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서 찾아온 회의감을 극복하는 방법, 『왜 일하는가?』, 조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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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본의 아니게 두 곳에서 독서모임을 이어가고 있다. 한 곳은 글쓰는 분들의 모임이고, 다른 곳은 교회 구역모임인데, 각각 성장의 도구로 책을 꼽게 되면서 매달 2권씩 읽어나가고 있다. 덕분에 개인적으로 읽고 싶은 책을 집중해서 읽지 못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새로운 배움도 있고, 모든 과정을 빠르고 간결하게 풀어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이 책은 30년 가량을 언론인으로 살던 저자가 50세 무렵 ‘왜 이렇게 죽도록 일만 하고 있나?’라는 회의감을 극복한 방법을 다루고 있다. 목사로서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그의 답은 성경과 예수였다. 그는 특별히 예수의 삶을 통해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깊이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일이 생명에 가치를 더하는 선물이자, 사랑이 흘러가는 소중한 통로임을 알게 되어 회의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 일하는 게 행복하지 않은 이유

우리나라에서 행복하게 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경제적 자유를 획득하게 되면 언제든 그만두고 싶은 ‘마음의 족쇄’라고 여기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까? 분명 우리는 일을 통해 전례 없이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되었는데, 어쩌다 일 자체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인식을 갖지 못하게 됐을까? 저자가 꼽는 핵심 원인은 일의 영성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다만 영성에 대한 부분은 2장에서 다루기로 하고, 무너진 영성의 세 가지 모습을 먼저 살펴보자.

① 일하는 이유를 묻지 않음
② 잘못된 우선순위
③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함

1.1. 일하는 이유를 묻지 않음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살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적성에 맞춰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정도 외에 이렇다 할 답을 찾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 않을까? 즉,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한 채 다수의 길에 합류하는 삶을 선택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기형적인 의대 편중 입시가 보여주듯, 보장된 길만 따르려는 가치관에 따라 남게 되는 질문은 그저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 뿐이다. “대체 내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끈질긴 자문(自問)은 살아남기 어렵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길을 걷는 두 아이의 비유를 든다. 처음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길을 걷다가, 한 명이 갑자기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한다. 다른 친구는 거기에 맞추기 위해 속도를 높였고, 점점 그 속도가 빨라져 결국 숨이 턱에 차도록 달리게 된다. 결국 앞서 가던 친구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고, 뒤따라 뛰던 친구도 넘어진 채 묻는다.
“너 어디로 가는 거야?”
“몰라 나도.”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달려가는 아이와 죽을 힘을 다해 뒤쫓는 아이. 어쩌면 지금 우리의 모습이지 않을까?

1.2. 잘못된 우선순위

일이 기쁘지 않게 된 중요한 이유로 저자는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일이 아니기 때문’을 꼽는다. 다시 말해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 즉 내 삶의 최우선 순위가 되는 일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일이 천직이라는 생각, 이 일을 하다 죽어도 좋고, 심지어 돈이 생기지 않아도 괜찮다는 마음이 들만한 일을 찾지 못해 소진되는 삶을 살게 된 것이라는 지적이다.

2021년 선진 17개국간 비교 연구로 주목을 받았던 ‘무엇이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가?’1Pew Research, What Makes Life Meaningful? Views From 17 Advanced Economies는 이런 경향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시 한국은 ‘물질적 풍요’를 삶에서 가장 의미있는 요소로 꼽은 유일한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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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별 삶의 우선순위 (* 이미지 출처 : Pew Research)

새삼 충격적이었던 부분은, 우선순위에 직업 (Occupation) 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부유하게 살고는 싶지만, 일은 하고 싶지 않은 상태’라고 본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1.3. 하나님을 대신하고자 함

그렇다면 일의 목적은 무엇일까? 성경적 모범 답안은 피조물로서 세상을 잘 다스리는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내 소유가 아니라 맡겨주신 것을 잘 관리하는 청지기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근본적인 불안은 명령하신 일 외의 일거리를 계속해서 만들면서 소유 욕심을 끝없이 부추기게 되었다.

인간의 모든 욕망을 권력을 얻기 위한 것으로 보는 저자는 시기심, 갈등의 근본 원인이 관리자라는 인식을 넘어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 때문에 분노하고, 나보다 뛰어난 사람을 시기하며, 내 것이 아님에도 내 것이라 생각하고, 심지어 자기 몫도 자기가 정해야 한다는 것에 스스로 설득당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 문제가 본질적으로 사람들 때문이 아니라 세상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진 채 갈등 처리 능력을 잃어버린 크리스천 때문이라고 일침을 놓는다.

