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이란 참 무서운 단어다. 분명 우리에게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지만 언제든 식상함으로 돌변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를 반복의 자동성 (관습을 수동적으로만 따르려고 하는 태도) 이라 불렀던 바디우를 따라 죄를 예비 중인 상태라고 부를수도 있을텐데, 기독교와 인연을 맺은지도 어느덧 40년이 다 되어가는 필자가 딱 이런 상태가 아닐까 싶다. 오랜 신앙생활로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에는 익숙해졌지만, 정확하거나 깊이 안다고는 할 수 없으면서 그렇다고 더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다 이런 식상함에 빠지게 되었을까? 한 가지 떠올랐던 것은, 그동안 교회에서 배워왔던 것들이 주로 결론의 대입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설교, 성경 공부는 이미 확립된 기독교 교리를 토대로 한 성경 해석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는 얘기다. 어쩌면 조급함에 사로잡힌 한국의 교육처럼, (시간 관계상) 이론의 형성 과정은 생략하고 그 시간에 공식을 한 번이라도 더 외우는 것이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 건 아니었을까? 물론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 해도 진리를 향한 열망까지 식상함에 자리를 내준 것은 아니었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하면서, 인간이 발견한 지식과 해법들이 많은 부분에서 성경과 만난다는 것은 늘 경험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상을 문제시 여기고 직면하여 분쇄시키려 했던 초기의 정신분석은, 증상이 오히려 그를 지켜주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단계로 나아가 구약에서 신약으로 이행하는 교회사적, 발달사적 흐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었다. 또한 철학적으로 기독교의 보편적인 은총을 통한 구원 개념이 고대 인본주의 (이원론과 금욕주의를 결합해 실존을 부정적으로 바라봄) 와 근대 인본주의 (존재 자체로서의 인간을 긍정함) 의 결정적인 차이를 낳았다는 폴 틸리히의 설명은 ‘인간이 할 수 없었던 생각’이라는 기독교 이론에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해 주었다. 분명 나의 정신적인 곤궁을 실재적으로 해결해 주었던 지식들이 본질적으로 기독교 이론과 중요하게 연결된다는 배움은, 기독교 이론 자체에 대한 식상함을 한꺼풀씩 벗겨내고 있었다. 교회 추천도서 목록에 뜬 이 책을 선뜻 선택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구체적인 삶과 다양한 분야의 지식, 그리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까지 서로 연결지어 바라보는 것, 개인적으로 익숙함에 도전하고자 하는 하나의 작은 사명과도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이 책은 애초에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144 페이지에 불과한 얇은 책이다. 기독교 이론의 핵심적인 부분만 요약해 놓았던 것인데, 혹시나 교회에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내용을 반복해서 알려주진 않을지 염려가 되기도 했다. 물론 실제로 그런 부분도,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이론 형성 과정에 대한 개요를 알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아마 교회 입장에서도, 그리고 기독교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로 들어가고자 하시는 분들께도 좋은 개론서가 되지 않을까 싶다. 배경 설명이 너무 길어졌는데, 이제 책의 핵심 내용을 살펴 보도록 하겠다.
1. 기독교 신앙의 토대, 성경과 신조
기독교의 참된 신앙이자 사람의 제일 가는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 (제네바요리문답 1문) 에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성경과 신조를 통해 얻을 수 있는데, ① 성경(Bible)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자기계시로, 16-17세기 종교개혁운동의 ‘오직 성경 (Sola Scriptura)’ 가치를 이어받은 기독교의 절대규범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사도신경으로 대표되는 신조(creed)는 성경의 핵심 진리를 요약한 정통교리를 신앙고백 형식으로 표현한 공적인 신앙문서이다. (참고로 신조의 creed는 라틴어 credo에서 유래했는데, ‘나는 믿는다 (심장을 cordia 주다 do)’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신조는 로마제국의 탄압을 피해 지하교회 (카타콤) 로 숨어들었던 기독교인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고 전승시키기 위해 만든 것으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을 전달한다는 점에서 저자는 성경과 신조를 동일하게 강조하고 있었다.
