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빌라도에게 죽임을 당했을까?, 『빌라도와 예수』, 조르조 아감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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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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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신앙고백문이 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요약한 ‘사도신경’이 그것인데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 외에도 전혀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다. 기독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 그 주인공이다. 뒤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성경의 내용을 통해 빌라도가 예수를 고소한 자들에게 예수의 죄 없음을 이야기하며 여러 차례 처벌을 막고자 노력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도신경에서 등장하는 빌라도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장본인으로 묘사된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분명 빌라도에게 직접적으로 고난을 받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왜 그 책임은 오롯이 빌라도에게 돌려진 것일까? 한 때 이렇게 생각했던 적은 있었다. 고백문의 내용과 복음서 사이의 미묘한 불일치에 대해, 빌라도가 재판관으로서 자기 소임을 다하지 못한 것 (무죄인 예수를 소요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면하기를 포기한 죄) 자체를 통칭해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고 한 것이겠구나라며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저자인 조르조 아감벤의 관심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325년 니케아 교부들이 작성한 사도신경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빌라도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추가[1]된 이유 말이다. 왜 로마 황제가 아닌 일개 지방 총독에 불과한 빌라도가 신앙 고백을 위해 사용되어야 했는지, 그가 주재한 예수에 대한 재판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깊이 따져보는 것,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가 기존에 잘못 알고 있었던 점을 짚어내는 것이 이 책의 저술 목적이었다.

1. 예수의 재판 과정

저자는 특별히 「요한복음」의 내용을 비중있게 다룬다. 공관복음 (마태, 마가, 누가복음) 에서는 간략하게 요약하고 넘어갔던 빌라도와 예수와의 대화를 일곱 개의 장면으로 나눠서 상세히 설명[2]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논의의 핵심 쟁점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진행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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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케 호모’ (이 사람을 보라), 안토니오 시세리 (위키피디아)

① 예수를 고소함

로마 재판 절차에 따라 빌라도가 고소 이유를 물었으나 그들은 그저 “이 자가 범죄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당신께 끌고 왔겠느냐”며 둘러댄다. 이는 재판을 진행하기 위한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이었기에 빌라도는 당연하게도 “당신들 법에 따라 처리하라”며 거절한다. 그러나 사제들은 자신들에게 사형 집행권이 없음을 호소하며 빌라도의 마음을 돌이키게 된다.

② 빌라도의 심문

빌라도는 예수에게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묻는다. 그의 첫 질문이 이렇다는 것은 아마 빌라도도 예수에 대해 익히 들은바가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유대인들이 고소 내용을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굳이 설명해야 되느냐’는 식이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이 질문에 예수는 ‘당신 스스로의 표현인지 다른 이들이 그렇게 부른건지’를 묻는다. 이에 빌라도는 (발끈한 듯) 자신이 유대인인줄 아느냐며, 너의 동족이 자기 앞으로 끌고 왔지 않느냐고, 무슨 짓을 했냐고 묻게 된다. 여기서 예수는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다.

나의 왕국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니다He basileia he eme ouk estin ek tou kosmou toutou. 내 왕국이 이 세계의 것이었다면, 내가 유대인들에게 붙잡혀 올 때 [백성들이] 나를 위해 싸우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나의 왕국은 이 세계에 있지 않다.
p. 35

빌라도는 “어쨌든 네가 왕이란 말이구나?” 라며 되묻고 예수 본인은 “진리를 증언하러 왔으며, 진리에 속한 사람이 그의 목소리를 들을 것”이라고 답한다. 이에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되묻는다. (이 질문은 니체가 모든 역사를 통틀어 가장 세련된 말[3]이라 표현한 것이다.) 그 이후의 대화는 외경인 「니고데모복음서」 를 통해 이어진다. “지상에는 진리가 없다는 말이냐?”, “그러나 당신은 지금 진리를 말하는 자가 지상의 권력자에 의해 재판받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소?”

③ 첫 번째 설득 시도와 실패

대화를 마친 뒤 유대인들 앞으로 나간 빌라도는 ‘본인이 예수의 어떤 죄도 찾지 못했으나, 유월절을 기념해 죄수 한 명을 풀어주는 관습을 활용해 이 유대인의 왕을 풀어주는게 어떻겠냐’고 설득을 시도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바라바를 대신 풀어달라고 소리쳐,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으며 ‘예수의 흘린 피에 죄가 없음’을 선언하고 돌아가게 된다.

