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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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주를 든 소크라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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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들아, 소크라테스처럼 자기가 지혜에 관해서는 실제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아는 자가 너희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자이다.”
p. 23

정확히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이 나진 않지만 한국 학생이 유학생활 중 경험했던 일이라고 한다.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콜롬버스에 대해 아는 사람?’이라는 질문을 던져 별 생각없이 손을 들었는데, 생각보다 손을 든 사람이 많지 않았다. ‘어떻게 콜롬버스를 모를 수 있지?’라고 생각한 순간 교수님은 손을 든 다른 친구를 지목했고 그 학생은 일어나 콜롬버스의 삶을 몇 분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 유학생은 콜롬버스의 이름과 업적을 그저 한국의 ‘교과서 수준으로만 아는’ 정도였으나 발표한 학생은 그의 삶을 꽤나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자신이 알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 부끄러웠음을 고백하는 그런 내용이었다.

이 일화가 생각났던 것은 소크라테스가 ‘앎’에 대해 그 누구보다 진지한 질문을 던졌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무지함을 진심으로 (어쩌면 전심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다) 믿었던 그가 선택한 방법은 당대의 지혜자들을 찾아 그들의 논리적 전제를 그야말로 낱낱이 캐물어 아는 것에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만났던 어떤 사람도 자신이 안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경우가 없었다. 이 때문에 자신과 상대방이 모르는 것은 동일하지만 적어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조금 더 지혜롭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단단한 진실을 알기 위한 이런 순수한 시도는 젊은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에게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일이자 세력에 대한 위협으로 다가왔기에 결국 고소와 재판을 통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

총 네 개의 대화편으로 이루어져 있는 이 책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서 고소된 내용에 대해 항변하고 (변론), 사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친구 크리톤이 탈옥을 권유하자 이를 반박하며 (크리톤), 독배를 마시기 전 철학자가 죽음을 사모하는 이유에 대해 변증하는 (파이돈) 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 대화편인 향연에서는 만찬장에서 에로스 신을 찬양하는 것을 주제로 많은 대화가 오고간다. 그렇게 서양 철학의 출발점이 된 그의 삶을 조명해 보면서 오랜 인문학적 탐구의 여정을 지속해 나가보고자 한다.

1.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지혜는 무엇이었을까?

재판정에서의 변론을 통해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두 가지로 구분 짓는다. 한 가지는 능숙한 기술, 예를들어 예술가나 장인들처럼 특정한 일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자들이 지닌 능력이다. 이를 인간을 초월한 지혜라고 보며 경이로움을 드러내면서 자신은 이러한 지혜를 갖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설명할 수도 없음을 이야기한다. 반면에 자신의 명성을 있게 한 지혜는 지극히 ‘인간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변증이라고 일컫는, 즉 직관이나 경험에 의지하지 않고 추론을 통해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연구하는 것[1] 말이다.

나는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관찰하여 살피는 일에 지쳐서 녹초가 되었네…. 내가 육안으로 사물들을 관찰하고, 여러 감각을 통해 사물을 이해하려고 하다가, 내 영혼이 완전히 눈멀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네. 그래서 변증에 따라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진실을 고찰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지…. 나는 실제 현실 속에서 실체를 고찰하는 사람이 변증으로 실체를 고찰하는 사람보다 더 진실에 가까이 간다는 것에 전혀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네. 어쨌든 나는 그런 식으로 탐구를 해나가기 시작해서, 그것이 원인과 관련된 것이든 그 밖의 다른 것과 관련된 것이든, 그때마다 내가 보기에 가장 탄탄하다고 생각되는 변증을 전제해놓고는, 그 변증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참된 것으로 보고,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모두 참되지 않은 것으로 보았네.
pp. 175 – 176

논리적 추론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확실한 전제, 즉 설득력 있는 원인을 아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때문에 그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고 여겨지는 가정을 딛고 한걸음씩 근원적인 지점으로 나아가게 된다. 하지만 이런 방식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신체의 연약함’이었다. 신체의 감각과 기관의 작용이 현실에 대한 지각을 흐리게 해 순수한 사유를 어지럽힌다고 봤던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불멸하는 영혼이 육체의 방해를 벗어날 때 신적인 존재로서 순수한 지혜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오직 신만이 진정으로 지혜롭다[2]고 여기는 전제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고 말이다. 이처럼 그를 죽음까지도 개의치 않도록 이끌었던 주체적 진리는 순수 이성의 추구를 통해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에 있었다.

2. 소크라테스가 지혜를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된 이유는?

소크라테스는 친구인 카이레폰이 델포이 신탁을 통해 세상에서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없다는 답변을 받았음을 민망한 듯 이야기 한다. 하지만 사제의 대언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기에 이를 반박하고자 지혜자들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렇게 정치인, 시인, 장인을 두루 만나 대화를 나눠보지만 그들 스스로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전제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시를 쓴 본인보다 다른 사람들이 시에 대해 보다 잘 설명할 수 있었고,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은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해 다른 영역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자신보다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 떠난 여정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경험한 것은 반복된 ‘신탁의 성취’ 뿐이었다.

