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종교는 사회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까?, 『종교란 무엇인가』, 오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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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들어 ‘나처럼 빠르게 부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는 광고가 우후죽순 등장하기 시작했다. 씁쓸하지만 ① 예측 불가능한 ② 저성장 시대를 살아내기 위한 절박감을 공략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물론 이런 강의를 통해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사람은 아마도 사업 확장에 성공한 판매자 본인이겠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다른데 있지 않을까 싶다. 대개 이 방법이라는 것이 시스템 자동화, 정확히는 시스템이 제공하는 보상 극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알고리듬에 간택되는 것이 유일한 목표가 되기 때문이다.

갈수록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핵심 키워드인 ‘이색, 최신, 고빈도’의 결과물 양산을 위해서라면, 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고자 하는 것, ② 사람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 ③ 의미있는 결과물을 위한 인고의 시간 등은 잠시 뒤로 미루거나 과감히 내려놓을 수 밖에 없다. 최근 인공지능 기술을 활용해 인기 유튜브 컨텐츠를 불법 복제해 논란이 일었던 신사임당 사건[1]처럼 말이다. 보상을 위해 시스템에 봉사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 데이터 소작농이 된 21세기 자본주의의 서글픈 자화상이지 않을까.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주객전도는 이미 도처에 깔려있다. 중심을 잡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어느 때고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할 최후의 보루인 종교마저도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종교로 장사한다는 세간의 평가가 이미 정설로 받아들여질 만큼, 종교는 현대 사회에 의미 있는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어서다. 부자가 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하는 이들은 얄미울 순 있어도 오히려 솔직하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해 줄 수 있다. 앞으로는 마음의 가난을 외치며 뒤로는 육신의 부를 챙기는데 급급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이 어려운 일도 아닌 현실에 비하면.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자들이 일부라는 항변도 분명 진실이겠지만,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는 소수자들 덕분에 이제는 자정능력을 상실한 집단의 핑계라는 냉소적 시선 외에 다른 반응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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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국내 종교인 비율 36.6%”…1998년 이후 최저 [2]>

최근 조사된 국내 종교인 비율 추이는 이러한 피로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2004년 57%에 달했던 종교 인구가 갈수록 내리막을 걷더니 2022년에는 36.6%로 쪼그라든 것이다. 전체 인구의 절반을 훨씬 웃돌던 종교인구의 1/3 가량이 다양한 이유에서 종교를 떠난 것으로 불교, 개신교, 가톨릭 중 어느 곳도 이런 흐름을 피해가지 못했다. 새로운 종교인구의 유입은 미미한 가운데서 기성세대의 이탈은 가속화되고 있으니, 특단의 조치가 없다면 이런 흐름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서론이 길어졌는데 그야말로 종교에 대한 회의감이 깊어진 시대에, 종교는 어쩌다 이렇게 하향세를 타게 되었을까? 여기서 회의감이란 분명 많은 이들이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바를 종교가 충족시켜주지 못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을텐데, 그렇다면 종교의 본질적인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이번에 접하게 된 『종교란 무엇인가』는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는 책이다. 특정 종교를 옹호, 또는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종교들이 지향하는 바를 통해 종교 본연의 의미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내용 자체도 학문적 접근보다는 일반적이고 상식적인 수준에서 풀어내고 있기 때문에, 평소 종교의 의미에 대해 궁금하셨던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길 추천드리고 싶다.

1. 종교는 어떤 가치를 제공해야 할까?

저자의 입장을 소개하기 전에, 일반인들이 종교에 대해 기대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삶과는 거리가 먼, 정의로우면서도 이타적이어서 세상을 바른 길로 이끌고,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고자 애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지 않을까? 따라서 종교를 향한 기대란, 이런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인 만큼, 힘을 합쳐 세상에 희망을 심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런 기대는 종교 자체의 메시지와도 부합하는 것이다. 기독교를 예로 들자면,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너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마가복음 12장 28 – 34절

①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와 정의), ② 이웃을 사랑 (이타성) 하는 것, 이를 통해 이 땅에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단순히 성공의 도구로 삼거나, 심리적 안정감만 제공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이다.

