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대상 a는 무엇일까?
1. 대상 a 는 과도한 행위로 드러나는 잉여향락으로, 발생 원인을 알 수 없는 욕망의 대상-원인이다.
2. 무의식은 구조적으로 ① 기표사슬과 ② 이를 움직이게 만드는 구멍 (언어화가 불가능한 예외, 대상 a) 의 흡인력 (향락) 으로 이루어져 있다.
3. 대상 a 의 원인인 타자는 ① 신체의 연장 ② 내가 사랑하는 나의 이미지 ③ 닮고 싶어하는 특색의 혼합물이다.
4. 대상 a 는 주로 신체적 특성에 기인하는데, ① 튀어나온 신체 ② 입구의 틈새 ③ 이중의 요구가 있다.
5. 대상 a 는 주체에서 분리된 (상실된) 대상으로써 환상 ($◇a) 가운데 머물게 된다.
6. 요구(울음)을 통해 욕구(배고픔)는 충족되지만, 대상이 상실됨으로써 욕망으로 남게 된다. (욕구 – 요구 = 욕망)
정신분석가와 대상 a
1. 분석가는 분석수행자의 ① 욕망을 유지시키면서, ② 일자를 점유하는 시니피앙의 교체, 즉 왜곡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추방)
2. 분석가는 미지의 상태인 대상 a 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2.1. 라캉 정신분석에서 증상의 치유는 분석가의 목표가 아니다.
2.2. 분석가는 분석수행자의 고통을 덜어주려 하지 말고, 그로 인해 놀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두어야 한다. (외장, 속아주기)
나지오 박사의 세 번째 강의는 라캉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대상 a 이다. 참고로 책에서는 타대상이라고 번역했지만, 이 글에서는 기존에 통용되던 번역을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 a 자체가 타자(autre)를 의미하긴 하지만, objet petit a (대상 소문자 a) 라는 원어를 타대상이라고 언급하는 경우를 찾지 못하기도 했고, 기호적 차별성 (단지 ’다른 대상’이 아닌 ‘a 라는 대상’) 을 유지하는데도 기존 번역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 대상 a 는 무엇일까?
대상 a 는 ‘잉여향락’, 무언가 과도한 ‘행위’로 자신을 드러냈지만, 그 정체와 발생 원인을 알 수 없는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이다. 실재계의 조각, 이론화에 저항하는 지점, 해결되지 않는 문제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 개념은 말 그대로 ‘이해 불가능한 것’에 대한 라캉식 문제 정의 방법이다.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답을 찾을 때까지 씨름하는 것이 아니라, 표식만 달아둔 채 다른 문제로 넘어가 탐구를 지속하는 것이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기에 골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기 위해 거리를 두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더해진 지식으로 돌아왔을 때 전혀 새로운 해법과 만나게 될수도 있기 때문이다. 실재를 우회하는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을 이러한 접근법은, 일생을 마음의 도식화에 헌신한 라캉의 다분히 수학적인 (효과적인) 문제해결 방식이었다.
1.1. 대상 a 의 타자는 누구일까?
