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인간 불안의 근본적인 원인 (불안의 유형과 그 의미),『존재의 용기』, 폴 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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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에 스스로를 가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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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제목은 『존재의 용기』이다. 새삼스럽게 제목을 강조한 이유는, 앞선 글들에서 용기 개념의 역사적 흐름을 정리하는데 집중하다 보니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용기’가 보다 근본적인 차원의 것 (존재론적) 이라는 점을 까맣게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언급했지만 저자는 철학자이자 신학자이다. 두 학문은 존재의 원인이라고 하는 근원적인 질문 앞에서 서로 마주하게 되는데, 이 책은 이 같은 관점에서 용기를 조망하기 위해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존재의 용기』에 대한 이전 글들
① 용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 (고대 ~ 중세)
②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의 차이
③ 스피노자와 니체의 자기 긍정

인간은 누구나 불안을 안고 있고 오늘날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하다. 어느 때보다 복잡해진 현대 사회는 우리의 예측 능력을 넘어서 버렸고, 기후 위기와 코로나 감염증이 보여주듯 긴밀하게 연결된 세계는 인간이 더 이상 이 땅에서 숨을 곳이 없다는 점을 보란듯이 증명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은 1952년에 쓰여져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을 저자가 예측할 순 없었겠지만, 모든 상황의 밑바닥에 인간의 보편적인 문제가 자리잡고 있음을 설명해 준다. 소크라테스부터 니체에 이르기까지 근원적인 불안을 마주하는 가운데서 보여준 그들의 용기를 통해 말이다.

1. 불안의 근본 원인, 비존재

이런 불안을 정교하게 다루기 위해, 저자는 가장 먼저 ‘비존재’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존재가 아닌 것, 존재의 부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존재 다음으로 중요하다는 점이 강조된다. 저자가 언급한 학자들 중 일부만 살펴봐도 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플라톤은 순수 본질과의 대조를 위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을 위해 비존재라는 개념을 사용했다고 한다. 칸트의 유한성 분석에서는 비존재가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으며, 변증법으로 유명한 헤겔은 이 부정성을 역동적인 운동으로 변화시켰다. 쇼펜하우어의 뒤를 이은 생 철학자들은 ‘의지’를 중요한 범주로 참고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의지가 자신을 상실시키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부정’하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 베르그송, 화이트헤드는 생성 과정이 비존재 개념을 담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아예 비존재를 존재론적 사고의 중심에 둔 하이데거, 사르트르에 이르기까지 비존재는 사실상 서양 사상의 중심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대조군이 분명해야 탐구 대상의 이해도 또한 높아지는 것처럼, 비존재는 이처럼 존재의 불안, 그리고 이를 극복한 존재론적 용기를 이해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비존재로 인한 불안은 언제나 우리 곁을 맴돌고 있기 때문이다.

사과 1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빨간 사과 (출처 : TWENTY20 [1])

1.1. 존재와 영원히 공존하는 비존재

분명 기술의 발전은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미지의 원인들을 밝혀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달리 말해 우리는 비존재에 머물러 있던 많은 것들을 존재로 바꾸는데 성공한 셈이다. 라캉식으로 상징으로 전환된 실재라고 할 수 있을 이러한 발전은, 그러나 우리를 더 많은 비존재에 직면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기 시작한 기술과 무한대의 변수, 그리고 오랜 기간 붙잡고 있던 공동의 질서, 진리 체계까지 빠르게 무너지면서 존재론적 불안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게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 극복 시도의 결과로 더 많은 불안을 양산해 버린 이런 아이러니는, 비존재는 존재와 영원히 함께하며 영원히 극복된다는 저자의 표현을 실감하게 한다.

게다가 비존재가 존재에 의존적이라는 것, 그러니까 빛이 있을 때만 어둠이 존재할 수 있다는 이러한 양극단의 상호의존성은 그것을 알 수 없다고 부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지만, 삶과 죽음이 언제나 동행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비존재를 정의할 때 (형이상학적으로) 존재가 그 자체와 비존재를 감싸안고 있다고 표현할 수 밖에 없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처럼 인간의 근본적인 유한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비존재는 존재와 영원히 함께하면서 영원한 불안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1.2. 불안과 두려움의 차이

살펴본 것처럼 인간의 성장이란 곧 비존재의 존재화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영역을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비존재를 정복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불안과 두려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존재로 인한 불안은 그 실체를 인식할 수 있게 되는 순간 두려움의 ‘대상’으로 전환된다. 불안을 일으키는 대상은 알 수 없지만 (비존재), 두려움을 일으키는 대상은 적어도 ‘인식을 통해 알아갈 수는’ 있기 때문이다.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순간, 그러니까 불안이 두려움으로 전환되는 순간의 고통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만한 것이 된다. 이는 정신분석의 오랜 교훈과도 맞닿아 있다. 증상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외상적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그것이 언어로 표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회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비록 존재의 많은 부분들이 그렇듯 불안과 두려움도 혼재되어 명확하게 구분짓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예측 불가능한 것 (불안) 을 가능한 것 (두려움) 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는 점 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2. 불안의 유형

