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계적인 철학자들은 기독교에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유독 사도바울에게만큼은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까? 마치 예수는 존경하지만 기독교인들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갖는 일반의 시선처럼, 오늘날의 기독교를 있게 한 그의 교리는 존중하지만, 그가 일으킨 기독교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오늘날 힘을 잃어가고 있는 기독교를 바로 세울 수 있는, 교회 공동체 내부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외부만의 진실을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것이 책을 읽게 된 이유로 길진 않지만 나름 일생을 한국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만을 들어왔던 것에서 철학자이자 비기독교인 (말 그대로 기독교와는 상극이라고 할 수 있을) 인 저자가 밝히고자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게다가 바디우의 글 솜씨에 감탄해 찾게 된 저서였던 만큼 그 기대 또한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200페이지 남짓한 두께와는 달리 다루고 있는 내용과 이를 설명하는 방식이 복잡해 만족스럽게 정리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이 책은 바울이 선포한 진리이자 곧 기독교의 진리이기도 한 ‘예수 이름 –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 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메시지를 비기독교인 철학자의 관점에서 풀어낸 것이다. 비록 종교적인 색채를 띄는 글을 쓸 수밖에 없다는 부담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담고 있는 ‘모든 사람을 향한’ 보편적인 힘은 종교의 자리를 넘어설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에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옮겨보고자 한다.
1. 왜 바울인가?
바디우에게 있어 바울은 ‘신학적’ 인물이 아닌 매우 중요한 ‘주체적’ 인물로 서문에서부터 그가 선포한 복음과 숭배에는 전혀 관심이 없음을, 그렇게 순수하게 철학자의 관점에서만 살펴볼 것임을 분명히 한다. 그가 바울을 탐구하게 된 계기는 투사를 향한 시대적 요구 때문으로, ① 진리를 판단의 언어로 환원시켜 결국 상대주의로 귀결되고 마는 분석, 해석학적 학문 사조, ② 문화적 미덕이라는 미명 하에 거짓 보편성을 내세우는 공동체적 특수주의 (인종, 민족, 종교, 성으로 소급되는), ③ 그리고 공산주의라는 유일한 적을 잃은 채 갈수록 미쳐 날뛰는 자본주의④ 거기에 더해 두루 생각하는 힘인 사유 권위의 추락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라 할만한 문제들이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수많은 투사적, 주체적 인물들 중 바울이 선택될 수 있었던 건 그가 아주 독특한 ‘보편적 개별성의 주체’ 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가장 개별적(주체적)인 것이 가장 보편적인 것이다’라고 할 수 있을 이해하기 힘든 모순 통합을 이룬 인물이라는 것이다.
2. 바울의 삶과 역사적 기록들
철저한 율법주의자 바리새파 유대인인 동시에 유복한 로마인이었던 그는 신약의 2/3를 저술 (27권 중 17권) 한 기독교의 핵심 인물로, 그중에서도 특히 로마서는 기독교 교리의 정수로 꼽힌다. 서기 5년 경에 태어나 예수와 같은 시기에 성장하여 기독교도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서다 다마스쿠스(다메섹)에서 환상 가운데 예수를 만나는,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 (변증법적 전도가 아닌) 을 경험한 후 기독교 복음을 증거 하는 정반대의 삶을 살다 결국 순교하게 된다. 바디우가 연구한 그의 저작은 성서 비평학이 진본으로 인정하고 있는 텍스트로만 국한시킨 것으로 50~58년 경 쓰여 복음서인 마가복음 (70년), 요한복음 (90년) 보다 훨씬 앞서서 널리 읽히고 있었으나, 정전으로 받아들여진 건 2세기 말이나 되어서였다.
