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 관련 전체 글
① 우리는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②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
③ 바디우가 공산주의 이념을 고수하는 이유 (현재 글)
첫 번째 글에서는 ① 바디우의 주체에 대해, 이어서 ②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었다. 마지막인 이번 글에서는 기존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무엇이 문제였으며, 그 역사적 실패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왜 꼭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써야 하는지, 그의 공산주의는 어떤 방식으로 재건되어야 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기존 공산주의는 무엇이 문제였을까?
1.1. 개별성을 향한 열광 vs 개별성의 내재적 예외
앞선 글에서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권력 (국가, 정당 등) 이 아닌 운동임을 이야기 했다. 이런 이념-국가화의 부정적인 사례로 제시된 것이 기독교가 국교화 된 콘스탄티누스 1세 때였고 말이다. 바디우는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강제적으로 개종시켰던 이러한 태도를 스탈린의 그것과 동일하다고 보고 있었다. 이와 같이 자신이 보기에 옳은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은 개별성을 향한 열광이 될 수 밖에 없다. 이런 태도는 우연한 사건을 통해 주체로 탄생하게 되는 조건인 개별성의 내재적 예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내 안의 가능성은 외부적 기회를 통해서만 활성화 될 수 있는데, 그런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해 버리기 때문이다. 개별성을 향한 요구의 아주 극단적이고 대표적인 예가 나치즘이다. 독일인들의 정체성 (개별성) 의 강조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유대인들의 하브루타식 학습법은 개별성의 열광에 도취된 개인에게 계속해서 도전함으로 그의 내재적 예외를 발견하도록 이끄는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듯 싶다.
1.2. 대의의 문제 (보편성의 타락)
한편 마르크스가 발견했던 자본주의의 내재적 예외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었다. 그 어떤 특징도 갖고 있지 않은 자본의 노예인 ‘무’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탈린 체제를 통해 이들은 더 이상 소외된 계급이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 즉 대의가 되어 버렸다. 분명 소외된 민중을 위한 보편적 운동에서 시작됐지만, 정치화, 국가화 되는 과정을 통해 보편성이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당에 의해, 마침내 스탈린에 의해 대의되는 철저한 단계화 (계급화) 가 발생한 것이다. 계급의 철폐가 중요한 목표 중 하나였던 마르크스에 있어서 국가나 정당의 개념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공산주의를 따르는 이들도 이런 모순점을 분명히 알았으나,결국 다수를 지배하는 소수의 국가 구조를 가져갈 수 밖에 없었다. 분명 불가피한 일이었지만, 레닌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당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대의자로 신성시했으며, 스탈린은 이를 더욱 폭력적으로 계승했다.
여기에서 상대 대담자인 페터 엥겔만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왜 그들은 보편적인 관점을 가졌음에도 대의라는 덫에 걸렸느냐고 말이다. 정치와 대의는 서로 연결될 수 밖에 없지 않았는지,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를 물었지만 바디우는 그건 항상 그런 것이라고 일갈한다. 플라톤처럼 순수한 주체화란 불가능한 것, 즉 보편적 움직임과 개별성은 함께 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념적 운동이 할 일은 대의와의 싸움을 지속해 나가는 것 뿐이다. (* 참고로 바디우는 레닌이 군사적 공산주의를 등장시키게 된 계기가 대의라는 관념에 기대지 않고, 폭력적이지도, 근본적 의미에서 훨씬 민주주의적이었던 코뮌의 패배가 결정적이었다고 설명한다.)
1.3. 자본주의와의 경쟁
또 한가지 문제점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를 이기는데 혈안이 되었다는 점이다. 바디우는 이론적으로 재산의 유형을 세 가지로 구분짓는데, 사유, 집단/협동, 국유/공유 재산이 그것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부분이 협동 재산인데, 공산주의 국가들은 이 재산을 어떻게 능률적으로 끌어올릴지를 고민하기보다 그저 자본주의 구조에 머무른 상태에서 그들을 앞지르는 것에만 집착했다. 하지만 자본주의적 프레임 안에서 양적인 경쟁을 위해 발버둥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듯 애초부터 상대가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도 익히 알다시피 구성원 모두가 공동체적 가치를 자발적으로 추구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본주의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이념에 대한 확신은 군사국가화, 즉 ‘병영 사회주의’의 강화를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부모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억지로 앉혀놓는 것 뿐이기 때문이다. 결국 자본주의의 틀 위에서 독자적인 경제체제를 구축하려고 했던 것, 그것이 결정적인 패착이었던 셈이다.
2. 왜 굳이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유지해야 할까?
페터 엥겔만은 대화 중에 두 차례에 거쳐 바디우가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고수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역사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한 이 단어를 버리고 다른 개념을 선택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바디우 역시 공산주의 국가들의 실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나, 단지 그 이름을 잘못 사용한 것이 다른 이름을 써야 할 근거가 되지 못한다고 반박한다. 그 또한 단어의 적절성에 대해 적잖은 고민을 해왔으나, 결국 ① 역사적으로 다른 개념이 없고, ② 포기보다 재생이 더 의미있겠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공산주의 복원을 이야기하게 됐다는 것이다.
