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이와의 가장 큰 갈등 요소를 꼽는다면 단연 식사 습관일 것이다. 먹이려는 엄마와 쉽사리 따라주지 않는 아이와의 싸움이 벌써 수년 째 이어져 오고 있다. 이상하게도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는 그렇게 밥을 잘 먹는다고 하는 아이가 유독 집에서 만큼은 배고프다고 표현한 적이 한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물론 짐작가는 부분은 아이에게 표현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점 – 배고픔을 느끼기 전에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의 연속 – 이었다. 결여가 욕망의 원인이라고 하는 라캉식 표현을 사실 우리는 일상적인 의미에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굶어 봐야 배고픈 줄 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또래보다 작다고 하는 평균의 저주는 아내가 감내하기엔 너무 부담스러운 일인 듯 싶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찾아 먹을거라고 아무리 곱씹어도 당장 내 눈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습관으로 굳어질까 조바심이 나는 것이다. 거기에 고생해서 만들어 준 것을 거부하는 것에 대한 분노는 덤이다. (음… 사실 이게 더 큰 것 같긴 하다.)
이런 상황이다보니 함께 식사를 하는 시간이면 어김없이 약간의 긴장감이 돌게 되는데, 우리 딸은 아랑곳 않고 산만한 시간을 보낸다. 한 숟가락을 입에 넣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딴청을 피우는데, 예를 들어 화장실을 간다거나, 거실로 가서 퍼즐 맞추기, 또는 그림을 그리거나 의자 위에서 춤을 추거나 하는 식이다. 밥 먹는 것 자체가 즐겁지 않으니 좀이 쑤시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절로 나오게 된다. 결국 서로에게 유쾌하지 않은 협박이 자동적으로 튀어나온다.
“밥 안먹어서 키 안 크겠네.” “밥 안먹어서 간식 못 먹겠다. 엄마 아빠는 이거 먹고 맛있는 것 먹을 건데.”
물론 이런 표현은 아이에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러니 아빠와 엄마가 식사를 마친 후에도 양의 변화가 거의 없는 아이의 밥 그릇을 보다 못해,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이려고 하는 건 결국 엄마의 몫이 되어 버리고 만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연속인 것이다. 어쩌다 우리 아이는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이 즐겁지 않게 됐을까?
1. 식사가 즐겁지 않은 이유
1.1. 간식의 유혹
아이가 배고프다는 표현을 하기 전에 식사를 한다는 것, 그 이면에는 소소한 간식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납장에 올려놓고 필요할 때 꺼내주던 간식거리가 최근에는 식탁 근처에도 자리를 잡고 있어, 언제든 먹을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한꺼번에 많이 먹지는 않아 특별히 제지하지 않았더니, 정작 식사 때는 맛도 없거니와, 식욕도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된 듯 싶었다. 이 때문에 ‘간식을 먹고 밥을 먹자’고 하는 룰이 생겨났고, 이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이 규칙에는 적응이 된 것 같았다.
1.2. 규칙을 지키지 않음
하지만 여기에서 나타난 두 번째 문제는 이 규칙을 철저히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 있었다. 밥을 먹지 않으면 간식을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놔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아이가 ‘먹고싶다’고 하면 마음이 약해져 ‘간식이라도 먹이게’ 되는 상황이 이어졌다. 그러니 밥맛은 떨어지고, 밥 외에도 먹을 것이 있다는 심리적 보상 구조가 마련돼 식사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가 심각한 수준으로 식사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온 가족의 즐거운 식사시간을 위해, 그리고 내년에 둘째가 태어나기 전에 이 문제를 진지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었다.
2. 습관을 들이기 위한 첫 시도
첫 시도는 3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계 바늘을 보고 언제까지 먹자고 제안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 때까지는 시간을 지키지 않아도 이렇다 할 제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주에는 달랐다. 밥을 먹지 않고 뜸을 들이자 언제까지 먹도록 하고, 밥을 충분히 먹지 않으면 다른 음식을 먹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아이도 물론 동의했지만, 아마 밥을 먹지 않아도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간식을 먹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을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밥은 금세 포기하고 곧바로 간식을 먹으려고 해 아이의 손이 닿지 않는 냉장고 위로 옮겨 놓았다. 그동안 아이의 습관이 얼마나 나쁘게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던, 반성의 순간이었다. 여기에 엄마는 설상가상으로 멜론까지 썰어서 접시에 담아 왔고, 포크를 빼앗으려고 하는 걸 피하면서 아내와 함께 맛있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먹어 버렸다. 그렇게 엄마, 아빠가 정말 하나도 주지 않고 다 먹는 모습을 본 아이는 방으로 들어가 울기 시작했다. 아내는 곧 아이에게 다가가 달래 주면서 한편으로는 네가 밥을 먹지 않을 때마다 엄마, 아빠도 이렇게 속상했다며 공감을 구했다. 거실서 묵묵히 빨래를 개고 있던 나는 옷을 방에 갖다 놓으며 아이에게 다가가 다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이는 엄마 다리를 베고 누워 다리를 내 쪽으로 뻗은 상태였다.)
“많이 속상했지? 미안해. 그런데 우리가 약속한거라 오늘은 먹을 수가 없어.”
기분이 좋을리 없는 아이는 말없이 발만 구를 뿐이었다.
“밥을 먼저 먹으면 다른 간식들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근데 네가 밥을 먹지 않고 자꾸 간식만 먹으려고 해서 엄마, 아빠랑 약속을 정한거야. 밥을 먹어야 키도 크고 몸도 튼튼해져서 신나게 놀 수 있거든. 그리고 또 약속을 잘 지켜야 다른 아이들과 놀 때도 믿음 있는 친구가 될 수 있겠지?”
기분 탓에 선뜻 대답을 하진 않았지만 아빠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한 것처럼 보였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엄마, 아빠의 단호한 태도에 대해 아이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분명 아이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래도 이제까진 타이르면서 양보해 줬었는데, 간식을 다 먹어버린 그 순간이 얼마나 야속하고 서러웠을까?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마음에 큰 상처 (외상) 가 되지 않는 수준의 좌절 (최적의 좌절) 을 경험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이전에도 잘못된 태도에 대해 설명을 해주긴 했지만 이때처럼 단호하게 대한 건 처음이었다. 이제서야 본격적인 오이디푸스기를 맞게 된 것이다. 엄마의 욕망에 종속된 상태 (밥을 먹어야 간식을 먹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먹을 수 있음) 에서 벗어나 상징적 질서 (밥을 먹지 않으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음) 를 경험함으로써 겪게 되는 주체의 소외. 대타자인 엄마의 욕망 또한 아버지 이름이라는 질서 하에 편입되어 욕망의 궁극적 원인이 되는 상실의 과정 말이다.
물론 당연한 얘기지만 아이의 태도가 곧바로 바뀌지는 않았다. 기저귀를 뗄 때도, 혼자 잠자리에 들 때도 아이의 필요에 따라 서서히 적응해 갔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아이가 의미있는 교훈을 얻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의 의미와 더불어 엄마와 아빠가 때에 따라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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