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부쩍 컸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즘이다. 그만큼 더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응?) 코로나로 인해 올해 대부분을 재택 근무만 해왔는데, 그 덕분에 양가 부모님들 손을 빌리지 않고 육아를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몸은 더 힘들 수 밖에 없었고, 이제는 오히려 많은 대화가 가능해진 아이와의 갈등도 자연스럽게 늘어나게 되었다.
거기엔 언제나 인식하고 있지만 용납하긴 어려운 ‘이미 알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큰 몫을 차지했다. 아이의 잘못된 태도들에 대해 수 십 차례, 어쩌면 수 백 차례에 걸쳐 설명하고 설득해 왔기에 익히 알 법한 일들을 받아주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진 것이다. ‘어려서 잘 모르니까’ 넘어갈 수 있었던 잘못된 태도들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교정하며 시작된 본격적인 좌절 경험은, 아이의 미숙한 감정처리를 통해 우리에게 한층 더 강한 시험으로 돌아왔다.
지난 주 아이와의 갈등은 이런 상황의 연장이었다. 양치를 하다 치약을 새로 묻히려고 해 몸에 좋지 않다고 말렸더니, (예상했던 반응인) 팔을 꼬집고 칫솔을 집어 던졌던 것이다. 이미 이런 태도를 보일 때마다 반복적으로 주의를 주고 알려줘 왔지만 11시가 넘은 시각인데다 피곤함까지 더해져 슬쩍 짜증이 밀려왔다. 이 때문에 혼자 씻든 말든 알아서 하라고 이야기하고는 밖으로 내보냈다. 그 후 한동안 화장실 앞에 주저 앉아 있던 아이는 내가 밖으로 나가자 뒤따라와 엄마에게 ‘아빠가 씻지 말라고 했다’며 일러 바쳤다. 하지만 설명을 들은 엄마로부터도 잘못했음을 지적 받자 의기소침해져 벌거벗은 상태로 자기 방에 들어가 이불을 덮고 누워 버렸다.
그래도 정말 자려고 한건 아니었던지 주섬주섬 옷을 입고는 안방으로 들어와 책을 읽어달라며 말을 걸었다. 내심 ‘책은 읽어줘야 되는데…’ 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이의 잘못된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좀 더 분명히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야멸차게 거절해 버렸다.
“싫어.”
그제서야 아이는 그 때까지 참고있던 울음을 한 번에 쏟아내며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한동안 울던 아이를 곁에 누워있던 아내가 도닥여 주면서 상황은 마무리 될 수 있었지만, 결국 아이는 훌쩍이며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기분 나쁜 상황은 다음날 저녁에도 벌어졌다. 의자에 앉아있던 아빠 무릎 위로 올라오려는 것을 살짝 힘을 주며 버티자, 곧 짜증이 났던지 짧게 소리를 지르고는 손으로 얼굴을 할퀴려고 휘둘렀던 것. “이렇게 하면 엄마, 아빠가 같이 놀기 싫다고 했지. 그렇게 할거면 내려가.”
문득 풀지 못한 어제 일이 떠오르긴 했지만, 어제의 태도를 고수하기로 마음 먹고는 아이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러자 기분이 나빠진 아이는 이런 저런 말로 협박을 시작했다. “그러면 엄마 오면 엄마한테 이를 거야.” “아빠랑 이제 안 놀 거야.”
물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라 건성으로 ‘응, 그래’라고 대답하며 가만히 앉아 있었더니, 뭐라고 궁시렁 거리면서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사실 생각해 보면 어제의 상황은 명백히 아이의 잘못이었지만, 오늘은 아무리 장난이라고 해도 아이의 화를 돋군 건 분명 나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었다. 거기에 전날 화해도 못하고 그대로 잠들게 했던 것에 대한 미안함도 계속 남아 있었다. 결국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평소 아이가 좋아하던 노래를 크게 틀기 시작했다. (얼른 이리 오라는 의미다.)
하지만 웬일인지 노래가 끝날 때까지도 인기척이 없었다. 아무리 삐졌어도 관심사를 포기할 아이는 아닌데 기분이 그렇게나 많이 나빴던 걸까? 살짝 걱정이 되어 찾아가 보니 웬 걸, 그 몇 분 사이에 벌써 잠이 들어 있었다.