2.1. 보편적 주체의 운동
역사적으로 다른 개념이 없다는 것은 앞선 글에서 밝혔던 것처럼 공산주의 이념이 보편적 대안이 가능함을 믿는 실천적 운동이기 때문이다. 이는 바디우가 개인에의 몰두에만 치중하는 기존 형이상학적 주체를 비판하며 외부적 사건을 통해 주체적 운동에 편입되는 주체를 이야기한 것과 합이 매우 잘 맞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말하는 주체 자체가 이미 보편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적 진리의 발견 순간, 셰익스피어의 글이 전혀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에게도 감동을 주는 예술의 보편성 등, 그에게 있어 주체의 개념은 언제나 보편성을 향해있다. 그렇기 때문에 바디우는 진정한 운동은 가장 먼저 공산주의 이념의 방향으로 간다고 보고, 모든 운동을 평가하는 이념적 잣대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2.2. 포기보다 재생이 의미있는 이유
당연한 얘기지만 공산주의의 본질은 스탈린이 아니다. 하지만 절대적 대의명분을 앞세운 권력의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에게 이념의 본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공산주의 이념에 심취한 자들이 저런태도를 취하는 하는 것을 이념이 정당화해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 않을까? 하지만 분명 매우 좋은 의도에서 나온 개념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끔찍한 시기를 지나며 신뢰를 잃었다는 것을 오히려 인정하는 것이 흥미로웠다고 바디우는 이야기 한다. 이미 이런 단어를 다루는 인간의 모든 경험 자체가 변증법적이고 모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정치에서는 병들지 않은 단어가 없음을,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이 이라크에 민주주의를 주기 위해 전쟁을 수행할 것이라고 선언했던 것을 예로 들며 설명한다.
한 단어의 영향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나쁜 것들에 노출되기 쉽다. 그럼에도 그 단어를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은 역사적 과오를 인정하는 것을 통해서만 그 이념이 성숙해 질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참고로 포기해서 안되는 이유는 필자의 추측임을 밝힌다.) 하지만 기존 단어를 포기하고 다른 개념을 도입하면 이런 역사성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게 새로운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은 권력을 갖게 되고, 부패하게 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다시 돌리게 되지만 (바디우는 이런 과정을 피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마땅히 통제할 근거가 없기에 새로운 문제적 전철을 밟게 될 가능성도 높아진다. 아마 정신분석적으로 증상의 전치 (옮겨감), 즉 외면받은 실재의 귀환으로 보면 적절하지 않을까? 비난의 고통을 감내하기 보다 외면하는 (단어를 바꾸는) 빠른 해결 방법을 통해 단기적인 변화에는 성공하더라도, 과오를 반복하지 않을 고민이 충분하지 못했기에 증상이 반복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갑자기 한국의 어느 정당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3. 공산주의 관념의 재건 방법은 무엇일까?
결국 여기에서 핵심은 앞선 글에서도 밝혔듯 (내재적 예외를 위하여) 개개인이 갖고 있는 가능성인 내재적 예외와 사건 간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임금 노동도, 군사적 공산주의의 강제 노동도 아닌 제 3의 길을 찾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 푹 빠진 개개인을 탄생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3.1. 대의 관념이 배제된 토론
이를 위해 바디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토론이다. 올바르고 진실된 것이라면 토론을 통해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마치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처럼 철저히 철학적으로 진리를 찾아나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자신도 공산주의 이념에 대해서라면 전 세계 어느 곳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함께 고민하고 토론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 (혹시 그를 직접 만나고 싶다면 이런 조직을 꾸려보는 것도 방법일 듯 싶다. 물론 한국에서는 위험할 것 같긴 하지만..) 다만 여기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두가 따라야 할 대의가 존재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구성원이 늘어날수록 조직화는 불가피하며, 모두를 이끄는 지도부가 반드시 필요하게 된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대의화가 진행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적에 관한 것 외에는 모든 것을 공개적인 토론 대상으로 삼아 특정 학파처럼 이념의 실천 형식이 고착화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
3.2. 해방 (부활)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
또한 바디우가 생각하는 것은 지역의 구체적인 경험들이 확장될 수 있는 세계적인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각자의 해방 이념을 어떻게 현실화시켰는지를 공유하는 장소 말이다. 행동하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했으며, 어떻게 폭력적인 선을 넘지 않고 그것을 이룰 수 있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곳으로, 본인 또한 이런 공동체를 조직하기 위해 여러가지 시도를 하고 있다고 밝힌다. 개인적으로 기존에는 이런 역할을 일정 부분 교회가 감당해 왔다고 생각하지만, 오늘날은 많은 부분에서 바디우식으로 대의만 남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십자가 부활 사건의 창조적 능력을 잃어버리고 교회의 고정 이론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바디우는 이런 대의화를 수학적 발견이라는 내재적 예외가 그 능력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원리로써 교재에 수록될 뿐임을 이야기 한다.) 어쩌면 바디우가 스스로 기독교적인 부활 사상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기독교인이 아닌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에게 있어 부활 가능성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것이 진실되다면 반드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가 공산주의의 재건을 꿈꾸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이고, 『사도 바울』을 쓴 것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바디우와 함께 대표적인 마르크스주의자로 손꼽히는 지젝은 기독교 유산이 마르크스주의와 혈통관계에 있다고 이야기[1] 한다.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본 공산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에서 소외된 자들도 더불어 잘살 수 있도록 하는 것, 다름아닌 예수의 삶이 그랬고,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음을 믿는 믿음 아래 차이가 없다고 선언한 바울의 깨달음이, 그리고 마르크스의 고뇌를 통해 공동체를 향한 이념이 모두 보편성을 향한 철학적 움직임과 맞닿을 수 있음을 본 것이다. 다만 첫 번째 운동은 모두가 알다시피 명백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사실상 자본주의에 완전히 편입된 세계 질서 속에서 자본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게 소시민들의 삶의 목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누구나 보편성에 맞닿을 수 있는 (주체로 편입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다만 그런 주체는 사건, 즉 기독교 식으로 은총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임을 기억하고 모두를 향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힘쓰는 것, 바로 그것이 바디우가 이야기하는 공산주의의 재건을 위한 움직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1] 슬라보예 지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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