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환상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판, 「투셰와 유토피아」, 라이언 앤소니 해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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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라고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황폐한 도시 모습
148. 유토피아 150

이번 책은 ‘유토피아’라는 주제에 대해 슬라보예 지젝, 가라타니 고진 등 저명한 학자 9명의 정신분석적 사유를 담은 논문 모음집이다. 앞으로 각각의 논문을 정리하고 이 기획에 대한 전반적인 생각도 나눠보고자 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교착점에 선 오늘날 어떤 실천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으로 풀어보도록 하겠다.

첫 번째 논문은 라이언 앤소니 해치 교수의 「투셰와 유토피아」이다. 투셰(tuché)는 라캉의 ‘우연’ 개념으로 주체에게 발생하는 우연적인 실재와의 만남을 뜻한다. 그렇다면 논문 제목을 ‘유토피아와의 우연한 만남’이라 볼 수 있을텐데 저자의 의도는 이와는 정반대이다.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느껴왔던 세상의 한계를 드러내는 우연한 계기, 다시 말해 완벽하다고 여겨왔던 세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주체의 탄생을 뜻하는 것이다. 이제 본문을 살펴보자.

1.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

이 논의는 1516년 토머스 모어의 정치 철학 소설, 『유토피아』를 참조점 삼는다. 일반적으로 유토피아는 공공의 안녕과 인간의 행복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모순을 궁극적으로 해소한 이상적인 사회로 여겨진다. 그러나 모어가 이 개념을 최초로 사용했을 때는 어디에도 없는 곳 (그리스어로 없는 ou, 땅 topas)이라는 뜻1위키피디아 한글, 유토피아이었다고 한다. 이 소설은 2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권은 1515년 영국 사회에 대한 비판을, 2권은 그에 대비되는 사회로써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다.2위키피디아 한글, 유토피아 (책) 그가 상상한 곳은 경제적으로 공산주의(농업 사회주의)를, 정치적으로 민주주의(의회 공화주의)를 실현한 사회로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정의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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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도시들의 연합국가인 유토피아 초판 삽화 (* 출처 : 위키피디아3위키피디아 영문, 유토피아 모로섬)

유토피아의 사회상을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4위키피디아 영문, 유토피아 30 가구를 대표하는 시포그란티 200명이 비밀 투표로 왕자를 선출하는데 그는 폭정 혐의로 폐위될 수 있고, 그렇지 않는 한 종신직을 유지할 수 있다. 사유 재산과 화폐가 없는 유토피아 사회는 시장에서 필요한 만큼 창고에서 물건을 가져다 쓰면 되고, 농업 기반 사회여서 누구나 2년 동안 농사를 지어야 한다. 남녀 모두 같은 일을 하며, 직조, 목공, 금속 세공, 석공 등 필수 직업 중 하나를 더 배워야 한다. 누구나 일을 하는 덕분에 하루 노동 시간을 6시간으로 줄일 수 있었고, 일을 마친 뒤에는 문화센터에서 맞춤 강좌를 듣는다. 또한 모두가 똑같은 종류의 단순한 옷을 입어야 해 좋은 옷을 만드는 양장점은 없으며, 금(Gold)은 범죄자를 속박하거나 요강 같은 부끄러운 일에 사용해 건전한 혐오감을 준다. 거기에 무료 병원이 있는 복지 국가에, 안락사, 신부의 결혼, 이혼,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등 당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이상적인 조건이 허용되는 사회였다.

2. 저자가 지적하는 유토피아의 문제

그러나 저자는 모어의 유토피아가 오늘날의 시선에서는 완벽하게 평범해 인상적이지 않다고 일축한다. 이는 그의 기획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기획’이 안고있는 공통적인 문제 때문이다. 그가 지적한 건 크게 두 가지인데,

① 계획된 도시 내에 고르게 배치된 시민들에게 사적인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② 쾌락마저도 특정한 방식 (내용, 기간, 목적이 미리 계산된) 으로 즐길 수 있는 일종의 의무였다는 점이다. 특히 게임의 성패를 운에 맡기는 주사위 놀이가 엄격히 금지되어 있다는 (시민들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는) 점이 주요하게 언급된다.

다시 말해 모어의 유토피아는 ‘우연’한 과정을 통해 등장하는 주체를 최대한 억압하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집단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예측 가능한 수준으로 개개인의 행위를 제한해야 하는데, 모어의 기획은 여기에 부합한다. 다만 여기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저자가 비판한 것은 유토피아 자체였다는 점이다. 모어의 유토피아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는데, 저자의 경우에는 그가 유토피아를 진정한 이상향으로 제시했다기보다 일종의 풍자 – 지도자들의 이상을 만족시켜줬을 때의 주체의 비극을 우회적으로 폭로 – 였다고 바라본다. 모어 또한 자신의 유토피아적 기획의 문제점을 알고 있었다고 본 것이다.

