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을 하러 나가면 부모님과 함께 있는 아이들의 대다수가 작은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모습을 자주 접하게 된다. 사실 결혼하기 전, 아니 정확하게는 아이와 식탁에 마주앉을 수 있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저런 부모가 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하곤 했었다. 자기 몸 편하자고 아이를 강렬한 자극에 방치시켜 그의 미래를 갉아먹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음을, 또는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는지를 몸소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매 때마다 단 한 순간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아이의 부산함에 매료(?)되어 밥이 어디로 들어갔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쟁같은 식사 시간에서 약간의 여유를 되찾기 위해 가장 즉각적인 해결 방법의 유혹을 뿌리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자연스럽게 식사 시간에만, 일상에서도 제한된 시간에만 허용하는 방향으로 점차 타협점을 찾아나가게 됐다. 하지만 한편으로 계속 찜찜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근거 없는 타협’이 아이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분명하게 아는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고민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록 영상이 아닌 글이라는 대상의 차이가 있긴 했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급격히 전환되는 시대의 흐름 가운데 지식을 쌓는 방식에 있어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무엇인지를 찾고 이를 해결하려는 것이 그녀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렇게 자신의 주제를 탐구하는 학자이자 제자들을 양성하는 교수로서, 그리고 부모로서 이 시대가 가장 중요하게 고민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만 아무래도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메시지가 중심을 차지하다보니 자칫 내용이 무겁게 전달될 수도 있음을 고려해 편지글 형식으로 편안한 대화를 유도하는 등 독자를 향한 마음씀도 잊지 않았다.
1. 그녀가 우려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저자가 문제시하는 부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았다. 그것은 우리가 읽기를 통한 주의의 질과 깊이가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존의 인쇄 기반 문화에서 디지털 기반 문화로 급격히 이동하게 만든 과학기술의 발달은 스스로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준비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갈수록 늘어나는 정보의 홍수를 다스리기 어려워져 자신의 지식을 외부에 위탁하기 시작했고, 그나마 지식으로 내면화하는 작업마저도 ‘훑어보기’로 대표되는 생략적 읽기 방식을 통해 ‘안다고 착각’하는 지적 나르시시즘 상태에 머무르는 분위기로 점차 굳어져 갔다. 간단히 말해 ‘자율적인 정신 확립을 위한 깊이 읽기’가 날로 어려워질 수 밖에 없는 시류에 대한 위기의식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 과학기술은 어린 친구들만을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보다 더 자극적이면서도 전례없이 빠르게 변하는 디지털 환경에 의해 주의가 끊임없이 분산되는 것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그렇게 고요 속에 머물러 저자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더 나아가 그 속에서 자신만의 것을 발견하는 사유의 풍요로움을 만끽하는 즐거움은 지적 사치가 되어가고 있음을 저자는 지식의 현장에서 그 누구보다 확연하게 느끼고 있었다.
지난 몇 년간 제가 받은 편지 중에서도 문학과 사회과학 교수들이 보낸 것들이 특히 당혹스럽고 놀라웠습니다. 그들은 대학생들이 오래되고 밀도가 높은 미국 문학과 문장을 읽을 만큼의 인내심이 없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고 있었지요…. 그 교수들이 관찰한 가장 흔한 현상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 밀도 높은 텍스트의 어려운 문장 구조를 이해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도 학생들은 점점 그런 시간과 노력을 참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학생들의 글쓰기 실력이 저하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학부생을 가르치는 내내 이런 비판을 들어왔지요. 그럼에도 이 문제는 어떤 시대도 결코 피해 갈 수 없는 중대한 물음입니다…. 학생들이 글쓰기에 인용한 문장을 추적한 결과, 대다수가 인용 자료의 첫 페이지나 마지막 세 페이지를 언급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그렇다면 자료의 본문에 나오는 배경 지식과 논증 그리고 증거들은 스쳐 지나갔거나 대체로 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 읽기 방식은 결국 완성도와 설득력이 떨어지는 글쓰기로 귀결되고, 학생들은 읽기와 쓰기 모두에서 개념적으로 겉핥기만 하게 되겠지요…. 문제는 학생들이 어려운 비판적, 분석적 사고를 견디는 인지적 인내심을 잃게 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pp.145 – 147
이처럼 갈수록 사람들이 깊이 읽고 사유하기를 위한 ‘높은 수준의 주의의 질’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생각보다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먼저 이야기 속 주인공들의 감정에 흠뻑 빠져 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는 힘, 즉 공감능력을 기르기 어렵게 되어 자연스럽게 낯선 것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게 된다. 말 그대로 꼰대가 되기 십상이란 뜻이다. 또한 주어지는 정보들을 비판적으로 사고하여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편협된 정보와 시각에 휩쓸릴 수 있는 문제도 안고 있다. 결국 저자가 처음 연구를 시작할 때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류가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의 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는 중대한 위협의 도화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 읽는다는 게 이렇게나 복잡한 일이었어?
