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은 크리스천인가? 아니다. 다만 그는 정신분석, 철학적으로 기독교가 어떻게 인류에게 중요한 유산인지를 설명하고자 할 뿐이다. 학자로서 지젝의 역량이야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바이기에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신앙적 확신으로 인한 확증편향으로 결론을 전제 (기독교만이 진리다) 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사실 더 중요하게 와닿았던 부분이었다. 원래 자신의 좋은 점을 스스로 홍보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전하는 것이 더 순수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법이니까. 마치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을 읽었을 때처럼 (그 또한 서론에서 자신이 기독교 복음 자체에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한다) 평소 익히 들어왔던 기독교적 메시지가 더욱 의미있게 와닿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기독교적 유산이 싸울만한 가치가 있다고, 심지어 너무도 소중하다[1]고까지 이야기 한 것일까? 앞으로 정신분석과 철학의 발자취를 좇아 이를 종합적으로 해석한 그의 메시지를 깊이 곱씹어볼 계획이다.
더불어 글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동안 글을 너무 한꺼번에 정리하려고 했던 경향이 글을 쓰는 필자나 글을 접하신 분들께도 여간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도 이런 고민을 계속 하고 있었지만, 특히나 이번 책의 경우에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도 한 달 동안 붙잡고 정리하다 이제서야 겨우 걸음을 떼기 시작한 것인데, 내용이 담고 있는 지식의 방대한 양을 단순히 나열식으로 압축시키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된 의미 전달이 되기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까지도) 끝내지 못한 『라깡 세미나 에크리 독해 I』처럼 기존보다는 조금은 짧은 호흡으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연속적으로 나눠보고자 한다.
1.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의 문제
포스트모던 시대와 소위 그 ‘사상’이 갖고 있는 통탄할 양상 중의 하나는 – 그리스도교의 근본주의와 다른 전통의 근본주의에서부터 수많은 뉴 에이지의 영성주의들을 거쳐 해체주의 그 자체(소위 ‘탈세속적인’ 사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적 감수성에 이르기까지 – 종교적 차원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회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명확히 말해서 ‘투쟁하는 유물론자'(레닌)인 마르크스주의자가 반계몽주의의 이러한 거대한 습격을 어떻게 막아낼 것인가?
p. 13
지젝은 서론에서부터 이미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 심지어 기독교 근본주의 사상까지도 종교적 차원을 잘못 이끄는 반계몽주의라 선언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포스트 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의 정의를 간단히 짚어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 시대의 이성 중심 사조에 반발한 탈이성적 사고, 다원적 사고인 ‘해체’가 그 특징[2]이고, 뉴에이지 운동은 유일신을 부정하는 범신론적이고, 개인의 신성 (영적 각성) 을 추구하는 운동[3]이라고 한다. 특히 지젝은 뉴에이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는데 현대 서구문명의 원죄는 인간의 교만함, 즉 우주의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모든 존재를 자기 이익을 위해 착취할 수 있는 신적인 권리를 부여받았다는 가설에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교만은 다시금 자연을 향한 겸손함으로, 우리가 지구의 질서에 종속된 존재임을 자각하는 ‘고대의 지혜’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4]이다. 인간 이성 중심주의인 모더니즘이 1, 2차 세계대전, 그리고 파시즘과 독재적 공산주의로 큰 타격을 입었음을 생각해 본다면 이러한 회의주의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상대주의(포스트 모더니즘)와 종교적 혼합 (뉴에이지) 특성의 이러한 사상들이 힘을 얻게 된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지만, 저자가 보기에 그들의 해법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1.1. 존재의 원인 제거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로 유명한 존 그레이는 뉴에이지 운동의 대표적 사례로 제시된다. 그레이는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타자의 사랑을 통해 창조적인 업적을 이룰 능력이 있다는 긍정적 태도로 변화시켜야 한다고 이야기 한다. 실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참여자의 어린 시절 외상적 장면을 평범한 기억으로 변형시켜 – 넌 쓸모가 없어! 경멸한다! 를 자비로운 아버지의 넌 훌륭해! 전적으로 믿는다! 로 – 더 이상 아버지의 이러한 멸시적 태도로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됨을 고마워하는 감동적인 무대가 펼쳐지는데, 지젝은 이를 ‘표준적 인지치료’에 불과하다고 일축한다. 왜 그런 걸까? 그것은 단순히 기억의 수정 작업을 통해 사실이 왜곡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글을 통해 집중적으로 다룰) 실재계 자체를 제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라깡에 의해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된 실재계는 프로이트적으로 ‘외상(트라우마)’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그것은 끊임없이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유령적 실체로 매우 역설적이게도 오직 그것이 있을 때만 주체는 존재할 수 있다.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뫼비우스 띠의 반대편처럼 나를 격동으로 이끄는 환상을 통해 끊임없이 분열시키는 것, 즉 욕망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라깡에게 있어서 주체($-‘빗금쳐진’ 비어 있는 주체)와 그것의 욕망의 대상-원인(주체에게 ‘있는is’ 결핍을 구체화한 나머지)은 엄밀히 상관적이다. 주체화에 저항하는 어떤 물질적 오점/나머지, 즉 정확히 주체가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잉여가 있는 한에서만 주체는 존재한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주체의 역설은 주체가 그것 자체의 근본적인 불가능성, 그것(주체)이 그것의 완전한 존재론적인 정체성을 영원히 얻을 수 없게 방해하는 ‘목 안의 뼈’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p. 50
