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 장애를 극복하고 내 삶에 정착하는 법,『전념』, 피트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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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의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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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전념하는 가운데,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 공동체의 이상을 향해 정진하라.

책의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보면 이 정도가 될 듯 싶다. 사실 누구나 알고 있을만한 내용이고,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관심사 별로 공동체 활동도 이뤄지고 있지만, 저자가 보기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살진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한 채 방황하는 이들이 갈수록 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젊은 세대로 갈수록 이런 현상 – 결정 장애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 이 심화되고 있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정의한 액체 근대 (어떤 미래에도 적응할 수 있도록 액체처럼 유동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를 인용해 모래알 같은 삶 (개인주의적이고 유목민적인) 의 문제점과 그 대안 (전념하기) 을 제시한다. 요약한 내용만 놓고 보면 자칫 전통주의자의 꼰대같은 소리로 여길 수 있지만,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세심하게 뒷받침해 그런 우려를 불식시켜 준다.

1. 무한 탐색 모드의 명암

무한 탐색 모드는 결정의 한 없는 유보, 즉 선택하는 것에도 어려움을 겪지만, 무언가를 선택한 이후에도 좀처럼 전념하지 못하는 삶의 태도를 가리킨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의 중요성과, 방황이 길어질수록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늘어난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저자는 이 부분을 깊이 다루진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몇 가지 짚이는 요인들이 있다. 무엇보다 기술의 급격한 발전이 가뜩이나 취약한 자아의 비교의식 (상대적 열등감) 을 심화시키고, 저성장과 규제 일변도의 정책 기조는 부에 대한 욕망을 지속적으로 강화시켰다. ‘주어진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고 하는 전통적인 성공 방정식이 저물어가고 있음에도 교육은 좀처럼 구시대적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따라서 이미 다양한 분야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는 인공지능과의 경쟁을 피할 방법은 ‘알아서’ 강구해야만 한다. 이처럼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불안한 마음을 다스리려면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실은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기회를 얻으면 얻은대로, 그렇지 못하면 못한대로 늘 유연하고 신속하게 대응할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떠날)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장기적인 관점을 갖고 무언가에 전념한다는 건 위험부담이 너무 큰 일이지 않을까?

물론 저자도 이런 방식의 중요성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다양한 선택지를 두고 비교해보는 것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아를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이다. 제한된 시간을 사는 우리는 시기에 따라 적절한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늘어난 선택지로 인한 갈등은 커지게 되고, 새로운 경험에 대한 기대와 만족도는 낮아지지만, 전념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기쁨도 그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다. 심지어 탐색 과정 자체에 머물게 될 우려도 있다. 목표를 잃어버린 채 아노미 상태 (사회적 규범의 동요, 이완, 붕괴 등에 의해 일어나는 혼돈 상태 [1]) 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미 시장 개척이라는 미명 하에 고유한 많은 가치들이 자본의 침식을 견뎌내지 못하고 있다. 다양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고민하고 해결하는 능력으로 여겨졌던 주체적 역량은, 늘어난 선택지 중 원하는 것을 고르는 능력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한 때의 약이 독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삶을 정하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 밖에 없다.

2. 무한 탐색 모드와 현상

2.1. 경제의 문제

한편 저자는 무한 탐색 모드 우위의 결과 또는 그와 밀접하게 나타나는 현상에 대해서도 짚어본다. 먼저는 우리 삶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제적인 문제를 다룬다. 아시다시피 기술과 자본이 고도화 되면서 기존에 문화적, 도덕적으로 보호받던 영역들 (연애, 범죄, 생식 등) 까지 시장성을 평가할 수 있게 되었다. 애초에 한정된 범위의 물건을 거래하기 위한 수단에서 벗어나, 우리 삶을 둘러싼 대부분의 것들을 누릴 수 있도록 해주는 권력, 즉 목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이다. 돈은 효율성의 극치를 나타내는 매개물인데 그 극도의 장점은 자본주의가 성숙되어 갈수록 극도의 단점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저자는 이런 점을 돈이 작용하는 두 가지 방식, ① 액체화 (모든 내재가치, 의미가 금액으로 환원됨), ② 일반화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고유한 기술에서 보편적 제품으로 상품화 됨, 프랜차이즈화) 로 설명한다. 모든 것이 상품이 되어 나라고 하는 고유성조차도 경제적 가치에 따라 평가받는 시대가 된 것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2.2. 도덕의 문제

