거세를 통해 주체의 분열을 유도하는 ‘상징계의 도입’은 비로소 내면에 감추어진 주체를 탄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내는데, 그것이 개인에게 가치 있는 유일한 원인인 ‘욕망의 원인’을 탄생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다만 책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증상을 형성한 것은 가족의 역사, 즉 구성원 모두가 힘을 합쳐 (의도하진 않았지만) 만들어 낸 증상이기 때문에 구성원 중 일부가 그 체계를 벗어나고자 할 경우 심리적 안정을 누려온 다른 구성원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다. 그것이 자녀의 증상을 치료하는 데 있어 온 가족이 함께 의식의 신장을 고취해야 되는 중요한 이유로 라캉주의 정신분석 학자의 다른 글이 이를 경고한다.

분석의 마지막 몇 개월 동안 어머니는 종종 아이에 대해 불평을 했다. 아이가 거칠어졌고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으며 더 이상 누나들이 자신의 옷을 입혀주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왜 그러냐고 묻지도 못한 채 슬프고 우울했으며, 제노퐁이 갑자기 아버지와 같이 어설프게 땜질하고 수선하는 일에 강한 흥미를 보이는 것에 놀랐다. 아이는 아버지를 모방하고 아버지의 면도칼과 화장수를 훔쳤고 넥타이를 매어 보았다. 그녀는 아들이 남자의 몸으로 살기 시작하고 언어를 사용하기를 감행했을 때 절망적으로 도움을 애걸했고 자살시도를 했다.(7)

4. 상대주의의 허울과 진리로서의 아버지의 이름

이 책은 강박증에 대한 원인과 해법을 다루었지만, 아이의 증상에 기여하는 가족 구성원의 역학관계를 밝혀낸 구조주의적 해석 책이다. 증상 자체가 아니라 구조에 집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인간이 형성한 모든 공동체에 공통분모로써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는 우리나라에 있어서 강박증의 구조를 다룬 이 책을 주의 깊게 살펴봐야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서론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자신의 삶의 방향이 모두 한 곳 수능에만 쏠려 있는 사회다. 소위 한국식 엘리트 코스를 밟는 것만이 성공의 유일한 방정식으로 인식되고 있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주체의 욕망은 온데간데없이 좋은 수능 점수만을 향한 한국 교육의 (강박적 증상을 일으킨) 어머니적 요구가 학생들의 모든 사고의 방향을 지배하고 있다. 청소년들의 높은 자살률, 낮은 삶의 만족도, 그들이 꾸는 빈약한 꿈 이 모두는 부모세대를 향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진리로 대리되는 아버지뿐이다. 아버지의 삶이 바로 설 때에 아이를 바라보던 어머니의 눈길은 남편을 향할 수 있고, 바로 그만큼 아이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된다.하지만 오늘날 진정한 아버지의 모습은 갈수록 힘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을 향해, 사회 공동체를 향해 헌신하며 법을 수호하는 아버지를 보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 되었다. 개인의 욕망이 법을 넘어서는 강박증 환자의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들을 우리는 사회 도처에서 만나고 있으며 이 시대의 지배자로서의 아버지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그렇게 스스로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제 이러한 아버지, 그리고 그들이 구축한 기성 질서에 대한 불신은 일종의 사회적 반항을 야기하고 있다. 상호 간의 차이와 이로 인해 비롯되는 갈등을 공동의 목표를 이루는 발판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죽이는 무기로 끝없는 싸움만을 반복하는 어른들의 모습에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젊은 세대들은 나의 생각과 너의 생각이 모두 옳다고 여기는 관용을 가장한 갈등의 회피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무한한 다양성을 무한하게 수용해서는 그 공동체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그것이 혼란의 시대에 소수 혹은 다수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문제점을 올바로 지적하고 이들의 힘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진정한 진리의 법을 세우는데 모든 세대가 힘을 쏟아야 하는 이유이다. 지체될 수 없는 세계적 변화의 흐름 앞에서 개개인이 진정한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욕망의 법을 우리나라가 새롭게 세울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마지 않는다.


(1) 위키피디아, 강박장애 
(2) (저서) p. 35(저자 인용 출처) S. Freud, “La dispostion a la nevrose obsessionnelle. Une contribution au probleme du choix de la nevrose”, in Nevrose, psychose et perversion, op. cit., p.196. 
(3) p. 65
(4) p. 308
(5) p. 75
(6) (저자 인용 출처) [34] S. Leclaire, “Philon ou l’obsessionnel et son desir”, in Demasquer le rrel, op. cit., p. 153.
(7) 카트린 마틀랭, 『라깡과 아동 정신분석』, p. 196
(※ 원글 작성 시점 : 2019년 4월 6일)

* 이미지 출처 : 시시포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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