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기독교 옹호’에 대한 이전 글
①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의 문제
2. 욕망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2.1. 동양(불교)적 관점 : 욕망에 대한 부정적 이해
열반은 탐욕(貪慾), 분노(憤怒), 어리석음(愚痴) 등 인간의 마음을 더럽히는 번뇌의 불이 꺼지고 아무 것에도 어지럽혀지지 않은 이상적인 상태를 말한다. 이러한 뜻에 따라, 열반의 이상경(理想境)은 일체의 번뇌의 속박에서 벗어나(解脫) 있으므로 적정(寂靜)한 것이라 하여 일반적으로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말한다. 고타마 붓다는 현실의 생사의 고(苦) 세계를 일체개고(一切皆苦)라고 파악하였는데, 에에 대해 고(苦)를 멸(滅)한 이상(理想)의 세계를 열반적정(涅槃寂靜)이라고 하였다.
위키피디아, 열반
불교로 대표되는 동양적 가르침은 살아가는 동안 우리를 괴롭히는 일체의 번뇌를 꺼뜨려 완전한 정신의 평안함에 이르는 것(열반, nirvana)이다. 하지만 지젝에 따르면 이러한 태도는 고통의 원인이 되는 조건인 욕망을 포기하는 것일 뿐이다. 앞선 글에서 지적했던 뉴에이지식 해법의 문제 – 우리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외상적 기억을 극적으로 변경(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것 – 처럼 우리 존재를 구성하도록 끊임없이 자극하는 실재를 제거해 욕망 자체를 잃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고통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다는 점에서 오늘날 서양에서 동양적 지혜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일부 일어나는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었다.
2.2. 서양적 관점 : 욕망의 가능성 탐구
하지만 거짓 현실을 향한 병리적 욕망과 욕망의 포기라는 선택지만 존재하는 이러한 세계관에 비해, 서양적 세계관에는 제 3의 길이 있다고 지젝은 이야기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무 자체를 향한 욕망’이다. 이게 대체 무슨 말일까?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욕망한다는 뜻일까?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열반을 향한 욕망’ (욕망의 포기) 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이처럼 수수께끼 같은 그의 답변이 정신을 아득하게 했지만 그의 설명을 반복해서 곱씹어 보니 그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를 향한 욕망은 무 자체가 아닌, ‘무를 통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대상’으로 향해 있다. 즉, 무 자체를 향한다는 것은 바로 그 ‘없음’의 상태가 ‘있음’을 만들기 위한 전제로 기능한다는 뜻이었다. 결국 지젝이 셸링과 하이데거를 통해 풀어내고자 했던 것은 ‘접근 불가능한 원인-대상’으로서의 ‘실재계’였다. 핵심은 그것이 어떻게 욕망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는 것에 있었고 말이다.
1) 사라지는 중재자
설명의 출발점은 셸링이었다. 『세계시대』를 통해 그가 해명하고자 했던 것은 우주의 탄생 과정, 그러니까 성경 창세기 1장 2절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 과 같은 상태에서 세상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었느냐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에 있었다. 지젝이 ‘신화에서 로고스로의 이행’ 또는 ‘실재계에서 상징계로의 이행’이라고 멋지게 표현한 이러한 과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를 일으킨 사건, 즉 ‘행위 결정’이라는 가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 지점에서 다른 철학 이론들은 잘못된 길을 걷게 되는데, 반계몽적인 관념론은 원-우주로부터 행위를 ‘추론’해 만들어낸다. 반면 유물론은 ‘행위의 우선됨’을 주장하면서 관념론자들의 원-우주에 대한 환상적 입장을 비난할 뿐이다. 하지만 셸링은 어디에도 쏠리지 않는 제 3의 길을 선택한다. 사실 연구의 결론을 이렇게 세상에 내놓기도 쉽지 않을텐데, 그는 세 차례의 설명적 시도를 통해 결국 행위를 결정한 토대를 확립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의 시도가 결코 가볍지 않았던 것은 불가능성에 대한 결론의 치밀함이었다.
