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고유한’ 존재로 만드는 것, 『도래하는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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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아감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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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래하는 존재는 임의적 존재이다. 책의 제목에 대입하면, 도래하는 공동체 또한 임의적인 공동체이다. 그것이 저자의 결론이자 해결책일까? 맞다. 심지어 이 메시지는 마치 선언문처럼 책의 시작과 함께 곧바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는 마치 결과를 알려주고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고자 애쓰는 것처럼 기운 빠지는 일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용어 중 하나인 ‘임의적’이라는 단어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임의적 존재, 임의적 공동체라는 것은 일정 기준 원칙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1] 존재이자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책을 정말 인상 깊게 읽었음에도 글을 어떻게 써야 할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었던 것이 바로 이 지점이었다. 너무 뻔한 결론이었기 때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주체성이 강조되는 시대에, 굳이 자기계발 서적을 찾지 않더라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원하는 삶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 된지 오래다. 지독하리만치 찾기 어려워서 그렇지. 그런데 그렇게 누구나 하는 말을 명망있는 철학자가 그저 어려운 용어로 포장해 표현하다니? 말만 고상할 뿐인 이 메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의미있게 다가갈 수 있을까? 내용을 정리하는 중에도 도무지 해결점이 보이지 않던 문제였다. 이런 책을 읽는 것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정말 놀라운 것이다. 다양한 자료들의 충분한 숙성 과정 이후 불현듯 등장하는 이러한 사건은 글쓰기의 괴로움을 보상해 준다. 이번 책을 통해 느꼈던 것, 그것은 필자가 얼마나 결과중심적이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 데 있었다. 저자가 결론으로 서문을 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그 내용이 갖고 있는 깊은 의미를 이제부터 탐구해 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결론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의 과정인 것이다. 기독교의 핵심적 결론이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의식적 과정의 결핍, 즉 이해되지 못한 실천의 결과가 신천지라는 증상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이해되지 못한 진실의 소외, 다시 말해 악이 필자의 내면에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있는지를 이 책은 새삼 깨닫게 해주었다. 결국 임의적 존재라는 결과가 다시금 원인이 되어 내 곁으로 돌아오기까지는 무척이나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것이 책에 대한 소감을 글의 서두에 이렇게 구구절절 밝히게 된 이유라 할 수 있겠다.

1. 임의적 특이성의 주체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임의적인 것은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으로 욕망과 근원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개개인의 욕망이 모두 다르고, 오직 임의적인 것을 통해서만 특이성은 드러날 수 있기에 둘은 불가분의 관계로 책의 전반에 등장하게 된다. 이러한 ‘임의적 특이성’은 존재가 어떤 정체성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존재 자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사랑스럽다. 이처럼 ‘무엇’으로 특정되거나, 어딘가에 ‘귀속’될 수 없는 ‘임의적 특이성’의 존재는 오직 자기 자신의 이념, 즉 자기 가능성들의 총합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될 수 있다. 즉, 나라는 존재는 내가 가진 이상의 크기와 동일하다는 뜻으로, 칸트가 완전한 규정성이라고 이름 붙인 이러한 성격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주체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임의적 특이성은 어떤 정체성을 지닌 것도 아니며 개념적으로도 규정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임의적 특이성이 단순히 무규정 상태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이 어떤 이념, 즉 자신의 가능성들의 총체와 맺는 관계를 통해서만 규정된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특이성은 칸트가 표현하듯,모든 가능성과 맞닿아 있으며 이로써 완전한 규정성omnimoda determinatio을 얻는다.
p. 95