이렇게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읽기는 지금이야 어린아이들도 할 수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수준의 성취로 여겨지지만, 약 6,000년 전 쯤 탄생한 엄연한 문화적 발명이었다. 하지만 마치 말하기처럼 자연스럽게 학습되는 것으로 생각해 그것의 의의를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치를 알려주는 것은 이 책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였다. 이 때문에 저자는 읽기가 인류 역사에 있어 얼마나 놀라운 성취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신경생물학의 세계로 우리를 초대한다.
인간의 성장과 관련해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뇌의 가소성(plasticity)이라는 표현을 아마 많이 접해봤을 것이다. 특별히 ‘우리가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자기계발 서적들에서는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개념인데, 그것은 인간의 두뇌가 경험에 의해 변화되는 능력, 즉 뇌가 성형적(plastic)이고 순응성이 있다(malleable)는 것을 뜻하는 용어이다. [1] 우리의 뇌는 반복된 경험을 통해 오래된 기본구조를 연결, 수정하며 새로운 조합의 경로를 만들어 낸다. 각각의 신경세포가 하나의 작업군을 형성해 특정 기능의 수행을 돕는 것을 통해서 말이다. 뇌의 회로 안에는 은하수 별들만큼이나 많은 연결이 존재하는데, 우리가 무언가를 읽을 때마다 이러한 수천, 수만 개의 뉴런 작업군이 작동하게 된다. 우리가 글자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저자의 구체적인 설명은 개인적으로 이 책의 백미라 꼽는 부분으로, 그 과정은 크게 3단계로 나뉘게 된다.
2.1. 주의 조정
저자는 먼저 단어를 접할 때의 두뇌의 복합적인 (다중적, 동시다발적)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커다란 서커스 장면을 떠올려 볼 것을 주문한다. 동물, 배우들이 뒤섞인 거대한 서커스 천막 꼭대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을 말이다. 위의 이미지처럼 공연 무대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는데 보통은 시각을 관장하는 후두엽을 통해 대상을 인지하게 되지만, 사실 눈이 단어를 보기 전부터 다양한 감각을 통한 주의는 이미 존재하는 상태다. 하지만 천막의 특정 영역에 조명을 비추듯 글자 이미지의 자극이 감지되면, 전전두엽은 이 신호를 빠르게 따라가도록 이끌어 시선을 대상에 고정시키게 한다. 자연히 다른 주의들은 의식 속에서 멀어지고 이후 주의 집중 및 읽기 회로가 행동에 나서게 된다.
2.2. 표상화 작업
글자를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인식하는 과정을 설명한 이 내용은 특별히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읽기를 배우지 않았을 때는 물체나 얼굴 등을 식별하던 신경망의 일부가, 읽기를 배운 이후에는 단어의 특징을 판단해 그것을 글자로 인식하도록 변화된다고 한다. 그렇게 망막을 거쳐 시신경을 통해 좌우 반구 뒤쪽에 도착한 이미지 상은 뉴런을 구성하는 구체 무리들에게로 퍼지게 된다. 이 무리들은 이 이미지가 글자인지를 먼저 파악한 다음 각각 단어의 철자, 글자의 패턴, 의미를 담고 있는 형태소 등을 분담하여 동시다발적으로 기억과 연결짓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 머릿속에서는 모든 가능한 의미들, 흥미로운 상상의 나래가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전달된 정보가 어떻게 각 구체들에게 신속, 정확하게 배분 되는지는 아직까지 수수께끼라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중요한 점은 구체가 불러오는 상상은 우연이 아닌 맥락적이고 개연적이라는 점이다. 즉, 우리가 기억한 것이 재료가 되어 이미지로 떠오르는 것으로 기억의 창고에 배경지식을 쌓아놓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를 위해 깊이 읽기를 통해 지식을 소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간접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었다.