다양한 종교를 비교 연구한 저자의 입장도 이와 다르지 않다. 종교의 본질이란 ① 궁극 실재 (신) 와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자각과 변화의 체험, 이로 인해 해방과 자유의 삶을 누리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여기에서 자각이란 제한된 사고에 갇혀있던 자아가 움켜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게 된다는 뜻으로, 이기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②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더 깊고 높은 차원의 실상을 발견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나아가야 한다. 변화와 성장이라 할 수 있을 이런 과정은, ‘우물 안’ 개구리가 ‘우물 밖’이라는 놀라운 세상을 경험한 것 (진리체험) 으로, 이런 기쁨을 맛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동을 자진해서 나눌 수 밖에 없게 된다. 또한 그러한 성취감을 반복하고자 다시 길을 찾아나서면서, 높은 산과 계곡, 멀리 있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더욱 넓은 세상을 경험하게 되고, 뒤따르는 이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불어넣게 되는 것이다.

2. 우리는 진리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앞서 진리체험이 신과의 만남을 통한 주체의 각성과 변화 과정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 때의 진리란 주체적인 것, 다시 말해 개개인의 변화를 이끈 원인을 알 수 없다는 뜻이자, 정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인용한 <도덕경>에서도 ‘도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영원한 도가 아니’라고 밝힌 것처럼, 개인에게 말할 수 없는 해방감과 자유를 줬다 하더라도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진리체험을 강렬하게 했느냐는 것은 체험 이후의 삶의 모습, 그의 궁극 관심이 어디로 향해있느냐는 열매로 증언할 뿐인 것이다.

다만 이런 진리를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는 없지만, 경험할 가능성을 높일수는 있다. 의문과 소통을 통한 깨달음의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앞서 설명한 진리체험은 오랫동안 나를 구속해 왔던 것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어떤 이유에서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늘상 들어왔던 것처럼 마음을 열어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언제나 새로운 것에 흥미를 갖고 놀랄 준비가 되어있는 것, 마치 아이의 성취를 보며 기뻐하는 부모처럼, 분석수행자 (환자) 의 성장을 바라보며 감탄할 분석가처럼 말이다.

어쩌면 서양철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소크라테스야 말로 이런 삶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을 가장 지혜롭다고 한 신탁에 대한 의구심에서 출발해, 자신은 적어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인간적 지혜’에 이르렀다는 그의 고백처럼 말이다. (* 참고 글 :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율법의 실천에만 사로잡혀 ’인간 사랑‘이라는 본질을 잃어버린 지도자들을 맹렬하게 비난했던 예수는 어떤가? 이처럼 우리의 전통, 관습, 상식, 체제, 원칙 등 마치 숙명처럼 믿어왔던 것을 되짚어보려는 태도, 즉 저자가 칸트를 빌어 설명한 회의적 신앙만이 진리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바로 이런 태도야말로 기독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받드는 자세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모든 것에 의문만 품어서도 안 된다. 의문의 해소 과정을 통해 어떠한 확신, 즉 믿음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면 그 자체로 매우 훌륭한 것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그저 덮어놓고 정답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알고 거기에 기꺼이 수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신에 대해서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처럼 자아의 눈을 가리고 있던 덮개를 벗겨주는 것을 신과의 만남을 통한 진리 체험이라고 본다면, 진리의 원인이라 할 수 있는 신 자체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신을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전을 찾아보는 것이다. 성경을 비롯한 모든 경전들은 저자와 신과의 진리 체험을 기록한 문서로, 후세는 이를 통해 자기 믿음의 토대로 삼게 된다. 다만 이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경전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라는 점이다. 저자도 조심스럽게 언급하지만, 그런 경전들이 결코 거룩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을 오롯이 전달할 수 없는 언어적 한계때문에 그렇다. 다시 말해 경전은 신 자체가 아니라 저자들의 주관적 진리 체험을 기록한 종교적 기록물이기 때문에, 텍스트 자체를 절대시하려는 ‘경전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한 번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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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트위터 [3]>