2. 일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앞서 저자는 성경과 예수를 통해 해결방법을 찾았다고 밝힌 바 있다. 덕분에 일의 영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그가 꼽은 해결 방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의 영성 (우선순위) 회복
② 믿음의 계산 (하나님께 맡기기)
③ 관계로써의 쉼

2.1. 일의 영성 (우선순위) 회복

‘영성’은 책에서 가장 자주 언급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종교적 관점을 넘어 신비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띄게 된 이 개념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① 사람의 가치를 무엇보다 우선시 여기는 태도
② 일상 속에서 몰입하고 있는 상태

기독교식으로 하나님 마음을 품은 것이라고 보면 적절할 듯 싶다. 주어진 삶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 자체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따르고자 하는 예수의 삶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다. 누구보다 바쁘게 일했지만, 그 목적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람을 살리는데 있었던 것 말이다. 일에서의 탁월함을 추구했지만 사람을 향한 가치를 간과해 회의감에 빠졌던 저자는, 이 때문에 두 가지가 반드시 함께 가야함을 강조한다. 일의 바른 목적과 동기를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것이다.

영성을 대표하는 인물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율법을 요약한 예수의 삶은, 약자들을 전심으로 사랑한 ‘일의 영성’ 그 자체였다. 율법의 목적이 ‘인간 사랑’에 있음을 알리기 위해 일하기를 금지했던 안식일에도 사람을 살렸고, 자신이 섬김을 받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러 왔음을 분명히 하며 제자들의 시기심도 잠재운다.

저자는 예수 외에도 바른 영성을 대표하는 인물로 다윗과 요셉을 꼽는다. 다윗은 전대 왕이었던 사울의 시기심으로 인해 8년 동안이나 쫓기는 삶을 살았는데,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음에도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이유에서 복수를 거부한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위기에 처한 사람을 먼저 돌볼 줄 알았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을 아낄 줄 알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을 얻으며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칭송 받게 된다.

억울하기로는 요셉도 만만치 않다. 그는 형제들로부터 애굽의 노예로 팔려가 보디발이라는 친위대장의 행정을 치리하는 집사로 자리를 잡는 듯 보였다. 그러나 머잖아 유혹하는 대장의 아내를 거부해 모함을 받고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 곳에서도 도움을 받은 고위 관료가 복권 후 오랫동안 잊고 있다 뒤늦게 요셉을 추천하면서 결과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후 자신을 버린 형제들과 상봉해 그들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바른 영성을 보여준 인물들의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헌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있는 삶, 우선순위가 바로잡힌 삶을 살았을 때, 고통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놓치지 않게 되어 뜻하지 않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 마태복음 6:33

2.2. 믿음의 계산 (하나님께 맡기기)

일의 영성을 바로잡았다면 (하나님의 뜻을 따름), 이제 어떤 결과도 기꺼이 수용하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모든 것을 짊어진 채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하려던 것을 내려놓고 참여하는 것 자체 (과정) 에서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믿음의 계산이란 세상의 판단 기준에서 바라보지 않겠다고 결단하는 것을 뜻한다. 믿음은 나의 능력보다 크기에, 진리의 길을 따르다 목숨을 잃게 되더라도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라는 ‘계산’을 끝내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고, 여기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그 일은 이미 성공한 것이라고 본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2.3. 관계로써의 쉼

오늘날 일하는 인간에게 구원이란 많은 일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다만 일에서 벗어나 그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통해 쉼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에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상대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기도를 통해 쉼의 본래 목적인 거룩의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예수는 낮에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집중하고, 그 외에는 한적한 곳으로 가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기도를 통해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정리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 자칫 흔들릴 수 있는 (고통스러운) 목적 의식을 바로잡았던 것이다. 저자는 이를 평안의 구심력으로 분주함의 원심력을 감당하셨다고 멋지게 표현한다.

2.4. 해결방법 요약

이처럼 일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다시 요약해 보면,

① 내가 전심으로 추구하는 것이
②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지를 살펴보고,
③ 그것이 맞다면 결과에 괘념치 않고 믿음으로 실행하는 것,
④ 과정의 어려움은 기도를 통해 회복하고, 극복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히 하나님의 뜻에 따르고자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일에 사람의 가치를 앞세움으로써 세상과는 다른 차원에서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을 당부한다. 진정한 회복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 사람이 만든 제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믿는 자들의 자발적인 권리 포기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교회가 세상의 희망이라면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문제를 인식하는 관점과 문제 해결 방식이 사람의 가치에 기초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상의 관점과 방법으로 문제에 접근한다면 교회는 더 이상 존립할 이유가 없습니다.

3. 우리는 어쩌다 돈에 미친 세상에 살게 되었을까?

