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페미니즘 발전사를 통해 배울점,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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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결하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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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82년생 김지영』을 접했던 건 작년 6월 경이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여성차별적 행태를 소설 속 주인공의 성장 과정 속에 낱낱이 드러내 이미 오래전부터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때였다. (글을 쓰는 이 시점에도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26위라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재작년에 출간된 책임에도 이처럼 높은 순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울리는 공감대가 크다는 의미겠지만, 사실 내게는 (아무리 소설이라 하더라도) 빙의를 통해 과거를 회상하는 구성의 무성의함, 그리고 모든 피해의식을 총망라해 쏟아낸 내용 전개 등 읽는 내내 불편함이 가득한 책이었다. 형제만 있는 집안에서, 게다가 남중, 남고를 나왔으니 어쩌면 너무 당연한 반응이었을까? 생각해보면, 아마도 나와 같은 반응을 저자는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여성의 고통에 무지한 자들이 그들의 아픔을 단지 알아주기만이라도 한다면 이 책은 그 소명을 다한 것이라고.

올 들어 새롭게 참여하게 된 독서모임은 내가 읽고 싶은 책만 읽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페미니즘과의 불편했던 첫 만남에도 아랑곳없이 페미니즘의 본산에서, 그것도 최전선에서 40년간 싸워온, 게다가 누구보다 차별로 인해 고통받았을 흑인 여성이 쓴 무시무시한 책과 조우하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대놓고 페미니즘이라니. 공공장소에서 책 표지를 드러내 놓고 읽기 내심 껄끄럽긴 했으나, 단 한 장(Chapter)을 읽고 나서 페미니즘에 대한 막연한 불편함은 곧바로 환희로 반전되었다. 나를 기쁘게 한 이유는 단순했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고통을 주제 삼아 평생 동안 이를 해결하기 위한 헌신적인 노력을 경주했던 저자의 고민의 흔적과 깊이를 느낄 수 있었고, 또한 이론이 성숙되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어 의미 있는 깨달음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그렇게 페미니즘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환상에서 비롯되지 않은 해법을 얻기 바랐던 그녀의 마음은 성공적으로 전달되었다.

페미니즘에 무지한 상태에서 대중언론을 통해 왜곡된 시선만을 갖게 된 대다수의 미국인들에게 가볍게 소개해줄 수 있을만한 책을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저자는 결국 기다림에 지쳐 직접 쓰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탄생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환갑을 훌쩍 넘긴 저자의 부드러우면서도 확신에 찬 메시지로 가득했는데, 멀리 갈 것도 없이 서론과 첫 번째 장을 통해 마주하고 있던 대부분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대중은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언론을 통해 남성 혐오주의 인상만을 갖고 있었고, 남성들은 대체로 사회화된 성차별주의로 누리는 특권에 안주하는 가운데, 여성들은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많은 분란을 겪고 있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이란 과연 무엇일까? 바로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 이다. 저자는 다양한 주제(문제)를 놓고 페미니즘 이론을 전개하고 있는데 문제의 원인으로 페미니스트 내부적으로는 계급주의를, 외부적으로는 가부장제를 가장 중요하게 꼽고 있었다. 이 두 가지 내용에 책의 2/3가 할애되고 있어 이 운동이 어떤 문제로 신음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1. 내부적 원인 – 계급주의 문제

