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기독교 옹호’에 대한 이전 글들
①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의 문제
② 욕망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③ 조화를 추구하는 이교, 분열시키는 기독교?
지금까지 지젝을 통해 다른 철학적 사조, 종교들과 기독교의 차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정신분석과 철학을 두루 섭렵한 명망있는 학자의 통찰을 의미있게 경험하고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제 기독교 자체 내 분열된 구조로 머물러 있는 유대교와의 관계를 살펴보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1. 주체란 무엇일까?
나폴레옹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영웅도 시종의 눈에는 별사람 아니다’ 시종이 영웅을 그렇게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헤겔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영웅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종은 영웅이 아닌 먹고, 마시고, 옷을 입는 사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1]
시종은 영웅의 공적인 위업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밖에서 아무리 칭송받는 영웅이라 하더라도 똑같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 밖에 없으니, 그의 공적인 위업을 시종이 알도록 해줘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젝은 시종이 영웅을 진심으로 존경하기 위해서는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무슨 뜻일까? 우리도 일상에서 느끼고 있는 부분일텐데, 타인을 진정으로 존경하게 되는 것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모습만을 통해서가 아니라 얼핏 드러나는 그의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 즉 개인의 연약함이나 사랑스러운 결점들을 보게 됐을 때라는 것이다. 보통 ‘인간적인’ 친근함을 느낀다는 바로 그런 모습 말이다.
지젝은 이를 ‘헤겔에게 라깡적 대상 a가 보충돼야 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대상 a’를 역자는 ‘타대상’이라고 번역했지만 ‘object petit a’는 ‘대상 작은 a’ 줄여서 ‘대상 a’라고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잉여 향락의 대상‘을 뜻한다. 지젝은 대상 a의 대표적인 예로 ‘콜라’를 드는데, 이는 물이나 포도주처럼 필요를 직접적으로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통해 우리를 계속해서 이끌리게 만드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건 위의 예처럼 이러한 미지의 것을 통해서만 주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주체화에 저항하는 어떤 물질적 오점/나머지, 즉 정확히 주체가 그 자체를 인식할 수 없는 잉여가 있는 한에서만 주체는 존재한다. 다른 말로 얘기하면 주체의 역설은 주체가 그것 자체의 근본적인 불가능성,그것(주체)이 그것의 완전한 존재론적인 정체성을 영원히 얻을 수 없게 방해하는 ‘목 안의 뼈’를 통해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여기에서 뫼비우스 띠의 구조를 갖는다. 즉 주체는 대상과 상관적이지만, 부정적으로 볼 때 주체와 대상은 결코 ‘만날’ 수 없다. 그것들은 똑같은 장소에 있지만 뫼비우스의 반대표면들 위에 있다.
pp. 50 – 51
지젝은 이러한 설명을 통해 피분석자가 주인기표(영웅과의 상징적 동일시, S1)에서 대상 a(상징적 동일시의 잔여물)로의 이행을 완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학의 궁극적인 목표라고 이야기 한다.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을 방해하는, 가장 혐오하는 것에 사실 내가 처한 곤궁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담겨 있다는 것, 바로 그 혐오를 수용하는 것, 기독교 식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방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인용한 글처럼 두 측면은 절대로 만날 수 없다. 결국 어떻게 해도 주체는 분열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라깡적 주체의 본질이었다.
