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에 머무른 개신교를 향한 평신도의 쓴 소리,『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정한욱

readelight

함께 손잡기
image

개인적으로 우리나라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꼭 읽어봤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던 책이다. 우리 아이가 크게 되면 선물해줘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을 만한 질문들, 더 나아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훌륭한 선배들의 답변이 가득 담겨있었기 때문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성서의 문자를 절대시하기 보다, 복음의 정신을 잘 받아들여 성서시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순종의 길을 찾자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자신의 주장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평신도 의사이자 국제실명구호기구 비전케어의 운영이사로, 교회에서는 안수집사이자 성가대원으로 봉사 중이다. 또한 성서와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매년 7~80권의 책을 읽고 블로그1저자 정한욱님의 블로그, 書淫人의 집 에 꼼꼼히 기록을 남기고 있는 연구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이런 삶의 결과물로 얇지만 결코 가볍진 않은, 신앙인이자 인생의 선배로서 발견한 깨달음을 따뜻하게 풀어 준 보물 같은 책이었다.

image 4
한 달의 수고를 모두 보상 받게 해주신 저자 분의 피드백 (41번째 서평으로 기록) 2정한욱님 블로그, 믿묻딸 서평

1. 개신교에 대한 세상의 인식

오늘날 한국 개신교에 대해 일반인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을까? 사실 물어보기가 민망할 정도이지 않을까 싶다. 약자와 소수자들의 입장에서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힘쓰기보다 권력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 보인지는 이미 오래됐고, 코로나 기간 동안에도 교회 입장만 내세우는 모습을 각인시켜 안팎으로 신뢰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자료가 있다.

image 1
개신교인 2,000명, 비개신교인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 출처: 더 미션)3더 미션, 개신교 6.8% 유교보다 낮다니… 전도 어떻게 하나

비종교 인구는 종교 인구보다 두 배나 더 많아졌고, 종교 호감도는 샤머니즘에 가까우며, 교인의 1/3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한국 개신교는 어쩌다 이런 위치에 놓이게 되었을까?

사실 오늘날 많은 교회들도 ‘삶으로 예배하기’ 즉,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복음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고 부르짖고 있긴 하다. 개신교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다짐은 교회 안에서만 통용되는 구호에 지나지 않는 듯 보인다. 삶으로 예배하는 것을 그저 성도 개개인에게만 맡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사익 추구와 범죄자 처벌 등의 문제를 철저히 외면한 결과에 대해, 또한 위기에 빠진 한국 사회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교계 차원에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한 현재의 인식을 되돌리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2. 저자가 지적한 한국 개신교의 문제

그러면 보수 교회에 40년 넘게 출석 중인 개신교인이자 세 자녀의 아버지인 저자는 개신교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책에서 지적된 문제들을 종합하면 크게 4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아마 내용을 읽어보면 묘한 기시감이 들 것이다. 무언가에 확신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태도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➀ 순수성 : 기독교가 순수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착각
➁ 태만 : 하나님만 의지해 스스로를 무능력하게 여기기
➂ 독단 : 근본적인 회의, 비판 없는 믿음
➃ 독선 :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우월주의

2.1. 순수성 : 기독교가 순수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착각

기독교가 다른 종교를 대할 때 배척할 것인지 (배타주의), 포용할 것인지 (포괄주의), 인정할 것인지 (다원주의) 를 따지는 것은 기독교 자체도 단일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잘못된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정재현 교수). 기독교의 신 개념도 유대의 종교적 신과 그리스의 존재론적 신이 종합해 발전한 것으로 순수한 기독교란 역사상 존재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용규 학자).

또한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인식들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성서가 온전히 신상필벌만 증언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내용도 존재한다. 그리고 무슬림을 그저 ‘반기독교적 이념을 지닌 중동 연합체’로 여기는 것도 곤란하다. 아랍 지역 무슬림은 전 세계 무슬림의 25%에 불과한데다, (그쪽도) 젊은 세대들은 자신의 미래에 주로 관심을 둘 뿐 이슬람을 그저 자기 나라의 문화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단정짓기 전에 언제나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2.2. 태만 : 하나님만 의지해 스스로를 무능력하게 여기기

그리스도인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해서, 자신도 그와 같이 살겠다고 결단하고 실천하는 이들을 뜻한다. ① 구원을 얻은 것이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도 요구되지 않는 전적인 은혜에서 비롯되었다고 여기는 성도의 길에서 출발해, ②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평생동안 헌신하겠다는 제자의 길을 걷는 자들인 것이다.