우리는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그 사람의 어떤 면, 함께했을 때의 어떤 분위기, 감정 등을 떠올린다. 그 사람 자체보다는 내가 가치를 두는 어떤 것이 그 사람과 함께 했을 때 공명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에서 이를 (타자의) ‘특색에 대한 주체의 동일시’라고 설명한다. 우리가 애정을 갖고 만나는 대상들의 공통된 특색이 바로 나라는 것이다. 이처럼 프로이트가 사랑하는 타자를 대상 (특색) 으로 구분지은 건 『애도와 멜랑콜리』에서 였다고 하는데, 나지오 박사는 이런 내용을 종합해 타자의 특성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① 내 신체를 연장시키는 신체 (환상적, 신체로서의 타자)
② 내가 사랑하는 나의 이미지 (상상적, 이미지로서의 타자)
③ 내가 동일시하는 반복적인 특색 (상징적, 역사로 압축된 타자)
최초 어머니의 젖가슴과 맺었던 관계에서 출발한 ‘연장된 신체 (영아는 주어진 젖가슴을 타자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한다)’ 와 그의 상실에서 비롯된 환상 (’내 입에 들어온 따뜻한 무언가가 참 좋았어. 다시 빨고 싶어’) 은 모든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언급한 세 가지 중 어느 것도 타자의 본질을 온전히 드러내진 못하지만, 신체는 우리와 가장 강렬하게 얽혀있는 사물이라는 점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대상 a 를 카리킨다 (라캉은 태반, 젖가슴, 대변, 시선, 목소리를 대상 a 에 깊이 연관된 대상으로 본다). 이후 이어지는 자기애, 그리고 인간 관계를 통해 따르고 싶은 대상의 특성들이 모여 주체를 구성하게 된다.
1.2. 대상 a 의 형식적 지위 (무의식의 구조)
먼저 대상 a 가 태어나는 방식을 큰 틀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지오 박사는 무의식의 구조 속에서 대상 a 가 어떻게 존재하는지를 설명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지난 글에서 정리한 도식을 다시 소환해 본다 (* 참고글 : 2강. 무의식의 이해).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 된 지식으로 이해한 라캉 관점에서 무의식을 규정하는 일자가 존재하고, 이를 설명하는 다양한 기표사슬들이 서로 얽힘으로써 주체의 정신세계를 구성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언어화가 불가능한 지점 (구멍, 대상 a) 으로, 이 구멍이 흡인력(향락)을 가짐으로써 기표사슬은 계속해서 구멍을 향해 움직일 수 있게 (역동성을 갖게) 된다. 이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증상을 통해 드러난 구멍의 테두리로, 구멍 속 공간, 즉 욕망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서는 결코 알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1.3. 대상 a 의 신체적 지위
앞서 대상 a 를 가장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신체적 조건이라고 설명했는데, 이 조건을 형성하는데도 다양한 방식이 존재한다.
① 몸에서 튀어나와 있어 붙잡고 싶게 만드는 것 (상상적)
젖가슴, 성기 등 ‘돌출 유혹 대상’
② 열리고 닫히는 수축성 틈새들 (상징적)
질, 입, 항문 등, 프로이트가 ‘성감대’라 부른 것
③ 이중의 요구 (상징적)
주체 (유아의 울음소리) 와 대타자 (자식으로 인정하는 어머니) 의 상호적 요구
내 것이 아닌 신체적 대상은 필연적으로 분리될 수 밖에 없다. 어머니의 젖가슴은 아이의 입에서 떨어지고, 대변은 항문에서, 목소리는 입에서 각각 단절되면서 그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것이 된다. 하지만 이미 주체의 머릿속에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와 욕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대상이라고 착각하는 상태 (환상, $◇a) 에 머물게 된다. 이후 점진적으로 분리를 받아들이면서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저자가 주의를 당부하는 것은 대상을 단지 상실물로만 여기려는 태도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신체적 조건’은 대상 a 가 형성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끊임없이 바꾸는 욕망의 환유적 특성상 대상 a 는 언제나 ‘미지의 것’으로 남게 될 수 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욕망 충족이 사실상 완전한 충족(대타자 향락)을 찾는 도중 얻어진 부분 충족(국소 향락)인 이유이다.
1.4. 불만족의 서로 다른 이름 – 욕구, 요구, 욕망
‘욕구’는 배고픔 등의 생리적인 불만족을 뜻한다. 이 때문에 아이는 울음을 통해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것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 때 어머니가 아이를 자식으로 인정 (너에게 젖을 먹이고 싶구나) 할 때에만, 즉 대타자의 요구로 응답될 때에만 주체 (아이) 의 요구는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이 대상 a 형성의 다른 조건인 ‘이중의 요구’로, 배고픔이 충족되더라도 만족감을 주던 대상(a)은 사라지므로 욕망 환상이 남겨지게 된다 (욕구 – 요구 = 욕망).