‘우리 두 사람 모두 대단하고 고상한 무엇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자기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는 반면에, 나는 그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모르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안다고 착각하지는 않는 것을 보니,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롭기는 하구나.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에, 적어도 이 작은 것 한 가지에서는 내가 그 사람보다 더 지혜로운 것 같아 보이는군.’
p. 20

애초에 지혜자들을 시험해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밝혀내는 것에만 목적이 있었다면, 산파술로 점철되는 그의 삶은 오래 유지되지 못했을 것이다. 최후의 변론을 통해 그는 일평생을 오직 신께만 충성해왔음을, 재물보다 선한 영혼을 추구하는 것에만 몰두해 왔음을 강조한다. 지혜에 있어 절대적 권위자로 여겨졌던 신의 명령과 이에 대한 믿음이 그의 삶 전체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혜로운 사람을 찾겠다는 처음의 열망은 본질을 따져 묻는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지혜 자체를 탐구하는 열망으로 변화되어 간 듯 보인다. 서양 철학의 시조이자 성인으로까지 추대받는 그의 삶은 이처럼 자신의 믿음을 끝까지 밀어붙인 주체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3. 소크라테스적 주체는 무엇일까?

하지만 재미있는 부분이 있다. 분명 절대 이성인 신에게만 복종하는 삶을 선택해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했던 그였지만, 그러한 삶을 이끈 것이 신에 대한 반발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기원전 4세기의 그리스에서 신탁의 영향력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할 만큼 절대적이었다. 신은 전적으로 지혜로운 분이자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그런 분이 소크라테스를 가장 지혜롭다고 했다면 그저 크게 기뻐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신의 선언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품고 이를 반박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게 된다. 신에 대한 강한 믿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신에 저항하는 이 모순된 상황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3.1. 반항에는 본질적인 이유가 있다.

오히려 신의 판단이 옳음을 믿고 이를 당당히 드러내기 위해 여행을 떠난 것이라면 차라리 이해가 된다. 믿음을 통해 자신감을 갖게 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 소크라테스는 신탁이 잘못되었음을 드러내고자 했기에 이런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불순종이라는 차원에서 신에 대한 믿음이 약했다고 보는게 더 적절한 해석일수도 있겠다. 떠나기 전에는 믿음이 약했지만 탐구 과정을 통해 신탁이 옳았음을 확인하고 믿음이 굳건해졌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가능성은 소크라테스에 의해 명백히 부정된다. 그는 이미 여정을 떠나기 전부터 신에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갖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께서는 무슨 의미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가? 이 무슨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란 말인가? 나는 내게 큰 지혜가 없다는 것은 물론이고, 작은 지혜조차 발휘하지 못하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신께서 가장 지혜롭다고 말씀한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신께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거짓일 리는 없는데.’
p. 19

따라서 남은 가능성은 여전히 강한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신탁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는 것 뿐이다. 하지만 필자가 뒤늦게 깨닫게 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그가 신탁에 반박하려고 했던 것은 실은 그 의미를 알기 위해서였다는 점이었다. 즉 반박을 위한 반박이 아닌 그처럼 터무니없(다고 여겨지)는 말씀을 하신 진짜 의도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한동안 나는 그 신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몰라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다가 많이 주저하고 망설인 끝에 신이 무슨 의미로 그런 신탁을 내리셨는지를 알아보고자 한 가지 방법을 시도하기로 했습니다. 나는 지혜롭다고 소문이 자자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서 얘기해보면, ‘신께서는 내가 가장 지혜로운 자라고 단언하셨지만, 당신이 나보다 더 지혜로운 것이 분명하지 않느냐’고 자신있게 말함으로써 그 신탁을 반박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p. 19

결국 마지막의 ‘반박할 수 있겠다’는 문장의 강렬함에 사로잡혀 그 이유를 고려하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행동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거나 잘못된 것으로 여겨지더라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는 것은 좀처럼 드러나기 어려운 이러한 의도 때문이다. 결국 신을 믿는다면서 왜 반항해? 라는 생각은 소크라테스를 세심히 이해하지 못했던 필자의 불찰이었던 셈이다. 이 질문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실 신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라고 마땅히 대체되어야 했다.

3.2. 스스로를 알 때만 응답할 수 있다.

게다가 소크라테스는 지혜에 있어서 만큼은 안타까울 정도로 스스로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작은 지혜조차 발휘하지 못한다’는 그의 생각은 ‘지혜가 전혀 없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말이다. 하지만 결핍에 대한 그처럼 극단적인 인식은 신탁의 메시지에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도저히 납득하지 못할 선언을 마주하는 순간을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 그가 이미 만인이 인정하는 지혜로운 인물이거나, 아예 관심조차 없는 인물이었다면 신탁의 내용에 별 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탁 이전에 그는 이미 지혜에 무지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었던, 자기인식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욕망하는 것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욕망하는 것이고, 결핍되어 있지 않을 때에는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정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런 것은 아닌지 한번 잘 생각해보게. 아가톤, 그것이 필연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게는 너무나 분명해 보인다네.”
p. 270

