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미국 유대인 유치원에 아이를 보낸 엄마가 유대인 친구들과 삶을 나눈 경험기이다. 지난번 리뷰했던 책 『13세에 완성되는 유대인 자녀교육』이 관찰자의 입장에서 유대인 교육을 연구한 내용이라면, 이번 책은 직접 경험하고 느낀 바를 남긴 글이라 훨씬 구체적이면서 직접적으로 와닿는 내용들이 많이 있었다.
책을 읽고나서 한 번 생각해 봤다. 유대인 교육에서 가장 핵심이되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 생각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 어떤 상황에서도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것? 분명 모두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뛰어난 표현이 가능하도록 이끄는 것에는 무엇보다 ‘질문을 중요시하는 태도’가 자리잡고 있었다. 유대인 부모들은 학교에 다녀온 아이에게 ‘무엇을 배웠는지’를 묻지 않고 ‘어떤 질문을 했는지’를 묻는다고 한다. 전자의 질문은 우리나라에서 많이 하는 방식일텐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어떤 질문을 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일까? 무언가를 새롭게 배웠다는 걸 알고 설명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나? 하지만 결과를 두고 생각해 보니 두 질문의 차이가 너무 선명했다.
1. 무엇을 배웠니? vs 어떤 질문을 했니?
아이가 ‘질문한 내용’을 통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부분을 알 수 있다. 아이가 어떤 것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 무엇을 알고 있고, 어떤 부분을 어려워하고 있는지 말이다. 게다가 아이의 질문은 철저히 주관적이기 때문에, 적절하게 반응하며 관심사와 관련한 의미 있는 대화를 이어갈 수 있는 기회도 된다. 하지만 무엇을 배웠는지를 묻는 것은 어떨까? 질문에 맞게 대답한다면 아이 자체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힌트를 얻을 수 없게 된다. 물론 아이가 나서서 자신이 느꼈던 점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질문 자체가 ‘사실에 대한 설명’, 즉 객관성을 요구하는 방식이기에 분명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지만 아이의 생각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는 두 질문 사이에 마주할 수 없는 심연이 자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필자도 글을 쓰고자 ‘생각’해보지 않았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질문이 이끌어낸 결과는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2. 왜 우리는 질문하기 어려울까?
분명 우리도 질문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질문과 관련한 경험 자체가 뭔가 긍정적이거나, 편하게 다가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게 어쩔 수 없는 현실인 듯 싶다. 유대인들처럼 질문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문화를 형성할 만큼 중요하게 생각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질문한다는 것은 모르는 것을 안다는 것, 달리 말해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용기가 필요한데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생각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한 것 같다. 나도 모르게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판단과 비난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못된 질문, 또는 무식한 질문이라는 실수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직까지 너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싶다.
“유대인 부모는 아이에게 ‘실수는 미래를 위해 지금 미리 들어놓는 보험과 같은 것’이라 가르쳐.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실수할 수 있지. 어릴 때 하는 실수가 어른이 되어서 하는 실수보다 낫지 않겠어?”
p. 163
유대인 친구가 저자에게 했던 조언이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또 여전히 ‘실수’와 ‘잘못한 것’을 동일시하는 이런 태도를 인식하고 벗어나는 것이 어쩌면 편안한 질문을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3. 유대인은 어떻게 질문을 중요시하게 됐을까?
우리가 아이를 양육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아마 아이가 좋아하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도록 하고 이를 아낌없이 응원하는데 있지 않을까? 유대인들의 관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과연 그들에게는 어떤 믿음이 더해졌기에 우리의 현실과 이토록 큰 괴리를 갖게 된 것일까? 물론 가장 크게는 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 때문일 것이다. 오랜 기간 이방인의 삶을 살았던 그들에게 물질적인 것은 언제든 사라질 위험이 있는 것이었고, 탈무드의 가르침처럼 오직 지혜만이 유일하게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신을 향한 믿음과 고난을 통해 깨우친 배움의 열정은 책의 곳곳에서 살펴볼 수 있었는데, 특히 교훈으로 삼을만한 그들의 가치관을 몇 가지 꼽아보았다.