이 때 요구는 현실적인 대상 상실에 대한, 욕망은 불가능한 대상 상실에 대한 갈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갈망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온전히 실현시키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욕망 환상이 남지 않았다는 것은 근친상간, 그러니까 요구하는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잃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환상과 현실의 구분이 없는 정신병적 상태에 머무름으로써 주체성 확보를 위한 움직임을 이어갈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정신분석가와 대상 a
한편 알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는 대상a 는 정신분석 현장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분석수행자가 분석가의 의도를 알 수 없어야 한다는 차원에서 말이다.
2.1. 분석가의 역할
무의식을 시니피앙 체계와 예외가 존재하는 구조로 이해 (1.2. 참고) 했을 때 분석가의 역할은 ① 반복의 운동성 (욕망) 을 유지시키면서, ② 일자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시니피앙의 교체를 도와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 분석수행자(환자)를 잘못된 고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 설명이 흥미로운 것은 욕망을 유지시키면서 시니피앙을 교체시켜야 한다는 모순성에 있다. 분석수행자가 욕망을 품고 있는 대상을 계속해서 원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면서, 마치 마술처럼 그 대상을 바꿔치기 해야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유지시키면서 욕망의 대상 바꾸기. 이 과정을 통해 분석수행자는 자기 자신을 낯설게 느끼는 경험 (이방인과의 조우) 을 하게 되는데, 이는 자기 성찰이 아닌, 분석가의 외부적 자극의 결과이다. 프로이트가 “이드가 있었던 곳에 자아가 도래해야 한다”고 언급했듯,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했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내쫓게 되는 것이다. 나지오 박사가 정신분석을 본질적으로 추방이라고 본 것은 바로 그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분석가가 어떻게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이 분석가에게 있어 대상 a 를 소환하는 지점이라고 볼 수 있다.
2.2. 라캉 정신분석의 목표
라캉 정신분석은 환자를 변화시키거나, 증상을 치유하는 것을 목표로 두지 않는다. 오히려 치유는 치료 과정의 부수적인 효과로, 분석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현상으로 여긴다. 심지어 분석가가 치유하려고 하면 할수록 치유는 불가능하게 된다고까지 이야기 한다. 전문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흔히 취하게 되는 이러한 태도를 나르시시즘에서 태어난 열정이라 부르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과연 정신분석이 필요할까 싶은데, 라캉이 의도한 바는 단순히 방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분석가는 분석수행자가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 가운데 있으면서, 그가 무언가를 발견해 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설령 알고 있는 것이더라도 모르는 척 하는 것 (속아주기), 다른 말로 외장이라고 정의한 이런 방식만이 회복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여기서 외장은 단순히 외면을 꾸미거나 흉내낸다는 뜻이 아니라 분석가 자신의 모든 생각과 감정, 열정을 백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물론 100%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석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란 분석수행자로 인해 놀라게 되는 것이다. 분석수행자의 깨달음에 진심으로 동참하는 것, 마치 아이가 처음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을 때 아주 자연스럽게,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치유하거나 이해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니라,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단지 전념하려는 그 상태 덕분에 진실에 의해 놀랄 기회를 마주하게 되는 것이 정신분석 치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분석가에 대한 나의 당부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습니다: 환자가 그들의 고통으로부터 구조되기 위해서는 분석가가 고통을 덜어주려 하지 말고 놀라움에 마음을 열어놓고 있어야 한다.
