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 『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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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돈보다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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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 관련 전체 글
① 우리는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②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 (현재 글)
③ 바디우가 공산주의 이념을 고수하는 이유

지난 해 우리나라 합계출산율은 0.92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가임 여성 (15 ~ 49세) 이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평균 출생아 수가 한 명도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OECD 평균 (1.65명) 에도, 초저출산 기준(1.3명)에도한참 못 미치는 [1] 심각한 상황이다. 물론 무조건 인구가 증가해야 좋다고 볼 수만은 없겠지만, 다음 세대를 향한 공동체적 희망을 잃어버렸다는 차원에서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문제다.

아이를 키우고 있는 입장에서 느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은 사실상 적자생존에 가깝다는 점이다.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려운 환경 뿐 아니라 주거, 교육, 경쟁 등 많은 부분을 홀로 감내해야 하는, 자연히 돈에 목을 멜 수 밖에 없는 사회 구조가 너무나도 깊이 뿌리박혀 있다 (출산 장려를 위해 사용했다는 185조는 도대체 어디에 쓰인 건지…). 그럼에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성취를 봤을 때 이런 상황을 오롯이 자본주의 탓 만으로 돌리는 것은 적절치 않겠지만,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자본주의의 무자비한 욕망을 다스리거나 보완할 수 있는 고민을 우리 사회가 깊이있게 해오지 못했다는 점이다.

1. 바디우의 자본주의 비판

자본주의를비판하는 바디우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자본주의는 전혀 지성적 탐구 대상이 아니다. 과정 전체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익을 향한 욕망을 앞세워 거대한 부를 획득한 나라 (여기서는 중국을 예로 든다) 는 세계시장을 지배하고, 높은 수익을 거두기 위해 아프리카를 약탈해 갈 것이다. ‘이 나라가 우리처럼 되길 바란다’는 싸구려 정체성 만을 심어주면서 말이다. 그에게 이런 세계는 전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한편으로 이미 세계의 질서로 자리잡은 자본주의에서의 우리는 (쾌적한) 병든 상태이다. 굳이 통찰을 끌어오지 않더라도 이런 사회가 제안하는 삶 자체가 상당히 파괴적이라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개개인의 부를 기반으로 한 신계급사회라는 것 말이다. 사람들이 바라는 성공은 모두 부에 집중되어 있기에 보편적 가치와 평등은 설 자리를 잃고, 교육도 서서히 파괴된다. 진리가 아닌 부의 흐름에 따른 의견들이 방향을 이끄는 천민 자본주의의 민낯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대사에서 (특히 한국인들에게) 최악이었던 공산주의를 다시 언급하는 것이 지식인의 적절한 태도라고 볼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여기에서 먼저 경계를 그어야 할 것이 있다. 바디우의 관심은 공산주의 이념을 빌어 군사정권을 세운 나라들에 있지 않았다는 점 말이다. 그의 초점은 프로이트로 돌아가자고 외쳤던 라캉처럼 마르크스의 이념 자체를 향해 있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바디우가 바라보는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먼저 살펴보고 다음 글에서 기존 공산주의의 문제점과 대안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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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마르크스 (출처 : Unsplash)

2. 마르크스의 세 가지 측면

모든 진리 탐구의 여정이 그렇듯 마르크스에 있어서도 자신의 사상을 세우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게 마련이다. 바디우는 크게 세 가지 범주로 그의 학문적 성과를 압축하고 있었다.