2.1. 역사적 보편성의 정초, 예루살렘 공의회
그 사이 몇 가지 중대한 사건들이 위치하는데 첫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이 한창 활동하던 시기였던 50년 (또는 51년),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었다. 당시 유대인-기독교인 (기독교 내에서도 유대 율법의 전통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입장) 과 바울 (예수 사건으로 이전의 표징들은 쓸모없게 되어 차이는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입장) 의 갈등은 봉합될 수 없는 것이었는데, 예루살렘 공의회는 바울이 예수와 삶을 나눈 ‘정통’ 제자가 아니었음에도 그의 활동 또한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정초한 역사적 사건이 된다. 즉, 기독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가 되는 것도 (예수와 함께한 제자들의 복음만 인정했다면), 또한 유대교의 역사적 뿌리를 결여한 그저 신비적 계시론이 되는 것도 (바울의 복음만 인정했다면)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54) 이 공의회는 진정 정초적이었는데, 그리스도교에 개방성과 역사성이라는 이중의 원칙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공의회는 진리 과정으로의 진입이라는 사건의 줄을 팽팽히 당겨놓았다. 사건이 새로운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새로울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상황, 즉 사건이 그것이 일어난 거점의 요소들을 동원해 들이는 하나의 특정한 상황과 관련해서만 그렇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2.2. 복음서 작성의 배경이 된 역사성 말살 시도
이후 66~70년에 티투스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디아스포라의 시작, 즉 기독교 운동의 수도를 로마로 만들고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던 유대적 기원을 역사적으로 지워버리는 과정이 진행된다. 해당 사건 이후 지어진 복음서들은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예수의 공적, 삶의 예외적 개별성 강조에 초점을 둔 반면, 1세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예수의 행적이 아주 풍부하고 상세하게 공유되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바울의 서신들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거의 하나도 들어있지 않고 오직 하나의 지점, 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했다는 것으로만 귀착된다.
2.3. 정전의 배경이 된 이단의 출현
마지막으로 바울 서신이 정전으로 묶일 수 있었던 중요한 배경이 된 극단적 바울주의 이단 ‘마르키온’이 2세기 초에 등장한다. 마르키온은 유대교(「구약성서」), 그리스도교(「신약성서」) 사이의 단절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 두 종교의 신이 동일한 신이 아니라고 주장했으며, 그리스도교의 복음만이 순수하고 진정한 신의 매개적 계시로 구약의 창조신을 비난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 주장이 왜곡인 것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구약성서」의 (유대인의) 신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이 단절을 강조한 것은 존재론적인 것이 아닌 투사적 명제로 단지 신의 유일성이 그리스도 사건에 의해 두 가지 상황으로 나뉘어짐을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게 용인될 수 없는 그들의 주장에 맞서기 위해 보다 중도적인 바울의 소환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들을 토대로 바디우는 바울의 서한들만이 「신약성서」의 진정한 교의적 텍스트라는 결론을 내린다. 바울의 텍스트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모호한 상태로 남은 채 당시 사방에 넘쳐흐르던 예언적이고 묵시적인 문학들과 거의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울의 서한이 정전에 포함된 중요한 이유이자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이다.
3. 사건
바디우가 보기에 바울이 독특한 주체적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를 오직 ‘예수가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단 하나의 우화적 진술로 환원시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서신들에서는 예수의 행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우화란 말 그대로 ‘가상의 이야기’로 놀랍게도 바디우는 ‘예수 부활 사건’을 그저 접근할 수 없는 실재로 남겨 놓아야만 모든 상상적인 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그렇게 우화 내용의 증명을 포기하는 것만이 보편적 진리의 산출 조건을 ‘잔여’로 남겨둘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즉, 기독교인들이 흔히 믿(어야 한다고 듣)고 있는 예수 부활 사건 자체가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예수 부활 사건이 실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로소 진리가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마치 동화와 같은 창작품 취급하듯 우화라는 표현이 조금 찝찝할 수는 있겠으나 어차피 바울에게도, 기독교인들에게도, 또 다른 누구에게도 ‘부활’이라는 사건은 증명이 불가능한 믿음의 영역이다. 부활을 목격했다고 이야기하는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바울은 단지 순수하게 우연적인 환상으로만 경험했을 뿐, 예수의 부활을 직접 보진 못했다. 그 점에서 분명 바울은 우리와 동시대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기독교인이었던 저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바울의 믿음은 이 사건이 ‘어떤 식으로든 인간을 구속할 수밖에 없는 사유들과 절대적으로 단절시키는 가장 강력한 틀’로써 작용하였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즉, 바울에게는 부활 사건 그 자체보다도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엇보다도 극적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89) 여기서 부활… 은 바울 본인의 눈에는 왜곡될 수 있거나 증명 가능한 사실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것은 순수한 사건, 한 시대의 열림,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사이의 관계들의 변화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은 특수한 또는 기적적인 사실의 경우에서처럼 그 자체로 중요성을 갖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이 죽음…(90)에 대해 승리를 거둘 수 있음을 증언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는 끊임없이 부활을 우리의 부활과 연결시키고, 개별성에서 보편성으로, 또 그 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112) 바울에게 그리스도라는 사건은 율법에 이질적인 것이자 모든 규정들 위로 넘쳐흐르는 순수한 범람이고, 개념도 적절한 의례도 없는 은총이다.`
바울의 진리, 즉 주체의 탄생이라는 것은 이처럼 사건을 믿음으로 선언하고 오직 그것에 충실한 것이다. 사건에 대한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의 깨달음은 그 어떤 논리, 법칙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철저하게 개별적인 것이 되게 했다. 동시에 진리를 생성시키려는 기존의 그 어떤 법으로도 (유대교 율법, 그리스 철학) 주체로서 세워진 진리를 귀속시킬 수 없었기에 비로소 온전히 모두에게 말 건넬 수 있는, 철저하게 보편적인 조건 또한 갖출 수 있었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바디우가 보기에 사건을 우화로 이해하는 것 (언어를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하는 실재의 지점으로서의 사건) 만이 이 모두를 관통하는 질서를 세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될 수 있었다.