2.3. 통합
온갖 심상으로 말그대로 혼돈상태가 된 머릿속이 그대로 있다면 소위 멘붕(멘탈 붕괴)에 빠지게 될 것이다. 하지만 후두엽(시각), 측두엽(언어), 두정엽(인지) 세 영역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모이랑회 영역이 최종 결정을 내려 이들을 안심시켜 준다. 모든 정보를 통합해 따라가야 할 단어의 노선을 골라주는 최종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단지 한 글자만 읽더라도 우리의 뇌는 이런 과정을 매우 빠르게 반복해서 경험하며, 이 때문에 저자는 우리가 뇌의 5%도 사용하지 못한다는 말은 낭설에 불과할 뿐이라 일축한다. 그래서 앞으로 필자는 이 표현을 우리의 뇌가 아니라 가능성을 5%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바꿔서 이해하기로 했다.
저는 우리가 하나의 단어를 검색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기 위해 수년간 연구해왔음에도 여전히 한 줄의 문장이 우리에게 더없이 깊은 생각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경이롭기만 합니다. p. 65
3. 깊이 읽기를 해야하는 이유는 뭘까?
앞선 내용을 통해 갈수록 깊이 읽기를 위한 인내심이 약해지고 있는 현실과, 읽기의 과정이 얼마나 놀랍도록 정교한 과정을 거쳐서 일어나는 일인지, 또한 얼마나 소중한 인류의 유산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도처에 ‘널려 있는’ 정보와 강화된 감각적 자극들에 자기도 모르게 빠져들어 주의가 쉽게 분산되는 문제는 누구나 인정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다. 저자가 타임지를 통해 소개하는 현상 또한 이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20대의 미디어 사용 습관에 대해 조사한 결과 정보를 얻는 매체를 전환하는 빈도가 시간당 27회에 달하며, 휴대폰 확인 횟수는 일평균 150~190회에 이른다고 한다. [2] 마치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는데, 스마트폰 보급률이 81%인 미국이 이 정도라면 그 비율이 95%인데다가 특히나 유행에 민감한 우리나라[3]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기술 전문가인 트리스탄 해리스Tristan Harris는 다양한 앱과 기기에 적용되는 ‘설득 설계’ 원리에 관해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이런 원리를 통해 의도적으로 사용자를 중독시키는 것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잘 쓴 시 간 Time Well Spent 운동을 처음 시작한 해리스는 최근 PBS(미국 공영방송망)와〈애틀랜틱〉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구글, 애플, 페이스북 등 세 개 회사에서 일하는 극소수 설계자들 (대부분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25〜35세의 백인 남성) 의 결정이 전 세계 수백만 명의 주의집중 방식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친 적은 없었다…. 우리는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pp. 190 – 191
이 대목에서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었는데, 특히나 극소수의 설계자들의 결정에 수백만, 아니 페이스북, 인스타그램만 보자면 수억, 수십억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쯤 되면 우리의 욕망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게 과연 누구인지 한 번쯤 깊이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현실의 물리적 제약을 초월한 우리의 마법 상자는 그 자극의 빈도와 강도 또한 날이 갈수록 상상을 초월하도록 만들었다. 이 시대를 본격적으로 도래하게 한 것이 스티브 잡스의 혁신을 통해서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받고 있는 전례없이 압도적인 혜택은 반드시 이와 동일한 수준의 위협을 동반한다는 점을 반드시 숙고해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일평균 소비하는 정보의 양은 무려 34GB에 이른다고 한다. [4] 어마어마한 양이 아닐 수 없는데 과연 이에 대한 생각의 정리 없이 그저 훑어보는 것만으로 이를 지혜롭게 활용할 수 있을까? 욕망의 노예가 아니라 이를 다스려 주체적인 삶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깊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이를 위한 깊이 읽기가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었다.
