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케고르의 기독교적 고난 해법에 대한 비판, 『고난의 기쁨』, 쇠렌 키르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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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과 귀를 가리고 모른척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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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덴마크의 철학자이자 신학자였던 키르케고르가 일생동안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가운데 지었던 저작 중 한 권이다. 특히 한국에 공식적으로 소개되지 않은 책을 역자가 직접 덴마크어를 공부해 펀딩까지 받아 출판한 애정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키르케고르 정도라면 전집이 번역됐을 법도 한데, 아무래도 책 자체가 전적으로 기독교적 관점에서 쓰여졌다 보니 일반 출판사 입장에서 부담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도 그의 사상에 매료된 독자의 노력 덕분에 좋은 기회를 접할 수 있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더불어 작년 7월에 책을 받았음에도 이제서야 리뷰를 쓰는 것에 대한 사과의 말씀도…)

내용을 소개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저자는 철저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난을 다뤘기 때문에 논증을 위해 끌어들인 전제 (기독교적 세계관) 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혹시나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갖고 계신 분들이라면 ‘키르케고르가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구나’ 정도로만 받아들이셔도 좋을 듯 싶다. 그의 기독교적 전제는 이런 것이다. 온 우주를 창조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 분이 인간을 위해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와 (예수)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에 스스로를 내어주고 이겨내 (부활)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보여주셨다는 점이다. 그리고 문제 해결의 핵심 요소인 ‘영원’에 대한 개념도 빼놓을 수 없다. 승천한 예수의 재림과 심판을 통해 모든 인간이 영원한 천국, 또는 영원한 지옥으로 향하게 된다는 내세에 대한 믿음 말이다. 이처럼 키르케고르는 철저히 기독교적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전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글을 읽는 것 자체가 고난이 될 수 있어 미리 말씀드리게 되었다.

1. 고난을 감당할 수 있는 이유

1.1. 영원의 위로

키르케고르가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 것은 ‘영원의 위로’ 덕분이었다. ‘인생을 가까이서 바라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 찰리 채플린의 명언처럼, 당면한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주어진 상황과 약간의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키르케고르의 입장에서 영원은 그런 관점을 극대화시켜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의 관점에서 지구, 그리고 인간은 그야말로 원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만큼 지극히 미미한 존재일 뿐이다. 이를 영원에 대입시켜 보면, 100년 남짓한 시간이라는 것도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생동안 셀 수 없는 고난을 당했더라도, 삶 전체를 놓고 보면 단 한 번 고난 당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은 이런 시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심지어 이 한 번의 고난도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어 붙인다.

영원이 당신이 한 번만 고난 당할 수 있도록 돕게 하라. 한 번의 고난은 없는 시간이다.
p. 59

하지만 모두가 알다시피 지나치게 거시적인 관점에서만 삶을 바라보는 것은 정신 승리 외에 별 다른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자칫 인생 자체를 허무적으로 바라볼 위험도 배제할 수 없고 말이다. 저자도 이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7개의 강화 (이야기) 를 통해 고난이 기쁨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한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소원, 고난을 감내하는 수준을 넘어 심지어 고난 당하기를 원하는데까지 이를 수 있는 길을 말이다.

1.2. 목표의 점검과 돌이킴

한편 영원의 관점에서 고난이 한 번뿐, 심지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은 ‘영원의 승리’ 또한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결론으로 연결된다. 시간을 영원의 일부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유한(시간)과 무한(영원)의 대립으로 본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주어진 고난이 어떤 목표 가운데서 경험하게 된 것인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삶의 방향을 점검해보길 바랐던 것이다.

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쫓게 되는 부, 명예, 권력 등을 세상 재물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의 공통된 특성으로 이기심을 꼽는다. 한정된 자원이 소수에게 편중되어 부러움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영원 기준에서는 시간에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영원의 것에 속하는 영적 재물은 기독교의 핵심 개념인 믿음, 소망, 사랑을 일컫는다. 이들 영적 재물은 세상 재물과는 반대로 인간적이며 이타적이다. 타인의 소유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쁨을 전달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통찰, 지식, 능력 등의 덜 완전한 영적 재물도 있다. 이런 재물은 소유권이 개개인에게 있어 (본인이 전달 여부를 선택할 수 있어) 본질적으로 전달인 영적 재물보다 부족하다고 봤다. (키르케고르는 자기 지식에 충만한 자가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못하는 문제를 예로 든다).