1.1. 주체 이야기를 먼저 한 이유
그렇다면 유대교와 기독교의 관계를 정리하겠다고 해놓고 주체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지젝이 이들 종교를 바로 정신분석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포스트모더니즘, 뉴에이지, 불교 모두는 불가능성으로서의 실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지젝이 문제로 지적했던 것은 실재적 곤궁을 급하게 덮으려고 시도하거나 (포스트 모더니즘, 뉴에이지) 실재를 피하기 위해 삶 자체를 외면해 버리는 (불교) 이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그동안 읽어왔던 다른 책들을 통해 주체란 ‘이념을 가진 존재’라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보다 자세한 내용은 『개인』에 대한 리뷰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특히나 이념을 ‘가능성의 총체’라고 본 조르조 아감벤의 정의가 무척 와닿았는데, 중요한 건 이러한 가능성을 존재하게 하기 위해 불가능성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지젝이 말하고자 했던 핵심 요지였다는 점이다. 첫 번째 글에서도 다뤘듯 지젝이 보기에 공산주의는 자본주의의 무절제한 생산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환상에 불과했기에 실패했다고 (제 3의 대안을 제시하지 못함) 꼬집는다. 즉, 욕망을 유지시키는 근본적인 적대로 존재해 오히려 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1.2.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되는 실재와 대상 a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한편으로 불가능성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실재’와 ‘대상 a’는 서로 동일하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문득 혼란스러워져 둘의 차이를 살펴보았다. 지젝은 대상 a를 ‘실재계의 나머지'[3], 작은 실재 조각[4]이라고 부른다. 좀 더 풀어서 치명적인 물(物, 실재)을 응축시킨 사물[5]이라고도 표현한다. 그런 사물이 무엇일까? 대표적인 것이 바로 ‘돈’이다. 실재는 직접 접근할 수 없지만, 실재의 대용품인 대상 a를 통해서라면 어느 정도 접근이 가능하다. 마치 유대인 아이들의 온화한 공격적 게임에서의 메시지처럼 말이다.
‘제발 나를 물어주세요. 그러나 너무 아프게는 물지 마세요.’
바로 그것이 대상 a의 핵심적인 기능이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실재와 대상 a 는 모두 우리에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불가능한 잔여물로 남아 있어 계속적으로 갈증(욕망)에 시달리게 만든다.
2. 실재를 품은 유대교
유대교의 핵심은 이런 실재를 받아들이는 방식에 있다. 유대교의 율법은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 선포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유대교가 어떤 어려움에도 자신들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이야기 한다. 앞서 나폴레옹의 예를 들었던 것처럼 상징적 전통인 율법과의 동일시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경외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셨다고 하는’ 실재의 외상적 (폭력적) 차원, 즉 그것이 실제로 있었던 것보다 중요한 ‘오직 그것이 있음으로 인해서만 우리의 전통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이라는 믿음’을 제공했던 것이다.
유대교가 다른 종교와 차이를 갖는 것은 인간의 자기실현 결과로 (깨달음을 통해) 출현하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것으로, 이런 관점 자체를 무의미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처럼 유대교는 유령적 차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기에 자신들만의 특수성을 견고히 유지시켜 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만이 선택받았다는 특수성으로 인해) 모든 인간을 향한 보편성의 길로 나아갈 수는 없는 일이지 않았을까? 하지만 여기에서도 지젝은 이같은 특수성에 대한 열정적인 집착 자체가 보편성을 유지시킬 수 있는 역설이라며 그 주장을 뒤집어 버린다. 그야말로 특수성의 전복이라 할만한 이런 가치가 진리의 한 축을 형성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3. 절단을 통해 진리를 완성하는 기독교
한편 이교도와 기독교의 가장 큰 차이점은 조화와 균형을 강박적으로 추구해 질식시키는 이교도의 주장에 저항해, 모든 차별적 질서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아가페적 보편성을 확립하는데 있다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글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 싶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내재적 모순인 유대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볼 수 있을까?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실재적 기원) 제거시키는 보편적 율법을 새롭게 세워야 할까? 아니다. 여기에서도 지젝은 기독교가 기성 질서와 단절했다고 이야기한다. 기독교가 단절을 시도하는 지점은 법과 위반의 악순환의 문제였다. 우리가 율법으로 인해 죽게 되었지만 율법이 있음으로 인해서만 죄를 알 수 있어 선한 것이라는 바울의 설명처럼 말이다. 유대교는 오직 법을 문자 그대로만 지키고자 했지만, 동시에 이를 형식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데 끊임없이 골몰하게 되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방식은 바리새인으로 대표되는 당대 최고의 율법가가 취한 삶의 태도였다. 모든 율법을 빠짐없이 지키며, 이를 자랑스레 드러내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경멸하는 이러한 이성주의적 태도(남성적)는 결국 사랑을 통해 비로소 극복(여성적) 되어야 했던 것이다.