누구도 다가올 세상을 예측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는 자율적인 정신의 삶이 필요하고, 읽기가 그런 삶의 기초가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읽는 뇌가 간직한 관조의 차원을 육성하고 보호해야 비로소 우리 공동의 지성과 연민, 지혜를 최상으로 유지하고 전수할 수 있다고 제안할 것입니다. p. 37
3.1. 공감 능력의 함양
저자에 따르면 공감이라는 것은 나의 관점에서 타인의 관점으로 관심의 시선을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하는 것은 읽기 과정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가장 심오한 혜택으로, 여기서 중요한 점은 반드시 자기에게로 되돌아오는 역방향의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프루스트가 독서의 핵심이라고 했던, 저자의 지혜를 넘어 자신의 것을 발견해내는 것이야말로 좋은 독자의 조건이니까요…. 내가 보기에 그들은 ‘나의 독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독자가 된다. 이때 내 책은 단지 일종의 확대경일 뿐이다…. 나는 그들 내면에 이미 자리한 것을 읽도록 수단을 제공한다…. 우리는 저자의 지혜가 떠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된다는 사실을 아주 분명히 느낀다…. 이례적인, 더욱이 신적이기까지 한 법칙 (어쩌면 우리는 진리를 다른 누구로부터도 받을 수 없고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는 법칙) 에 의해 그들의 지혜가 끝나는 지점이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의 지혜가 시작되는 지점처럼 보이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독서에 관하여》 pp. 36, 38, 69
재미있는 것은 자율적인 주체의 차원에서 라깡이 환자를 대할 때의 태도와 저자가 인용한 프루스트의 읽기에 대한 이해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환자가 안다고 가정된 주체인 상담자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달라고 ‘요구’하지만 상담자는 궁극적으로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으며, 오히려 환자의 요구 자체에 자신의 ‘욕망’이 담겨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만이 치료의 효과를 보장한다. [5] 결국 내가 읽고 있는 내용을 통해 되돌아오는 감정과 생각을 아는 것은 타인의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나의 욕망 또한 알 수 있는 중요한 해석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저자는 영화, 영상 매체로도 어느 정도 공감대 형성이 가능하지만 글의 명료함을 통하는 만큼의 몰입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아쉬움이 남았는데 개인적으로 공감 뿐 아니라 몰입도 측면에서도 텍스트는 영상을 따라잡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지적 인내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충분히 공감하지만 영상의 몰입도가 훨씬 강하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식으로 설명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싶다. ‘흘러가는’ 영상이 감정에 몰입할 수 있는 관조적 사유를 차단해 능동적이고 보다 깊이 있는 감정의 인식 과정에 이르게 하지 못하기 때문에 깊이 읽기가 더 의미있다고 말이다. 글을 깊이있게 읽을 때 우리는 저자 혹은 등장인물들의 생각과 감정을 보다 더 진하게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소설을 ‘집중해서’ 읽을 때 등장인물들의 느낌, 행동과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 된다고 한다. 촉감에 관한 은유적인 표현을 읽을 때는 촉각을 담당하는 영역의 신경망인 감각 피질이 활성화되고, 움직임에 관한 글을 읽을 때는 운동 뉴런이 활성화 되는 식으로 말이다. [6]
3.2. 비판적 사고를 통한 대상의 진실 파악
앞선 이유가 감성의 차원이었다면 이번에는 이성의 차원이다. 깊이 읽기가 이 두 가지 감각을 키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은 새삼 놀라운 일이었다. 인간에게 있어 의도라는 것은 언제나 감추어진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 속에서 그것을 알고자 고군분투한다. 자녀는 부모를, 학생은 선생을, 부하 직원은 상사를, 기업은 소비자를, 공직자는 국민을, 국가는 타 국가의 저의를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은 그것을 아는 것이 자신의 성패와 직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타인의 의도라는 것은 알기가 결코 쉽지 않을 뿐더러, 알더라도 그 뜻을 달성하기 매우 어렵다.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우리의 학문은 결코 이처럼 정교해 질 수 없었을 것이다.) 정치, 경제, 철학, 정신분석 등 내면의 사상을 아우르는 학문들은 언제나 인간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자신들의 열정을 불태웠다. 저자가 중요하게 언급하는 과학적 방법론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치열한 고민의 결과물로써 계승된 것이다.