  • 변증법적 마르크스는 그의 초창기 학문적 성향으로 가장 헤겔주의적이었다고 한다. 노예 제도 → 봉건 제도 →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역사적 운동을 포괄하기 위해 객관적 변증법에 기댄 당시의 마르크스를 바디우는 역사철학자라고 부른다.
  • 분석적 마르크스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연구를 이어나가는데, 당시 중점을 두었던 것은 변증법이 아닌 잉여 가치, 재분배 메커니즘에 대한 분석이었다고 한다. 『자본론』을 쓰는데 인생의 가장 많은 부분을 할애한 그는, 자본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윤율을 유지하는 것이 기본 법칙임을 깨닫고 분석 작업을 통해 사회, 정치적 조직의 전환점들을 정확히 설명해주었다고 덧붙인다.
  • 정치적 (혁명가적) 마르크스는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 에서 자신의 다른 연구 방식을 통합하며 이 단계로넘어오게 된다. 즉 역사철학과 자본주의에 대한 분석적 시각이 만나는 지점에서 역사적 주체인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마르크스가 가졌던 목표는 ① 역사적 진화 모형을 만들고, ② 사회 메커니즘의 세밀한 분석을 통해, ③ 자본주의적 질서를 파괴할 수 있는 혁명적 도구를 만드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라캉의 주이상스 (향락) 개념이 시대를 지나면서 그 의미가 달라졌던 것처럼, 바디우는 알튀세르를 예로 들며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읽고 마르크스에겐 주체 이론이 없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특정 자료만으로 그의 전체 사상을 규정짓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고 덧붙인다.

3. 주체를 이끌어낸 마르크스의 분석 작업

바디우가 마르크스의 위와 같은 과정을 인상깊게 보는 것은 그의 주체 개념의 탄생 과정이 철저히 분석적이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것은 앞선 글의 질문, ‘변증법적 과정의 누적을 통해서만 반변증법적 주체가 가능하지 않을까? (준비된 만큼 기회가 오지 않을까?)’ 에 대한 긍정적인 답변이라고 할만한 부분이었다.

페터 엥겔만 : 당신이 마르크스를 정치가나 혁명가로 볼 때 그의 변증법적이고 분석적인 작업으로부터 정치적 필연성이 도출된다고 생각하나요?
알랭 바디우 : 물론이지요. 그의 책을 읽으면 실례들을 찾아낼 수 있어요.
p. 45

위 내용에 따르면 마르크스가 혁명적 주체의 개념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구조적 분석을 진리의 영역까지 (주체를 움직이게 하는) 몰아붙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기존의 자본주의적 사회 구조를 아무리 분석해 봐도 마땅한 대안을 찾을 수 없었다는 것, 즉 기존 구조의 붕괴만이 진정한 해결책을 등장시킬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랐던 것이다. 결국 혁명을 위한 ‘주체’는 철저한 이해 (변증법적, 분석적) 과정 끝에 탄생할 수 있었다.

한편 이런 변증법적 방식은 일어난 사건 (붕괴) 을 이해하는 데에도 같은 방식으로 적용된다. 마르크스의 분석에 따르면 모든 붕괴는 불완전하다. 붕괴가 발생하는 것은 어느 한 지점에 불과할 뿐으로 그곳이 무너지더라도 다른 장소는 여전히 기존의 사회적 구조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이런 붕괴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구조에 대한 명확한 이해, 즉 분석 작업이 선행되어 있어야만 가능하다. 사건이 일어나도 그 가치를 정확히 해석할 수 있어야만 그것을 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주체에 편입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디우가 보기에 마르크스의 혁명적 주체, 그리고 사도 바울의 부활적 주체가 탄생한 것은 모두 기존 질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가운데 (변증법적 주체), 그리고 그것이 붕괴됨으로 인해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반변증법적 주체) 때문이었다.

4. 공산주의의 의미

그렇다면 바디우는 어떤 이유에서 공산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일까? 그가 설명한 내용을 살펴보면 아래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4.1. 보편적 이념

바디우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모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적 운동을 이론화 하는 것이다. 바디우는 이를 보편적 형식화라고 설명하는데, 그가 보기에는 공산주의 이념을 사용하는 것이 이런 진정한 운동을 형식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진정한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 개인, 공동체에만 해당되는 (특수성) 운동이 아닌 말 그대로 ‘모두를 위한 것’ (마르크스의 인터내셔널 개념), 보편적인 의미를 갖는 운동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운동은 가장 먼저 공산주의 이념의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이해를 위한 다른 작업 (분석적, 변증법적 선택) 이 필요하지 않다고 이야기 한다. 오히려 공산주의 이념을 기준으로 두 가지 방법들을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또한 보편성을 추구하기 때문에 철학적이다. 철학의 진정한 관심은 절대자 (앞선 글에서 절대성이라고 표현한), 즉 집단적 삶에서 우리가 어떻게 보편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만을 우선시하는 자본주의는 이런 생각을 스스로 형성할 수 없다.