(48) 어떠한 진리의 과정은 오직 – 그러한 과정이 실재를 가리킬 수 있는 지점에서 – 그러한 진리의 개별성에 대한 즉각적인 주체적 인정에 의해 지탱될 수 있을 때만이 보편적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의 준수나 특수한 징표들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을 한 공동체의 공간에 고착시키고, 그것이 보편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을 뿐이다.`
이처럼 진리가 사건을 선언하고 이에 충실한 것이라고 하는 정의는 진리를 한 순간의 계시가 아니라 과정 속에 머물게 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잘 알려진 다음 성경 구절의 의미로 오직 사건에 대한 믿음과 인내, 그로부터 비롯되는 보편적 사랑의 실천이 주체를 특징짓는 세 가지 요소가 되는 것이다.
① 선언하는 순간의 주체를 명명하는 ‘확신’ (피스티스, 통상적으로 ‘믿음’으로 번역)
② 확신을 투쟁적으로 말 건네는 순간의 주체를 명명하는 ‘사랑’ (아가페, 통상적으로 ‘자애’로 번역)
③ 진리의 과정이 완성된 성격을 가진다는 ‘확실성’ (엘피스, 통상적으로 ‘희망’으로 번역)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장 13절)`
이렇듯 사건에 대한 이해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후의 많은 학자들이 같은 주제를 다루었지만 바디우가 보기에 바울의 사건 해석에는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유사상가들의 설득을 위해 예언(그리스도는 구약 예언의 성취)과 기적(그리스도의 이적들)을 통해서만 기독교적 믿음이 가능함을 – 표징을 구하는 유대 담론으로의 회귀 – 이야기한 파스칼은 ‘증명’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만 사건을 선언한 바울의 급진성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오늘날 기독교적 논의를 강화시켜준 헤겔의 변증법적 해석은 과거와의 완벽한 단절로 세운 열림을 부정의 부정(죽음을 간직한 채 이를 부정하는 것)으로, 즉 고통과 순교가 구원을 전제한다는 주장으로 다시금 통합되게 했으며, 실재로서의 사건 자체를 실질적인 진리의 영역에 위치시킨 니체, 라캉, 비트겐슈타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바울의 핵심을 비껴가고 있었다.
4. 주체의 탄생
4.1. 율법과 죄
율법이 없는 어린 시절에는 죄는 죽고 (죄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살아있는, 곧 나누어지지 않은 충만한 상태에 있었다. 하지만 율법이 죄를 알려줘 욕망을 일으키고 (자율성) 그렇게 살아난 죄는 결국 나를 죽게 (자동성) 만든다. 즉, 지켜야 하는 형식 자체가 금기를 형성해 이를 거부하는 외설적 욕망을 다스려야만 하는 수동적 상태에 빠지게 만드는 것으로 죄는 과오라기보다 행위를 규정할 수 없는 살아있는 무능력, 곧 반복의 자동성인 것이다. 분명 자체로 선한 율법이 자아를 삶의 죽음으로, 죄를 죽음의 삶으로 전도시켜 우리를 죄된 상태로 몰아넣는다. 이처럼 죄를 짓는 것이 자아가 아닌 죄 자체라고 하는 분리는 죄가 아담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하는 원죄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가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법에 종속된 순간 우리는 이미 죄인인 것이다.