과학에서든 삶에서든 텍스트에서든 사물의 진실에 이르기 위해서는 관찰, 가설, 추론과 연역에 기초한 예측, 검증과 평가, 해석과 결론, 그리고 가능하다면 재현을 통한 새로운 증거가 필요하지요…. 읽는 뇌의 관점에서 보면 비판적 사고는 과학적 방법의 전 과정을 요약한 것입니다. 텍스트의 내용을 우리의 배경 지식, 유추, 연역, 귀납, 추론으로 합성하여 저자의 숨은 가정과 해석, 결론을 평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비판적 사유를 세심하게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다음 세대가 텍스트에서든 스크린에서든 조작적이고 피상적인 정보에 휩쓸리지 않도록 예방접종을 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pp. 99, 104
우리가 무언가를 안다고 내세울 수 있으려면 그것에 대한 세심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다양한 관점에서 대상을 살펴보고 그것을 통합해 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의미있는 해석, 즉 통찰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한 좋은 경험을 소개해 주고 있는데, 그녀의 가족이 이스라엘 철학자의 안내로 외부인의 출입이 어려운 정통 유대교 학교를 방문한 내용이었다. 그곳에서 아이들은 《토라》의 한 문장(한 문단이 아니다)을 어떻게 해석할지 논쟁을 펼치는데, 단지 하나의 해석에 머무르지 않고 과거의 모든 주석을 토대로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러한 모습이야말로 가장 깊은 형식의 읽기의 대표적인 모습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배경 지식과 공감, 추론과 비판적 분석이 합쳐져 과거의 것을 최선을 다해 통합해 내는 것, 그것이 앞서 프루스트가 이야기 했듯 저자의 지혜를 넘어 자신의 것을 발견하는 결과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7]
4. 우리 아이들은 어떻게 키워야 할까?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이에 대해 충분치 못한 대응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그것의 어두운 면을 드러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문제들은 비단 미국에만 해당되는 문제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을 무조건 배척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보니 저자 또한 고민이 깊어져 감을 고백하며, 아직 상당 부분에서 연구가 충분치 않아 다양한 분야에서 연합하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함을 강조한다.
사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디지털 도구들에 대한 염려는 대체로 옳다고 볼 수 있다. 핵심은 처음 지적했던 것처럼 우리가 대비할 새도 없이 몰아닥친 디지털 폭풍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이에 대한 저자의 조언은 아이와 디지털 기기의 만남을 늦출수록 좋다는 것과 현실적 어려움으로 인해 그것을 노출시키더라도 적절한 수준으로 사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디지털 시대를 살아갈 아이에게 있어 해당 문화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것이기에 적절한 시기가 되면 이를 충분히 활용할 수도 있도록 두 문화 사이를 자유롭게 교차할 수 있어야 한다. 저자는 이를 양손잡이 읽기 뇌 만들기라고 표현하며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부모 사이에서 자란 아이들이 두 언어를 유창하게 다루는 경우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4.1. 첫 5년의 아날로그
초기의 뇌는 느낌 기반의 신경망이 인지 기반의 신경망보다 앞서서 발달한다고 한다. 즉, 편도체 (기억의 감정적 측면에 관여) 가 기억을 위한 해마보다 먼저 구축된다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심리학자들의 연구를 생리학적으로 뒷받침해주는 것[8]으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책을 읽어주는 것은 학습 효과 그 이상을 주는 것임을 설명한다. 감촉과 느낌의 연계를 통한 상호 교감, 눈을 맞추고 부드럽게 지시하는 공동주의, 마지막으로 마술처럼 등장하는 단어와 개념의 노출 등 아이의 삶의 출발점을 풍성하게 해주는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이다. 특별히 인상깊었던 것은 그녀가 제시한 디지털 매체가 문제가 되는 새로운 이유였다. 비인간적 매체를 통한 입력은 아이로부터 사실상 한 걸음 떨어져 있어 그 초점이 아이에게로 향하지 않는다는 점, 즉 아이의 반응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기 때문에 아이가 이에 대한 긴밀한 느낌과 정확한 이해를 얻을 수 없어 디지털 기기에 그저 내맡기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흔히 디테일의 중요성을 많은 곳에서 강조하지만, 육아의 현장에서도 세밀한 피드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특히 첫 5년 중에서도 2년은 아이의 미래를 결정짓는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이기에 이 때 아이에게 디지털 기기를 금지, 보상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한다. 그렇게 낮에는 아이가 주도하는 놀이와 인간적인 접촉에 시간을 내어주고, 밤에는 주로 이야기를 읽어주거나 종이책을 보게하는 것이 [9] 그녀가 추천하는 첫 5년의 아날로그적 육아법이었다.