3.1. 배움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
아마도 가장 결정적인 차이가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우리나라에서 배움, 좀 더 직접적이고 부정적인 인상을 갖고 있는 공부란 무엇일까?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 지긋지긋하지만 밝은 미래, 또는 먹고사니즘을 위해 꾸역꾸역 감내해야만 하는 것이지 않을까? 하지만 유대인들은 자녀들이 공부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을 가장 크게 우려하고 있었다.
유대인 엄마들은 “아이들이 공부를 싫어하는 일등공신은 부모의 잔소리”라고 이야기한다. 특히 아이들이 어린 시절 공부가 ‘지루한 것’이라는 인식을 갖게 될까 봐 노심초사한다. 유대인에게 있어 배움은 ‘인간에게 즐거운 일’이다. 그리고 어린 아이들이 배움을 즐거운 일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다.
p. 39
그렇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아이가 배움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도록, 그 경험이 최대한 즐거운 것, 즉 배움이 놀이가 되도록 애쓰는 모습을 가장 많이 엿볼 수 있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한 가족관계의 형성일텐데 매주 돌아오는 안식일의 긴 저녁식사와 가족여행 등을 통해 함께 소통하며 용기를 북돋워주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또한 책의 제목처럼 아이들에게 장난감을 사주는데 연연하지 않는 것은 (전혀 사주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일상에서 접하는 모든 것들이 놀이와 배움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렇게 대화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된 무언가를 통해 배움이 깊어지기를 기대하며 질문으로 자극한다. 특히나 어떤 종류의 도전이라도 기꺼이 응원해 줄 수 있는 것은 아이의 관심이 향해 있는 곳에 배움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학교에서 수석을 놓치지 않던 아이가 갑자기 군에 입대하겠다는 뜻을 기꺼이 수용하는 유대인 부모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러한 결정에 부모는 “Who knows?”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자신이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 새로운 기회는 도전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것, 실수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는 것, 이 모두가 배움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삶을 배움의 연장선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진심어린 태도가 아니고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3.2. 남과 다른 아이로 키우기
저자의 유대인 친구들은 자녀들이 남보다 뛰어나기보다, 남과 다른 아이로 키우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따라서 애초에 조급해 할 필요가 전혀 없다. 적절한 시기에 꽃피우게 될 아이만의 시계를 위해 부모와 자녀가 함께 노력하면 되기 때문이다. 남보다 뒤쳐질까 두려워 어쩔 수 없이 자녀들을 교육현장으로 내모는 우리와는 상반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유대인들이 가정교육 만으로 아이들을 키울거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이다. 유대인 자녀들도 부족하다고 여기는 과목에 대해서는 과외 등 별도의 보충 수업을 받는다고 한다. 다만 그것이 역효과를 불러오지 않는 것은, 어려서부터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많이 누려왔기 때문이다. 스스로 사고하고 표현하는 용기를 포기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는 그들은, 따라서 자신들의 반응이 아이의 표현을 막지 않도록 늘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한편으로 이렇게 주체적인 아이로 자녀를 성장시키기 위해 유대인들이 가르치는 것은 의문을 품는 습관이다. 가르침을 무턱대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권력과 자기 자신을 부패하게 만든다는 격언에 따라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을 의심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나 일론 머스크의 사고 방식과 같은 이런 태도는 익숙함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한 유대인 교수도 자신의 이론이 반박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성장하는 것이 진심으로 기쁘다고 이야기 한다. 이처럼 결국 배움에 열려있고, 주체성을 옹호하며, 도전을 독려하는 마음가짐이 질문을 무엇보다 귀히 여길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편 변호사가 된 아들은 어려운 형편에도 열심히 벌어 학비까지 보태주신 부모님께 감사해 값비싼 선물을 사 갖고 집에 돌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어머니는 선물을 받자마자 화를 내며 환불하라고 야단을 쳤다.
“네가 나에게 느끼는 감사한 마음을 나중에 네 아이에게 보답하며 잘해주렴. 나의 부모님도 나에게 똑같은 말씀을 늘 하셨단다.”
p. 194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되갚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효라면, 이들이 생각하는 효는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는 것이라는 점이 크게 와닿았다. 우리는 자녀에게 얼마만큼 솔직할 수 있을까? 너희들이 잘 사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고 말하지만 은연 중에 무언가 돌려받을 것을 기대하고 있진 않을지, 그 어떤 기대도 없이 온전히 아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그들의 삶의 모습에 절로 숙연해지는 시간이었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