도덕적으로는 공동체가 요구하는 책임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가치에 따라 사는 시대의 도래를 꼽는다. 가히 취향의 시대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주관적 가치에 대해서는 섣부른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넘어 판단 자체를 거부하는 중립적인 태도가 일반화되었기 때문이다. 자연히 공동체가 중시하는 명예도 의미를 상실하게 되면서 모든 가치는 보편화된 수단 (돈) 으로 쏠리게 되었다. 도덕적 선의에 기대 모호하게 남아있던 공공의 영역은 하나 둘 규칙들로 채워지고, 도덕적 책임을 요구하던 기관들마저도 중립화 대열에 동참 (헌신할 필요 없고, 당신의 선택지 열어두기 돕기 위해 존재한다는 메시지 전달) 하면서 공동체적 책임감을 학습할 수 있는 기회도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따라서 이 지점에서도 양극화 (가족과 일부 친구들 공동체와 차가운 세상만이 존재하는) 가 심화되어 친밀도는 낮지만, 그만큼 안정적인 공동체가 탄생할 수 있는 타인과의 연대는 갈수록 어려워지게 된다.

2.3. 교육의 문제

교육적으로도 모든 것이 개인 발전을 위한 훈련 (자기계발) 에 초점이 맞춰진다. 한편으로 이게 무슨 문제인가 싶을수도 있는데, 교육의 이유, 저자가 전념을 이야기하는 이유에는 언제나 공동체를 향한 책임의식이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언가와 진정한 관계를 맺는 것 (애착 교육) 이 아니라, 개인의 성공만을 위한 맞춤 교육으로 변질되는 것 (발전 교육) 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것이다. 공동체와의 유대감 형성, 즉 앞서간 선배들을 향한 존경심과 동일시를 통해 다음 세대는 다양한 선택지 가운데 한 가지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개인과 냉혹한 사회만 남은 현실 속에서 리스크를 제거하고 남은 선택지는 보편성 (일단 모아두면 이후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다고 믿어 무한 탐색의 문제를 덮어줄 수 있는 ‘돈’) 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우리는 저자가 출세 제일주의라고 꼬집은 현대 교육의 문제를 공동체의 상실로써 체현하게 되는 것이다.

3. 무한 탐색 모드에 머문 이유

앞서 저자가 문제의 원인을 깊이있게 다루진 않았음을 언급하면서 외적인 요인들을 짚어본 바 있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문제의 원인은 무엇일까? 그가 표면적으로 언급한 원인은 두려움이었지만, 책의 내용을 통해 유추해 보면 선택을 도울 수 있는 유대관계 형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듯 싶다. 선택지 열어주기 (무한 탐색 모드) 문화가 많은 문을 열어볼 수 있는 도구는 제공했으나, 무언가를 선택하고 전념할 수 있는 길까지 마련해 준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심리적 유대의 끈이 느슨해지면서 강화된 개인은 역설적으로 고립으로 인한 두려움을 더 크게 느낄 수 밖에 없다. 저자가 지적한 것처럼, (1) 전념하기 전에는 특정 선택지에 머물렀을 때 ① 후회할까봐, ② 유대관계가 깨질까봐, ③ 고립될까봐 두려워 주저하게 된다. 하지만 (2) 전념한 이후에도 두려운 마음이 들기는 마찬가지인데, 기본적으로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하기에 ① 지루하고, ② 유혹이 따르며, ③ 무엇보다 성공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점이 집중하려는 의지를 방해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주저할만한 이유들처럼 말이다.

4. 전념하기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처음 문장을 다시 소환해 보자.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전념하는 가운데, 같은 가치를 지향하는 사람들과 연대를 맺고 공동체의 이상을 향해 정진하라.

위 문장에서 세 가지 키워드를 꼽아보자면 ‘나, 공동체, 이상’을 들 수 있다. 이는 저자가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틀로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중요하다고 꼽은 세 가지 차원 – ① 길이 (자신과의 관계), ② 너비 (공동체와의 관계), ③ 높이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 – 을 차용한 것이다.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자.