3. 행복과 유토피아, 그리고 라캉 정신분석

행복에 대한 정신분석가들의 평가는 야박하기 그지 없다. 프로이트는 애초에 피분석가를 행복하게 해줄 생각이 없다고 함으로써 정신분석을 탄생시켰고, 그의 뜻을 계승한 라캉은 행복이 남들과 같아지는 것이며 나만의 자율적 자아는 녹아 사라지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슬라보예 지젝은 이를 간단히 욕망의 배반5필자의 블로그, 행복이 뭐가 문제야? 이라고 표현했다. 행복을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이끄는 힘인 욕망의 결과를 마주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억압 기표로 본 것이다.

꿈과 희망, 그리고 행복을 약속하는 유토피아적 관점은 이런 점에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라캉이 주체의 ‘적응’을 목적으로 한 정신분석 (자아심리학)을 비판했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상상계적인 모자 관계를 ‘치료를 통한 정상화’라는 유토피아로 대체했을 뿐, 상징계의 상호주관적 양극(갈등)을 마주하도록 이끄는 거세 (증상 제거의 불가능성) 를 차단한 것이라 봤기 때문이다. 그가 성관계도, 일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 것처럼 말이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유토피아는 진보적 이상으로 공공의 안녕과 인간 행복의 모순을 궁극적으로 해소한 상태를 뜻한다. 하지만 라캉은 (거의 언급한 적은 없지만) 이를 황폐하게 파손된 상태이자 정신분석의 비천함을 드러내는 최저 지대라고 일축한다. 명백히 반유토피아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4. 행복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이유

앞서 행복과 유토피아적 환상이 ① 양극단의 긴장관계를 제거하고자 하는 것 때문에 비판 받았다면, 애초에 ② 이런 상태에 머무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요소가 있다. 유일하게 하는 일이 침범 뿐인 주이상스(향락)가 그것이다.

라캉을 통해 최초 쾌락의 의미에서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얻는 만족감으로 의미가 확장6필자의 블로그, 라캉 주이상스(향락) 개념의 변화 과정된 주이상스 (향락) 는 프로이트의 예감에서 출발한다. 그는 『문명 속의 불만』에서 문명의 압박과 성 기능 자체에 내재된 본성 속 ‘무언가’로 인해 완전한 만족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여기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바로 주이상스인데, 우리 심리구조의 다른 면에서 끊임없이 행복 추구를 벗어나게 만든다고 이야기한 것이다.

이처럼 ① 외적 금지가 제거된 완벽한 만족 (대타자 향락, 유토피아) 환상은, ② 우리를 끊임없이 추동하는 주이상스 (잉여 향락) 와 대립하며 제논의 역설 (평행선처럼 영원히 만날 수 없는 관계) 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5. 진정으로 유토피아적인 것

결과적으로 유토피아적 기획은 주이상스가 추동하는 인간의 욕망 변화로 인해 한계점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단지 반유토피아적 관점에 머물러 있어야 할까? 물론 저자는 이 점에 대해서도 반대 의견을 분명히 한다. ① 긴장 관계를 부정하는 유토피아적 관점이 천박한 (생기없는 부정성에 빠지는) 것만큼, ② 그 반대에 머물러 있는 것 또한 무한대의 악순환(악무한성)에 빠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정치를 비롯한 지도자 집단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분명 불가능하지만, 그렇다고 결코 포기할 수도 없는 궁극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저자는 프로이트를 다시 소환한다. 주체의 ‘진정성 있는 행위’만이 악무한의 순환 고리를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전이라 부를 수 있을 이 행위는 기성 질서로 점철된 숨막히는 유토피아에 길들여지지 않은 새로움을 선사하며 균열을 일으킨다. 저자는 이런 주체성의 출현만이 기존 존재의 공허함을 드러내며,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그렇게 세상이 여전히 열려있음을 보여주어 진정으로 유토피아적이라고 설명한다.

외부 세계는 오염 (악) 되어 있어 안전한 이 곳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관리자들의 설명과 통제는, 한 사람의 호기심으로 인해 숨겨진 진실 (관리 주체가 악이었음) 을 드러내게 된다. 영화 <아일랜드> 이야기의 골자이자 기성 질서를 넘어서는 용기있는 주체에 관한 대표적인 서사이다. 이처럼 저자는 즐길 것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적 명령에 의문을 품고, 주어진 틀을 넘어 자신만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애쓰는 모든 주체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유토피아』 전체 글 목록
1. 유토피아 환상에 대한 정신분석적 비판, 「투셰와 유토피아」, 라이언 앤소니 해치 편
2. 상상의 가능성을 연 기독교적 자유, 「유토피아적 응시의 모호성」, 슬라보예 지젝
3.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제 위기와 혁명이 반복되는 이유, 「반복과 혁명」, 가라타니 고진

* 표지 이미지 출처 : D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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