이틀 동안이나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잠들게 하고 싶진 않은데… 그래도 그나마 잠든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생각에 벌써 자면 어떡하냐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 다른 반응이 없어 살짝 간지럽혀도 봤지만 잠시 몸을 뒤척일 뿐 더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이쯤 되자 그냥 자게 해주고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올라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꼭 기분은 풀어주고 싶었다. 물론 깨울 수 있는 방법이 없는게 문제였긴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심하게 깨우면 오히려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들 것 같아 계속 망설여졌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깨우기 위한 방법을 고심하던 차에 아이는 한기를 느꼈는지 이불을 덮으려고 했고, 이를 살짝 뒤집자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발로 차고 꼬집는 몇 차례의 움직임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다시 이불을 잘 덮어주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 아이는 잠이 덜 깬듯 대답이 없었고, 이불 안으로 고개만 살짝 넣고 아빠 밉냐고 물어보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고는 배시시 웃었다. 어라?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반응이었다. 순간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모두 보상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깨워서 미안하다며 다시 사과하니 아이는 아빠가 언제 깨웠냐고 되물었다. 아마도 잘 자다가 스스로 잠이 깬거라 여긴 듯 싶었다. 너 계속 못자게 이불 걷어내 짜증내면서 깬거라고 했더니 모르겠다고 한다. 예상 밖의 간접 깨우기 효과였다. 그래도 엉겁결에 화해도 하고, 아이도 곁에 있던 책을 보더니 읽어달라고 해 몇 권을 읽어 주었다. 곧 퇴근한 아내도 돌아왔고, 덕분에 기분좋게 재우고 싶었던 마음은 다행히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잘 자던 아이를 굳이 깨워가면서까지 기분을 풀어줘야 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음 날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기분좋게 놀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사실 이런 선택이 지극히 이기적이었다는 점은 인정할 수 밖에 없다. 미안함을 전하고 싶다는 마음이 끌어낸 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과가 좋았기에 망정이지 그 반대 상황이었으면 미안함이 더 커져 다시 깨우는 악순환이 반복됐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아이가 잠을 자면서 정리하게 될 그 날의 기억이 기분 좋게 남겨졌으면 하는 바람, 그렇게 아이의 무의식으로 기록될 감정이 조금 더 나은 것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 계속해서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뭔가 시원찮았다. 막연하게 무의식으로 퉁칠게 아니라 확신을 갖게 한 무언가가 더 있지 않았을까? 고민을 계속하던 중에 한 가지 떠올랐던 것은 역시나 ‘책’이었다. 언젠가 독서클럽에서 『감정의 분자』에 대한 설명을 들었던 기억이 났다. 감정이 호흡과 혈류, 장 운동 (소화, 배설), 면역까지도 결정한다는 점을 과학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책이었다. 감정을 전달하는 물질인 펩타이드가 머리 뿐 아니라 온 몸에서 기억된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 주요 내용이었고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향후 리뷰를 통해 공유해 드리도록 하겠다). 성경 구절 중에도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에베소서 4:26)’ 는 내용이 있는데 불분명했던 이런 기억의 조각들이 알고자 하는 의지 가운데 불현듯 수면 위로 떠올랐다. 결국 아이를 어떻게든 깨워서 감정을 풀어주고자 했던 마음의 근저에는, 나쁜 감정이 몸에 기억된 상태로 무의식화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어쩌면 글쓰기의 묘미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그냥 지나쳤으면 생각나지 않았을 무의식적 기억들이 글쓰기라고 하는 의식화 과정을 통해 현재의 경험과 어우러져 새로운 가치를 획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조각들이 떠오를 때면 어김없이 깨달음의 기쁨이 찾아왔다. 이전 책에서 J-D. 나지오 박사는 해석이란 환자들이 이미 어렴풋이 알고 있는 것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좀 쌩뚱맞은 결론이지만, 아이와의 이번 갈등은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해주는 글쓰기야 말로 해석의 중요한 도구라고 하는 뜻 밖의 의미있는 교훈을 더해 주었다.
[1] 유튜브, Maroon 5 – Memories (Cover) One Voice Children’s Cho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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