만약 사람이 거짓 목표 (시간에 속한 것을 탐하는 것) 에 헌신하고 있다면, 일이 순탄하게 풀리는 형통이 오히려 그에겐 독이 될 수 있다. 고난이 주어지기 전까지 자신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고난이 닥쳤을 때 이제까지의 목표를 신중히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삶 전체를 영적 재물로 가득 채우고도 최악의 고난을 당했던 인물 (예수) 도 있지만, 오롯이 영원의 목표에 헌신하기 어려운 우리는 고난을 통해 잘못된 목표를 뒤집는 것 (회개) 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만약 이런 신호를 무시한채 여전히 시간적인 것에 자신의 열정을 바친다면, 저자가 모든 장을 마무리 지을 때마다 강조했던 죄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을 상실하는 것, 멸망) 를 짓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3. 소망을 구해오는 고난

모든 사람은 내면에 소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 하지만 평소에는 주로 외부세계에 관심을 갖다보니 이를 인식하지 못하다가 고난이 닥쳐왔을 때 비로소 기회가 찾아온다. 주어진 고통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다른 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고, 그 덕분에 내면의 소리에 보다 귀를 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난은 영원 가까이에 있는 내면을 깨워줘 결과적으로 우리를 소망에 보다 가까이 가도록 이끌어 준다 (고난이 우리를 즉시 목표로 인도한다). 물론 그렇다고 고난이 소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고난이 소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구해온다’는 섬세함도 잊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인상깊었던 주장이다). 그렇게 고난은 마치 금이 불을 통해 불순물이 제거되며 순도가 높아지듯, 외부의 잡음을 제거해 우리의 영혼을 보다 청결하게 (소망에 가까워지도록) 만들어 준다.

1.4. 시간과 영원의 종합

하지만 아무리 영원을 통해 고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더라도, 막상 고난에 당면해서 그런 믿음을 지켜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고난을 기쁨으로 여기는 것, 더 나아가 고난을 소망할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은 내 안의 하나님이 강하실 때에만 이뤄질 수 있다. 그러니까 나와 전혀 대등한 관계가 될 수 없는 전능하신 분이, 자신의 사랑으로 우리를 중요한 존재로 바꿔주셨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 그 길이 열릴 수 있는 것이다. 우월성과의 행복한 관계, 즉 존경을 통해 그 분 (예수) 의 삶을 따르려 할 때에만 우리는 고난을 기꺼이, 시간에서 영원을 최대한 가깝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렇게 고난은 시간과 영원한 것을 종합한다.

2. 영원의 이름으로 고난을 축소시키려는 시도에 대하여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하다보면 소위 현타가 오는 때가 있다. 원인에 대한 회의. 내가 왜 이러고 있느냐는 질문이 온 몸과 마음을 사로잡아버린 상태 말이다. 고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어진 고난이 무엇을 위한 것이냐에 따라 이를 받아들이는 태도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빅터 프랭클 박사가 지옥에 가까웠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목적의식, 즉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한 사람들이었다는 공통점을 발견한 것은 매우 의미 깊은 일이다. 물론 키르케고르는 그보다 100년 가량 앞선 사람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 밖에 없는 고난의 궁극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한 간절함에서는 같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종교철학자 특유의 사유 방식으로 하나님과 영원에 대한 확신을 끝까지 밀어붙였던 그의 고민에, 늘 성장에 목말라 있는 독자로서 감사한 마음이 든다. 아마 일반적인 기독교 입장에서도 기본적인 교리의 틀 안에서 신선함을 더해준 것 – 영원 관점에서 고난이 한 번, 심지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 고난이 소망을 ‘구해온다’는 것, 고난이 시간과 영원을 종합한다는 주장 등 – 이 좋은 인상을 주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모태 기독교인으로서 그의 기독교적 전제들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하지만 (특히 고난이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확신하지만), 이를 감당하기 위한 근거를 영원 (순수한 믿음의 영역) 에서 끌어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이같이 극단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을 기준삼아 현실에서 당면한 고난을 무력화, 심지어 무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에는 더더욱 동의할 수 없다. 근본적으로 ① 불가피하게 현실을 부정할 수 밖에 없는 문제와, 불충분한 현실 인식으로 인한 ② 부족한 정교함, 즉 폭력성의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글의 도입부에서 가볍게 짚고 넘어갔던 문제를 저자 스스로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2.1. 불가피한 현실 부정의 문제