2. 기독교 교리의 핵심, 삼위일체론
신앙고백의 핵심은 ‘우리가 믿는 신이 누구인가’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등장하는 세 분의 신 (구약의 하나님,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 성령) 이 각각 어떤 존재냐는 것으로, 기독교에서는 이들을 사실상 한 분으로 본다. 단지 역할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을 뿐이라는 것이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를, 성자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은 인간의 구원을, 그리고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움직이시는 한 분 하나님이라는 것이 ‘삼위일체론’의 요지이다. 기독교의 신앙고백은 이러한 삼위일체론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한 분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매우 당연하게도, 이 과정은 결코 한 순간에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수 백년에 걸친 교리 논쟁, 정반합의 과정을 통해 완성된 체계였기 때문이다.
3. 기독교의 정체성을 확립시킨 교리 논쟁
저자는 기독교의 핵심 이론이 형성되기까지 있었던 논쟁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한다. 이 중 핵심이 되는 것은 기독론과 구원론으로 배교자들의 처리를 다룬 교회론은 제외하고 정리한 내용을 나누고자 한다. 자세한 내용들이야 물론 다른 책들을 통해 보충해야겠지만, 기본적인 내용도 모르는 상태였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이었다.
3.1. 기독론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다루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냐는 질문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의 하나님만 존재하던 것에서 새롭게 등장한 두 분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3.1.1. 동일본질 문제
동일본질은 삼위일체론의 초기 논쟁으로, 구약의 성부 하나님과 신약의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의 존재이냐 (동일본질 – 양태론적 단일신론) 아니냐 (상이본질 – 삼심론적 종속론) 는 질문이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4세기에 아리우스가 성자는 성부의 피조물 (상이본질) 이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혼란에 빠지게 됐는데, 325년 기독교 최초의 세계공의회인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가 동일본질을 주장해 삼위일체론을 확정짓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다양하게 해석한 분파들이 많이 있었다. ① 에비온주의자 (유대적 기독교 분파) 는 성부만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단일신론을 주장해 예수의 신성을 부정했다. ② 영지주의자 (헬라적 기독교 분파) 는 육체와 물질 세계를 악으로 보는 이원론을 주장해 예수의 인성을 부인했으며, ③ 몬타니즘 (신령주의 이단) 은 자신의 교주를 보혜사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등 다양한 갈등을 겪었다.
3.1.2. 양성 연합 문제
한편 앞선 문제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으로 정리되면서 또 다른 질문이 시작됐다. 한 분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어떻게 연합해 구속사역을 이루는가 하는 문제 말이다. ① 4세기 말 아폴리나리우스 (310-390) 는 영지주의 이분설에서 비롯된 생각, 즉 신성이 영혼만 차지해 육체와 무관함을 주장한다. ② 5세기 초 네스토리우스 (386-451) 는 신성과 인성이 완전히 결합한 것이 아닌, 하나님을 지닌 인간으로 주장해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③ 5세기 중반 유티케스 (375-454) 는 신성이 인성을 흡수해 제 3의 존재로 변화된다고 해 정죄되었다. ④ 이후 7세기의 단의론은 유티케스의 사상을 이어받아 그리스도가 하나의 의지만 갖고 있다는 주장을 펼쳐 마찬가지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고 한다. 이런 논쟁에 대한 기독교의 결론은 그리스도 안에 신성과 인성의 구별은 있으나 분리, 혼합, 변화, 흡수가 아닌 완전한 결합으로 본다는 것이었다. (2 natures in 1 person)
3.1.3. 성령과의 관계 문제
성령과의 관계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성부와 성자와 달리 등장 비중이 낮았던 (?) 특성상 성부의 영, 즉 인격이 배제된 하나님의 힘 또는 능력으로 여기는 시각이 많았던 것이다. ① 4세기 경, 마케도이누스 등의 성령배격론자는,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피조된 능력, 도구라 주장했다고 한다. ② 삼위일체론 이단이었던 반아리우스주의자들은 성령을 천사들과 다름없는 피조물로 성자에 종속된 존재라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362년 알렉산드리아 회의에서는 성부 – 성자의 동일본질을 주장했던 아타나시우스 등이 성령에 대해서도 동일본질을 주장해 이를 확정지었다고 한다. 이후 성령이 성부로부터만 나오시는지 (단일발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시는지 (이중발출) 논란도 이어졌는데, 기독교에서는 후자를 정통신앙으로 채택했다고 한다.