4.2. 대안적 운동의 과정

한편으로 진정한 운동은 주체의 운동처럼 끊임없는 형식화의 과정을 거치는데 마르크스의 분석이 그랬다. 그는 매일 같이 벌어지는 사안들이 자신의 공산주의 이념과 어떻게 관계 맺는지를 알고자 했다. 일종의 기준점으로 삼은 셈인데 바디우는 마르크스의 이런 방식에 깊이 공감하는 모습을 보인다. 즉, 실제적 상황에 끊임없이 적용함으로써 이론화 – 현실과 괴리된 채 역사철학에 머무르게 하는 – 에만 머무르지 않도록 애쓰는 실천적 이론가라고 평가했던 것이다. 따라서 공산주의는 하나의 대안적 운동, 즉 현재가 아닌 다른 어떤 구조가 가능하다는 신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점이 특히 중요하다고 바디우는 강조한다. 오늘날 부의 편중, 추종만 부추기는 (공동체에 대해 야만적인) 병든 자본주의에 있어서도 다른 이념의 가능성을 찾기 위해 이 개념을 다시 소환했던 것이다.

4.3. 머무름(권력화)에 대한 저항

주체와 공산주의에 있어서 바디우가 무엇보다 운동에 강조점을 둔 것은 모든 해방 이론이 현실화 된 이후 부정적 경험으로, 특히 해당 이념이 국가나 지도 권력과 융합하게 될 경우 아주 특별하게 부패해 왔기 때문이다. 이 부분 (기존 공산주의의 문제점) 은 다음 글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텐데, 간단히 예를 들자면 소외된 민중들에게 권력을 돌려주겠다는 대의를 걸고 출발한 공산주의 국가들의 철권통치가 오히려 그들을 지독하게 억합했던 것을 들 수 있겠다. 다른 한 편으로는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시점을 예로 든다. 즉 기독교를 믿지 않는 백성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행사하는 폭력, 고문이 정당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공산주의 운동과 국가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가 국가 권력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 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공산주의 운동이 국가를 전복시키는 것에 초점을 둔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것, 달리 말해 초심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고하는 것에 의의가 있기 때문이다.

5. 내재적 예외를 위하여

금관에 불순물이 섞여있는지 알아보라는 지시를 받았던 아르키메데스는, 같은 물체라도 부피에 따라 넘치는 물의 양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는 “유레카!”를 외치며 욕조에서 뛰쳐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깨달음은 하나의 사건이고 개인이 주체가 된 순간이다. 분명 사건은 외부에서 주어졌지만 이미 그의 개별성의 토대 (수학적 지식) 를 통해서만 발견될 수 있었다. 이미 자원을 갖고 있었음에도 알지 못하던 상태였던 개인은 그런 신념을 붕괴시키는 사건을 통해 새로운 보편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처럼 내재적 예외란 이미 존재하고 있으나 알지 못하고 있던 그 무엇을 일컫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해되지 못한 채 남아있던 실재인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바로 그런 존재였다. 자본가의 부의 증진을 위해 헌신했지만 결코 빛을 볼 수 없었던 잊혀진 존재 말이다. 따라서 소외된 이들을 돌아봐야 한다는 표현은 단지 윤리적 태도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들이야 말로 우리를 주체로 이끌어 주는 결정적인 동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 중앙일보, 출산율 0.92명… 세계 꼴찌 기록 또 경신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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