4.2. 구원
한편 구원은 이처럼 죄라는 이름을 가진 주체적 형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죽음은 법, 문자로 대표되는 사유의 질서로 구원은 이러한 사유가 나의 행위, 힘과 분리되지 않는 것, 즉 부활 사건이라는 은총의 넘침으로 인해 문자화 된 삶에서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은총이라고 하는 것은 삶의 길이 갑작스럽게 작동하게 되는 이유로, 나의 변화된 행동과 이전 사유와의 관계가 새로워진 것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음을 뜻한다.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은 진리의 힘은 약하고 어리석은 것, 곧 죽음 속에 내재되어 있으나 그것 자체로 구원의 조건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죽음과 구원은 완벽히 분리된 것으로 사건의 돌발적인 출현이 주체에게 내재된 죽음의 조건을 요구하게 되지만 이는 철저히 은총의 질서에 속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경험한 사건 속에서도 바울만이 세계를 뒤흔들 특별한 깨달음의 은총을 얻었다는 것은 은총 자체도 주체의 선택을 기다리는 하나의 가능성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므로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 섣불리 전화위복, 곧 구원의 가능성을 언급하는 것이 위험한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3. 믿음(확신)과 사랑의 합주
바울에게 있어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가능한 것이다. (갈라디아서 2:16) 그러나 동시에 그만큼 열정적으로 구원을 사랑에만 할당하는데, 심지어 사랑 없는 믿음은 공허한 주관주의에 불과할 뿐임 또한 이야기한다. (고린도전서 13:1~3) 사랑의 충실성 없는 믿음의 선언은 무가치한 것으로 결국 그가 주장하는 진리는 믿음이 사랑을 통해 일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5:6) 죽음 가운데 있는 주체는 스스로를 사랑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에 먼저 자기를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사건에 대한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통해 사유를 힘으로 전환시키는 진정한 사랑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구원의 길은 마음이 아닌 입에 있다는 것(로마서 10:8~10), 부활의 고백을 통해 모두에 대한 가능성을 선언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사건이 율법의 끝이자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이율배반적 사고의 의미는 선언된 확신으로써의 믿음이 온갖 문자적인 법을 넘어선 사랑을 이끌어 내 사건 이후의 진리를 세계 속에서 실행하게 되는 삶 자체의 보편적 법칙화를 이루는 데 있다.
4.4. 희망 (확실성)
기독교의 전통적인 종말론은 마지막 때의 심판적 정의 실현에 있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함축되는 보상과 처벌, 즉 ‘분배적 정의 실현’에 대한 희망은 주체를 다시금 대상과 결합하도록, 즉 표징을 요구하는 유대 담론으로 회귀하게 만드는 것으로 이런 방식의 희망은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한 증오, 원한으로 표출되어 바울의 보편적인 사랑과는 양립하기 어렵게 만들 뿐이다. 오히려 바울의 희망은 매우 담백하다. 그것은 보상에 대한 요구가 아닌 그저 주체의 순수한 인내, 지속에 대한 명령, 끈질김으로 희망의 이름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련이 극복되었다고 하는 보편성이 거두는 승리의 주체적 태도인 것이다.
4.5. 보편적 진리의 투사
바울이 보기에 율법으로 대표되는 유대 담론과 지혜로 대표되는 그리스 담론은 모두 주체를 죄의 자리로 위치시키는, 즉 지배를 요구하는 아버지의 담론이자 민족적 주체를 대변하는 특수주의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논거, 지배가 불필요한 사건의 선언은 모두에게 예외 없는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모든 차이를 폐기시키는 보편주의, 즉 아들의 담론이 될 수 있게 했다. 이처럼 진리는 모두에게 말 건네지는 일자로 예외나 차이가 없는 것이다. 달리 말해 인류 전체가 고려되어야만 유일신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이를 뒤집으면 유일신을 금지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말 건네질 수 있는 무한성 또한 금지시키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보편주의(모두에 대하여)와 카리스마(아무 이유없이)는 근본적으로 연결되어 오직 카리스마, 즉 은총만이 모든 보편적인 문제에 부합할 수 있게 된다. 죽음의 상태에서 사건의 은총을 통해 삶의 상태로 갑작스럽게 옮겨진 주체는 그 은총이 이미 모두를 향하고 있음을, 즉 내가 ‘의롭게’ 된 것은 모두가 의롭게 되는 것만을 통해서라는 지극히 중요한 선언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이처럼 구원의 구조가 보편적인 한에서만 개별성으로서의 주체는 탄생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진리를 벗어난 특수자만 존재 가능할 따름이다. 이처럼 은총을 통한 과거로부터의 철저한 단절은 주체를 분열시킨 채 사랑의 보편적 태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끈다. 바울을 세상의 온갖 차이들과 관습들, 궤변들을 무관심하게 횡단하는 ‘관용적 무관심’, 즉 ‘모든 것이 다 허용됨 (고린도전서 10:23)’의 태도를 가질 수 있게 만든 배경인 것이다.