4.2. 다음 5년의 디지털
이 때는 상충된 두 관점을 자유롭게 오가며 통합할 수 있는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시기이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모두 충분히 경험하고 이해한 후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하여 자기만의 길을 찾도록 이끌어줘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중언어 학습자에 관한 지식을 토대로 아이를 지원해줘야 한다. 아이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아이가 다른 언어로 옮겨갈 때마다 저지르는 실수를 점차 극복해 어떤 언어로든 깊게 사고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서게 된다. 좌우의 사고를 두루 갖춘 유연성의 대가가 되는 것이다. 부모는 아이를 디지털 도구에게 그저 맡겨버리기 보다는 함께 참여하여 사용하는 모습을 살펴보고 그것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아직까지 제공되는 디지털 교육 도구들이 아이의 성장을 돕는데 충분한 조력자가 되지 못하고 있어 이에 대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만 저자의 경우에도 이러한 학습법의 개발은 진행 중인 상태로 아직 가설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당장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지도 못한채 급속도로 휩쓸려 손을 쓸 수 없는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던 마음이 그녀로 하여금 이러한 책을 써내도록 이끌었던 것이다.
5. 책에 대한 몇 가지 생각들
평소 궁금했던 부분들에 대한 의미있는 답변들로 저자는 나의 선택에 기꺼이 응해주었고, 덕분에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음 책을 향해, 그리고 아직 첫 5년의 울타리 안에 있는 우리 아이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을 보다 분명히 할 수 있었다. 물론 저자가 제시한 해법들이 아직은 완성되고 검증된 열매가 아니라는 점은 책에 대한 일말의 아쉬움을 남기긴 했지만, 앞서 소개한 내용들 만으로도 그 가치를 입증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마 저자라면 분명히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들 속에서 새롭게 배운 내용들을 다시금 책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올 것이다. 그래서 사실 해법 이전에 조금 더 분명히 했으면 하는 것은, 저자가 비판하는 디지털 매체에 대한 정의가 불분명한 것에 대한 부분이었다. 문제가 되는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은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것 만큼이나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매체가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킨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연구의 주인공들은 처음에는 아마존의 이북리더인 킨들이었다가, 아이패드였다가, 요란하게 설명해주는 증강현실 북이 되었다가, 인터넷 기사로까지 확장된다. 물론 이 매체들이 디지털 시대를 대표하는 읽기 도구라는 점은 충분히 공감할만 하지만 각각이 주는 경험과 미치는 영향은 분명히 다를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책만 읽을 수 있는 킨들과 가벼운 글들을 읽고 빠르게 이동해 다른 작업을 병행할 수 있는 아이패드와 심지어 인터넷 기사를, 거기에 아이를 위해 대신 책을 읽어주는 동화책에 이르기까지 이들을 모두 디지털이라는 한 장르에만 몰아 넣기에는 그 범위가 너무 넓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아날로그 책과 디지털 책이 촉각과 공감각의 차이가 있어 디지털 읽기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식의 주장은 디지털 읽기의 주의력 결핍 문제를 지적하기에는 충분치 않아 보였다. 물론 그 의도에 대해서는 깊이 공감하지만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보다 정교한 차원의 결과들을 소개해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들었다.
소개글을 통해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필자는 책 전도사다.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 또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저렴하면서도 효과적인 수단으로 주저없이 책을 꼽는 것은, 저자가 한 권의 책을 쓰기 위해 바친 시간은 몇 달, 혹은 1~2년 수준으로 쉽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이라는 압축된 결과물을 얻기까지 수 없이 많은 괴로움과 방황, 탐구를 통한 나름의 해결 과정들을 반복적으로 겪어 가면서 자신의 것을 갈고 닦는데, 우리는 그렇게 오랜 과정을 거친 노하우를 단 돈 몇 만원에 습득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필자는 이토록 가치있는 책들, 특히나 특정 분야의 거장들이 쓴 천재적 작품들을 통해 내면의 곤궁을 극복할 수 있었고, 이렇게나 좋은 책들을 정말 잘 소개해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답답해 글쓰기로 나아가게 됐다. 앞으로 반복된 습관을 통해 요령이 붙어서 더 좋은 글로 이 시대의 어려움에 대안적으로 동참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진리에 보다 더 가까워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언론인인 울린의 관점에서든, 나라의 젊은이들을 보호하는 대통령의 관점에서든, 청년들의 교사인 에드먼드슨의 관점에서든,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두려워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바로 젊은이들이 진실을 찾는 고된 훈련에 나서기도 전에 이미 진실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p. 123
[1] 위키피디아, 신경가소성
[2] p. 117
[3] KBS 뉴스, https://mn.kbs.co.kr/news/view.do?ncd=4135732
[4] p. 120
[5] 이 내용을 다룬 리뷰는 필자의 다른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주체의 성장을 이끄는 라깡의 방법”, [6] p. 91
[7] p. 107
[8] p. 198
[9] p.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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