p. 143
2.3. 분석가 담론의 의미
살펴본 바와 같이 정신분석가는 대상 a 의 위치를 점유한다. 알 것으로 가정된 주체, 즉 환자를 아는 지식 (S2) 이 행위자 (그림에서 a의 위치) 의 자리를 차지해 분석수행자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 (전통 정신분석 뿐 아니라 인지심리학 등 심리치료의 일반적인 방식) 이 아니라, 아는 듯 모르는 듯한 상태에 머물러 (a) 분석수행자를 고민에 빠뜨리고 (분열된 주체, $) 결과적으로 주체의 성장을 자극하는 것이다. (* 참고글 : 히스테리 담론의 특별한 의미)
저자는 분석가의 이러한 외장적 태도를 여성적 신비라고 표현한다. 분석수행자는 분석가의 수용적인 태도를 통해 자기도 모르게 욕망의 대상을 바꾸게 되는데 그것이 분석가로부터 비롯됐는지 (욕망의 원인) 스스로 선택한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외장을 ‘여성적’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 보충하자면, 여성은 자신을 감출 때 타인에게 마음을 쓰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감추면서 자신의 신비를 언뜻 내비친다. 반면 남성의 경우 타자에게 스스로를 감추려고 하면서 몸짓이 노골적으로 드러나 결과적으로 모든 의문과 수수께끼를 꺼 버린다. 불투명한 베일에 자신을 살짝 내비쳐 호기심과 놀라움을 자극하는 여성적 신비는 그러나 단순히 생물학적 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성별을 넘어 모든 인간 존재는 여성적 태도와 남성적 태도를 견지할 수 있으며, 우리의 모습은 그 중 일부가 강화된 경향을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나의 대상 a, 온전한 사랑을 위해 지식이 필요한 이유
살펴본 것처럼 대상 a 는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무언가라고 할 수 있다. 무수히 많은 경험의 합인 인간 행위의 근본적인 원인은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에, 마치 병의 주요 원인을 스트레스로 보듯 그 대상에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하지만 결론은 너무 간단해 보여도 이 기호는 결코 쉽게 획득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내면 세계 이해를 위해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도달한 결과물. 그것은 마치 무의식처럼 우리의 내면 세계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그러니까 구멍을 좁혀 나가는데 성공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남아있고 영원히 메울 수 없는 구멍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최선을 다한 지식의 ‘겸손한 한계 인정’인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실패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것은 탐구 과정 속에서 획득한 지식들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을 보다 풍성하게 넓혀줬다는데 있다. 증상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환자의 경우, 실은 증상 자체가 최악의 상황에서 그를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 대표적일 것이다. 절대 향락의 고통에 맞선 주체적 저항의 결과물. 일반적인 관점에서 고통스러워 보이는 증상이 오히려 환자에게는 현실의 더욱 큰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역할을 해 부분적인 만족 (국소 향락) 을 제공한다는 것은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지식이다. 나지오 박사가 분석가의 역할에서 강조한 부분은 이러한 이해에서 나온 사랑의 정교한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치유를 의도하지 않는 가운데,
② 오히려 그의 욕망을 유지시켜주고,
③ 그럼에도 그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을 깨달을 수 있도록 외장 (대상 a) 의 상태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환자의 잘못된 믿음 (증상) 을 직접적으로 고치려고 했던 프로이트의 결정적인 실수, 그리고 여전히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있는 우리에게 ‘증상이 아닌 구조를 봐야 함’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모태 기독교인인 필자가 ‘한국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적 원리’에 의해 구원받았음을 스스럼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한 것이 없는 한국 기독교의 진부한 사랑의 메시지는, 급속도로 변화되는 세상에서 신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에 의미있는 울림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인의 전반적인 감소, 특히 젊은층의 감소가 두드러지는 현 상황이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 문제의 본질적인 지혜와 해법을 담지하고 있음에도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기독교적 사랑의 원리를 세상의 지식을 통해 글로 남기는 것. 필자에게 있어 글쓰기는 죽어서가 아닌 이 땅에서의 에덴이라고 하는 대상 a 를 이루기 위한 작은 노력 (사명) 이라고 볼 수 있을 듯 싶다. (* 참고글 : 내가 글을 쓰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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