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를 모르는 사람은 자신의 모국어도 전혀 모른다. –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이번 책의 저자인 폴 틸리히는 저명한 신학자이다. 필자도 그의 이름을 익히 들어왔지만 단순히 신학적 해석을 잘하는 학자일 것이라고 생각해 책 읽기를 차일피일 미뤄왔었다. 교만이긴 하지만 모태신앙인으로서 수 십년 간 들어온 기독교식 해석이 특별히 새롭게 다가올 것이라는 기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결핍은 필자가 정신분석과 철학을 탐구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놀랐던 것은 그가 성경만 연구한 것이 아니라, 철학을 통해 신학의 가치를 재조명했다는 점이었다. 그가 학문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평소 확신하는 부분 중 하나도 앞서 인용한 괴테의 말처럼 자기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타자의 반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인류의 보편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성경은, 인간 내면의 깊이있는 탐구를 통해 사랑의 방법을 구체화 한 정신분석과, 사랑의 사회적 실천을 탐구한 철학적 언어가 더해질 때 시대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새롭게 생산할 수 있다고 믿는다.
특별히 서구 역사에서 철학과 신학이 서로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함 때문에 쉽게 엄두를 내기 어려운 게 현실인 상황에서, 뜻 밖의 만남은 이런 갈급함을 조금이나마 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리고 이처럼 뛰어난 학자들의 글을 접하는 필자의 기본적인 태도는 ‘배움’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래왔듯) 책의 중요한 내용들을 몇 차례에 걸쳐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책의 제목이 ‘존재의 용기’ 인 이유
용기의 정의를 생각해 보면 일반적으로 두려움을 불러 일으키는 대상을 향해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용기가 필요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대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용기는 대립을 표면화하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갈등을 불러 일으키며, 적절한 판단을 통해 (용기있는) 행동에 대한 평가가 내려지게 된다. 저자가 용기를 두 가지 관점으로 바라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드러난 행위와 가치 판단의 관점에서 용기는 도덕적이지만, 자기 자신을 긍정할 때에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에서 존재론적이다. 하지만 쉽게 생각해볼 수 있듯 본질적으로 자기 긍정을 통해 용기있는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윤리적 가치 판단이란 애초에 탄생할 수 없다. 분명 행위로 드러난 용기가 도덕적 판단을 이끌어 내지만, 이 용기는 본질적으로 인간 존재 자체의 구조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용기의 본질에 대한 도덕적인 질문은 불가피하게 존재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반대로 존재의 본질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이 용기의 본질에 대한 도덕적 질문으로서 제시될 수도 있다. 용기는 존재의 정체를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으며, 존재는 용기의 정체를 보여 줄 수 있다…. 존재의 용기는 도덕적 행위로서, 그 속에서 인간은 본질적 자기 긍정과 대립되는 실존의 여러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를 긍정한다.
pp. 34 – 35
2. 용기에 대한 시대별 해석 (고대 ~ 중세)
2.1. 고대의 군사적 용기와 그 쇠락
고대에는 귀족들이 직접 무기를 갖고 용맹을 발휘하던 시대였다. 귀족적 용기와 군사적 용기가 하나로 합쳐져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도 그렇지만 용기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대표적인 방법은 ‘자신의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 일 것이다. 고대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군인들이 용기있는 자의 대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결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귀족적이고 군사적인 전통은 철학의 시대를 맞이하며 붕괴되고 만다. 용기를 선, 악에 관한 보편적 지식을 통해 정의내리게 되면서 군사적 용기가 더 이상 진정한 용기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었던 (군사적 용기가 떨어져 나갔던) 것이다. 죽음마저 담담히 마주했던 소크라테스의 믿음 – 살아서는 육체의 한계로 이해 순수한 지혜에 이를 수 없으나, 죽어서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신적인 존재로서 온전한 지혜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음 – 이 극적인 예였다. 그의 죽음은 귀족적인 것도, 군사적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철저히 이성적이고, 서민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2.2. 용기의 정의에 실패한 소크라테스
그러나 이런 소크라테스도 살아서는 용기를 정의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플라톤의 대화편 『라케스』 (Laches) 에서는 용기에 관한 초창기의 논의를 보여준다. 용기에 대한 앞선 정의들이 거부되었고, 니키아스라는 장군이 ‘두려움의 대상이며, 대담한 것에 대한 지식’이라며 마지막으로 정의를 내리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지식을 획득하려면 우리는 모든 상황 속 선악에 대해 알아야 하는 불가능한 문제에 봉착하게 (보편적인 문제가 되어버림) 된다. 이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용기를 정의하는데 실패했다’ 고 결론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덕성을 지식이라고 본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이러한 용기에 대한 무지는 상당한 문제였다. 철저한 이성주의자였던 그가 지식을 발판삼아 행동할 수 있는 근거가 없었기 (내가 한 행동이 과연 용기라고 할 수 있는가?) 때문이다. 그러나 틸리히는 이러한 실패를 용기에 대한 그 어떤 성공적인 정의보다도 가치있는 것으로 추켜 세운다. 그의 실패는 결국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보여줬던 것으로, 용기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니키아스의 불가능한 정의에 도전 – 인간과 세상의 구조와 가치에 대한 이해 –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2.3. 스승의 길을 따른 플라톤
플라톤은 『국가론』(Republic) 에서 영혼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요소로 용기를 언급한다. 티모스 (기운차고 용기있는 요소) 가 그것인데, 이것은 인간의 이성과 감각 사이에서 가교 역할을 하며 마찬가지로 귀족 계층 (필라케스 : 보위병) 이 이를 대표하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플라톤의 사상이 이성과 감각 사이의 갈등을 강조하고 있어 가교 역할이 필요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티모에이데스 (이성의 명령에 복종해 정욕을 억압하는 기개) 를 인간의 본질적 기능임과 동시에 도덕적 가치로 보았다는 점에서 그는 스승의 길을 따랐다고 할 수 있다.