하지만 종교 개혁을 일으킨 마틴 루터의 전통을 따라 성도가 된 것에 대한 감격 (은혜를 누리는 것) 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인간이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기는 교만을 주된 죄악으로 여기게 되었다. 이 때문에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고, 은혜를 거스를 만큼 수동적인 상태 (노예근성) 에 머물러 있는 태만의 죄를 간과하는 문제가 갈수록 커져갔다. 오늘날 기성 질서에 무조건적으로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고 독립, 해방을 추구하는 성향을 죄악 (좌익?) 시 여기는 잘못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일조한 것이다. 개신교의 부흥으로 권력을 얻게 된 종교 지도자들이 다른 지배세력과 공감대를 형성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한편 제자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저자가 찾은 스승은 목사이자 신학자, 반나치운동가였던 디트리히 본회퍼였다. 그의 신앙은 세상이 이미 성인 (어른) 이 되어 무종교의 시대가 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면서 많은 신앙인들이 여전히 인간이 철저하게 무능력하다고 여기는 전통 교리에 머리를 파묻은 채 과학이 밝혀내지 못한 영역에서 틈새의 하나님을 필사적으로 찾는 모습을 비판한다. 본회퍼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예배보다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의 잔 (고통의 잔) 을 함께 마시는데 있다며, 무종교 시대에 발맞춰 비종교적 기독교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그는 이런 신념으로 미국 망명을 고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했다 발각돼 사형 당하게 된다.

”미친 운전자가 차를 몰고 있다면 기독교인의 본분은 차에 치인 사람의 장례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그 운전사를 끌어내리는 것이다.“ – 디트리히 본회퍼

2.3. 독단 : 근본적인 회의, 비판 없는 믿음

독단은 오늘날 한국 사회를 혼동 속으로 몰아넣은 1등 공신이다 (신난 건 이를 이용해 먹고 사는 정치인들 뿐인 듯 보인다). 개신교 자체만 놓고 보면 성서를 의심 없이 문자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보수적인 주장이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서의 원본에는 사실과 어긋나는 것 (오류) 이 없다고 여기는 성서 무오설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받아들여 진다. (참고로 성서 무오설과 관련된 내용은 뉴스앤조이 기사의 도움을 받았다.)4NEWS & JOY, 성경무오설과 성경의 권위

① 온건주의 : 성서가 하나님의 이상과 목적, 인간의 구원을 설명하는데 어떠한 오류도 없음
② 근본주의 (축자주의) : 성서의 모든 기록의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음

초기 한국교회 선교사들은 교리 제일주의를 강조했는데 교리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5대 원리는 “예수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 그리스도의 육체적 재림, 성경의 절대 무오”이다. 이러한 신학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미국을 중심으로 일어나서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근본주의이다. 이영미, 한신대 신학과 교수5NEWS & JOY, 성경무오설과 성경의 권위

한국 개신교는 대부분 후자의 입장을 따른다. 저자는 이에 대해 고대 근동의 시선을 21세기에도 오류 없는 진리라 주장하는 것은 시대 착오적이라고 시원하게 일축한다. 거기에 우리의 기복신앙, 가부장제 문화와 맞는 주장만 선별해서 믿는 선택적 문자주의 문제도 지적한다. 복음의 이름으로 익숙한 문화를 절대화하려는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자에 대한 지나친 숭배, 의심하지 않는 신앙, 질문하지 않는 성서 읽기 모두는 사람들을 탐욕스러운 권력의 노예 (태만의 상태)로 이끌 수 있다.

물론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기록된 통시적 (역사적) 문서다보니 이해하기도 어렵고, 모순되는 내용도 많아 전통 교리의 안내는 반드시 필요하다. 기독교 변증가인 체스터턴을 인용해 설명한 것처럼, 광활한 황무지를 홀로 여행하는 것보다 선배들의 영적, 지적 탐험로를 발판삼아 나갈 때 더 의미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 독선 : 자기 혼자만이 옳다고 믿고 행동하는 우월주의