미국은 다민족 국가의 상징으로 여성들만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특권계급 여성들이 있었는데 이는 백인 여성을 의미했다. 기본적인 위치가 다르다 보니 주장하는 바 또한 다를 수밖에 없었기에 저자는 이들을 개혁파로, 나머지 여성들을 혁명파로 구분 짓는다. 경제적으로 여력이 있고, 사회적으로도 관심의 대상이었던 이들 개혁파는 기존의 인식 체계를 유지한 상태에서 남녀의 권리 평등을 주장했고, 성공적으로 용인되었으며, 사실상 페미니즘 운동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다. 반면 주로 저임금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레즈비언, 흑인, 유색인종 중심의 혁명 파는 기존 체계를 뜯어고치고 가부장제와 성차별주의를 무너뜨리고자 했으나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다행스럽게도 학계에는 진지하게 수용되어 이론화의 과정을 거쳤으나 오히려 이 때문에 대중화에는 실패하게 된다. 혁명파(이렇게 쓰니 조폭 같다;)의 일원인 저자가 계급주의를 반복해서 지적한 것은 개혁파 여성들이 직장 내 여성 권익에 일익을 담당한 것은 인정하지만, 나머지 부분들에 있어서는 오히려 모든 여성의 평등을 향한 페미니즘을 후퇴시키고 분열시켜왔기 때문이었다. 계급주의 여성들은 백인들의 힘이 약해질 것을 두려워한 사회 지도층을 효과적으로 움직여 저임금 노동의 현실에 등을 돌리고 고임금 직업을 획득하는데 만족했으며, 가정 폭력의 가해자의 대다수가 여성이라는 현실을 외면해 남성 혐오주의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인종간 격차를 직시하지 않은 채 이를 문제시 삼는 여성들을 페미니즘에 인종주의를 끌어들인 배신자 취급한 상태에서 결국 자신들의 요구가 어느 정도 점철되자 전 세계 여성들을 상대로 페미니즘 의제를 정할 권리를 주장하는 신식민주의적 태도를 취했다. 여성을 넘어 모두를 향한 의미 있는 평등을 외쳤던 혁명파의 주장은 계급과 권력의 힘 앞에 소외당할 수밖에 없었다.

(115) 사실 그들의 헤게모니는 평등에 대한 페미니즘의 레토릭을 멋대로 가져다 씀으로써, 그들이 지배계급과 결탁해 백인우월주의-자본주의-가부장제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교묘하게 감추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인종을 불문하고) 수많은 여성들이 페미니즘 용어를 구사하면서도 서구 제국주의와 초국적 자본주의에 부역하는 모습을 보고는 경악했다.

2. 외부적 원인 – 가부장제 문제

계급의 문제가 우리나라 여성들 사이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가부장제는 우리나라에서도 매우 만연한 문제다. 성차별주의의 주원인이자 이를 뒷받침하는 근본주의 기독교를 같은 선상에서 비판하고 있는 저자는 많은 지면을 할애해 감추어진 의식의 폐해를 고발한다. 여성들은 페미니즘 운동 이전보다 더욱 자기 몸을 혐오하게 됐으며, 직장 생활을 하는 여성들에게 집안일과 육아를 도맡게 했고, 성역할을 떠나 가정과 사회 내에서 약자를 향한 강자의 폭력을 정당화해 결국 여성들이 모든 남성의 사랑을 불신하는 단계까지 나가도록 종용했다. 페미니즘 운동이 젠더가 아닌 가부장제적 사고가 근본적인 원인이었음 (가부장제를 수용한 여성들이 곳곳에서 성역할을 공고화하는데 기여했으므로)을 이해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이를 깨닫기까지 이성애적 사랑을 원하는 여성들과, 남성 혐오주의를 비판하는 사회의 모진 시선을 견뎌내야만 했다. 하지만 이제 저자는 분명히 주장할 수 있게 됐다. 이제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적 사고를 떠난 진정한 평등, 곧 진정한 사랑을 위한 토대를 쌓아야 한다고 말이다.

(235) 우리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비전의 맥박은 여전히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진실과 공명한다. 즉, 지배가 있는 곳에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페미니즘 사고와 실천은 동반자 관계와 육아를 통한 상호 성장과 자아실현의 가치를 강조한다. 누구나 욕구를 존중받고, 누구나 권리를 누리고, 누구든 예속이나 학대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관계에 대한 이러한 비전은, 가부장제가 관계의 구조를 지키기 위해 고수하는 모든 것과 반대된다.

3. 진짜 적은 내부에 있다.

