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개월] 아이의 마음을 ‘잘’ 받아주는 것의 어려움

readelight

우는 아이

어제 하원 후 집 앞 놀이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그네도 타고 시소도 타며 놀고 있는데 다른 여자아이 둘이 놀이터에 들어왔다. 그렇게 얼마간은 잘 노는듯 싶더니 곧 사건이 터졌다. 우리 아이가 나선형 모양의 미끄럼틀을 거슬러 올라가는데 조금 더 어린 다른 아이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 서로 엉키게 된 것이다. 다행히 거의 끝까지 올라간 상태라 내려오는 속도가 붙기 전이어서 그 아이의 엄마와 내가 각자 아이들을 잡고 가볍게 타박 (‘보지도 않고 내려온다’와 ‘거슬러 올라가면 어떡하냐’는 식) 하는 선에서 교통정리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잘 마무리되자 마자 우리 아이가 곧바로 울기 시작했다. 응? 고개를 갸우뚱하며 울고 있는 아이를 안고 벤치에 앉아 괜찮다고 위로해줬지만 서러운 울음은 그칠줄을 몰랐다. 그냥 우는게 아니라 끅끅 참아가면서 우는 그런 울음이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안정이 될 때까지 기다리다 등을 토닥이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playground 1
사고(?)가 난 미끄럼틀 (출처 : 아내)

“동생 나빠. (훌쩍) 미끄럼틀 혼자만 타려고 하구.” “그래? 그런데 네가 거꾸로 올라간거잖아. 동생은 모르고 내려온거구. 그리고 같이 타는거니까 줄 서서 타면 되는데 왜.”

역시 자기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그런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때부터 다시 울음이 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는 생각나지 않았지만 (사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본인이 ‘먼저’ 올라가고 있었는데 위험하게 무턱대고 내려오는게 혼자타려고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겠구나 싶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아이를 탓할 수는 없는 것이 미끄럼틀의 첫 번째 목적이 내려가기 위한 것이기도 했고, 상대 아이의 나이가 어려 올라오는 사람과 부딪치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에 아이는 기어이 아빠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한 마디 더 내뱉었다.

“동생 쓰레기통에 버려 버렸으면 좋겠어.”

심정이야 이해하지만 그런 표현을 어떻게 이해해 줄 수 있을까. 말조심하라는 뜻에서 손으로 입술을 살짝 때렸다. 사실 때린 것도 아니고 입술에 ‘톡’ 갖다 댄 정도긴 했지만 곧바로 서러운 울음은 계속됐다. 어느 정도 기다려도 아이의 울음은 도무지 그칠줄을 몰랐다. 계속 들어줄 수가 없어서 벤치에 앉히고 자꾸 울면 갈거라고 으름장을 놓아도 소용 없었다. 아이가 우는게 그야말로 ‘떼’라고 여겨졌으니 차오르는 분노를 삭히기가 쉽지 않았다. 그저 맨발로 있던 아이에게 멀리 놓여져 있던 신발을 앞에 툭 던져주는 것으로 살짝 표현하고는 물끄러미 앉아서 지켜보았다. 이제는 바닥에 누워 뒹굴며 울고 있는 아이를, 잘 놀고 있는 사고 당사자(?)였던 아이와 그 엄마가 있는데서 보고만 있는다는건 무척이나 민망한 일이었다. 같이 부딪쳤는데 왜 우리 아이만 이렇게 우는 걸까? 한편으로 20분이 넘도록 그렇게 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극적인 행동화 (두고 가버리는 식으로 충격을 주어 아이의 떼를 다스리려고 하는, 사실 그런 충동이 수 차례 밀려오긴 했었다) 로 가지 않았던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당시에 필자를 붙잡아주었던 생각은 이런 것들이었다.

1. 동생이 나쁘다고 할 때 맞장구 쳐주는게 나았을까?

그럴 순 없었다. 잘못이 없는 것에 책임을 전가하고 상황을 마무리짓는 것은 단기적인 위로가 될 수 있을 뿐 상황을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자신과 타인의 책임을 구분짓는 것을 미루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른들의 수많은 상황에서 자신의 책임은 외면한 채 손상된 권리만 내세우는 경우를 얼마나 많이 보고 있고 우리를 피곤하게, 또 분노하게 만들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더더욱 아이를 그렇게 키우고 싶지 않았다. 이제 아이는 자신이 무조건 옳다고만 여기는 것에서 그 생각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는 좌절의 단계를 조금씩 감당할 때가 되었다. 오이디푸스의 교훈은 결코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에, 많은 부분에서 상상 속에 머물러 있는 아이의 믿음을 좌절을 통해 상징적으로 고양시켜줄 필요가 있었다. 다만 그것이 오히려 외상으로 자리잡지 않고 깨달아 갈 수 있도록 인내하는 것은 부모의 몫일 터였다.