저자는 인간의 불안을 크게 세 종류로 구분지어 바라본다. 존재론적 불안, 도덕적 불안, 정신적 불안이 그것인데, 먼저 ① 존재론적 불안은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라고 하는 보편적인 명제 앞에서 느끼게 되는 불안을 뜻한다. ② 도덕적 불안은 공동체의 윤리를 어긴 자가 갖는 죄의식을, ③ 정신적 불안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자들이 갖게 되는 불안을 의미한다. 이들 불안은 절망의 강도에 따라 각각 운명과 죽음 (존재론적 불안), 죄의식과 정죄 (도덕적 불안), 공허와 무의미 (정신적 불안) 로 세분화 된다. 시대적으로 바라보면 고대에는 존재론적 불안이, 중세 시대에는 도덕적 불안이, 현대에는 정신적 불안이 각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듯 싶다. 물론 이들 세 종류의 불안은 보로메오 매듭처럼 우리 내면에 중첩되어 있으며,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고 함께 할 수 밖에 없는 ‘본질’이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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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로메오 매듭

2.1. 존재론적 불안 (운명 / 죽음의 불안)

존재론적 불안은 우리의 존재 자체가 (비존재에게) 위협받는 것을 뜻한다. 죽음이라고 하는 가장 기본적이고 보편적인 관념에 대한 감정이기에 다른 두 종류의 불안을 압도하지만, 특별히 생사의 갈림길에 있지 않은 이상 일상에서의 영향력은 다른 불안들보다 덜 직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은 존재론적 불안 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우리는 죽음이 일으키는 절대적 불안보다, 운명이라고 하는 상대적 불안에 좀 더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처럼 느낀다.

여기에서 운명이란 존재의 궁극적인 우연성을 의미한다. 우리가 마주하는 많은 것들이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 즉 논리적인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뜻에서 말이다. 우리는 특정 시대, 나라, 누군가의 자녀로서 이 세상에 태어났다. 말 그대로 원인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인과관계의 틀 속에 내던져진 셈이다. 거기에 내가 속한 사회의 가치, 문화를 받아들이고, 수 많은 사람들과의 우연적인 만남을 통해 사회가 기대하는 구성원으로 성장 (해야만) 한다. 자연히 존재론적인 원인도, 그 결과도 알 수 없는 우리는 삶의 경과가 안정적이지 못할 경우 (일반적인 궤도에서 이탈할 경우), 앞으로의 운명에 대해 불안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상황 속에서도 끊임없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우연적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다.

2.2. 도덕적 불안 (죄의식 / 정죄의 불안)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내가 누구인지’ 알아낼 것을 요구받는다. 우연히 세상에 태어났지만, 그 이유를 밝혀내는 것은 나의 몫이라는 것이다. 주어진 운명을 진취적으로 성취하면서 잠재적인 모습을 현실화시키는 것에 대한 이런 요구는 시대마다 다르게 주어져 왔다. 참고로 이런 성취의 본질을 철학적, 신학적 용어로 설명하는 것이 윤리학의 (저자 자신의) 직무라고 한다. 이런 요구에 순응한 사람들은 칭송을 받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책망하는 죄의식이 형성되도록 만들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비롯된 존재론적 불안과 사회적 차원의 도덕적 불안은 그렇게 혼재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가 지독하게 겪고 있기도 한 이러한 불안은, 스스로에게 맞서는 재판관 (양심) 의 판결의 강도에 따라 가혹하다는 느낌을 넘어 스스로를 거부하게 만들기도 한다. 저자의 표현으로 상대적이었던 죄의식의 불안이, 정죄라고 하는 절대적 불안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불안을 다룰 수 있을 만한 두려움으로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상징을 찾아 나서듯, 도덕적 질서로 돌아가는 선택 (형식주의) 을 하게 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강요된 도덕적 관념에 대한 깊은 절망과 회의는, 우리를 운명의 우연성에 내맡기도록 (도덕적 무질서) 이끌기도 한다. 오늘날 사회 분위기는 철저히 후자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처럼 보이는데, 인정된 질서에 대한 거부는 죄의식의 감소와 함께 상호의존적이라 할 수 있는 정신적 불안의 감도를 높이게 된다.

2.3. 정신적 불안 (공허 / 무의미의 불안)

