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것처럼 저자는 철학과 신학의 통합, 즉 서구 사상사 (철학) 의 탐구를 통해 자기 학문 (신학) 의 가치를 높인 인물이다. 물론 두 학계 모두에서 인정받는 실력을 갖추고 있는 만큼, 내용의 충실함은 글을 정리함에 있어 단 한 문장도 소홀히 할 수 없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러다보니 이번 글에서는 용기에 대한 스토아 철학과 스피노자, 니체에 대한 내용까지 모두 다루고 싶었지만, 분량상 (실은 정리 능력의 한계로) 스토아 철학에 대한 내용만 먼저 소개하고자 한다.
1.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용기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이전 글을 잠깐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고대의 용기는 군인의 용기로 사실상 지배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나 순수한 지혜를 향해 사형마저도 담담히 수용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이 용기를 귀족적인 것에서 서민적인 것으로, 즉 군사적 덕목에서 지혜의 덕목으로 방향을 바꿔 놓았다. 그렇게 밀려난 군사적 용기는 중세 시대 초 ‘기사’를 통해 다시 부활하게 되는데, 이 때는 기독교적 인본주의가 그와 대립된 입장에 서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대표적인 신학자로서 이런 이중성을 통합하기 위해 믿음의 가치를 도입한다. 하지만 용기에 대한 그의 견해 또한 여전히 지혜에 종속된 것으로써 이성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의 능력’ 이라는 정의에 머무르고 만다. 물론 여기에는 이중의 문제가 있다. 용기가 지혜에 종속될 경우 가톨릭처럼 창조적이지 못한 침체 상태, 반대로 독립적일 경우 일부 개신교와 실존주의 사상들처럼 무방향성으로 인한 혼란에 빠질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2. 보편적 체념의 용기, 스토아 철학
2.1. 기독교와의 결정적인 차이
한편 스토아 철학은 고대 서구 사회를 대표하는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이전 글에 포함 되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저자가 이 사상을 별도로 다룬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서구 사회에서 기독교에 대한 유일한 대안이라 할만큼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영속적인 영감을 얻은 그들은 분명 실존의 문제 (죽음에 대한 불안) 를 정복하는데 성공했다. 게다가 고등 교육을 받고,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띄는데다가, 유신론까지 기꺼이 수용하니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전혀 위험한 존재가 아닌 것으로 여겨질만 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분석이 ‘피상적’이라고 못 박는다.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론에서 결정적인 차이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저자가 ‘우주적 체념’이라고 표현한 스토아주의자들의 믿음은 기독교의 ‘우주적 구원’과는 도저히 타협 불가능한 것이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 신적 존재가 강림한다는 사상은 당시에도 종교적 혼합주의 형식으로 존재하고 있었지만, 구약의 역사성을 토대로 등장한 예수 그리스도의 기독교가 훨씬 우위에 있었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두 종류의 신이 등장한다. 운명을 결정짓는 다양한 신들 (gods) 과 그들 위의 로고스인 신 (God). 여기서 스토아주의자들의 이상향인 현자는 신들 (gods) 이 주는 두려움과 쾌락을 초월해 (above) 신 (God) 의 보편적 이성에 참여하는 자라고 한다. 신 (God) 은 고통 너머 (beyond) 에 있어 고통을 겪지 않지만 이를 초월하는 (above) 현자와는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을 기독교의 ‘우주적 구원’과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라고 언급한다. 스토아 철학에 있어서 고통은 본질이 아닌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본질 그 자체인 신이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고통을 받는 것은 그저 인간일 뿐인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고통의 극복을 통해 본질적 행복에 도달한 현자가 고통 너머의 신 (God) 마저도 초월했다고 본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신은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충분히 그렇게 볼 수도 있을 듯 싶다. 하지만 기독교의 신은 고통을 모두 감당하고 극복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우리에게도 가능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준다. 결국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은총’이 스토아주의자들에게는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인간의 입장에서 기독교적 신을 상상하기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긴 하다.
2.2. 스토아 철학의 용기
이처럼 스토아주의의 구원론을 ‘우주적 체념’이라고 표현하긴 했지만, 소크라테스를 통해 알 수 있듯 일반적인 관점에서 삶을 포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프로이트 (1856 ~ 1939) 는 죽음을 향한 본능 (죽음 본능, 리비도 모리엔디) 을 이야기 했다. 하지만 스토아 학파의 대표적 인물이었던 세네카 (BC 4 ~ AD 65) 는 삶을 추구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죽음을 추구하는 충동이 아님을 이미 알고 있었다. 스토아적 입장에서의 자살이 정확히 그런 입장 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살은 죽음 충동에 스스로를 내맡긴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삶을 정복한 자들만이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었던 것이다.