순간 라깡의 글을 읽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던 소크라테스의 이 같은 발언은 그가 이미 인간 내면의 작동 원리도 잘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늘 합당한 원인을 탐구해 온 그였기에 욕망의 원인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 싶다. 비록 책에서는 신탁 이전의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소개되고 있진 않지만 신탁에 대한 반응을 통해 평소에 그가 얼마나 지혜에 목말라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사실상 지혜가 없다고 여겼던 결핍감은 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역설적으로 이에 비례한 강렬한 욕망 또한 갖고 있었음을 설명해 준다. 신탁이 있기 전부터 이미 지혜는 소크라테스의 중심 주제였다. 다만 이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특별한 계기가 필요했던 것 뿐이다.

3.3. 깨달음은 언제나 사후적이다.

앞서 소크라테스가 지혜를 두 가지로 나누어 바라보고 있음을 설명한 부분이 있다. 자신의 지혜를 지극히 ‘인간적인 것’으로 보았던 반면 남들을 가르칠만한 능력을 가진 자들의 지혜는 인간을 초월한 것으로 바라봤던 것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은 철저히 신탁 이후, 즉 지혜의 탐구 과정 이후에 가능하게 된 일이었다. 모두의 동경 대상이 되는 지식적 지혜만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에서 자신만의 방식을 발견하고 그것이 세상에 드러남으로써 비로소 지혜는 ‘구분 지을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질문과 상대방의 동의로 결론을 이끌어내는 그의 탐구 방식은 시대를 막론하고 분명 탁월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특별함을 갖고 있었다. 기존에 그가 믿고 있었던 지혜의 정의는 신의 선언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이는 여지없이 ‘분열된 주체 속 욕망의 출현’이라는 라깡의 공식을 상기시킨다. 이른바 절대적 권위자의 메시지는 그의 잘못된 사고 체계를 거세시켰다. 이 때문에 그동안 굳건히 믿고 있던 지혜에 대한 정의가 잘못된 것일수도 있다는 자각, 즉 제 3의 정의가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결국 상징적 진리로 대리되는 지혜의 가능성은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존재론적 차원(나는 지혜자인가 아닌가)을 넘어 소유론적 질문(지혜자는 누구인가)을 던지도록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유아가 오이디푸스의 세 번째 단계인 ‘거세’를 통해 비로소 팔루스를 찾아나서는 여정을 시작할 수 있듯 소크라테스 또한 같은 차원에서 ‘진실을 가진 자’를 찾기 위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탁은 애초부터 옳은 것이었지만 그 의미는 인간적으로 탐구함을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었다. 결국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신탁과 주체의 환상적인 합작 덕분이었다.

4. 글을 마무리지으며

소크라테스를 읽으며 느꼈던 것은 새로운 차원을 연 그의 뛰어난 능력 뒤에 감춰져 있던 마음 속 어두운 그늘이었다. 신탁이 있기 전까지 당대의 뛰어난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소크라테스는 과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쩜 지혜가 조금도 없다고 여기는 그의 생각이 스스로를 얼마나 강하게 옭아맸을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진지함이라는 프레임에 구속되어 있던 필자 뿐 아니라 스스로를 신뢰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의 아픔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는 전혀 뜻밖의 기회를 통해 잘못된 인식 속에 파묻힌 자신의 보물을 드러낼 수 있었다. 아마 신탁이 없었다면 평생토록 지혜자들을 부러워하며 방황하는 삶을 살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주변 인물들은 이미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기에 신탁을 받을 때 ‘누가 제일 지혜롭느냐’가 아닌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인물이 있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정작 당사자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는데 말이다. 결국 결정적인 기회는 신을 통해 발현되었지만 이를 전혀 의도치 않았던 친구와 이미 그런 삶 또는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던 소크라테스의 순수한 우연적 과정을 통해 역사적 결과물은 탄생할 수 있었다. 삶의 진지한 도전을 끝까지 밀어붙인 존경할만한 어른이었던 소크라테스. 시대를 뛰어넘어 깊은 울림을 주는 책들은 이처럼 분명 중요한 주체적 진리를 담고 있었다. 오래 두고 깊이 음미하고 싶었던, 이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바로 그런 책이었다.


※ 이 글은 현대지성 출판사의 도서 지원을 받아 작성한 서평입니다. 그러나 서평의 내용은 전적으로 제 주관적인 감상임을 밝힙니다.

[1] (주) ‘변증’은 직관이나 경험에 의거하지 않고 추론을 통해 논리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으로 대상을 연구하는 것이다. 나중에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현실세계에 대한 관찰이나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성에 의거해서 논리적인 추론과 변증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오직 사유와 변증을 통해서만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p. 155

[2] 아테네 사람들이여, 내 생각에는 오직 신만이 진정으로 지혜롭습니다. 그리고 신께서 우리에게 신탁을 주시는 이유도 인간의 지혜라는 것에는 가치가 거의 또는 전혀 없음을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p. 23

 * 이미지 출처 : Britann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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