④ 두 번째 설득 시도와 실패

빌라도는 관저 안으로 돌아와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내란죄에 대한 처벌로써 예수에게 채찍질을 가하고, 가시면류관을 씌운 뒤, 침을 뱉고는 다시 유대인들 앞으로 데리고 나간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그의 죄를 찾지 못하였음을 이야기하나 이제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게 된다. 빌라도가 이를 거절하자 유대인들은 율법을 거론하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칭한 것은 죽어 마땅한 일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예수는 ‘아버지의 일을 이루지 못하면 자신을 믿지 않아도 좋으나, 정 못 믿겠다면 자신이 한 일은 믿으라고, 그러면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사실 알 것이라 (「요한복음」10장 36-38절)’고 스스로를 변호한다.

⑤ 재판의 종결

이에 매우 혼란스러워진 빌라도는 다시 관저로 돌아와 예수에게 “너는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냐?”라고 묻지만 예수는 대답하지 않는다. 마음이 다급한 그는 자신에게 풀어줄 권력도, 십자가에 못 박을 권력도 있음을 이야기하며 말할 것을 종용하지만, 예수는 ‘그저 그 권력도 위에서 내려준 것임을, 그렇기에 빌라도에게 자신을 넘긴 자들에 더 큰 죄가 있다’고만 말할 뿐이다. 결국 빌라도는 다시 밖으로 나가 예수를 재판석에 앉힌 뒤, “보라, 너희들의 왕을!”이라고 소리쳐 보지만, 고위 사제들은 “우리에게 황제 외에 다른 왕은 없소.”라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결국 빌라도는 예수를 넘겨주어paredoken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한다.

2. 빌라도 재판을 바라보는 기존 입장은 무엇일까?

저자가 연구한 많은 학자들의 주석은 오늘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신학적 해석을 향해 있다. 빌라도는 유다와 마찬가지로 ① 구속사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것과, ② 로마 제국을 통한 재판의 결과로 그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2.1. 구속사를 이루기 위한 도구

처음에는 칼 바르트가 소환된다. 앞서 넘겨주다paredoken는 단어를 강조해서 표시했는데, 이 인계consegna가 구원 질서의 핵심 요소로 기능한다. 예수는 인간에게 넘겨지기 이전에 하늘에서 땅으로 인계 되었다. 이어서 유다를 통해 유대 사제들에게 넘겨졌으며, 최종적으로 빌라도에게 인계됨으로 구속사는 완성된다. 그에 따르면 유다야말로 새로운 약속의 최초 집행인이었고 빌라도는 그 다음이었다. 물론 유다와 달리 빌라도는 예수를 계속해서 풀어주려 했지만 이는 예수의 항변에 따른 것으로 큰 틀에서의 맥락은 변하지 않는다. 마틴 루터가 빌라도의 아내가 꿈에서 예수로 인해 애를 많이 썼다고 그와 상관하지 말 것을 권유한 것에 대해 (「마태복음」 27장 19절)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걸 방해하기 위한 악마의 공작으로 볼 수 밖에 없다고 본 것[4]이 바로 그런 관점이라 할 수 있다.

2.2. 지상 권력을 통한 심판

여기에서 대표적으로 인용되는 인물은 단테이다. 그는 『제정론De Monarchia』(II,12.)에서 빌라도를 언급하는데 그의 주장은 분명 인상적이다. 예수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심판할 수 있는 분이 내리신 권력, 즉 당시 로마 제국의 정당한 재판을 통해 실현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아감벤이 그리스도의 정신의 왕국과 로마의 지상 제국을 화해시키기 위한 시도[5]였다고 평했던 그의 주장에서 파스칼은 보다 급진적으로 나아간다. 예수는 가장 치욕적인 죽음이 필요했기 때문에 법적인 절차에 따라 판결받아야 했다는 것이다. 또한 고대 주석가 중 유일하게 ‘넘겨주었다’는 표현에 관심을 가졌던 아우구스티누스도 재판에 따른 판결을 통해 처형이 허락되었음을 밝히고 있었다. 사도신경에 빌라도가 들어간 이유를, 아감벤은 이처럼 교회와 결탁한 제국 권력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보고 있었다.

3. 아감벤이 재판을 바라보는 입장은 무엇일까?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저자는 앞서 언급한 두 개의 관점을 뒤집어버린다. ① 빌라도가 구속사를 위한 도구로 쓰였다는 입장은 적어도 이 경우에서 만큼은 거두어야 하며 더 충격적으로, ② 예수의 재판은 재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일까?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자.

