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교육의 4가지 가치관, 『유대인 엄마는 장난감을 사지 않는다』, 곽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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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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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글에서는 유대인들이 질문을 중요시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가혹한 일이긴 하지만 질문은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그 무언가를 통해 벼리어지는 게 분명한 일인 듯 싶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사람에게는 좀처럼 질문이 생기지 않는다. 반드시 해결해내고 싶은 고통, 즉 실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 글에서는 미처 언급하지 못했지만 라캉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에서 핵심적으로 설명한 부분이 이런 점을 분명히 설명해 준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만 바라보는 줄 알았던 어머니가 다른 사람 (아버지) 을 보고 있다는 불안한 예감이 ‘내가 정말 엄마의 팔루스(욕망의 대상)인가?’ 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야기한다는 것 (적절한 시기에 이 질문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아이는 정신병에 머무르게 된다) 말이다. 이후 그것이 점차 확신으로 바뀌면서 아이는 자신의 욕망을 찾아나서는 (거세된, 분열된) ‘주체’가 된다. 역설적이게도 질문은 주체성의 축복인 것이다.

하지만 책을 통해 다뤄볼 유대인들의 고통의 역사가 결코 축복이었다고 섣불리 이야기하고 싶진 않다.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는, 무려 600만 명이 학살당한 홀로코스트를 제외하고도 무려 2000년 동안이나 이방인으로서 차별적 삶을 지독하게 겪어냈기 때문이다. 게토에 머물러 정규학교도 보낼 수 없는 어려움 때문에 가정 교육은 시작될 수 있었고, 오늘날 찬란하게 빛나는 실리콘밸리는 러시아의 뛰어난 수학자, 과학자였던 유대인들이 망명하면서 탄생할 수 있었다. 그들이 뛰어난 수학자, 과학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러시아 사람들이 해당 학문 분야를 꺼려했기 때문, 즉 다른 학문을 선택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결국 고통의 삶을 감내하고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선 것 (찾아나설 수 밖에 없었던 것) 이 오늘날 유대인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의 문화를 일궈낸 셈이다.

질문에 대한 생각을 적다가 서론이 다소 길어졌는데, 이번에는 지난 글이 주로 질문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던 그들의 교육 가치관에 대해서 조금 더 깊이 알아보고 싶었다. 특히 이 책의 경우에는 종교색이 짙은 정통 유대인이 아닌 일반 유대인들의 모습을 주로 다루고 있기에, 그들의 문화가 얼마나 대중적으로 퍼져있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1. 빈 수레는 요란해야 한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우리 속담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와 함께 말이 많은, 소위 ‘난체’ 하는 사람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비판하기 위해 쓰인다. 한국인 엄마인 저자도 이런 의식이 강했던터라 유치원 선생님이 자신의 아이가 ‘유치원에서 말을 많이 안하니 집에서 많이 할 수 있도록 독려해달라’고 하자 할 말이 없는데 억지로 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서 앞의 속담을 인용해 응수했다고 한다. 그러자 선생님은 엄마의 두 손을 잡고는 ‘소리를 내야만 수레의 존재를 알 수 있어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며 부탁했다[1]고 한다. 이런 철학이 있으니 저자가 보기에 유대인 아이들이 심란해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말이 없는 아이는 배울 수 없다고 여기는 그들은 교육을 대화, 곧 아이가 스스로 생각하고 입으로 표현하도록 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유대인 교육의 처음과 끝이 질문, 대화, 토론[2]이라고 할만큼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온 힘을 쏟는 것이다. 함께하는 모든 순간을 호기심으로 바꾸는 질문에서 시작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끝없이 의심하는 것까지, 논쟁에 대한 그들의 사랑은 주체적인 삶을 준비하는 중요한 밑바탕이 된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 싶다.