(124) 우리는 사건을 통한 단절이 주체를 항상 ‘……이 아니라 ……임’의 분열된 형태로 구성하며, 바로 그러한 형식이 보편성을 담보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아니라’는 폐쇄적 특수성들(‘율법’이 그것의 이름이다)에 대한 (125) 잠재적인 해체인 반면 ‘……임’은 사건(‘은총’이 그것의 이름이다)에 의해 열린 이 과정의 주체들이 동역자로서 임해야 하는 과업과 충실한 수고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사건이 그것을 선언하는 주체의 구성에 가담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것을 통해, 그리고 구체적인 사람의 특수성과는 전혀 무관하게 그러한 사건이 이 두 갈래의 길을 부단히 분리하고, 또한 보다 쉽게 은총 아래 놓일 수 있도록 끊임없는 과정을 통해 율법을 배제하는 ‘……이 아니라 ……임’을 배분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주체가 분열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마지막으로) 중요하다. 사건의 은총이 과거를 배제시킨다는 것도, 변증법적으로 통합시킨다는 것도 아닌 분열된 상태 자체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야 말로 끊임없이 나의 약함만을 자양분 삼는 기독교의 핵심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바울 담론은 특수성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구약을 주체화의 도구로 삼은 채 보편성을 향해 나아가는 반철학적 이론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시대와 함께 살되 시대에 순응(특수주의)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사건에 대한 믿음의 선언을 통해 주체가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을 시대를 초월하여 기능하는 보편주의적 사유를 획득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사건은 ‘기다림’이 아닌 ‘충실함’을 요구한다. 결국 주님의 날은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2)
5. 진리의 어려움
어젯밤 아내에게 했던 잔소리 – 안된다고 믿으면 안 될 수밖에 없다는 – 가 떠오른다. 안 되는 이유를 들며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설득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무언가 작은 변화의 시도를 통해 성취감을 얻고 성장의 즐거움을 경험하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일과 육아에 지친 데다가 나처럼 무언가를 이루고 싶다는 의지가 아직 분명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몇 걸음 앞선 마음은 나도 모르게 기대에 찬 요구를 내뱉게 했다. 누군가 이야기했듯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긴 쉬워도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는 정말 어려운 일인 듯싶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귀할 수밖에 없는 것은 배우자의 자리라는 것이 나의 수준을 있는 그대로 가늠할 수 있게 만드는 거울로써 위치하는 것에 있지 않을까. 당장 아이를 대하는 태도만 보더라도 아내에게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내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이 글을 부둥켜안고 씨름하는 가운데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곤고한 사람인지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이러니 나보다도 훨씬 더 철저한 율법주의자였던 바울의 내면의 갈등은 과연 얼마나 더 컸을까. 오늘날 우리는 얼마나 누군가에게 서로 꼰대가 되어 판단하고 정죄하고 있을지… 결국 서로에게 강자이자 약자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필연적인 억압구조 속에서 어떻게 주체적 구원을 이룰 수 있는지 사도바울의 울림 있는 외침은 이 같은 시련을 극복한 자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아마 그것이 바울이 학자들에게 있어 그처럼 중요한 이유요, 그가 세운 기독교가 세계적 종교가 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어떤 모습인가? 처음 질문했던 우리 기독교인들이 놓치고 있던 진리에 대해 나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었나?
5.1. 진리는 주체적인 것이다.