스토아적인 존재의 용기는 자신의 이성적 본질을 긍정하는 것이다. 다만 이 때의 이성은 경험, 또는 수학적 추론을 통해 주장을 내세우는 오늘날의 정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한다. 신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는 당시의 이성은 세상의 형상에서부터 인간의 마음에 이르기까지를 통합적으로 아우르는 의미의 구조 (질서) 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성의 지배에 동참하여 본질적이지 않은 요소들인 욕망과 두려움을 정복하는 것이 삶의 핵심 가치였다. 세네카에 따르면 인생이 무의미하고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쾌락 원리를 받아들인 결과였다. 무제한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그들의 왜곡된 상상력이 죽음을 향한 지혜롭지 못한 성향을 만들어낸다고 본 것이다. 마찬가지로 두려움 또한 상상력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두려움을 만드는 것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네카는 본질적인 이성의 지배, 즉 지혜의 용기를 통해 왜곡된 욕망을 제한하여 다스릴 수 있을 때 존재의 즐거움 또한 느낄 수 있다고 보았다. 욕망이 충족됨으로써 느끼는 즐거움이 아니라, 모든 환경을 초월해 고양되는 영혼의 행복을 진정한 즐거움이라고 본 것이다.
2.3. 스토아 철학의 한계
이처럼 삶의 기준에서 놓고 보면 스토아 철학은 지극히 합리적이며, 오늘날에도 충분히 납득할만한 원리들을 담고 있다. 하지만 저자가 지적했듯 논증으로 우리의 본질적인 불안을 잠재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스토아 철학자들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이 지점은 질문으로 남겨둘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지혜의 용기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부분 말이다. 인간이 아무리 이성적 본질에 참여한다 하더라도 필연적으로 실재적 갈등에 빠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용감하게 긍정하기는 어렵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담담히 수용할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신체를 벗어나야만 순수한 지혜 자체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또한 아무리 보편적 이성이 모두에게 평등하게 존재한다고 믿었다 하더라도 이런 지혜가 극소수 엘리트들의 전유물임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욕망과 두려움에 갇혀있는 자들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들의 모습은 우월적이고 자기만족적인 태도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다. 마치 기독교에서 바리새인들이 구원에 이르는 온갖 규칙들을 모두 지켜온 자신들의 삶이 저들과 같지 않음을 드러내놓고 감사해왔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또 다른 결정적인 문제는 이처럼 죄의식을 갖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에 있었다. 합리적 우월성에 기댈 수 있는 그들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완전한 절망을 경험할 수 없다. 자신이 철저히 무기력하고 무능력한 존재라는 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그들을 실존적 어리석음의 자리에 머물게 했기 때문이다. 많은 종교들이 그렇듯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존재들은 외부로부터의 도움이 필요 없다. 다시 말해 이들의 삶에서는 타자를 통한 보편적 구원의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독교의 보편적 구원 신앙이 등장하자 이들의 사상이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3. 합리성이 죄의식과 연결되기 어려운 이유
요즘 읽고 있는 책 『제프 베조스, 발명과 방황』 에서는 이런 일화가 나온다. 10살 무렵의 베조스가 한창 다양한 사건을 예측하고 계산하는 것을 즐기던 때였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던 중, 할머니가 차에서 담배를 피는게 싫었던 베조스는 계산 끝에 그녀의 수명이 9년 감소했다며 자랑스럽게 알려 드렸다. 당연히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칭찬해 주실 줄 알고 했던 행동이었지만 할머니는 그런 기대와는 달리 울음을 터뜨리셨다고 한다. 이에 조용히 차를 세운 할아버지는 차에서 내린 베조스에게 다가가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
“제프, 너도 언젠간 알게 될 게다. 똑똑한 것보다 친절한 것이 어려운 일이란 걸 말이야.”2010년 자신이 다니던 프린스턴 대학의 졸업 연설에서 그는 이 예화를 언급하며 똑똑함은 재능이고 친절함은 선택이라고 이야기 한다. 똑똑함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지만 (반만 동의한다) , 친절함은 선택의 문제이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으면 재능에 현혹되어 재능을 망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재능이 아니라 80세가 되어 후회없을 선택에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해 꺼냈던 이야기인데, 글을 마무리하던 중에 문득 이 이야기가 떠올랐다. 폴 틸리히가 지적한 스토아 철학자들의 결정적인 문제가 바로 이 사례와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베조스의 경우에도 할아버지의 진중한 조언이 없었다면 그저 무안했던 해프닝 정도로 여기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할아버지를 통해 알게 된 것이 바로 친절하지 않은 똑똑함이 죄가 될 수도 있다는 가르침이지 않았을까.
물론 스토아 철학자들이라고 친절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다만 저자의 설명을 통해 유추해 보자면 친절함은 그들의 관점에서 전혀 본질적인 요소가 되지 못한다.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변론할 때 통제 가능한 일들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공, 사간 그릇된 일은 결코 행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도덕적인 목적 외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법을 배웠다고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런 주장은 누가 들어도 잘못됨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자신들이 옳다고 여기는 삶의 태도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 나머지 요소들을 철저히 배제하는 태도는 복합적인 실존의 어려움을 진지하게 대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지젝이 실재의 수용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이다). 기독교의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임을, 신약에서는 죄 없는 그리스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것을 죄로 규정하고 마음을 돌이킬 것 (회개) 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비록 보편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죄의 강조가 중세시대의 암흑기를 지나게 했지만, 그 깊은 절망 가운데서 비롯된 자기 긍정의 열망이 근대적 희망을 불러 일으켰음을 생각해 보니, 저자가 지적한 스토아 철학의 한계가 한결 더 명료하게 다가왔다. 이제 다음 글에서는 이런 절망 가운데서 탄생한 긍정 사상의 대표 주자인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