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라는 이름의 십자가 (feat. 놀이터의 의미),『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슬라보예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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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50

벌써 21년 전에 개봉된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인 네오는 가상세계에서 깨어나 기계에 의해 배양되고 있는 인류의 참혹한 현실을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다. 모피어스는 깨어난 그를 보며 이렇게 이야기 한다.

“Welcome to the real world.” (현실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책 제목의 배경이 된 이러한 장면은 지젝이 이야기하는 ‘실재’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전에 읽었던 책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에서는 오늘날의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심각한 문제는 존재의 원인인 ‘실재’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렇다면 환상의 세계를 교란시키는 인간들을 뒤쫓는 스미스 요원은 시스템 안정화를 위해 우리를 거짓 환상 속에 머물게 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도라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체제에 헌신하는 그 조차 어느 순간 통제 불가능한 시스템의 과도한 잉여 (시스템의 실재) 가 되어 제거되어야만 하는 운명을 안고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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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붕괴시켰던 9.11 테러가 있었던 다음해, 2002 한일 월드컵이 한창이었던 때, 동시에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압사 사건’으로 반미 시위가 격렬하게 벌어졌던 시기에 출간된 책이다. 우리나라에는 그로부터 9년이 지나서야 처음 소개되었지만 말이다. 참고로 2003년에 출간된 그의 책 『죽은 신을 위하여』가 2007년에 한국에 소개되었던 것을 생각해 보면, 테러를 향한 미국의 문제적 태도를 신랄하게 비판한 이 책 또한 한편으로 우리나라에 있어서 하나의 실재로 기능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한편 ‘슬라보예 지젝의 기독교 옹호’ 글들을 작성하면서, 지젝이 말하는 실재에 대해 나름대로 이해하고 설명했다고 생각했는데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막상 실재란 개념을 떠올려 보면 ‘불가능성’ 이라는 단어 외의 다른 표현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글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기존의 궁금증을 많이 해소할 수 있긴 했지만 좀 더 정확히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제목을 보자마자 읽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번 글에서는 테러를 향한 당시의 문제점을 고발한 그의 메시지를 소개하기에 앞서 무엇보다 중요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을 ‘실재’에 대해 조금 더 깊이 다뤄보고자 한다.

1. 실재란 무엇일까?

늘 생각해왔던 것이긴 하지만 라캉의 세계관은 우리의 정신 세계를 이해하기에 정말 탁월한 도구인 듯 싶다. MECE (구성 요소간 중복, 누락 없음) 의 모범 사례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으로서의 상상계, 법적 질서로서의 지극히 합리적인 상징계, 그리고 상징계에 포함되지 못한 잉여로서의 실재계의 틀을 가지고 정신세계를 매력적으로 설명해 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상상계와 상징계는 그나마 그 의미를 쉽게 유추해볼 수 있지만, 실재계가 진짜 현실을 얘기하는건지 현실을 왜곡한 걸 얘기하는건지 한동안 헷갈려하며 읽었던 기억이 난다. 라캉이 설명하듯 마치 유령처럼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는 그런 개념이었던 것이다.

산트너는 라캉이 그의 세미나 『앙코르Encore』에서 실재계를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내린 것을 즉각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매우 정확한 형식화를 사용하고 있다. 유령적인 환상적 역사는 ‘계속 일어나지 않고’ 바로 그 역사의 개입에 의해 생겨난 상징적 영역 안에서는 명기될 수 없는 외상 사건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라캉이 말했듯이,유령적인 외상적 사건은 ‘써지지 못하도록[그 자체를 명기하지 않는] 멈추지 [또는 그치지] 않는다.’(1)(그리고 물론 정밀히 말해서 그렇게 존재하지 않지만, 그것은 계속 존속한다. 즉,그것의 유령적인 존재는 계속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출몰하고 있다.)
(1) Jacques Lacan, Seminar XX: Encore, New York: Norton 1998, p. 59.
슬라보예 지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김재영 역, pp. 98 – 99

2. 불가능의 외상

아마 많은 분들이 머릿속에 뚜렷이 각인된 어떤 충격의 이미지를 하나쯤은 갖고 계실 것이다. 당시에는 이해될 수 없거나,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야말로 ‘불가능한’ 사건이 ‘외상 trauma’이 되어 우리와 불쾌하게 동행하게 되는 것을 말이다. 이런 외상의 충격이 크면 클수록 우리 삶은 험난할 수 밖에 없다. 자극 되어서는 안될 (그러지 않길 간절히 바라는) 이러한 상처의 아픔이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재경험되면서 우리를 고통 속으로 내몰아 격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외상적 사건은 어린 나이에 경험할수록, 강도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고통이 클수록 이를 억제하기 위한 강도도 높아지기 때문에 정신적 차원의 질병 뿐 아니라 육체적 질병으로도 그것의 고통스러움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라캉과 아동 정신분석』 리뷰 – 아이의 증상이 부모의 거울반응인 이유 – 를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 싶다.)