가장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진리는 전적으로 주체적인 것이라는 점일 것이다. 성경은 다양한 주체적 인물들의 삶의 기록이고,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확신을 드러내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바울만이 유일하게 주체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다. 하지만 오직 보편성을 담지한 주체만이 시대를 뛰어넘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바울이 대표적으로 보여주었기에 바디우의 이목을 끌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온갖 특수주의의 수호자로서 자기만의 진리를 내세우는 주관주의적 꼰대와 그 기준을 달리해야 하는 이유다. 보편성이란 인간 사유의 ‘예외적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기독교에서는 부활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받아들이지만 오히려 그런 믿음이 우리를 보편적 진리로 향하지 못하게 한다는 통찰은 이 책에 있어 핵심적인 ‘사건 해석’이자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결국 바디우가 계속해서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 사유 질서 하의 정의들은 특수주의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음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으로, 결국 예외 없이 죄 가운데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자신의 위치를 깨달을 수 있는 ‘은총’, 즉 이를 증거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사랑’을 통해 그 길을 돌이킬 때만 비로소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5.2. 주체를 구원하는 믿음, 타자를 구원하는 사랑
또 한 가지는 주체를 구원하는 것은 믿음이지만, 타자를 구원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많은 경우 인간 존재가 서로 만나기 어려운 이유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사랑이 없이는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할 뿐이라는 바울의 주장은 본인 또한 아무 이유 없이 주어진 은총을 통해 보편적 진리로 향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은총의 인간적 표현인 ‘사랑’의 길로 이끌어 주었다. 이처럼 결국 믿음을 증명하는 것은 사랑의 열매 뿐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한국의 교회는 국민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는지를 아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나를 포함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지 않는 많은 이들에게 ‘믿음의 꼰대’로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진 않은지. 철저히 약함 가운데서만 구원의 빛을 발견하는 종교이자, 약자와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내세우면서도 당장 나에게 이익이 되지 않거나 손해가 된다는 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때문에, 혹은 기득권적 권력에 혈안이 되어 가치를 뒤로 유보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정작 그들 – 실질적으로는 나의 약함의 진실인 실재 – 의 간절한 필요와 요구에는 눈감아 매해가 새로운 혹독한 겨울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교회 공동체는 서로의 약한 믿음을 사랑으로 북돋아주는 신앙생활의 중요한 울타리이다. 그러나 이웃을 향한 보편적 사랑에 눈과 귀를 닫는 순간 공동체 주의, 즉 (해당 교회 신자임을 증명하는) 정체성을 요구하는 특수주의의 추종자로 전락할 따름이다. 분명 우리에게도 믿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을 경험하고 배우지 못해 그것을 표현하는 게 서툰 것은 아닌지 그렇게 우리의 진심이 와전되는 것을 막기 위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언제나 역사는 주체를 통해 변화되어 왔다. 언제까지고 다른 사람을 통해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길 바라는 것 또한 나의 소망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것일 뿐이기에 그저 나로부터 시작하면 될 일이다.
이 글을 완성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기록을 한 번 살펴봤다. 책을 읽은 시점이 5월이었고, 글을 쓰기 시작한 지는 무려 3개월이 지난 뒤였다. 모두 합쳐 반년의 기간 동안 내용을 정리하는 과정은 말 그대로 좌절의 연속이었지만, 그만큼 이 책은 머릿속에 잘 담아두고 싶었다. 책을 읽으면서도 그 핵심을 의미 있게 전달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를 기쁘게 한 그 내용이 아직 나에게 온전히 소화되지 못했다는 뜻 일터다. 그동안 소개해주고 싶은 좋은 책들을 접하고도 다른 사람들에게 그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지 못하는 나 스스로가 답답해 시작한 글쓰기였지만 이번 책은 그런 마음에 무엇보다 나 자신의 각오를 ‘마음판에 새기는’ 메시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 더해졌다. 즉, 누구보다 간절하게 ‘삶’이 증거 되길 바라면서도 그렇지 못한 스스로에 대한 절망감에 몸부림치는 가운데 나온 작은 결과물인 것이다. 비록 메신저에 불과할 뿐이지만 그래도 이 글을 통해 진심으로 헬조선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방황하고 있는 누군가 – 신앙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을 기독교인뿐만 아니라, 삶으로 증거 하지 못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실망한 비기독교인들에게도 – 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가 닿을 수 있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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