앞서 언급한 모든 생각들이 한데 어우러지면, 이상화 된 신에 대한 절대적인 의존이 가능하게 된다. 기독교 이외의 세계는 우리가 구원해야만 하는 열등한 곳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들의 생각을 고쳐 구원에 이르게 해야 된다는 정신 개조의 장이 되는 것이다. 오늘날 개신교가 관용보다는 차별에 앞장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이러한 우월주의가 뿌리깊게 깔려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런 태도를 한 마디로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꼰대’다.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이들을 멸시하는 표현6위키피디아, 꼰대인데, 어느새 개신교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현실에 대한 냉철한 진단과 자기 반성 없이 2000년도 전의 사람들의 시선을 절대시 해 현실을 재단하는데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어떻게 살아내야 할까?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답은 간단하지만 결코 쉽지는 않다. 믿음을 고백하기는 쉽지만, 이를 증명하는 삶을 살기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가 제안한 방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성서의 정신에 집중해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해석하기
② 성서 탐구를 놀이이자 진실을 향해 떠나는 모험으로 여기기
③ 공공선을 이루기 위해 지금 여기서 가장 올바른 환대적 실천 방법 찾기

3.1. 창조적 재해석

문제 해결의 출발점은 무엇보다 성서의 정신 (본질) 에 집중하는 것이다. 성서가 일점일획도 틀림 없는 사실이라는 믿음, 즉 문자 절대주의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아프리카 기독교가 유럽보다 초대교회 모습을 더 많이 닮은 것에 충격을 받아 탄생하게 된 세계기독교학이 좋은 모델이 될 수 있다. 19세기 유럽 북미 사람들만의 종교였던 것에서, 20세기 특히 1945년 이후 ‘기독교 무게 중심의 남반구 이동 현상’7NEWS & JOY, 20세기 ‘세계’ 기독교를 만든 사람들을 통해 전혀 다른 양상의 교회들이 모두 기독교 진리에 온전히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세계기독교학의 중요한 목표는 복음의 무한한 번역 가능성이라고 한다. 같은 복음도 나라마다 서로 다른 문화적 표현을 통해 강력하게 전달될 수 있으므로, 모든 시대는 나름의 신학, 문화적 표현을 지닌 독특한 기독교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의 시선적 한계에 갇혀있기 보다, 성서의 본질적인 정신에 집중하여 시대에 맞게 창조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기를 (구약학자 김근주), 그렇게 본문 구절로 상대를 괴롭히는 차이의 해석학이 아닌, 환대의 해석학으로 성서를 읽어내자는 것이 (여성신학자 레티 러셀) 저자의 일관된 당부였다.

3.2. 성서 탐구 놀이

창의성을 간단히 정의하면 새롭게 연결하는 능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고정된 관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은 갈수록 그 중요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런 창의성이 가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든 것을 진지하게 바라보던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흥미로운 방법 (질문) 을 찾아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서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성서를 읽고 해석하는 것을 절대 진리를 찾기 위한 진지한 사명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즐거운 놀이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설명한다. 이성적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여기는 ‘도그마 (독단주의)’로 굳어지면, 사람을 살리기보다 남을 정죄하거나 핍박하는 도구로 전락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정신을 창조적으로 계승하는 구도자임을 기억한다면, 다양한 통찰, 일리있는 견해들을 기쁘고 진실되게 반영하는 이해의 운동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다소 혼란스럽고 가끔 잘못 가더라고 요란하고 유쾌한 차이로 가득한, 그 차이를 삶의 조건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세상을 위해서 말이다.

3.3. 공공선을 이루기 위한 환대적 세상 참여

필자가 이해하는 성서의 목적은 공의와 사랑으로 요약되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가 이 땅에 충만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죽어서 갈 천국이 아니라 이 땅이 천국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하나님 뜻이라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는 개인과 교회라는 울타리를 넘어 타협과 연대의식을 바탕으로 사회의 긴급한 문제를 함께 해결해 나가는 자세가 필수적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최선의 합의점을 도출하는 과정’ 자체가 붕괴된 듯 보이면서 사회가 극심한 분열과 갈등 속에 휘말리고 있다. 원자화 된 개인의 자폐적 의사소통 방식은 갈수록 법의 개입을, 심지어 법조차도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으면서 공동체를 잿빛으로 물들이고 있다.

앞서 성서의 창조적 해석을 위해서는 놀이처럼 접근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무엇일까? 그 출발점은 자신의 삶에 책임 의식을 갖는 것이다. 제목에서 언급한 ‘환대’는 타자의 이질성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것을 뜻한다. 다름으로 인한 불편함을 감내하겠다는, 다른 말로 부분적으로 책임을 지겠다는 말이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나라에 만연한 태도는 이런 식이지 않을까?