이와 관련해서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한 설명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자본주의는 무제한적인 생산력으로 인해 그 자체로 쇠약해질 수 밖에 없는 (파괴적 경제위기) 역설적 문제를 안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이러한 장애물이 없이 생산력을 효과적으로 조율할 수 있다고 봤다. 마치 앞선 그레이의 사례처럼 아버지의 외상적 모습을 마술적으로 인자하게 변형시켜 유토피아적 삶이 가능한 것처럼 제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성의 실재가 제거된 자리에 생산을 향한 욕망은 존재할 수 없었다. 다른 사회적 질서를 통해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서 공산주의는 이미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내재된 위반적 환상에 불과했다. 일종의 대비 개념처럼 우리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반대 환상을 현실화한 자본주의의 아류였기에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본주의의 실재를 걷어냈으나 그 자체로 실재가 되어버린 공산주의는 지난 세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했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유령으로써 공산주의는 아직까지 유효한가?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일부 계층에 의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물론 이를 진심으로 믿는다기보단 그저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해 진정성을 인정하긴 어렵지만) 사실상 수명을 다했다고 봐도 되는 걸까? 실재로써 기능하던 이러한 공산주의 이념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면 홀로 남겨진 자본주의는 자신의 존재 원인을 어디에서 찾게 될까? 아마 지젝이 고심하는 부분도 여기에 있는 듯 싶다. 최근 출간된 책들 『공산당 선언 리부트』, 『다시, 마르크스를 읽다』 을 통해 앞으로도 계속 살펴보겠지만, 유토피아나 공산주의의 개념 없이 생산의 악순환에 사로잡힌 자본주의에 대한 ‘정치적 경제비판’을 어떻게 이어갈 것인가[5]가 그의 사명 중 하나인 듯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균형잡힌 통제적 사회라는 전근대적 개념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본주의의 올무를 빠져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을 포함해서 말이다.
1.2. 의무적 악순환의 반복
대표적 모더니스트인 칸트의 윤리 정식은 ‘당신은 의무를 해야하기 때문에 이를 수행할 수 있다’이다. 그러나 향락을 추동하는 초자아는 오늘날 이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해야 한다!’로 변형시켜 놓는다. 즉, 허락된 향락에서 부여된 향락으로 상황이 반전[6]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메시지는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심심찮게 목격할 수 있다. 당신의 가능성을 믿으라는, 자신의 진정한 자발성을 회복하자는 뉴에이지의 지혜를 곳곳에서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젝은 이것이 의무에 충성하는 전통의 권위주의적 지혜를 벗어나는 방법인듯 보이지만 실은 쾌락을 의무로 종용하는 더욱 은밀한 반전이 숨어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최고의 예로 제시된 비아그라는 그 자체의 효과로 인해 성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러나 즐기지 못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잘못이 된다. 즉, 거짓 희망 속에 감춰져 있는 초자아의 명령으로 인해 더욱 큰 좌절을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의무가 된 행복, 모든 것이 허용된 사회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면 가책을 느끼게 되는 악순환의 반복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은, 앞선 그레이와 공산주의의 예처럼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대상을 제거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쾌락과 의무라고 하는 두 가지 외적 대립의 교차점에 서 있다. 전통의 권위주의적 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전체주의적 힘의 역설 (당신의 의무를 다하고 그것을 즐겨야 한다) 과 쾌락의 의무화의 역설 (행복하지 않다면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이 그것이다. 여기서 지젝이 말하는 초자아는 이러한 대립 요소가 서로 교차되는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리는 외설적 초자아의 올무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독교는 행위를 금지시킨 유대교에서 그러한 생각마저 금지시키는 길로 나아가 초자아를 보다 정교하게 (주체를 옴짝달싹 하지 못하도록) 다듬는 듯 보인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태복음 5: 27-8)
p. 198
이러한 금지의 강화는 필연적으로 이를 위반하기 위한 욕망 또한 강화시켜 지젝의 표현대로 ‘사악한 금지 사이클’을 형성하게 된다. 하지만 바울을 통해 완성된 율법 해석, 그것은 율법을 철폐시키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그러한 악순환을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설득된 (이유가 이해된) 금지에 대해서는 불만으로 인한 위반 환상을 품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기독교가 더 이상 유대교의 율법에 얽매여 있지 않다고 하면서도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환기시킴으로써 더 이상 위반 환상 (이스라엘에는 금지를 회피하기 위한 방법을 연구하는 단체 – 유대교와 과학연구소 The Institute for Judaism and Science – 가 따로 있다고 한다[7]) 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느니라 (로마서 7:7)
p. 198
앞서 살펴본 것처럼 실재적 대상을 일시에 제거하고자 하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의 해법은 그 자체로 욕망이 제거된 회색빛 미래를 드러낼 수 있을 뿐이다. 책의 곳곳에서 실재적 대상을 다루는 최선의 방법으로 기독교가 언급되는 것은 이런 차원을 함축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 글에서는 기독교와 이교 질서의 차이점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그리스도교와 마르크스 주의는 새로운 영성주의들의 공격에 대항하여 쳐놓은 바리케이드의 맞은 편에서 같이 싸워야 한다一진정한 그리스도교적인 유산은 너무나 귀중하므로 근본주의자의 변덕에 남겨질 수 없다.
p. 14
[2] 포스트 모더니즘, 위키피디아
[3] 뉴에이지, 위키피디아
[4] p. 123
[5] p. 195
[6] pp. 36 – 37
[7] p. 205
* 표지 이미지 출처 : wallpaperfl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