2.4. 용기를 인간의 본질로 본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고통과 죽음에 용감하게 맞서기 위한 동기 (용기) 를 그렇게 함으로써 고귀하고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비열하게 되는 무엇이라고 언급한다. 덕성의 목표가 고귀한 것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기 때문에 용기있는 사람은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고귀함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성격, 즉 부분적인 희생이 불가피하다. 고귀한 일이 칭찬받아 마땅한 일인 것처럼, 희생 또한 어떤 경우든 칭찬 받을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희생적인 태도가 고귀할 수 있음을 넘어, 심지어 이것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라고까지 본 것이다. 일반적으로 자기 안위만을 생각하는 것이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이지 않나 싶은데, 여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은 없지만 용기에 대한 그의 다른 정의는 이런 입장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용기란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이 본질적이지 못한 것을 극복한 것이라고 말이다.
2.5. 완전한 용기, 토마스 아퀴나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고대의 용기 (귀족적 용기와 군사적 용기의 통합) 는 지혜의 등장으로 인해 분리되었지만, 중세 초 ‘기사’ 계층을 통해 다시 부활하게 된다. 하지만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이런 귀족적 윤리는 다시 중세 말, 기독교 인본주의의 유산인 이성적, 서민적 윤리와 다시 한 번 대립하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해당 시기의 용기에 담긴 이런 이중성을 드러내고 결합하고자 시도했던 인물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
그는 용기를 최고의 선에 도달하는 것을 위협하는 어떤 세력이든 정복할 수 있는 마음의 능력이라고 봤다. 또한 신학자로서 용기를 보다 극적으로 밀어붙여, ‘완전한 용기’는 성령 (Divine Spirit) 의 은사 (gift) 라고 이야기 한다.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고 성령을 은사로 받는다고 여기는 기독교 관점에서 봤을 때 용기가 믿음에서 나옴을 강조한 셈이다. (참고로 이를 먼저 언급한 인물은 4세기 신학자였던 암브로스였다고 한다.) 이는 자연히 기독교의 핵심 개념인 소망, 사랑과 연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용기는 존재론적으로 믿음 안에, 도덕적으로 사랑 안에 도입되게 된다. (기독교에서 주체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그 믿음을 통해 타인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용기도 여전히 지혜가 우선시 되는 (지혜에 종속된) 상태였다. 신학적 노선을 따르면서도 용기와 지혜를 분리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물론 종속과 분리 모두는 동일한 위험을 안고 있다. 지혜에 종속된 용기란 이성의 명령에 순종하는 ‘마음의 능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기는 창조적이지 못한 침체 상태 즉, 가톨릭의 많은 부분과 합리적 사상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반면 독립적으로 지혜의 창조에 참여하는 용기는 방향성을 잃고 방황할 수 있다. 일부 개신교와 많은 실존주의적 사상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마치 보편성과 개별성이 서로 독자적인 노선만 걸을 때의 문제를 연상시킨다).
이처럼 기독교를 통해 (용기의 원인인) 믿음이 본격적으로 부각되긴 했지만, 이전 시대의 용기를 다루기 위해서도 무엇보다 존재의 믿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점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불굴의 투지가 되었든, 지혜가 되었든, 고귀함이 되었든 이런 개념을 따라 행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보다 가치있는 것이라는 점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주제의 원인, 곧 ‘용기의 분석을 통해 드러나는 믿음’을 해석하는 것에 연구의 초점을 맞출 것이라 이야기 한다. 믿음이 다른 어떤 신앙적 용어들보다 시대에 맞는 해석을 요구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용기의 본질을 보다 깊이있게 다룰 수 있을 것이고 말이다.
이렇게 이번 글에서는 틸리히가 설명한 용기의 역사적 배경을 중세 시대까지 간단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이어지는 글을 통해서는 그가 비중있게 다룬 스토아 철학과 스피노자, 니체가 정의한 근대의 용기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