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스피노자와 니체의 자기 긍정 (용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 『존재의 용기』, 폴 틸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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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하트 모양 만드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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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한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단어로 용기만한 것이 또 있을까? 물론 그 근원에는 무언가를 향한 사랑이 작동하고 있겠지만, 용기는 그런 결단을 현실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인간의 성장에 있어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을 용기의 사상사를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점에서 매우 값진 시간이었다. 아직까지 책의 첫 번째 장에 불과하지만, 이번 글로 앞선 내용을 다시 한 번 정리하면서 현대적 실존의 용기를 정립한 두 인물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용기의 역사적 배경

지배 계층의 전유물이었던 고대 군인의 용기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영감을 받은 스토아 철학의 서민적 (지혜의) 용기로 대치 된다. 이성의 지배를 통해 비본질적인 욕망과 두려움을 정복할 때 환경을 초월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그들의 설득력 있는 주장은 이후 서구 사회의 정신적 기둥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정욕으로 가득찬 육체를 벗어날 때 (죽음) 순수한 지혜에 다다를 수 있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처럼, 비본질적인 요소들의 끊임없는 괴롭힘 때문에 실존 자체를 용감하게 긍정할 수 없다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이런 사고 방식은 그들의 신 개념에도 그대로 연결되는데, 신은 우연적이고 비본질적인 요소인 고통 너머 (beyond) 에 있어 고통받는 것은 인간일 뿐이라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물론 인간적 이상향인 ‘현자’가 이런 욕망과 쾌락 (gods) 을 초월해 (above) 신 (God) 의 보편적 이성에 참여함으로써 신 (God) 마저도 초월한다고 주장했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음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였던 소크라테스의 용기마저도 체념적 용기라 일컬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삶 자체를 오롯이 긍정할 수 없었던 그들의 사고적 한계 때문이었던 것이다.

비록 통하는 면이 많이 있지만, 결정적으로 기독교와의 차이를 보인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기독교의 신은 인간을 위해 스스로를 고통에 내맡긴 존재이다. 스토아 철학의 경우처럼 인간적인 생각으로 결코 만들어 낼 수 없었던 보편적 은총의 등장은, 믿는 자들로 하여금 생 자체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처럼 고대 후기까지 서구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생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 (보편적 체념의 용기) 는 보편적 구원을 통해 극적으로 바뀌게 되면서 스토아 철학은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된다.

2. 인본주의의 극적인 변화

이후 기독교적 암흑기였던 중세시대가 붕괴되면서 기독교 구원론에 반대하는 지식층을 통해 고대 사상들이 새롭게 부활하게 되었다. 삶이 긍정될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한 근대 인본주의 (신스토아주의) 가 탄생한 것이다. 기독교를 사이에 두고 봤을 때, 고대 인본주의와 근대 인본주의의 결정적인 차이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한가 (고대) 선한가 (근대) 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인본주의가 이원론과 금욕주의를 결합하여 실존에 대한 비극적 감정, 사상, 생, 특히 역사적 태도를 지배했다면, 근대 인본주의는 존재로서의 존재는 선하다는 기독교 교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된 이 시대의 인간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기 위해 물질 영역을 적극적으로 탐구함으로써 금욕주의를 창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개인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였다. 고대의 개인은 보편적 질서에 참여하는 특정 덕목의 대변자로 여겨졌다. 자유에 대한 고대의 정의가 오늘날과 정반대였다는 점 (아리스토텔레스는 별들의 규칙적인 운동처럼 미리 결정되어 있고 질서 정연한 삶을 사는 것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이야기 했다. 『개인』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소중한 이유 참고) 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근대의 개인을 그 어떤 것에도 견줄 수 없고, 대체할 수 없는 무한한 중요성을 지닌 존재로 바라보게 되면서 르네상스 시대는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앞서 근대 인본주의가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등장했다고 이야기 했는데, 그 말은 기독교의 체념과 구원의 개념이 생략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복의 과정이 생략된 상태에서 자기 긍정의 확신만 남겨진 것이다. 물론 이는 죄의식으로 장사를 한 당시 기독교가 자초한 일이기도 했다. 본래 극도로 부패하게 된 개념은 거부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3. 절대적 자기 긍정, 스피노자

저자는 스피노자를 근대 인본주의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꼽으며, 그의 대표적 저서인 『에티카』 를 통해 근대의 용기를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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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 (출처 : 위키미디아)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지속하고자 기울이는 노력, 그 노력은 물체 자체의 실제적인 본질에 불과하다.” (Ethics iii. prop.7)
p. 52 에서 재인용

스피노자는 존재를 지속하기 위한 노력 (코나투스) 을 존재의 본질이라고 보았다. 심지어 이런 노력, 즉 무언가를 향한 분투는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본질 그 자체로, 그것이 사라지면 존재마저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했다. 틸리히가 자기 긍정이라고 정의한 이런 스피노자의 핵심 사상은 곧 덕성 (virtue, 한 개인이 참된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힘) 이라고 볼 수 있다 (노력의 정도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덕성의 수준이 다르다는 차이는 있지만). 이처럼 존재를 지속하려는 노력을 통해 획득한 덕성은, 이성 (존재의 본질적인 지식을 이해하는 영혼의 능력) 의 인도에 따른 열망으로 보충되어야 하는데 스피노자는 이를 용기라고 보았다.