이 책은 2017년 5월 17일에 출간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된 후 문재인 전 대통령이 취임 (5월 10일) 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다. 국가 원수를 평화적으로 물러나게 한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성취였고, 사회 정의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희망이 넘쳐났던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이다 (당시 문 전 대통령의 지지율은 80%를 넘어섰다). 그러나 불과 6년 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상황은 180도 뒤집어졌다.

2020년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확산되면서 촉발된 ‘강제 비대면’과 ‘유동성 공급’은 비트코인, 주식, 부동산의 폭등을 견인하며 ‘벼락거지’라는 FOMO (Fear Of Missing Out : 소외 공포증) 를 부추겨 (특히 노동 없는) 부를 향한 갈망을 심화시켰다. 게다가 비대면이 기본이 되면서 급격한 온라인화에 따른 개발자 몸값 상승, 배달 노동자 수입 급증 등 곳곳에서 소득 불균형 문제도 불거졌다. 전쟁과 갈등이 빚어낸 인플레이션은 공무원을 비롯해 저임금 노동의 가치를 재고하도록 압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가계, 기업, 국가 할 것 없이 빚이 급증한 가운데, ‘경제 블록화’와 ‘고금리’라는 새로운 정산서를 받아든 상태.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엉뚱한 곳에 모든 힘을 소진하고, 무정부 상태보다 못한 행정력으로 나라의 곳간마저 비어가고 있어 마치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과정을 쭉 지켜보면서 한 번 생각해 봤다.
‘이 나라가 과연 돈에 미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일까?’

삶의 최우선 순위가 부가 아니었던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지금처럼 대놓고 높았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대리가 퇴직금으로 50억을 받아도 부모에게 건넨 게 (뇌물이) 아니라며 합법적으로 봐주고2뉴데일리, “곽상도-아들 경제공동체 아냐”… ’50억 무죄 논란’ 재판부가 김만배 풀어줬다, 정부 지원금을 올려주면 올린 만큼 가격을 따라 올리고3서울경제, “100만원 올라요”…산후조리원, 지원금만큼 이용료 인상, 시장을 살려 놓으니 건물주가 상인을 내보내고4YTN, “우려가 현실로”…예산시장 살아나자 건물주 횡포 시작됐다, 위아래 할 것 없이 ‘나만 잘 살면 돼’라는 인식이 팽배한 가운데 위축 경제로 들어섰으니 정말이지 오죽할까 싶다. 물론 그동안 드러나지만 않았을 뿐 만연했던 문제가 한꺼번에 터지는 (차라리 속 시원한) 상황에서 우리는 과연 영성이라는 것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까?

4. 어려운 영성 회복의 길

물론 개개인이 영성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 저자 또한 많은 분들, 특히 크리스천들이 그런 마음을 앞서 품어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책을 쓴 것으로 보여 너무 귀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런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공동체 (교회) 를 이루고, 돈을 악착같이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를 위해 손의 힘을 빼기 시작할 때 더불어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한다. 그렇게 교회들이 힘을 합쳐 과도한, 혹은 잉여 이익을 세상과 더불어 나누는 운동을 조금씩 시작한다면 만연한 불안감을 해소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런 마음을 보여주는 것조차도 희귀한 세상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단순히 선의에만 기대서는 의미있는 결과를 내기 어렵기 때문에 제도적인 뒷받침도 반드시 따라줘야만 한다. 진정한 회복이 믿는 자들의 자발적인 권리 포기에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런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면 초대교회처럼 그저 단기적인 불꽃에 그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더불어 잘 사는 방법을 함께 모색하는 공론의 장, 갈등과 퇴행이 아닌 공존과 협력의 정치 활동이 함께 일어나야 한다. 그러나 이미 수 십년 째 저출생 문제 하나도 해결 못하는 상태에서 그런 일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언젠가 개신교가 창업자들로 넘쳐나는 곳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글로 남긴 적5필자의 페이스북, 교회에 창업자들이 넘쳐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이 있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한데, 업의 본질이란 각 분야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즉 사랑이 핵심이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생명 중심의 선순환 궤도에 올라타기 위해서는 선한 양심을 품은 기업가들이 많이 나와 세상을 의미있게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정당한 수익 (지속 가능성) 도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갈수록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 심화되는 이유는 생산성, 효율성, 수익성에만 목을 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가기도 벅찬 기술 발전은 이미 기술 소외 인력을 양산해, 전문성을 습득할 시간을 갖지 못한 젊은 세대를 저임금 시장으로 퇴출시키고 있다. 아마 공산주의를 대체할만한 이념이 다시금 많은 이들의 마음에 불을 지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두 눈 똑바로 뜨고 공멸하는 길로 나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쪼록 이 흐름을 되돌릴 만한 무수히 많은 결단들이 힘을 합쳐나갈 수 있길 간절히 바라고 또 기도한다. 그리고 이 땅의 진정한 영성 회복을 위한 노력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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