정신적 자기 긍정은 자신의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이 갖고 있는 일종의 자신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창조적이라는 표현은 천재들의 업적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일상에서 마주하는 어려움에 반응하고 적응하는 우리의 모든 창의적인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이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궁극적인 관심을 사로잡고 있는 주제가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정신 생활이 개개인의 관심에 따라 진지하게 취급되고, 그 결과가 드러날 때 우리는 비존재의 위협에 맞서 정신적인 안정감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듯 우리는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모른다. 일생을 바쳐 헌신할 나만의 무언가를 찾지 못해 그 외의 것들 (대부분 쾌락적인 요소가 포함된 행위들) 을 좇아보지만, 순간의 기쁨에 뒤이은 공허함까지 잠재우지는 못한다. 이제까지의 모든 불안들처럼 (상대적) 공허함에는 (절대적) 무의미함의 불안이 내재되어 있지만, 공허함이 지속되거나 강화될 경우, 삶의 무의미함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뒤흔들게 된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의 이유 (의미) 를 묻는다. 하지만 스스로가 존재의 원인이 되지 못한 인간은 그 답을 영원히 알 수 없다. 남아있는 것은 삶을 충실히 살아냄으로써 자신만의 의미를 발견해 내는 것 뿐으로, 이 때 가장 필요한 것이 질문이다. 저자의 놀라운 설명처럼 우리는 대상에 참여하면서도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대상이 외부에 있기 때문에 질문할 수 있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나를 대상으로 두고 질문을 거듭해 깨달음을 얻었던 데카르트처럼, 의심과 질문은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무엇보다 중요한 전제 조건이 된다. 하지만 그 답을 찾는게 매우 고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손쉬운, 그러니까 권위 (라는 정답) 에 기대 의미를 구축하는 (하지만 자아는 희생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자신의 일부에 대한 의심이 전체로 확장되는 실존적 절망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동의한 권위에 동참하지 않는 자들을 맹렬히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불안을 감추는 광신주의자가 이에 대한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만약 이들의 신념을 깨뜨리는 어떤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정신적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을 넘어, 존재 자체가 부정되는 죽음의 공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모든 불안은 그렇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3. 삶의 의미를 찾는 혼란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불안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비참하게) 죽고 싶지 않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도덕적 불안을 감내해야 했고, 그런 만큼 삶의 의미에 대해 묻는 과정은 충분치 못했다. 정답에 함몰된 교육을 통해 만들어진 경쟁적 우월감 내지 열등감은 다른 사람들 눈에 잘 보이기 위한 삶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어진 정답으로 인해 질문을 상실한 삶은 타인을 정죄하는데 많은 시간을 허비하도록 만들었다. 나보다 나은 삶을 살고 있는 듯한 대상을 죽이거나 끌어내려야만 지금의 내 삶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다고 여기는 (안심하는) 가련함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자의 정신적 불안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아마 기술이 오늘날처럼 발전하지 않았다면 이런 삶은 상당 기간 연장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입신양명의 기치 아래 일원화 된 삶의 스펙트럼을 무한대로 늘려준 것이 바로 기술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아이폰과 앱스토어가 기업이 아닌 개인들의 자생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면, 유튜브는 그 가치를 모든 사람들에게 선명하게 각인시켰다. 크리에이터, 즉 컨텐츠 제작자들에게 금전적인 보상을 제공하는 것이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에도 도움이 된다는 인식은 관련 서비스들의 등장을 촉진시켰고, 때마침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진 빈 자리를 빠르게 메워가고 있다. 직장생활을 통하지 않아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역대급 개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이 옳다고 여기는 권위는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오히려 새로운 가능성에 가장 뒤쳐져 있는 것이 바로 그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수능의 유효기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본다. 해마다 높아지고 있는 수능 결시율이 이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불과 5년 전인 2017학년 수능만 해도 결시율은 8.9%에 불과했지만, 2021학년의 결시율은 14.7%에 달했다고 한다 (49만여 명 중 7만여 명이 미응시)[2]. 이는 94년 수능 도입 이래 최고치로, 불과 5년 사이에 두 배 가까이 급증한 것이다. 물론 아직 SKY로 대표되는 대입신화가 무너진 것은 아니지만, 유치원생인 우리 아이가 성인이 될 때 쯤에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지 않을까 싶다. 그 때 쯤이면 아마도 ‘대학은 나와야지’가 아니라, ‘내가 관심있는 분야를 진짜로 더 깊이 알고 싶어서’ 라고 하는 애초의 목적에 맞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지 않을까? 또한 대학에 가더라도 지금처럼 2년 또는 4년을 보내야 하는 것이 아닌, 해당 분야만을 단기간에 섭렵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대학의 생존방식도 급변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쩔 수 없다. 학령인구는 급격히 줄고 기존의 성공 방정식도 빠르게 붕괴되고 있으니 말이다.

이처럼 우리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던 도덕적 불안은 기술 발전을 통한 개인성의 강화에 따라 급격히 위축되고 있다. 물론 그에 따른 부작용도 만만찮게 경험하고 있지만 말이다. 도덕적 불안 감소에 상응하는 정신적 불안의 증가는 이런 과도기적 혼란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부여된 의미의 나약함에 안주하기보다, 정신적 절망의 문턱에서 나만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 진정한 삶의 의미란 바로 그런 과정을 통해서만 확보할 수 있다. 언제나 우리 삶과 동행하는 비존재를 존재화하려는 용기를 통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도덕적 불안의 문턱을 막 넘어서기 시작한 우리 사회의 혼란을 응원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1] TWENTY20
[2] 베리타스 알파, [2021수능] 결시율 ‘역대최고’ 14.7% .. 전년 11.7%보다 상승

* 표지 이미지 출처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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