4.1. 진정으로 원하는게 무엇인지 아는 방법

내가 원하는게 무엇인지 아는 것은 전념을 결심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원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얻는 즉시 새로운 욕망이 창조되기에, 사실상 죽을 때까지 자신의 욕망을 알지 못하는게 인간 아니던가? 이렇게 신기루 같은 내면의 진실을 보다 선명하게 붙잡기 위해서는 여러 겹의 그물망을 마련해야 한다.

① 감정의 도움 받기 첫 번째 방법은 여러 가지 선택지 중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사실 가장 간단한 방법이지만, 이 때 내 마음을 깊이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가 진심으로 원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소중한 어떤 사람이 원해서, 또는 사회적으로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선택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타자의 욕망을 충실히 살아내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가운데서, 우리는 주입된 생각들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② 가치의 도움 받기 두 번째 방법은 내가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를 아는 것이다. 누구나 어떤 이유에서건 존경하는 인물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의 사례를 수집하고, 그들의 어떤 모습이 나에게 감동이 되었고, 또 무엇을 배우고 싶은지 찾아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정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고민하면서 삶의 방식을 조정해 나갈 수 있게 된다.

③ 이성의 도움 받기 마지막 방법은 선택지의 장단점을 두고 합리적으로 비교해 보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릴만한 방식인데, 여기에도 방법이 있다. 단숨에 작성하지 않고 3~4일 가량 고민하면서 떠오른 생각들을 각 칸에 추가해 나가는 것이다. 다양한 상황들을 마주하면서 연결되는 생각을 붙잡을 때 보다 명확한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4.2. 전념을 위한 전제 조건

원하는 것에 대한 윤곽을 잡았다면 실행 방법을 찾아봐야 하는데 실천에 앞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가 있다. 바로 ‘믿음’이다. 해야만 하는 이유가 명백하다면, 그만큼 절박하다면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역사적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음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저자가 밝힌 것처럼 놀라운 결과를 이뤄낸 많은 이들이 ① 매우 오랫 동안, ② 성공 여부가 불투명함에도, ③ 그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성취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변화는 느리고 유기적이다. 특히 정치적 변화는 막스 베버가 언급한 것처럼 단단한 나무에 구멍을 내는 것처럼 강하고 느린데, ① 감히 떠올리지 못할 생각을 ② 비주류적인 생각으로, ③ 논의해 볼만한 생각에서, ④ 대중적인 생각, ⑤ 마침내 모두가 동의하는 생각으로 만들어 내는 과정이기에 더욱 그렇다. 미국에 여성 참정권이 법으로 인정되기까지 10대 소녀들은 72년간 싸워 (수십 개 단체 창설, 수백 권의 책, 신문 출간, 수천 의의 캠페인, 수만 번의 시위, 수십만 통의 탄원서 통한 설득 끝에)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평범한 대학 과제에서 출발한 동성 결혼 합법화에는 36년이 걸렸으며, 숲이 우거진 곳의 민영화를 막고 공원 조성을 위해 소동을 부렸던 한 젊은이는, ‘나무 심기 요구’ 대신 ‘나무 심기 프로그램’을 만들어 이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며 30여 년의 세월을 헌신했다. 맞은편 공터의 쓰레기 더미를 오랜 기간 치워주지 않자 직접, 점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치우고 씨를 뿌려 정원을 조성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를 전국 단위의 프로젝트로, 그리고 당사자는 농경 관련 학위까지 취득하면서 정원 만들기 운동을 일궈낸 경우도 있었다.

이들은 한결 같이 어떤 이끌림에 의해 과정에 몰입하게 됐고, 덕분에 의식할 필요가 없어 자연스레 자기 삶의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미리부터 과도하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할 시점이 분명해지면 그때부터 새로운 방법을 찾아나서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의 찬사 앞에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나도 모르게 생겨난 무언가로 인해 수 년, 수 십년에 걸쳐 한 숟가락씩 모래를 채워간 결과. 그들은 올바른 미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이 올바른 것이 되도록 만들어 낸 것이다.