여기서 존재 그 자체라는 표현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음 장에서도 설명하겠지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 있는 언어적 방법이 없어 이 같은 표현이 등장하게 된 것으로, 서구 철학의 두 갈래 축인 보편성과 개별성을 보완하기 위한 제 3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는 상대방의 특정 속성들을 통해서가 아닌, 그 사람 그대로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무엇보다 사랑스러운 임의적 특이성은 그러한 속성 (보편성과 개별성) 을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스피노자를 통해 설명하듯 신적 속성을 표현하는 공통적인 것(모든 신체 부위)은 결코 개별 사물의 본질을 구성할 수 없고, 개별적인 것들 간의 소통을 통해서만 [2] 특이성은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드러낸다. 인간이라면 모두 동일한 얼굴을 갖고 있지만 (보편성) 각각의 삶의 역사를 통해 고유한 모습이 드러난다 (개별성). 다시 말해 존재라는 것은 철저히 보편성과 개별성의 무차별적 왕복 운동(습관, 에토스)이라는 개체화의 원리를 통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물론 ‘임의적 특이성’의 존재는 인간이라는 종에 귀속된 상태다. 그러나 이는 단지 ‘전체와의 관계’에 불과할 따름으로, 인간이라는 보편적 개념은 개별 존재에 대해 아무런 정의도 내릴 수 없으며 단지 어떠한 한계만 제시할 수 있다. 이처럼 규정될 수 없는 텅 빈 공간에서 탄생한 존재는 순수한 외부성 안에서 스스로를 구축한다. 결국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란 전적으로 외부로부터의 발견이라는 것, 저자에 따르면 이는 사유되기 가장 어려운 것이다.

2. 언어적 한계의 극복

앞서 언어를 통해서는 존재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음을 이야기 했다. 우리가 아무리 정교하게 묘사한다고 해도 단어는 각각의 특이성을 공통 속성으로 묶어서 표현[3]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존재를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위계가 생기고 이 위계 또한 결국 두 갈래의 질서인 보편성과 개별성으로 요약될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언어는 존재가 불가피하게 개별자와 보편자 사이에서 모순을 드러낼 수 밖에 없도록 언어적 존재, 그러니까 집합(인간)인 동시에 특이성(나, 너, 그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식 또한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1772년 2월 21일 칸트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 “우리 표상이 대상을 무슨 근거로 지시할 수 있는가?”[4]에 대한 러셀의 응답으로 이 책의 핵심을 관통하게 된 것이다. 원소가 집합을 구성한다는 것에 모순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을 간파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다. 만약 특정한 대상이 특정한 속성을 갖는다면 그 속성도 하나의 대상이 되며 다른 속성들과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개별적인 속성들이 모여 이룬 집합은 각각의 속성들과 또 다시 구분되는 ‘새로운 개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보편자 속에 녹아든 개별자로써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존재, 자기 자신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의 집합으로 규정지은 것이 바로 ‘러셀의 역설’이었다. 한편 보편성을 구성하는 개별성에 대한 정의는 아리스토텔레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알랭 바디우가 철학의 역사란 동일한 것의 반복이라고 표현한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일이다.)

“동명동의어들이 참여하는 바에 따라서 동명동의어의 다수성은 이데아에 대해 동명이의적이다.”(『형이상학』,987b 10)
p. 104

아리스토텔레스는 집합의 모순을 드러내는 결정적인 원인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다수의 속성을 포함하는 동명동의어(보편자)는 이념(가능성의 총체)에 관계될 때 비로소 특이성(개별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개념은 포괄적(동명동의적)이지만 이념은 개념에 속한 것들의 이질성을 계속해서 드러내 절대성의 기반을 뒤흔든다. 전체에 속한 부분이 아닌 전체와 공존하는 부분, 그곳에 잠재성이 있었다.