한번 성취된 행위는 즉시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영원한 특성을 얻게 된다. 이것은 일단 한번 처음 가정되어 밖으로 인도되면 즉각 무의식으로 침전되는 의지와 같다. 이것이 시작, 하나 되기를 멈추지 않는 시작, 진정으로 영원한 시작이 가능한 유일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여기서도 역시 시작은 스스로를 알 수 없음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번 행해진 행위는 영원히 행해진 것이다. 어쨌든 진정한 시작인 결정은 정확히 그것을 불러낼 수 있기 때문에 의식보다 먼저 나타나지 말아야 하고,마음으로 회상되어서도 안 된다. 어떠한 결정과 관련하여 그것을 다시 비추게 하는 권리를 스스로 확보해 놓은 사람은 결코 시작을 완수하지 못할 것이다. – F.W.J. von Schelling, Ages of the World/Slavoj Zizek, The Abyss of Freedom, Ann Arbour: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97, pp. 181~2.
p. 110 에서 재인용
성취된 행위, 즉 우주 창조의 행위는 그것이 완수되자마자 그 어떠한 잔여물도 남기지 않은 채 (회상 가능성조차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버렸다.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이렇게 심오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운데, 지젝은 이 텍스트를 통해 욕망에 대한 제 3의 길로써 ‘사라지는 중재자’ 라는 개념을 등장시킨다. ‘무 자체를 향한 욕망’이 선택하도록 이끄는 이러한 원초적 개념은 대립을 공식화하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를 창조에 적용해 보면, 비합리적인 욕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질서 잡힌 우주가 탄생할 경우 곧바로 사라지게 되는 것, 다시 말해 차별화를 세우는 움직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뭔가 한 번에 잘 와닿지 않는 이 개념은 헤겔을 통해 보충되는데, 그의 초기 작품에서 존재론적 광기의 상태 (‘세계의 밤’, 세계로부터의 주체의 철저한 퇴각, 자기 축소) 는 인간 이전의 본성에서 상징적 세계로 넘어가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로 언급된다. 결국 위 내용들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공허와 혼란의 상태에서 고뇌하는 것만이 질서를 창조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세계의 밤’이라고 했던 것이고, 바디우가 『투사를 위한 철학』에서 표현을 살짝 바꿔 ‘철학의 밤’이라고 표현했던 중간 과정에 대한 설명이었다.
2) 진리의 전제로써의 비진리
하이데거 또한 마찬가지다. 하이데거는 존재들[1] 가운데서 인간의 출현 자체가 어느 정도 실체의 균형을 깨어버린다는 점에서 이를 ‘존재론적 이전의 교란상태 (인간의 자기 중심성)’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상태는 진리 자체보다 더 오래된 (망각된) 것으로 이미 상태 자체가 혼란을 안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 속에서 각각의 존재들은 자신들만의 본질적인 움직임을 통해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러한 비진리의 움직임 가운데서 드러난 진리, 그것이 바로 지젝이 말하는 하이데거의 ‘사건’이다.
진리는 ‘주체적이지’도 ‘객체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모든 것들이 그것들의 본질 속에서 나오도록 함으로써 세계 속으로의 우리의 활발한 참여와 우리의 세계에 대한 역동적인 개방을 동시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더 나아가 획기적으로 결정된 존재, 드러남의 양식으로서의 진리는 어떤 초월적인 궁극적 토대(신적 의지, 진화적인 우주법칙…)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그것의 존재 내부에서 획기적으로 일어나고, 발생하며, ‘이제 막 생긴’ 어떤 것, 즉 ‘사건’이다…. 진리의 핵심에 비진리를 헤아릴 수 없는 배경으로서 인식하는 것이 충분하지 않는가? 모든 획기적인 진리사건은 그 배경을 토대로 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다.