3.1. 구원 경제에의 저항

예수의 재판 과정을 보자면 빌라도가 느꼈을 당혹감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죽음을 개의치 않는 것을 넘어 마치 기다리기까지 하는 듯 보이는 예수와 근거 없는 (광기어린) 억지를 부리고 있는 유대인들을 보면 갈팡질팡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과정이었다. 니체가 “신약성서 전체를 통틀어 우리가 존경해야 할 유명한 인물”[6]이라 칭한 그를, 도저히 ‘수동적 도구’로 바라볼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고뇌를 통해 구원의 경제라는 드라마 속으로 직접 ‘침투한’ 진정한 배우, 역사로의 ‘인계’를 중단시키고자 부단히 노력했다는게 그의 판단[7]이었다. 따라서 역사를 구원 경제의 실행 과정으로 보는 기독교적 역사 이해는 적어도 이 경우에서 만큼은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3.2. 판결 없는 재판

법학자들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재판이란 언제나 판결과 이를 언도하는 판결문만이 전부인 법적 절차를 의미한다.[8] 빌라도 또한 이런 이유로 예수의 죄를 발견하지 못해 놓아주려다 유대인들의 외압에 못 견디고 그를 결국 ‘넘겨주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예수의 재판은 법적인 절차가 모두 생략된 채 십자가형이 집행된, 단테의 합리화 – 재판관의 정당한 징계를 통해서만 인류 구원 역사 가능 – 를 깨부수는 ‘부당한 처벌’에 불과한 일이었다. 또한 이는 파스칼이 이야기했던 것보다 더욱 치욕적인 죽음인 셈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판결은 정말 내려지지 않은 것일까? 이와 관련해서는 앞서 예수 재판 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강조했던 부분, ‘예수를 재판석에 앉힌 뒤’라는 구절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 구절은 일반적으로 “빌라도는 예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재판석에 앉았다 (ekathisen epi tou bematos, 불가타 성서 번역 sedit pro tribunal).” 고 쓰여져 있다. 이는 한글 성경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와서 박석(히브리 말로 가바다)이란 곳에서 재판석에 앉았더라.” (「요한복음」 19장 13절, 개역한글) 하지만 아감벤은 ekathisen을 ‘앉혔다’라는 타동사로 봐야한다고 이야기 한다. 기가막히게도 단어 하나가 그야말로 내용 전체를 전복시킬만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셈인데, 이와 관련해서는 내용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해 보인다.

성 유스티노(『변론』,1, XXXV, 6)에게 전거를 두고,근대의 학자들 가운데서는 하르낙Harnack 과 디벨리우스Dibelius의 권위에 의지하는 성서 주석 전통이 있는데,이에 따르면 ekathisen은 타동사transitivo로 보아야 한다. 즉 “그는 예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그를 재판석에 앉혔다.” 또한 「베드로 복음서Evangelium Petri」 3장 7절의 보고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그에게 홍포를 걸치게 하고 재판석에 앉힌 다음ekathisan auton epi tou bematos kriseos 이렇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정의롭게 심판하소서dikaios krine, basileu tou Israel.” 타동사에는 [직접]목적어auton가 있어야 하지 않느냐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지체 없이 동사 ekatisen은 바로 앞에 언급된 “예수Iesoun’를 받을 수 있다고 대답하면 그만이다. 예수가 베마bema위에 앉았다는 사실은 「마가복음」 및 「마태복음」의 이야기와도 일치한다. 이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 그에게 홍포를 걸치게 하고 마치 왕홀처럼 갈대를 쥐고 있게 했다. 예수를 유대인의 왕처럼 모시는 시늉을 한 것이다. 또한 성 유스티노에 의하면,예수를 베마에 앉힌 유대인들은 오직 왕만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부려보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우리를 심판하소서!” 게다가 빌라도가 그 의자에 앉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가 판결을 내리지 않고 다만 예수를 “넘겨주었을” 뿐이라는 사실과도 일맥상통한다. 이게 사실이라면,비단一비커만이 언급했듯이一 앞서 진행된 다섯 시간 동안의 대화뿐 아니라 제 6시에 일어난 사건 역시 어떤 형법상의 효력도 가질 수 없게 된다.
pp. 67 – 68

참고로 성 유스티노는 기원 후 100년에 태어난 교부로 당대 철학에 몰두했으나 만족하지 못한 가운데서 개종하고 기독교 탄압에 항거하다 순교한 인물[9]이라고 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그의 독해에 따라 예수를 재판석에 앉혀야 많은 퍼즐 조각들이 제 자리를 찾을 수 있고, 결정적으로 판결에 대한 어떠한 가능성도 열리지 않게 된다. 로마 재판법상 예수에게 적용된 것과 같은 중범죄는 재판석에 배석한 상태에서만 판결을 내려야 했기 때문[10]이다.