위 원통은 원일까 사각형일까?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모두 맞는 말 (True) 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신에 대한 우리의 관념, 이론도 마찬가지의 한계를 안고 있음을 지적한다.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신에 대한 각기 다른 경험의 기록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물론 저자도 이런 주장을 통해 자신의 신관 또는 신들간의 위계를 따지려는 것이 아니다. 어차피 그런 이론들 또한 초월적 존재를 어떻게든 이성의 틀에 끼워맞추려는 시도로써 애초에 저작 의도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가 주장하는 내용의 핵심은 신에 대한 인간의 그 어떤 표현도 코끼리를 만진 장님의 묘사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단지 그 뿐이다. 따라서 인간의 이러한 인식적, 표현적 한계를 배제한 채 경전의 내용을 곧이곧대로, 또는 자기 식대로 믿으려 하는 것은 달이 아닌 손가락에만 집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본질은 외면한 채 형식에만 치중하는 표층 종교 (닫힌 종교, 근본주의) 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오늘날 종교 문제를 야기하는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4. 종교간의 만남이 의미하는 것

그러면 모든 종교가 옳다고 여기는 종교 다원주의로 가자는 것일까? 물론 저자는 여기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그가 누차 이야기하는 내용의 핵심은, 내 종교만 옳고 다른 종교는 틀리다는 (특히 기독교에 만연해 있는) 제국주의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이제는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특별히 와 닿았던 설명이 있었는데, 아이가 ‘우리 엄마 최고’라고 고백하는 것이 다른 엄마는 상대적으로 열등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자신이 경험한 최고의 감동을 표현한 것이기에 모두가 최고라고 여겨도 (교리 문제로 들어가기 이전에 종교의 본질적인 차원에서)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에서 말이다. 오히려 각 종교의 주관적 진리체험의 기록 (경전) 을 절대시 해 이를 과학적이고, 역사적 증거로까지 격상시키는 우 (마찬가지로 전혀 과학적이거나 역사적이지 않다는 것도 아니다) 를 범하기보다, 종교 본연의 가치에 초점을 맞출 것을 촉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 종교인들은 자신의 교리를 온전히 신뢰하는 가운데 인간으로써의 한계, 앞서 설명한 인식과 표현의 한계 또한 인정하고 각자의 진리체험을 기꺼이 나눌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 주로 기독교를 중심으로 설명하긴 했지만, 우리를 변화시켜 세상과 더불어 사는 것이 종교의 공통된 의미라고 한다면, 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종교 방식을 버리거나 개종할 필요도 전혀 없다. 오히려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 각자의 진리체험을 보다 깊이 할 수 있음을, 그렇게 사회적 화합을 꾀할 수 있는 통합적인 시각을 가질 것을 당부하는 것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저자의 요청이었다.

5. 종교는, 종교인은 사회에 어떻게 기여해야 할까?

5.1. 왜 예배만 강조되어야 하는가?

다시 처음 문제로 돌아가보자. 오늘날 한국에서 종교가 브레이크 없는 추락을 거듭하고 있는 것은 사회에 의미있게 기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상은 갈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지며, 삶도 고달파지고 있는데 종교는 과거 영광의 자리에 머물러 꼼짝도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생을 개신교와 함께 한 필자가 봐도 교회는 3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이제는 과거의 방식대로 좀처럼 따라주지 않으니 ‘첫 사랑 (예배) 의 회복’을 부르짖으며 어떻게든 예배당에 앉히려고 애쓰는 모습만 보일 뿐이다.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분이 아닐텐데, 왜 예배에 대한 강박은 영향력을 잃어갈수록 강해져만 갈까? 여기서 극단적인 반대 의견의 충동을 막기 위해 (저자도 반복해서 해명했듯) 보충 설명을 하자면, 정확하게는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도대체 왜 예배만 강조되어야 하느냐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 사랑에는 열심을 내는 것 같은데 이웃 사랑에는 이렇다 할 관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둘이 과연 분리될 수 있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우성치고 있지만 게토화 된 교회에서는 좀처럼 들을 수 없는 진실이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제도화 된 교회에서 각종 행사들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좀처럼 시간을 내기 어렵다는 것도 분명 진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에 충성하는 것이 이웃 사랑의 실천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것을 지키고자 애쓰는 것은 인간적 편의와 효율을 위한 것일 뿐, 종교의 존재 이유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느덧 우리 곁에 성큼 찾아온 (무한하게 발전할) 인공지능과의 공존을 고민해야 할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인간의 번영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던 이성적 패권을 압도적인 경쟁자에게 내어주게 되면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립해야 할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전적으로, 또는 서글프지만 강박적으로 인간만이, 아니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길을 떠나야만 한다. 물론 어느 때고 그렇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지만, 특이점에 가까워진 기술의 발달을 과거의 수준에서 이해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틀에 박힌 말씀 해석과 전파에만 초점을 둔 기존의 종교의식 (예배) 에 대해서도 중대한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란 예배에 안주하는 가운데 거동이 불편한 신체적 약자들, 진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완악함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의 목을 겨누고 있는 기술 자본주의의 칼날 자체이기 때문이다.