pp. 119 – 120
이 설명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결국 진리를 탄생하게 하는 것 (진리의 원인) 이 다름 아닌 헤아릴 수 없는 비진리, 즉 실재라는 점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제 3의 길은 이분화된 욕망의 갈림길 (① 거짓된 현실을 향한 욕망과 ② 욕망의 포기) 이전의 실재 그 자체를 욕망하는 것, 달리 말해 본질을 욕망하는 것이다. 이를 불교의 열반을 향한 태도에 도입하자면, 혼란/전도/방해적 실재가 비어있는 열반에 이러한 실재를 위치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욕망을 포기하는 것(열반)도 아니고, 욕망을 왜곡시키는 것(병리적 욕망)도 아닌, 오히려 욕망을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3) 실재의 역설
이 지점에서 지젝은 라깡을 통해 실재의 탁월한 특성에 대해 설명한다.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된 실재는 이해할 수 있는 그 어떠한 방법도 없기 때문에 오직 환상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디우를 통해 읽었던 『사도 바울』에 대한 이야기로 연결되는데, 이는 오직 이러한 실재를 통해서만 보편적 진리가 가능하다는 기막힌 역설이다.
어떠한 진리의 과정은 오직 – 그러한 과정이 실재를 가리킬 수 있는 지점에서 – 그러한 진리의 개별성에 대한 즉각적인 주체적 인정에 의해 지탱될 수 있을 때만이 보편적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의 준수나 특수한 징표들에 의지해야 하는데, 그것은 복음을 한 공동체의 공간에 고착시키고, 그것이 보편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막을 뿐이다.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p. 48
바울이 목숨을 걸고 전하고자 했던 ‘예수 부활 사건’은 그것이 ‘우화’였기 때문에 기독교가 보편적인 종교로 거듭날 수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가 행한 기적들, 그리고 부활 사건이 실존했던 일임을 믿었던 (그것이 아니고서는 십자가 사건이 의미가 없어진다고까지 주장한) 파스칼은 본문에서 바디우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특수한 징표 (기적을 행하심)’를 통한 당시 신비주의 종교들과 다를 바 없는 유대 종교 중 하나로 추락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약 성경의 2/3 (27권 중 17권) 를 저술한 바울은 예수의 일대기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는다. 바디우가 보기에 모든 상상적인 가능성(이적에 집중해 본질을 잃어버리는)을 철저히 배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을 실재의 자리에 남겨두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바울은 마치 이를 알고 있었던 듯 실재에 어떠한 환상을 덧붙이고자 시도하기보다 ‘예수 부활 사건의 의미’에만 몰두했던 것이다.
한편으로 『사도 바울』을 리뷰했던 당시에도 실재에 대한 설명은 상당한 충격이면서도 아리송한 면이 있었는데, 지젝의 설명을 통해 보충되니 그 의미를 보다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앞서 설명했던 것처럼 불가능한 실재에 대해 갖게 되는 환상 (불가능을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 은 외상적 절단의 본 모습에서 눈을 돌리게 하는 유혹 행위로 작용하도록 만든다. 물론 이런 관점은 확립된 모든 ‘진리체계’가 우리의 생명의 자유로운 흐름을 변형시키고 질식시킨다는 해체주의의 입장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오류 없이는 어떠한 생명체도 살 수 없다’는 니체의 형이상학적 저항안에 머물러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또는 뉴에이지처럼 교만한 인간은 이제 자연의 처분에 겸손히 따라야 한다는 것도 아니다. ‘무를 향한 욕망’은 진리 안에 내재된 비진리, 그 안에서 사건을 탄생케 하는 반복적인 환상의 가로지르기인 것이다.
사실 이번 글에서는 지젝이 말하는 기독교와 이교의 차이를 전반적으로 짚어보고 싶었으나, 내용을 이해하며 풀어나가다 보니 불교와 욕망에 대해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아무래도 큰 틀만 잡아놓고 내용을 정리해가면서 궁금하거나 필요한 부분들을 채워넣는 식으로 글을 쓰다보니 구성이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 듯 싶다. 아무쪼록 양해 부탁 드리며, 이어지는 글을 통해 불교 외 다른 종교들과의 차이점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1]
1929년에서 1930년까지의 강의 과목인 『형이상학의 기본 개념들』의 제2부에서 하이데거는 불활성 대상(돌),동물(도마뱀 • 벌) 그리고 인간의 서로 다른 존재론적 지위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다. 돌은 세계가 부재하고, 동물은 세계에서 불쌍하고, 인간은 세계를 형성한다는, 즉 세계와 그 자체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 그의 유명한 정의이다.
p. 130
- 표지 이미지 출처 : ibeliev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