2. 가정에서 만큼은 존재만으로도 지지받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이 박히지 않도록 인내해야 하는 이유에는 가정에서 만큼은 아이를 온전히 지지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었다. 필자와 종종 깊은 대화를 나누는 선생님이 (아이들을 짐짓 엄하게 가르치시는) 계신다. 하지만 계속 고민이셨던 것은 이런 방식이 정말 맞느냐 하는 것이었다. 분명 억지로라도 학생을 끌어 당겨서 일정 수준 이상으로 올려놓으면 아이들이 너무나도 고마워하고 행복해 한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방식은 아이들의 자율성이 침해당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이만의 특정한 계기를 통해 열정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욕망을 따라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이런 성취가 장기간 유지되기 어렵다는 한계 또한 안고 있다는 고민이었다. 필자도 고민이 되었던 부분이었지만 대화를 나누다가 어떤 이유에선지 확신을 갖고 그대로 밀고 가시라고 응원을 해드린 일이 며칠 전에 있었다.

세상에는 나를 한계에 부딪치게 만드는 온갖 적대적 요소들이 그야말로 즐비해 있다. 아이는 날마다 세상으로 나가 싸우고 배우며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올텐데 그런 아이가 회복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은 가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사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있기에, 또한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기에 언제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런 중요성들을 너무나도 쉽게 간과하게 하고 있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고등부 교사를 하고 있는 가운데서 아이들이 부모님들 개개인의 욕망으로 인해 이런 지지를 받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듣거나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캉주의 정신분석이 이야기하듯 ‘증상이 아닌 구조를 봐야 한다’는 메시지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아이들이 흔히 빠지게 되는 게임 중독은 그 자체로 아이의 숨 쉴만한 공간, 그러니까 게임만큼 내 삶에 만족감을 주는 것이 없다는 반증이다. (필자 또한 지독하게 오랜 기간 경험했던 일이기도 하다.) 이미 고착화된 이런 구조를 갑작스럽게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그의 삶을 지탱해주는 환상의 보호막을 산산조각 내는 것이나 다름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결코 쉽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절대로 포기해선 안되는 것은 아이는 부정할 수 없는 부모의 증상이라고 하는 교훈, 즉 엄마와 아빠라고 하는 절대자가 빚어낸 가정 구조의 열매라는 공동의 책임의식을 갖고 (아이의 문제를 탓만 할 것이 아니라) 아이와 함께 방법을 찾아나가는데 있을 것이다. 필자에게 각인된 기독교적 핵심은 주체는 믿음으로 구원받지만, 타자는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타자에게 자신의 믿음을 강요하는게 엄연한 현실인 상황에서 사랑의 회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한편으로 아이가 저 정도까지 우는 모습을 보면서 오히려 지지받지 못하는 슬픔이 그렇게나 컸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심하게 혼낸 것도 아니고 단지 동의를 해주지 않았을 뿐인데 저렇게 서글펐다는 것은, 이전에는 자신의 감정이 충분히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로도 생각해볼 수 있을 듯 싶었다. 고맙게도 엄마와 아빠는 나를 전적으로 지지해준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아이와의 갈등 이면에 어쩌면 이런 상실의 아픔이 아이을 더욱 슬프게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아이는 드러누워 울다 하품을 하면서 그대로 잠들려고 해 곧 일으켜 앉히고 신발을 신긴 뒤 서둘러 놀이터를 떠났다. 바닥을 뒹군 상태로 그대로 재울 순 없었기에 안긴채 잠들려고 하는 아이를 결국 바닥에 내려주고 손을 잡고 걸어갈 수 밖에 없었다. 비틀대며 울면서 따라들어온 아이를 겨우 씻기고 로션을 발라주자 슬프게도 (ㅋㅋ) 기사회생해서는 매니큐어를 바르고 한참을 놀다가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일련의 과정 가운데 아이는 스스럼없이 나를 대해줘 적어도 어느 정도는 적절한 수준의 좌절로 경험된 듯 싶었다. 다만 필자로서도 아쉬웠던 것은 당시의 아이 입장을 충분히 헤아려주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내 안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옳고 그름에 대한 관념이 아이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는데 선뜻 마음을 열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로 작용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입장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면 보다 더 친절하게 엄격한 태도를 취할 수 있었을텐데. 오늘의 사건을 계기로 앞으로 조금 더 나은, 지혜로운 선택을 할 수 있길 기대해 본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pixabay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