3. 악과 선

이처럼 전체에 속하지만 전체와는 구분된 개별적인 존재를 ‘임의적 특이성’의 존재, 즉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특이성을 구분짓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이념’이라는 점도 말이다.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이념이 없는 존재는 전체 속에 파묻혀 다른 대상과 구분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가 그 어떠한 가능성도 내포하지 않는 상태, 저자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악’이다. 악이란 사물들의 다양한 구성 요소들을 한 가지 사실로 환원하는 것이자, 구성 요소들에 내재한 초월성을 망각하는 것[5]이다. 한마디로 섣불리 규정짓는 것, 일상적인 표현으로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판단하는 것이 바로 악이라는 것이다. 이를 연결지어서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악마’라고 하는 존재는 본질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것, 곧 ‘불능’ 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악마를 가장 유약한 피조물로서 신에게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6]고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가 악마라고 칭하는 존재는 자신만의 (우리에게는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도움을 요청한다. 이들이 얼핏 보면 유혹자인 듯 보이지만 실은 악의 하수인, 즉 아무렇지도 않게 대량학살을 자행한 아돌프 아이히만[7]처럼 누구보다 유혹당하기 쉬운 존재인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시 악은 우리가 이런 악마적 요소와 맞닥뜨렸을 때 부적절한 반응을 보이는 것[8]으로 돌아오게 된다. 악마적 대상의 불능을 이끈 구조적 모순을 종합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겉으로 드러난, 일반적으로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는 이러한 악이 뿌리깊이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잠재성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기에 손쉽게 배제해 버린다. 이는 우리의 진정한 능력,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아는 가능성, 즉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을 잃어버리게 만든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오직 이러한 악을 통해서만 선을 이해할 수 있다. 선은 악이 실체를 드러낸 그 순간에만 자기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한 가능성 속에서 자유롭게 행한 행위가 타인에게 고통을 줄 경우 우리는 그 지점에서 비로소 선이란 무엇인지를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윤리가 탄생하게 된 배경으로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실패를 경유해서만 성공으로 향할 수 있으며, 무지를 자각함으로써만 앎을 향한 욕망을 탄생시킬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통해서만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다.

진리는 오직 그것이 거짓을 드러낼 때에만 현시될 수 있다. 하지만 그 거짓은 잘려져 어딘가 다른 곳에 버려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열다’를 의미하고 공간spatium과 관련된 동사 파테파케레patefacere의 어원을 따르면 진리는 공간을 내주거나 비-진리에 자리를 내줌으로써만 계시될 수 있다. 즉 거짓의 ‘자리 잡음’으로서, 즉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도덕/비고유성을 노정함으로써 말이다.
p. 25

4. 임의적 특이성의 예, 아죠

우리는 어려운 상황에 봉착했을 때 좋은 사례, 즉 선례를 찾는다. 선배들의 노하우를 배움으로써 당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런 예들은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이는 앞서 정의한 악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면 전체에 예속된 상태, 즉 일반적으로 (나는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기 때문에) 남탓을 하며 제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을 찾아냈다는 뜻이다. 이 때문에 예는 자기 예가 자기자신인 유일한 존재로, 다른 것들 중 하나이면서도 다른 것들을 대신하고 전체를 대변한다.

보편자와 특수자의 이율배반에 사로잡히지 않은 개념 하나가 오래전부터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이 바로 예이다. 예는 어떤 상황에서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든 간에 언제나 같은 유형에 속하는 모든 경우를 대표하면서도 동시에 이 경우들 가운데 하나라는 특징을 보인다. 예는 다른 것들 가운데 하나인 특이성이면서도 다른 것들을 대신하고 전체를 대변한다. 예는 한편으로는 실상 특수 사례로 다루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특수자로서의 효력을 잃을 수 있다고 전제된다. 즉 예는 특수하지도 일반적이지도 않으며 그런 것으로서 스스로를 제시하는, 자신의 특이성을 보여주는 특이한 대상이다.
p. 20

예는 보편적인 언어에 귀속되지도, 특수한 일부에 한정된 것도 아닌 전적으로 개별적인 존재, 즉 임의적 특이성의 존재이다. 세계적으로 맹위를 떨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한 각국의 대응에서 우리나라의 사례가 빈번하게 언급되는 이유도 그 방식이 매우 독특했기 때문이다. 교류와 이동을 전적으로 통제하지 않고도, 환자 수를 은폐하기보다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검사하고 공개함으로써 증가세를 누그러뜨릴 수 있었고, 전체(국가)와 개별(개인) 사이 어딘가에서 ‘잘 관리되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다.