문제의 원인을 내부와 외부로 나누긴 했지만 분명 여성들 스스로에게 이미 내면화되어 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적은 결국 우리 내부에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고, 일상 속에서 그렇지 못한 어른들의 모습을 너무도 빈번하게 마주하고 있다. 끊임없이 나의 행동과 생각을 되짚어보며 우리가 어떤 잘못된 이론에 복종하고 있는지 살펴보지 않는다면 같은 문제는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괴롭힐 뿐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저자의 비판은 외부만을 향하지 않았고 바로 그 과정을 통해 비로소 페미니즘 이론이 단단해질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234) 이제 와 돌이켜보면, 당시 우리는 사랑에 관한, 특히 이성애에 대한 긍정적인 페미니즘 담론을 만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부장제 대중매체가 페미니즘 운동이 사랑보다는 증오를 발판으로 하는 주장이라고 떠들 수 있는 여지를 주고 말았다. 남성과 유대를 맺고 싶었던 수많은 여성들은 그런 유대를 맺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페미니즘 운동에 헌신할 수도 없었다. 실제로 우리는 여성도 남성도 페미니즘을 통해 사랑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널리 퍼뜨렸어야 했다. 이제는 그 사실을 안다.

4. 진솔한 대화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책의 핵심 내용 전달에 초점을 맞추긴 했지만 사실 이 책에서 가장 가치 있게 여겼던 부분이었다. 성장에 관심이 있는 나는 페미니즘 운동이 어떻게 그렇게 거대담론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는지 내심 궁금했는데 그 출발은 너무도 평범했다. 많은 성공한 사회운동, 사업 등과 마찬가지로 페미니즘도 처음부터 혁명적인 모습을 갖췄던 것이 아닌,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서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함께 모인 여성들은 아무에게도 드러내지 못했던 깊고 내밀한 상처를 토로하며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가부장제의 정체를 인식할 수 있었고, 이러한 공감의 대화를 통해 비로소 싸워갈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더욱 중요했던 것은 서로의 입장 차이를 격렬한 토론을 통해 받아들이면서 진정한 자매애 연대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분노로 점철됐던 대화의 장은 점차 이성을 되찾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하면서 정치적 색을 띠고 대중화되어 마침내 이론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만, 한편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의식화 모임이 와해되어 기회주의자들의 등장을 불러왔다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39) 무엇보다 의식화 모임에서는 소통과 대화를 중요 의제로 여겼다. 여러 모임에서 모두의 목소리를 존중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여성들은 순서를 정해 발언함으로써 모두가 목소리를 내게 했다. 위계 없는 토론 모델을 만들기 위해 참석자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발언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 때문에 대화가 맥락 없이 이뤄지는 경우도 잦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경우 보통 모든 참가자가 적어도 한 번씩 발언한 뒤 토론과 논쟁이 이어졌다. 의식화 모임에서 논쟁은 흔했는데, 이는 남성중심주의의 본질에 대해 집단 차원에서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토론과 의견 충돌을 통해서만 젠더 착취와 억압에 대한 현실적인 관점을 모색할 수 있었다.

5.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옥의 티는

저자가 성차별주의를 강조하고자 했던 나머지 아동을 향한 부모의 폭력마저도 그 원인을 성차별주의로 돌렸다는 점이었다. 물론 가정 폭력이 성차별주의의 직접적 산물이라고 보는 데는 공감하지만 “가부장제 폭력이 성차별주의에 찌든 여남이 아동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이 부분은 약자를 향한 강자의 폭력인 가부장제로 돌렸다면 보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151)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가부장제 폭력을 우선적 관심사로 삼아야 한다. 하지만 가부장제 하에서 자행되는 다양한 폭력 가운데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가장 끔찍하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이런 유형의 폭력에만 집중한다면 페미니즘 운동을 더 진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상당수의 가부장제 폭력이 성차별주의에 찌든 여남이 아동에게 휘두르는 폭력이라는 현실을 은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저자가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그 모든 세속적 편견을 떠나 인간 존재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상호존중을 요구하는 여성향 민주주의이다. 권력에 의해 억압받던 민중은 진작에 해방되었지만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의 해방은 아니며, 자본주의는 그마저도 다시금 잠식해가고 있다.) 교묘하게 억압받고 있던 여성 해방의 외침은 비로소 시작되었다. 저자를 통해 본 미국 사례에 빗대 보면 우리나라는 말 그대로 사회운동 초기의 전형적인 현상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중이다. 우리는 선배들의 실패의 경험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서로를 향한 진정한 사랑을 위한 발걸음을 옮겨야 할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페미니즘은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 된다.

 


* 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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