3.3. 빌라도의 재판이 의미하는 것

아감벤은 위와 같은 이유로 기존의 재판해석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빌라도는 재판석에 앉아 재판을 진행한 것도, 심문을 통해 예수의 죄를 밝혀낸 것도 (심지어 이해할 수도 없었다), 판결을 통해 형을 언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넘겨줬을 따름이다. 수많은 법학자들이 이 재판에 대해 서로 다른 결론을 낼 수 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으로, 결국 지상의 재판과 하늘의 구원은 이 세계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서로 만날 수 없는 것, 즉 영원히 분리된 것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 정치신학, 세속 권력의 신학적 정당화를 위한 노력은 이처럼 수수께끼가 된 인간과 신의 법의 만남으로 인해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예수에게 판결은 이미 내려져 있는 것이었다. 아감벤이 탁월하게 묘사하듯 재판이 판결로 해소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판결이 재판으로 해소된 것[11]이다. 재판 결과에 입각해 선고와 석방을 결정짓는 콘뎀나시오는, 유죄 형벌 선고(뎀나시오)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여기 있지 않은 왕국의 진리에 관해 지금 여기서 증언한다는 것은, 우리가 구원하기를 원하는 바로 그것을 [오히려] 우리가 심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덧없음 속에 있는 세계는 구원이 아니라 정의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계가 정의를 원하는 이유는 구원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받을 수 없는 피조물이 – 영원한 것에 대해 판결을 내린다 – 바로 이 역설이 결국 빌라도 앞에 선 예수를 돌연 끝내버린 것이다. 여기가 십자가고, 여기가 역사다.
p. 86

분명 빌라도의 재판은 아감벤의 논의를 따라 상징화가 불가능한 지점, 즉 실재가 되었다. 실재를 통해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에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결코 그러한 진실 – 대속을 위한 죽음 – 이 아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그러했듯 모름지기 메시아란 이 세계를 실질적으로 다스려 자신들을 중용하는 왕으로서의 정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실재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아마도 절대 다수에 해당되는 태도, 즉 외면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를 알기 위한 욕망, 즉 의심을 거두지 않는 태도다. 또 다른 하나는 이를 믿음의 영역으로 이양하는 태도, 즉 사도 바울과 같은 태도라 할 수 있을 듯 싶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위 과정을 모두 거쳐야만 진정한 믿음의 투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이전 책 『팬데믹 패닉』에서 지젝이 퀴블러로스를 인용해 밝힌 것처럼 ‘부인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의 과정을 통해 충격적인 진실을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빌라도의 재판’ 또한 앞으로도 이와 같은 과정을 끊임없이 밟아나가며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는 영원히 그 지점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이다.

호기심이 인간의 선천적 특성이며 우리 모두의 깊숙한 내면에는 ‘알고자 하는 충동Wissenstrieb’이 있다는 생각과 반대로, 자크 라캉은 인간의 자발적 태도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는 태도, 지나치게 많이 아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저항이라고 주장한다. 모든 진정한 지식의 진보는 우리의 이런 자발적 경향을 거스르는 고통스런 투쟁을 대가로 얻어진다.
슬라보예 지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p. 91


[1]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staurothenta te yper emon epi Pontiou Pilatou” 325년 니케아에 모인 교부들이 작성한 “[사도]신경”에는 이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이름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 이르러 추가되는데, 이는 분명 그리스도께서 수난당하신 연대를 확실히 해두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p. 7

[2]

「공관복음서」가 간략하게 요약하고 넘어갔던 빌라도와 예수 간의 대화는 「요한복음」에 와서 모든 측면에서 결정 적인 밀도와 중요성을 획득한다. 요한은 이 사건을 일곱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데, 장면이 바뀜에 따라 장소 역시 바뀐다. 가령 총독 관저 안에서 관저 앞마당으로 이동하는 식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이 드라마가 몇 시간 동안 진행되었는지도 알 수 있다. 즉 빌라도와 예수의 대화는 이른 아침proi(18장 28절)에 시작되어 제6시까지(19장 14절) [당시 시간 셈법으로] 다섯 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p. 32

[3] p. 37
[4] p. 56
[5] p. 72
[6] p. 11
[7] p. 57
[8] p. 89
[9] 굿뉴스 성인, 유스티노
[10] p. 45
[11] p. 97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 이미지 출처 : 폰티우스 필라투스,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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