5.2. 진정한 종교의 모습을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

이런 가운데서 우리가 종교의 본질을 되새겨 본다면, 단지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전도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 교회 중심의 닫힌 방식에서, 지역 사회의 필요에 귀 기울이는 실천 중심으로 조금씩 발걸음을 옮겨야 하지 않을까? 어떤 방식이든 좋다. 고민해 볼 마음만 있다면 그 방법은 무궁무진하게 찾을 수 있을테니 말이다. 주로 일요일에만 사용되는 교회 건물을 활용해 돌봄 교실을 운영한다거나, 종교적 의도를 걷어내고 순수하게 그들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더 나아가 이미 현재진행 중인 인구 붕괴 문제에 있어서도 교회가 힘을 합친다면 무능력한 정치를 보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 이런 실천적인 고민을 위해서는 다음 세대를 의사결정 기구에 적극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한국 정치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인구의 33.8%에 달하는 40대 미만 유권자를 대변하는 국회의원수가 4.3% [4] 라고 하는 처참한 결과도 중요한 몫을 했을 것이라 본다. 누가 누구를 대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한국 교회는 과연 다른가? 교회 운영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담당하는 기구인 당회는 주로 장로 등 50대 이상의 중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미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분들이 다음 세대의 절박감을 공유하며 정책에 반영해 주길 기대하는 것은 미련한 일일 것이다. 필자 또한 10년 전 청년부 회장을 할 당시 교회 운영과 관련하여 어떤 참여 제안이나 공유를 받은 적이 없었고, 근래에도 ‘당회나 교회 운영위원회에 청년부 대표가 참석한다는 비율이 17%’라는 조사 결과[5]도 찾아보니, 딱히 개인적인 경험에만 국한된 문제도 아닌 것 같다.

거칠게 쓴 생각이지만, 우리가 어떻게든 고민을 나눌 수 있다면 더 이상 죽어서 갈 천국이 아니라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드는데 마땅히 일조할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하지 않을까? 이런 방식의 환대를 통해 갈수록 차가운 시멘트 안에서 화면만 바라보게 될 많은 사람들과 건강한 성장을 도모하며 삶의 온기를 나눌 수 있다면, 희미해져 버린 희망의 불씨를 다시금 되살릴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담백한 사랑의 실천이 간절한 시기에, 한국의 많은 종교들이, 특히 도심 곳곳에 자리잡고 있는 교회들이 시비를 가리려는 마음을 조금씩 내려놓고, 작게나마 사랑을 실천해 감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풍성하게 해나가길 바라는 마음이다.


[1] 서울경제, ‘유튜브 도둑질’ 폭로에…100억 자산가 ‘신사임당’ 주언규 활동중단
[2] 연합뉴스, “국내 종교인 비율 36.6%”…1998년 이후 최저 수준
참고로 종교 인구 비율이 48%에 달한다는 연구도 있는 등 조사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이 글에서는 전반적인 추이가 반영된 최근 연구 결과를 인용하기로 한다.
[3] Twitter, Pavel Macek
[4] 여성신문, 한국 청년 국회의원 비율 4.3%, OECD 국가 꼴찌… 북유럽은 30%
[5] 국민일보, 청년이 교회 정책·의사결정에 참여케 하자

* 썸네일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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