3. 외상 극복 시도의 나쁜 예

그렇다면 이처럼 우리를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외상적 실재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일반적인 해법은 간단하다. 그것을 제거해 버리거나, 발생하지 않도록 예방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은 지젝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끊임없이 비판한다는 점 (과거의 외상적 기억을 행복한 기억으로 ‘일시에’ 바꾼 존 그레이의 사례) 인데, 존재의 원인을 제거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대체 존재의 원인이라는 건 뭘까? 관련해서 지젝이 자주 예로 드는 것이 있다. 카페인 없는 커피, 지방을 뺀 크림, 무알콜 맥주… 무언가 핵심이 빠졌다는 의미인 것 같긴 한데 아마 직접적으로 와닿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 아래 이미지들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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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놀이터와 한국의 놀이터를 비교해 본 것이다.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아마 곧바로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이라는 인상을 받으셨을텐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안전성’이다. 즉, 단조롭고 천편일률적인 한국 놀이터의 고질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이들의 공간을 ‘너무 안전하게 만들어 놨다’는 것이다. 아니 아직 자기 몸도 충분히 못 다루는 아이가 놀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라고 그런 걸까? 여기서 필요한 생각이 바로 그 ‘다칠 수 있음’을 용인하는 것에 있다. 위험해 보이는 독일 놀이터에 숨은 뜻이라는 기사를 보면 독일로 건너간 한국인 엄마가 경험한 독일 놀이터를 이야기해 준다. 원목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일관되지 않고, 목적이 불분명해 보이는 기구들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한국에서라면 엄두도 못낼 만한 곳을 독일 아이들은 부모의 큰 간섭 없이 자유롭게 오르내린다. 아무래도 위험한 면이 있기 때문에 놀다가 다칠 수도 있다. 또한 원목을 그대로 사용하기 때문에 간혹 마감 처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곳에서는 심지어 찔릴 수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을 아이가 직접 경험할 때에만 그 어려움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성장의 중요한 메시지, 폭력적 침입이라는 외양을 띈 실재는 그렇게 우리 삶의 중요한 계기로 함께해야 함을 이야기한 것이다. 놀이에 있어서의 위험성을 ‘제거’한 것, 그것은 아이의 성장을 향한 욕망의 ‘가능성’을 박탈한 것이나 다름 없다. 성장을 향한 욕망을 유지시키는 저항점 (위험성) 을 제거했기 때문에 아이의 상상도, 발달도 그 수준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주체로서 성장해야 할 아이가 처할 어려움을 볼 수 없어 직접 나서려고 하는 부모의 실재, ‘안전한 것’을 향한 가상의 세계를 벗어나야 우리는, 아이는 진정한 세계와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미국의 경우도 9.11 테러를 통해 이러한 교훈을 얻을 수 있었음에도 그 실재를 외면해버렸다는 것이 지젝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였다. 우리의 상처를 있는 그대로, 그러면서도 우리의 과오와 타자의 문제를 구분지어 받아들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4. 환상을 가로지르기

이처럼 폭력적으로 경험되어 우리를 각성시켜주지만, 그 자체로는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실재를 우리는 어떻게 대해야 할까? 지젝이 요구하는 자세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하나는 실재를 대면할 수 없는 끔찍한 괴물로 여기는 것이 두려움으로 인한 잘못된 선입견일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위의 예로 보자면 아이가 놀다가 크게 다칠지도 모른다는 염려 자체가 나의 실재로서 아이를 향해 급하게 ‘행동하도록’ 이끌텐데, 이 때 한걸음 물러서서 이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다. 가능성이란 일관된 질서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것의 예외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만이 존재를 있는 그대로 품어줄 수 있다. 우리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시스템의 규칙이 아닌 외설적 불문율이라는 것은, 결국 이처럼 내게 주어진 사건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느냐가 결정적으로 중요해진다.

정신분석은 당연히 우리를 특이한 환상들로부터 자유롭게 해주고 우리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수 있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라캉의 목표는 그 정반대에 가깝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는 “현실”(환상에 의해 구조화되고 지탱되는) 속에 침잠해 있다. 그리고 우리 정신 속의 억압된 다른 차원은 이 침잠에 저항한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증상으로 나타나 이 침잠을 방해한다. 따라서 ‘환상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스스로를 환상과 완전히 동일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일상적 현실 속으로의 침잠에 저항하는 과잉분을 구조화하는 환상과의 동일시를 의미한다…. ‘환상 가로지르기’는 주체가 공상적인 변덕에 연루되는 일을 그만두고 실용적인 ‘현실’에 적응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정확히 그 반대를 뜻한다. 주체는 일상적 현실의 한계를 드러내는 상징적 결여의 효과에 복종한다. 라캉적인 의미에서 환상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공상을 초월하는 환상의 진짜 핵심과 그 어느 때보다도 긴밀한 관계에 놓인다는 점에서 가장 깊숙이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pp. 31 – 32·

두려움을 갖게하는 환상을 걷어내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대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현대적 사조에 가깝다. 오히려 라캉을 통해 지젝이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삶의 구조를 지탱해주는 이러한 외상적 환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환상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이런 환상을 스쳐 지나가는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체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드러난 외상의 흔적이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결국 외상을 받아들이라는 말은 ‘당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정으로 아는 길은 이처럼 외부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실재의 폭력적 침입 속에 새겨져 있다. 결국 요약하자면 실재란 기독교적으로 십자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감당하기 가장 두려워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매우 역설적인 불가능성의 가능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마가복음 8:34 (KRV)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1] 첫 번째 이미지 출처 : google
[2] 한국의 놀이터 이미지 출처 : sos3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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