2. 창조에 대한 가치 부여

우리나라의 교육 목적은 무엇일까? 교육기본법에 따르면 널리 인간세상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의 이념을 따르는 것[3]이라고 한다. 하긴 교육 이념에 더불어 잘 사는 것이 포함되지 않은 나라가 있을까 싶은데, 중요한 것은 이 좋은 취지를 어떻게 살리느냐에 있을 터였다. 한국의 교육이 모두 실패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특히나 심각한 부작용을 낳았다고 생각되는 것 중 하나는 다양한 가능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태도에 있지 않을까 싶다. 우리나라에 만연한 혐오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태도가 ‘잘못되어 마땅히 고쳐야 함’을 전제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함께 성숙한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이 홍익인간의 정신일텐데, 정답 경쟁에만 매몰되어 사실상 교육 이념과 대치된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은 교육의 방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교육 목적은 무엇일까? 그들은 정답을 구하는 것보다 기존의 정답(이론)을 어떻게 바꿔나갈지를 고민하는 것에 초점을 둔다[4]고 한다. 다시 말해 새로운 지식을 창조해 나갈 것을 주문하는 것이다. 기존의 고정 관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유대교의 경전인 토라 (구약) 에서도 예외가 없다. 성경이 기록된 당시와 오늘날의 상황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복잡해진 사회상을 반영하기 위해서는 해석이 새로워져야만 한다는 것을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배움에 있어서 ‘열려있는 태도’는 자유롭고 독창적인 생각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오늘날 이스라엘이 중동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며 인구대비 창업 기업이 가장 많은 나라[5]가 된 것은 이런 가능성에 대한 확신 때문이지 않을까? 물론 그들은 상상력이 경험이라는 닻에 놓여있다는 점 또한 잊지 않는다. 다양한 경험을 통해 폭넓은 상상을 펼칠 수 있도록 가족여행을 중요시하고, 무엇보다 가장 많은 시간을 책을 읽고 대화하는 것으로 채우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 것이다.

3. 믿음에 기초한 자율성의 울타리

① 자신의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고, ② 항상 새로운 방법을 찾아갈 것을 가르쳤으니, ③ 이제 아이가 자신의 삶을 꽃피울 수 있도록 믿어주는 일만 남았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이상, 흥미를 찾으면 스스로 공부하게 되어 있다[6]는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부모는 그저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굳게 믿고 응원해주면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실수가 미래의 보험이라며 오히려 독려하고, 위험하거나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라면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기 전까지는 놔두는[7] 쪽을 택한다. 물론 그렇다고 마냥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다양한 보완 장치들을 마련해 둔 상태에서 말이다. 대화하며 노는 것부터 시작해서, 책 읽고 질문하는 것, 그리고 매일 함께하는 축복의 저녁 식사와 주마다 철저히 휴식을 취하는 안식일 등 그야말로 대화의 채널을 활짝 열어놓은 상태에서 아이의 관심을 함께 알아가는 것이다.

4. 즐거운 배움을 위한 노력, 놀이화

이 부분은 앞선 글의 ‘배움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하는 것’이라는 부분에서도 한 차례 설명했던 내용이다. 필자가 느끼기엔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싶었다. 삶과 언제나 동행할 배움이 결코 즐겁지 않은 것이 되지 않도록 그야말로 무진 애를 쓰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교육을 위한 시간, 놀이를 위한 시간을 구분지어 생각하기보다는, 함께하는 시간 자체를 놀이화 해 즐거운 깨달음을 줄만한 기회를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먹다 남은 치즈껍데기는 플레이 도우처럼, 야외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나뭇잎과 나뭇가지가 훌륭한 교구가 될 수 있기에 굳이 장난감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자녀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부모의 창의력을 십분 활용하는 것이 핵심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너무 염려하진 않았으면 하는 것은, 이런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정서적 교감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새로운 것을 알려주기 위한 고민이 지나쳐 자칫 가르쳐주기 위한 대화가 되어버리지 않도록 유의하면서, 그저 재미있게 놀 수만 있어도 충분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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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아이들이 성장하는 과정