3.2. 구원론
인간 곤궁의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를 다루는 구원론은 비단 종교 뿐 아니라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고민일 것이다. 그만큼 다양한 구원론이 등장했고, 구원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바라보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① 영지주의 (헬라철학 혼합주의 이단) 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한 특별한 지식을 강조한다. 영혼만 선하고 육신을 악으로 보는 (이원론) 이들에게는 육체에서 이탈하는 것이 구원으로, 이를 위해 어떤 영원자의 계시를 받아야 함을 주장한다. ② 한편 4세기 말,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자유의지에 의한 자력 구원을 주장한다. 아담의 원죄는 우리와 상관 없으며, 모든 사람은 선하게 태어나 각자의 능력으로 스스로를 악에서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431년 에베소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③ 반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신인협력설, 인간의 의지와 하나님의 은혜를 조화시킨 구원론을 주장했다. 원죄에 대한 자유의지 타락을 인정하고, 구원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고 보았으나, 은혜를 받아들여 구원을 얻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에게 달려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529년 2차 오랑주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정죄). ④ 에비온주의자들은 (유대적 이단) 복음 외 율법 준수를 구원의 조건으로 강조 했으며, 그 외에도 말시온주의 (반성경, 반유대주의 이단), 몬타니즘 (신비주의 사이비 종파) 등 기독교에서 비롯된 구원론은 다양한 관점으로 해석되었고 여기에 대한 판단이 이뤄진 끝에 기독교의 교리 체계는 완성될 수 있었다.
4. 바울을 따르려는 이유
필자의 영어 이름은 Paul (바울) 이다. 회사에서 선택한 마지막 이름 (이전까지는 Joseph, Daniel 등을 사용했다) 으로, 서론에서 잠깐 언급한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 을 매우 감명깊게 읽었던 영향이 크다. 자신의 모든 존재를 이방인 복음 전도에 불태워 유대교의 한 분파로 머물렀을지도 모를 기독교를 인류의 보편적 종교로 승화시킨 인물. 그러나 철학자인 바디우는 바울을 신학이 아닌 철학적 관점에서 자신의 이념을 살아낸 주체로서 조명했고, 전혀 새로운 해석에 깊이까지 더해진 그의 설명에 매료되어 반년 가량 붙잡고 글을 썼던 기억이 난다. (* 참고글 : 무신론자인 철학자가 바울의 주체성에 주목한 이유) 지금까지도 유지하고 있는 글쓰기 습관은 당시 받았던 감동의 증거로, 그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기성 이론 (유대교) 에 가장 깊이 헌신 했으나 (바울은 기독교인들을 학대한 철저한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이었다), 이를 뛰어넘었던 바울의 삶을 따르고 싶은 마음을 담은 것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환상을 경험한 바울은 극적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데, 바디우는 이를 반변증법적 사건으로 규정한다. 어떤 논리적인 설득의 과정 (변증법적 과정) 을 통해서가 아닌, 머릿속에서 번개가 치듯 일순간에 그의 뇌리를 강타한 경험으로 인해 그의 삶이 180도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설명에도 한 가지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있었다. 바울이 일생을 바리새인으로 사는 가운데 지켜왔을 율법, 그러니까 그의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변증법적 확신이 없었다면, 반변증법적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말이다.
종교개혁을 통해 성경만이 유일한 진리임을 내세우는 기독교는 세상 지식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아래에 둔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 세상의 지식에 대해 이렇다 할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독교 교리 자체가 이단의 주장을 반박하는 가운데 (변증법적으로) 정교하게 세워져 왔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다양한 관점을 하나로 아우르는 시도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할 듯 싶다. 이것만 중요하고 저것은 배제하는 마음가짐이 부지불식간에 세상에 대한 차별적 인식의 싹을 키웠던 것은 아닐지, 그렇게 나부터 감동의 사명을 전하는 전도자로 바울의 삶을 따를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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