키르케고르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오직 이타성 (영적 재물) 만이 선이고, 이기성 (세상 재물, 불완전한 영적 재물)을 드러내는 것은 가능성만으로도 배제해야 할 악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이론이 가져야 할 순수성이라는 차원에서는 백번 공감하지만 (그의 주장이 틀렸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영적 재물에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종교를 떠나서 누구나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 가져다 줄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당신은 세상에 대하여 죽게 될 것이다. 당신이 죽은 자일 때, 살아있는 자가 이해할 때 모든 것이 되어 있었던 것을 잃어버림으로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금과 재물을 잃으라, 권력과 힘을 잃으라, 명예와 명성을 잃으라, 건강과 체력을 잃으라, 날카로운 정신적 능력을 잃으라, 최고의 친구를 잃으라, 애인의 사랑을 잃으라. 왕이 “명예를 제외하고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할 때,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고 말한 왕보다 더 많은 것을 잃으라. 그리고 당신이 모든 것을 얻는다는 것을 믿으라. 그러면 그때 아무 것도 잃지 않는다!
p. 205

모든 대상은 가치 중립적이다. 대상 그 자체로 선과 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를 사용하는 사람의 목적만이 자신의 진위 여부를 드러내 줄 뿐이다.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많은 돈을 번 사람이 다음 세대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는 돈을 열심히 벌고자 했던 젊은 시절의 이기심으로 인해 회개해야 하는 것일까? 재물과 권력, 능력은 고난을 위해 무조건 거부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영적 재물에 헌신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의 소외가 심화될 수 밖에 없는 기술 자본주의의 현실에서는 더더욱. 정치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치는지 매번 경험하고 있지 않나. 영적 재물을 향한 진심을 갖고 세상의 방식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독교적 헌신이라고 믿는다.

2.2. 폭력성의 문제

오늘날 개인주의적 성향이 왜 강화되었을까? 바로 권력을 가진 세대들이 강화시킨 착취 구조 때문이다. 의식없는 자본주의의 광기 말이다. 그 구조를 가장 크게 답습하고 있는 곳 중 하나가 교회가 아닐까. 그나마 민간 기업에서는 노동의 정당한 대가에 대한 요구가 지속적으로 이어져 직원 중심으로 처우가 많이 개선되고 있다 (물론 귀족 노조, 떼쓰기의 부작용도 있지만). 그러나 돈을 죄악시 여기는 분위기에 근로계약서도 쓰지 못한 채 정당한 대우는 바라지도 못하고 헌신에만 내몰리는 부교역자 분들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보니 이런 의문이 든다. 부교역자 입장에서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여전히 고난은 한 번 뿐이고,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 오직 영원만을 바라면서 과로로 내몰리다 망가진 몸을 이끌고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옳은 일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일까? 오히려 그러한 불의로 인해 빚어진 고난에는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개신교(protestant)의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키르케고르는 여기에 대해 오히려 이렇게 답할 것이다.

포도원 주인이 다른 시간에 일꾼들을 불렀을지라도, 합의에 따라 일꾼에게 같은 품삯을 주었을 때, 그는 옳지 않았는가? 영원의 의미에서, 그는 옳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영원의 의미에서, 그들은 단 한 번 일을 한 것이니까…. 영원의 품삯을 받는 것과 관련하여,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오래 일한 적이 없다. 왜냐하면 세 시(아침 9시)에 부름받은 사람이 열한 시(오후 5시)에 부름받은 사람보다 더 오래 일을 한 것이 아니니까.
pp. 56 – 7

얼마나 권력자 입맛에 잘 맞는 주장인가? 애초에 이 구절의 의도는 일을 구하지 못한채 방황하는 일꾼들이 최소한 굶주리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이를 주인의 권위에 따라 (애초에 약속했던대로 이행) 하겠다는 것에 있지 일하는 시간에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다. 이론이 정교하지 못하면 누군가에게는 폭력으로 기능하게 된다. 고난이 축복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고난의 자리로 나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런 태도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길 원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도 아니고, 키르케고르 본인이 지적한 것처럼 시간적인 상실을 더욱 극대화시키는 (자학하는) 죄를 짓는 것일 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길을 가는데 있어 고난이 예상됨에도 그것이 나와 세상,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길이라고 여길 경우 (이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책임감을 갖는 것이다. 고난이 닥쳤을 때 스스로 부족했던 부분을 찾아 돌이켜 반복하지 않는 것 (회개). 이런 과정을 통해 죽어서 갈 천국이 아니라 이 땅에서의 천국을 완성시켜 나가는 것, 그렇게 시간의 것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의 시선으로 시간을 따뜻하게 품어내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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