“용기란 모든 사람들이 이성의 명령대로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분투하려는 열망을 뜻한다.” (iii. prop. 59)
p. 53 에서 재인용

이를테면 덕성이라는 충동에 이성이라는 삶의 방향이 덧입혀져야 하는 셈이다. 용기의 신조가 보편적으로 존재론적이며, 구체적으로 윤리적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의 본질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결국 (매우 자연스럽게) 신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유대인이었던 그는 신비주의를 토대로 인간의 자기 긍정이 신적 자기 긍정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설명을 내놓게 된다.

“모든 특정한 존재, 더 나아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는 데 사용하는 능력은 곧 신의 능력이다”(iv. prop. 4)
p. 54 에서 재인용

스토아 철학이 인간과 신을 분리된 존재로 생각했다면, 스피노자는 인간이 신 안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영혼이 영원 밑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완벽한 행복, 더 나아가 완벽한 사랑이 가능하게 된다. 이러한 완벽한 자기 긍정의 상태는 이기심과 공존할 수 없으며, 스스로를 향한 관대함이 타인에게로 향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이러한 해석을 통해 스피노자는 스토아 철학이 실패했던 욕망과 불안을 정복 (소크라테스는 육체적 한계를 벗어나야 순수한 지혜가 가능하다고 보고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모든 행위가 이미 신적인 행위에 참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가 해결하지 못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구원의 길이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무시되는 이유가, 숭고한 것은 어렵기 때문이라고 답했던 것이다. 이런 대답에 대해 저자는 스토아 철학자들과 다를 바 없는 (구원이 아닌) 체념의 답변이라고 일갈>한다.

4. 자기 초월의 의지, 니체

틸리히는 대표적인 존재 철학자인 니체를 설명하기에 앞서 용기가 존재론적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형이상학적 사상사에서 특정 개념들 (세계혼, 소우주, 본능, 권력을 향한 의지 등) 이 사물의 객관적인 영역에 주관성을 끌어들였다는 비난을 받아왔던 것처럼, 인간의 본질에 용기가 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주장이 있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때로는 좋은 결과가 기대되지 않더라도 도전하는 사람을 보면 감동을 받듯이, 용기는 분명 인간의 실존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물론 우리가 아무리 정교한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존재를 온전히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존재에 가장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언어이기 때문에, 주관성과 객관성을 초월한 (주관성과 객관성 사이 어딘가에 뿌리내리고 있는) 존재를 설명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저자가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 문자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흔한 표현으로 이성 (사고) 과 감성 (경험) 을 활용해 유추적 (추론적) 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뜻에서 말이다. 앞서 설명한 철학들도 실존의 한 쪽 면만 살펴봤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실존을 위협하는 비본질적인 요소들을 인정하긴 했으나 이를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외면한 스토아 철학과, 신적인 참여 논리로 인해 극복 과정이 생략될 수 밖에 없었던 신스토아 철학 모두 진정한 실존적 용기를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간을 위협하는 실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니체에 이르러 생의 자기 긍정에 죽음을 포함시키면서 존재에 대한 해석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여기에서 생은 존재의 힘이 자신을 실현시키는 과정으로써 스피노자의 본질과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이라고 한다.) 니체의 핵심 개념 중 하나인 권력 (힘) 에의 의지 (will to power) 는 힘도 의지도 아닌 하나의 순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를 보존함과 동시에 초월하려는 의지, 그러니까 삶의 모호성 가운데서도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생의 의지 (용기) 를 말하는 것이다. 니체의 덕성은 이처럼 (가장 위대한) 권력 (힘) 을 향한 부정을 포함하고, 이를 넘어서는 긍정을 의미한다. 용기를 가진 자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려는 비겁함 (악) 이 아니라 칸트처럼 스스로에게 명령 (재판관) 하고 복종 (희생 제물) 하는 자아를 갖고 있다. 이런 고결함을 갖고 있는 자아는 죄의식, 그러니까 양심의 가책과 복수의 정신을 거부하고 따라서 화해의 수준도 넘어설 수 있게 된다. “신은 죽었다.”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인 자의 철저한 외로움 속에서 비존재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용기를 보여준 것이다.

“오 내 형제여, 그대는 용기를 지니고 있는가? … 단지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그런 용기가 아니라, 신에게도 보이지 않는 독수리 같은 용기를 품고 있는가? … 두려움이 무엇인지 알지만 그것을 몰아내는 자, 깊은 심연을 바라보지만 결코 움츠려 들지 않는 자에게는 담(tart)이 있다. 독수리의 눈으로 심연을 내려다 보며, 독수리의 발톱으로 심연을 움켜잡는다. 그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p. 62 에서 재인용

이처럼 철학사적 고찰을 마무리하면서 폴 틸리히는 이러한 연구가 단순히 용기 개념의 역사를 서술하기 위함이 아니었음을 강조한다. 책의 제목 뿐 아니라 곳곳에서 강조한 것처럼, 드러난 용기의 도덕적 차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것의 존재론적 가치를 이해하는게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실존에 죽음이 포함된다는 니체의 개념은 앞으로 살펴볼 저자의 결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렇게 앞으로 이어나갈 글들을 통해 그의 연구를 면밀히 정리해 보도록 하겠다. 🙂


‘용기에 대한 철학적 고찰’의 이전 글들
① 용기에 대한 철학자들의 생각
② 스토아 철학과 기독교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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