3.1. 증상 개념의 전환
이런 전환은 정신분석의 역사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초기 라깡의 증상 개념은 분석적 해석을 통해 반드시 해소되어야 할 병리적 구성물, 즉 상징적 법이 결여된 말그대로 불능의 표지로 판단되는 것(남성적)이었다. 그러나 이후 보편화된 증상 개념을 통해 증상에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역설적 전환(여성적)을 이루게 된다. 오히려 이러한 증상을 제거하고자 시도할 경우 그의 삶 자체가 붕괴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따라서 증상은 제거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를 지탱하는 구성물이라는 생각으로 전환된 것이 핵심이었다.
3.2. 사랑의 의미
유대교적 법과 악순환의 문제를 극복하는 기독교적 방법은 정확히 바울의 아가페, 즉 형식 자체에만 몰두하는 유대교에서 외면했던 사랑을 절대적 위치에 두는 것 (사랑의 초자아화)이다. 이 사랑은 바울 그 자신도 매일 죽노라고 고뇌하며 이야기하듯 관대함이 넘쳐서 베푸는 사랑이 아닌 자기 억압적 의무의 칸트적 사랑이다. 법으로 인해 발생하는 죄악된 욕망을 억압하는 투쟁의 사랑. 이러한 사랑이 신비로운 것은 모든 지식에 있어 예외가 아님에도, 그 어떤 지식도 불완전하게 만드는 무nothing라는데 있다. 그렇다고 사랑을 갖게 된다고 유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나에게 사랑이 결여되어 있다는 인식을 통해 비로소 풍요로워질 수 있는 무이다. 따라서 오직 결여되고 약점있는 존재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 불완전함은 완전함보다 더욱 고귀하며, 바로 그런 점에서 기독교가 성취한 것은 사랑하는 불완전한 존재를 신의 자리, 절대적 완벽함의 자리로 승격시킨 것에 있었다. 바울의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가리가 되고,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 소망 •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pp. 213-214
3.3. 기독교적 삶의 방식이란
이처럼 실재를 수용한 유대교를 다시 한 번 수용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 기독교적 단절, 떼어내기의 해법이었다. 지젝은 책의 말미에서 이를 현실에 적용한 버전을 제시한다. 우리가 감옥생활을 한다고 가정했을 때 필요한 것은 감옥 밖의 세계를 동경하거나 (이교적 방식) 내적 거리를 두는 것 (불교적 방식) 이 아니다. 오히려 이런 방식은 거짓 환상에 사로잡혀 감옥에 나를 더 가두는 꼴이 될 뿐이다. 오히려 진정으로 유일한 기독교적 해결책은 감옥생활의 규칙을 모두 받아들이고, 이러한 세계 속에서 규칙을 극복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다. 감옥의 규칙에 얽매여 진짜 감옥에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수용해야만 진정으로 희망에 대한 여지가 생기게 된다. 하늘을 바라보면서도 세상의 법에 충실한 삶을 사는 이러한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기독교인들의 삶이라는 것이다.
4. 글을 마무리지으며
사실 아직도 더 나누고 싶은 (더 나눠야만 하는) 내용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지만, 욕망을 억누르고 이번 책은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를 지어야 할 듯 싶다. 고뇌하는 가운데 글을 정리하면서 저자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 각 종교들에 대한 그의 관점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필자에겐 상당히 큰 의미가 있었다. 또한 이런 좋은 내용들을 공유할 수 있는 도구가 풍부하다는 점이 새삼 감사하기도 했다. 말 그대로 책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던 시간. 물론 책을 읽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읽은 내용을 내 기준에 맞춰 재구성하는 것에 비할 바가 되진 못하는 듯 싶다. 머리를 쥐어 싸매는 만큼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그 가치가 새롭게 와닿게 되는 경험을 계속하게 되면서 이런 과정은 어느덧 필자에게 없어서는 안될 시간이 되고 말았다. 그렇게 가장 크게는 나에게 도움이 되고, 그 자체로 누군가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건 너무나도 귀한 일이다. 그렇게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리면서,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성장의 과정들을 의미있게 공유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필자가 되도록 하겠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
[1] p. 76
[2] 이미지 출처 : sothebys
[3] p. 76
[4] p. 75
[5] p. 38
[6] 이미지 출처 : instrumentofmercy
[7] 이미지 출처 : allworship
* 표지 이미지 출처 : timesofisra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