그렇다면 임의적 특이성의 존재들로 구성된 도래하는 공동체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저자가 예로 든 공동체는 아랍학자 루이 마시농의 바달리야 공동체이다. 바달리아는 ‘대신’한다는 뜻으로 타인에게 결여된 것을 채우거나 교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기독교적 환대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특정한 용어로 대표되거나, 재현될 수 없기에 “자기 자신의 자유로운 사용”만이 가능한 “가장 어려운 과제”이다. 저자는 이를 ‘아죠(이웃한 공간)’라고 표현하며 모든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온전히 품은 모든 것의 자리-잡음, 즉 순수한 초월자[9]로써 긍정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5. 공동체와 주체의 상관관계

이 책은 흥미롭게도 제목으로는 공동체를 선택했지만, 그 내용은 전적으로 주체를 향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어떠한 공동체라고 하면 정체성에 대한 기대와 요구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즉, 어떤 단일한 개념으로 정의내릴 수 있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모든 현실 공동체를 제한하는 것은 그것의 가장 공통적인 요소[10] 때문이다. 한국인이라는 이름만으로 모든 개개인을 의미지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구성원들의 삶의 패턴, 문화 등을 통해서 우리는 개략적으로나마 개인의 면면을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임의적 특이성의 주체들로 구성된 공동체라면 어떨까? 아마 그 공동체는 자기 자신에 대한 어떤 정의도 내릴 수 없을 것이다. 정의를 내리기 무섭게 이를 이탈하는 (새로운 정의가 필요한) 존재가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래하는 공동체에서는 기관 없는 신체의 무질서함만을 남겨두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우리는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평등이 얼마나 폭력적이며 더 없이 무기력한지 잘 알고 있다. 결국 개개인을 온전히 품어주는 공동체란 어쩌면 너무도 이상적이기만 한 공동체이지는 않을까? 물론 어쩌면 우리는 경험해보지 못했을 뿐 그런 공동체들을 일부 알고 있는 듯 싶기도 하다. 저자가 소개한 바달리야 공동체도 그랬겠지만, 성경의 초대교회 모습이 그러했고, 가깝게는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저항하던 시민들의 모습이 그랬다. 자신의 소유를 거리낌없이 내어놓고 함께 연대하는 공동체 말이다. 하지만 이들 공동체에서는 중요한 부분이 한 가지 발견된다. 이들을 묶어주는 어떠한 ‘이념’이 이들의 연대에 당위성을 부여해주었다는 점 말이다. 하나의 이념 아래 뭉쳤기에 그 외의 차이는 문제될 것이 없었다. 마치 바울이 기독교를 세웠을 당시 유대 기독교인들이 이방인 기독교인들의 삶과 예배 방식에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 아래 차이가 없음’을 선언했듯, 공동의 이념 하에 있을 때 그 공동체는 공고히 유지될 수 있었다. 임의적 특이성의 주체는 이념이라는 가능성을 품었을 때에만 오롯이 자신의 개별성을 드러낼 수 있다. 이념을 통한 욕망이 없이는 임의적인 것이 탄생할 수 없으며, 그런 존재는 이미 전체에 예속된 존재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임의적 특이성의 공동체 또한 공동의 이념이라는 가능성을 품었을 때에만 수많은 공동체 중 하나에 속하지 않고 자신만의 빛을 묵묵히 드러낼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도래할 공동체란 그러한 가능성을 품은 임의적 공동체이다.


[1] 네이버 국어사전, https://ko.dict.naver.com/#/entry/koko/cf3d5911b388458da60bdac6f01df735 [2]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신체는 연장성의 신적 속성을 표현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에티카』, 제2부,정리 13, 보조정리 2) 하지만 공통적인 것the common은 결코 개별 사물의 본질을 구성할 수 없다. (『에티카』, 제2부, 정리 37). 여기에서 결정적인 것은 비본질적인 공통성의 이념,결코 본질과 관련되지 않는 연대의 이념이다. 연장성의 속성에서 자리-잡음,특이성들의 소통은 특이성들을 본질 속에서 통합하지 않고 실존 속에서 분산시킨다.
p. 33

[3] p. 19
[4] p. 100
[5] p. 28
[6] p. 51
[7] 한나 아렌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지독하리만큼 평범했던 악의 실체를 드러낸 그의 삶을 알려면 이 책을 읽어보면 좋을 것이다. 또한 해당 책에 대한 필자의 북 리뷰를 참고해 보셔도 좋을 듯 싶다. 책임있는 삶의 의미
[8] p. 52
[9] p. 27
[10] p. 21-22

* 표지 이미지 출처 : akeph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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