4.3. 실행하기

전념해야 할 대상을 알고, 확신도 가졌다면 이제 적잖은 시간동안 꾸준히 헌신 (믿음으로 실천하는 것) 하는 일만 남았다. 물론 이 과정의 지난함 때문에 많은 이들이 버티기를 주저하지만, ① 일단 사소한 변화부터 시도해 봐야 한다. 어차피 오랜 싸움이 될 것이고, 성공 여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오직 내 안의 진실에만 응답하면 되기 때문이다. (최대한) 순수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시도하기도 훨씬 수월하다.

우리는 일단 행동으로 옮기고 난 후에야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아무리 심사숙고 해도 생각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일단 결정하면 과거의 선택에 심리적으로 적응하기 때문에 탄력이 붙고, 더 많이 헌신할수록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면서 점차 전문성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② 실행 과정 중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중요하다. 아무리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했어도 외부 조건들이 덧입혀지면 길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③ 장거리 여정을 단계 별로 나눠서 생각해 보는 것, ④ 전념하는 과정 중에 자신이 변화시킨 것들을 짚어봄으로써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여정을 환기시켜 줄 필요도 있다.

4.4. 공동체로 나아가기

저자가 꾸준히 강조하는 것은 나보다 더 큰 무언가에 헌신하는 것이다. 첫 번째는 공동체이고, 두 번째는 깊이를 통해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찾는 것에 있다. 우리가 어떤 목표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은 나의 관심 덕분이다. 앞서 이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눠 구체적으로 정리한 이유는, 바른 신념으로 세워진 개인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표 대상 자체가 이미 공동체의 지지를 받고 있어서라는 점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스타는 대중의 뜨거운 호응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 기준에서의 생각과 다른 사람 기준에서의 생각, 태도를 합치는 연대의 과정을 통해 공동의 이상을 세우고 이를 따르는 과정은 필수적이다.

공동체를 직접 만들든, 자의나 타의에 의해 참여하든 구성원들은 서로의 취약점을 나누고 이를 해결할 기회를 찾는 연대의 과정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상향에 부합하는 목표를 세워 도전하고, 공동체는 성취를 축하할 형식과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개인적 성취가 모두의 성취가 될 수 있음을, 그 특별한 의미를 경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개개인의 소속감은 커지게 되고, 이를 다음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전하게 되면서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된다.

물론 초기에는 개인적인 자유를 다소 포기해야 하지만, 이 시기의 불확실성을 잘 조율하고, 한계를 수용해 유대 관계를 형성하면 더 큰 힘에 도달할 수 있다. 더불어 유대 자체가 큰 행복이라는 점도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유대 관계가 형성됐을 때 우리는 공동체적 관습에 대해 책임을 지고, 또 요구할 수 있게 되면서 영웅 (공동체적 명예를 획득한 인물) 이 될수도, 그렇지 못한 이들을 권면하거나 책임을 물을수도 있다. 가치판단을 뒤로 미룬채 중립 노선만 고수하는 수 많은 기관들의 자기 역할을 기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저자가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관용이 아닌 용서라고 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고 할 수 있다. 책임자의 반성 여부와 관계없이 품어주는 것 (관용) 과, 잘못을 인정했을 때 품어주는 것 (용서) 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결과 – 잘못을 부추기는 전자, 잘못을 교정하는 후자 – 를 낳게 된다. 우리나라가 매우 잘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공동체의 최소 단위, 저자가 출산, 육아보다 놀라운 것이라 꼽은 결혼에 대한 기대감이 무너져내리는 것은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공동체가 더 이상 이런 방식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공감대를 반영한다. 어떤 공동체고 규모가 커지면 이러한 형식주의에 매몰되어 동일한 문제를 겪게될 수 있다. 이 때는 현실에 깊이 참여한 사람들이 나서 선지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미래를 예언하기 위함이 아니라 본질로 돌아갈 것을, 새로운 정신과 관습을 제시함으로써 공동체의 잃어버린 사명을 되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4.5.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를 찾는 파고들기