그렇다면 위와 같은 교육 철학은 유치원에서, 가정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먼저 유대인 유치원부터 살펴보자. 저자의 경우 아이들이 토라와 탈무드를 읽고 공부하겠구나라고 내심 기대했으나, 오히려 노는 것이 주요 일과였음을 곧바로 알게됐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는 아이, 스쿠터를 타는 아이, 나무에 올라가거나, 흙먼지를 뒤집어 쓰고 모래성을 쌓는 아이 등 자기가 원하는대로 노는 모습에 놀랐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8] 그렇다고 높은 학년이라고 특별히 다를 것도 없었다. 아이의 유치원 생활을 돌아봤을 때 그저 자유롭게 놀고, 그림 그리고, 음악을 들으며 따라 부르고, 책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전부[9]였기 때문이다. (교육 중심이 아닌 우리나라의 많은 유치원들도 아마 비슷한 방향이지 않을까 싶다.) 다만 이 활동들이 하나의 프로젝트에 연결되어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었다. 누누이 강조했듯 배움을 즐거운 것으로 여기도록 하는 것에 강박적일만큼 집착하는 그들이었기에 무언가를 알아가는 것을 오감을 통해 느낄 수 있도록 준비했던 것이다.

지식을 가르쳐야 할 때, 유대인 유치원에서는 남다른 방식을 활용한다. 바로 ‘프로젝트화’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애벌레의 삶’에 대해 5~6세 아이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면, 먼저 동네 어린이 극장에서 공연하는 ‘애벌레의 삶’에 관한 짧은 연극을 보러 소풍을 간다. 연극을 보기 며칠 전부터 관련 책을 반복적으로 읽으며 아이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전반적인 아이디어를 갖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연극에서 느낀 점을 대화로 이야기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그리고 지점토를 이용해 애벌레를 직접 만들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교육은 절대 빠지지 않는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에 대한 복잡한 개념을 가르칠 때는 선생님이 직접 두루마리 화장지를 이용해 아이들 눈앞에서 일련의 과정을 보여 준다. 아이들도 직접 두루마리 화장지에 감겨 있다가 나비처럼 팔을 활짝 펴고 날갯짓을 해본다. 이렇게 직접 역할놀이를 통해 눈으로 보고, 체험하며 그것을 음악, 미술, 토론 등으로 되짚어본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수개월에 걸쳐 진행되고 아이들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과정을 통합적으로 사고하는 능력을 배우게 된다.
pp. 20 – 21

또한 가정에서나 유치원에서나 자기 힘으로 이룬 성취가 주는 자부심을 알기 때문에 [10] 실수하거나, 장난치느라 몇 배의 시간이 걸리더라도 혼자서 하는 법을 익힐 때까지 직접 해결해주지 않고 참고 기다려준다고 한다. 그렇게 4세 무렵에는 낮잠을 자기 위한 이부자리를 스스로 펴고 갤 수 있게 되고, 6세가 되면 유치원에서 거의 모든 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7세 때는 혼자서 샤워하고 간단한 집안일을 도울 수 있는 정도가 된다고 한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책을 읽어주기 시작해 자라서도 책을 읽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장 많이 할애한다. 그리고 아이가 5세가 되면 보통 바이올린, 피아노 등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길러주기 위한 그림 그리기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유대인 아이들이 경험하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들은 이런 식이었다. 보다시피 어린 시절 아이들의 모습은 우리와 큰 차이가 없는 듯 보이는데, 결국 앞서 소개한 4가지 가치관을 얼마나 성실하게 쌓아나가느냐가 관건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언제나처럼 내가 먼저 잊지 않기 위해 글을 남기게 되었고 말이다.


[1] p. 88
[2] p. 90
[3] 국가법령정보센터, 교육기본법
[4] p. 31
[5] 중앙일보, 갖은 박해에도 선진국 반열… 건국 자체가 기적인 이 나라
[6] p. 133
[7] p. 157
[8] p. 37
[9] p. 18
[10] p. 137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 본문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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