”내가 왜?“

외국인들이 감탄할 만큼 환대가 넘쳤던 사회에서 천박한 자본주의와 지도자들의 대놓고 떳떳한 무책임함으로 인해 갈수록 마음의 여유를 잃어가고 있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 때문에라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남에게로 돌리던 책임의 일부가 자신의 것임을 알고 되가져오려는 노력이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인용한 세 명의 스승 – 칸트가 주장한 세계 시민의 공화주의적 정치 체계 (보편적 환대), 자크 데리다의 사적 공간까지 완전히 개방하는 필요하지만 불가능한 절대적 환대, 사적 공간의 개방은 제한해 데리다의 딜레마를 해결한 김현경 교수의 제한적 환대 – 을 배워나가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4. 개신교가 성서를 버려야 한다고까지 생각한 이유

비록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개신교의 역할은 앞으로 갈수록 중요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수 많은 가치가 돈으로 환산 되고, 많은 이들이 고도화 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가는 이 질서에 역행 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을 갖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서만을 진리로 여기고, 그 진리에 참여하는 의미있는 세상의 지식들을 평가절하하는 지금의 상태로는 많이 어려울 것 같다. 과격한 표현이지만 몇 년 전부터 ‘한국 개신교는 성서를 버려야 살 수 있다’고 본 것은, 이러한 근본주의적 성서무오설의 태도가 세상을 이분법적이고, 위계적으로 바라보는 색안경을 끼게 만들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성서 시대 때보다 자유와 평등, 사랑의 원리와 실천 방식을 더 깊이 밝혀내 하나님의 뜻에 참여하는 진실들이 정말 많아졌다. 부족한 필자가 그런 책을 악착 같이 찾아가며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앞으로 개신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도, 이런 지식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에 적극적으로 비추어 세상에 대한 더 나은 이해와 사랑의 실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교개혁 당시 기독교 인문학자였던 에라스뮈스의 바람처럼 복음의 은총과 인문 교양이 융합된 교양 있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믿기 때문이다.

최근 우리나라는 정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차악을 피하려다 사상 최악을 만나 고통 받지 않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피로와 분노가 누적되는 가운데 경제적인 어려움까지 더해져 곪아있던 문제가 물 밀듯이 터져 나오고 있다. 나라 전체가 집단 우울 상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절체절명의 시기에 개신교마저도 ‘죄 많은 이 세상은 내 집 아니네’만 부르며 방관해서는, 여전히 예배만 중요시 여겨서는 정말 곤란하다. 이 세상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더라도 좋다. 하지만 자녀가 있다면, 아니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는 분들이라면, 약자들의 고통과 함께하셨던 그 분을 따라 사회의 약자인 다음 세대들을 향한 최소한의 책임의식은 가져야 하지 않을까? 개교회 중심주의에 머물러 각자도생 사회의 첨병 역할만 하는 작금의 현실을 타개할 방법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개신교가 이 땅에 설 자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 같은 시기에 귀한 책을 내주신 저자 분께 정말 눈물나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책이 벌써 5쇄를 찍고 대형교회에서도 북 콘서트를 여는 등 개신교 사회에서 의미있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하는데, 깨어 있는 의식이 들불처럼 일어나 이 땅을 회복시키는데 보탬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는다. 진정한 희망은 깊은 절망의 늪에서만 길어 올릴 수 있다.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서로에게 손을 내미는 최소한의 환대부터 시작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을 통해 큰 일을 이뤄 주시리라 굳게 믿는다.

* 표지 이미지 : UnsplashTyler Nix

2 thoughts on “믿음에 머무른 개신교를 향한 평신도의 쓴 소리,『믿음을 묻는 딸에게, 아빠가』, 정한욱”

  1. 와…….. 블로그 글 보고 속이 뻥 뚫렸습니다!!!!!!!!!!!!!! 교회를 다니지 않는 신랑을 만나며, 두 아들을 백지에서 키우며 신앙적 성숙함과 신중함을 갖추고자 노력해 왔어요. (저자분마냥 대단하게는 못했지만) 외국에 계시는 한국인 구약학 교수님 설교나 변증 토론 유툽 채널을 시작으로 놀라움의 연속을 경험했지요. 아주 작은 노력을 기울였을 뿐임에도 국내 교회에서 강조되는 것들이 얼마나 제한적인지 알게 된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너무 공감 가고 속 시원하고 나아가 감사하고 희망차네요. 저자분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책의 훌륭함을 알아보고 리뷰하고 소개해 주신 쓰친님께도 감사해요.

    응답
    • 너무 귀한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글에 대한 반응들이 더 열심을 내야겠다는 마음을 굳게 해주네요. 다시 한 번 감사 드려요. 🙏🏻

      응답

여러분의 생각을 남겨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