개인의 목표와 공동체의 목표를 일치시켰다면 남은 것은 깊이를 통한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경험에 의존하는 것은 ① 외부로부터 온 것, ② 식상함으로 인해 지속이 불가능하다. 반면 자신의 목적에 깊이 몰입하는 것은 처음엔 지루할 수 있으나, 깊이 파고들수록 깨달음이 더해져 ① 내면으로부터 올라오는 ② 새로움을 지속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된다. 그로 인한 결과물이 개인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것은 덤이고 말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갈망하고 있지만, 앞서 문제의 원인으로 지적한 다양한 이유들 때문에 선뜻 시도하지 못한다. 결국 이 지점에서 우리는 원하는 것을 찾아 전념하는 앞의 방법으로 되돌아 가야 한다. 관심의 범위를 좁히고 전념할 계기를 확보하면, 평범함을 특별하게 만드는 깊은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전념을 위한 다짐

너무나도 힘든 시기다. 나라 안팎으로 갈등만 커지는 가운데 존경하고 닮고 싶은 어른은 좀처럼 찾기 힘든 각자도생의 시대. 정처없이 방황하는 젊은 세대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기보다 여전히 내몰기 바쁜 비통한 현실 앞에서 매일 같이 되묻게 된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까? 혹자는 ‘너나 잘 살라’고 이야기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보다 더 잘 지내기 어려울만큼 감사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지만 따뜻한 아내와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아이들이 있고, 요즘 같은 시기에 빠르게 성장하는 스타트업의 창업 멤버로, 좋은 동료들과 함께 만족스럽게 일하고 있다. 이런 조건들을 두루 갖추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가끔씩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싶을 정도로 감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언제나 삶의 절박함을 내려놓지 말라는 뜻인 걸까. 가정과 회사 울타리 너머에서는 그야말로 ‘바보들의 대행진’이 벌어지고 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알량한 감정 해소를 위해 권력을 이용해 먹거나 그 장단에 춤추는 자들만 넘쳐나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전체가 참혹한 암흑의 길을 걷고 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합심해도 어려울 판국에, 제 한 몸 건사하겠다고 책임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억지 권리만 주장하고 있는 자들을 이 땅의 지도자로 모시고 있는 현실. 그들의 냉소와 무지, 후안무치함에 국민들, 특히 젊은 세대들의 절망과 비참함은 갈수록 깊어져만 가고 있다. 정말 저들의 마음 속에는 자기 집단 외의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걸까? 그렇게 공동체가 무너져도 본인들은 잘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 건가?

그래서였던 것 같다. 이 책을 그렇게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던 이유가. 개인적인 감사 따위는 가차없이 삼켜버릴 정도의 거대한 불의와, 기대를 걸고 싶지도 않은 윗 세대의 무능력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도 잡아보고 싶은 마음에서 말이다. 저자의 진솔한 설명과 사례들은 그런 점에서 많은 위로와 용기를 줬다. 당장 어떤 결과를 기대할 수 없더라도 그저 지속해 나갈 확신을 다시금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이미지와 영상의 시대, 짧은 글이 아니면 읽히지 않는 시대에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이런 글을 몇 주 동안이나 붙잡고 있는 걸까? 이 글을 여기까지 읽어줄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여기까지 읽고 계신 분이 있다면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글에 대한 감상도 남겨 주시면 더욱 감사드리겠.. 쿨럭)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그저 적절한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묵묵히 배움과 생각을 심겠다는 다짐 하나로 이어온 글쓰기였다. 하지만 극심한 비효율에 신음할 수 밖에 없었고, 이 상태로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나 하는 마음 때문에 늘 답답했다. 그런데 나라까지 이 모양이니 치미는 울분을 애꿎은 가족들에게 토해내기 일쑤였다. 그래도 책을 덮고 글을 정리하면서, 그리고 참여 중인 작은 공동체와의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아직까지 뚜렷하게 떠오르는 방법은 없다. 그저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시기가 됐을 때 보다 확신을 갖고 도전할 수 있도록, 지금의 과정을 좀 더 단단하게 다져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좀 더 깊은 곳에서부터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내가 먼저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현실을 왜곡시키고 희망과는 거리가 먼 일들만 벌이는 지도자들을 늘 감시하는 가운데, 저들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의미있는 결실을 맺어갈 수 있도록, 나만의 칼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어 갈 것을 다시금 다짐해 본다.


[1] 아노미, 네이버 두산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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