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우리는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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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에 손을 뻗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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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공산주의 복원을 말하다』 관련 전체 글
① 우리는 어떻게 주체가 될 수 있을까? (현재 글)
② 마르크스와 공산주의에 대한 바디우의 생각
③ 바디우가 공산주의 이념을 고수하는 이유

이번 책은 공산주의 이념에 대한 알랭 바디우의 생각을 읽어보려고 했던 것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주체 개념을 심도있게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그의 주체 이론을 통하지 않고서는 정치 개념에 다가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듯 정치적 행위란 행위자의 이념, 원칙, 정책 등을 통해 스스로를 증거하기 때문에 높은 수준의 주체성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사실상 주체만이 유일하다고도 할 수 있기에 정치에 앞서 그의 주체성을 먼저 접하게 됐던 것이다. 따라서 본 글에서는 알랭 바디우의 주체에 대해 먼저 살펴보고, 다음 글을 통해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가 보도록 하겠다.

1. 주체성에 대한 배움의 과정들

1.1. 이념을 가진 존재

최근까지 갖고 있던 주체에 대한 정의는 ‘이념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었다. 관련해서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1]은 결국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주체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순수 이성에 다다르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수용했던 소크라테스, 사도 바울의 급진적 주체성, 그리고 참된 삶의 핵심이 이념에 있다는 것을 명료하게 설명해 준 바디우, 조르조 아감벤의 ‘가능성의 총체’로서의 이념에 이르기까지. 덕분에 나름의 주체성을 정의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2. 자율성의 주체

이후 알랭 르노의 『개인』 에서는 오늘날의 개인이 있기까지의 역사를 개괄해 볼 수 있었다. 서구 사회에서 무려 1700년대까지 이어졌던 ‘타율로 정의된 자유 (기독교적 의무)’에서 ‘근대의 주관적 자유 (자율)’, 그리고 ‘의무없는 권리’의 시대인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개인이 세워져가는 과정을 상세히 전해주고 있었다. 책을 통해 저자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근대의 주체가 자율성과 독립성에 이중의 가치를 부여했다는 것, 즉 현대의 철학자들이 독립성만을 옹호(신토크빌주의)하거나, 자율성과 독립성을 이기주의로 규정(하이데거주의)하는 시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이를 토대로 스스로를 성찰하고 세우는 진정한 자율성의 주체가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1.3. 변증법적 / 반변증법적 주체

한편 지난 번 글에서는 라캉의 주체화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헤겔의 변증법과 알랭 바디우의 반변증법을 비교하며 두 가지 관점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헤겔의 변증법적 주체가 전제되어야만, 사건을 통해 우연히 도래하는 바디우의 주체가 더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마무리를 지었는데 (쉽게 말해 준비된 자에게 기회가 따른다는) 이번 글에서는 그 둘의 관계를 보다 깊이 탐구해 볼 수 있을 듯 싶다.

2. 바디우의 주체

2.1. 바디우 주체 개념에 영향을 준 인물들

알랭 바디우는 1937년생으로 올해 83세이다. (오래오래 사셔서 좋은 가르침 더해 주세요..) [2] 그는 1950년대 현상학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후설) 에서, 50년대 말 구조주의 (라캉, 알튀세르, 데리다, 레비스트로스, 하이데거) 로 나아가지만, 늘 주체가 정치의 근본적 범주라고 생각해 내적 저항감을 갖고 관련 저자들의 글을 읽어왔다고 한다. 이들 중에서도 당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라캉의 학설이었다고 하는데, 무의식이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는 그의 혁신적인 깨달음과 더불어, 정신분석학적인 주체(무의식의 주체)를 보존하고, 한편으로 새롭게 변형시켜 완전한 중심점(욕망의 주체)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라캉과 관련해서는 필자의 라캉 탐구 글들을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 싶다.)

2.2. 진리와 사건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바디우의 주체가 반변증적이라는 것은 주체성이 내부에서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을 뜻한다. 바울을 굳이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진리와 사건이라고 하는 주체 탄생의 원리, 즉 어떤 결정적인 계기 (진리와 접촉한 사건) 로 인해 전혀 다른 (이념적)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을 아마 한 명 쯤은 알고있을 것이다. 이들이 수적으로는 적어도 널리 알려지게 되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도전과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리의 ‘운동’이 바로 바디우가 말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운동에 강조점이 있는 것은 지속성이 없는 상태는 진정한 주체적 삶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2.3. 개인과 주체의 구분

바디우가 기존의 주체 철학을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다. 외적 계기와 지속성이라고 하는 두 가지 특성을 가진 이만 주체라 불릴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철학은 개인과 주체를 온전히 구분짓지 못했기 (융해됨)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데카르트의 코기토적 주체도 개인적 경험을 통한 깨달음이었고, 사르트르의 의식도 개인의 의식적인 형상을 주체로 이름 붙였던 것이다. 하지만 바디우에게 있어 개인은 그저 자연적인, 인간적인 동물에 지나지 않은 존재다. 그저 삶에 머무르는 것, 그가 스피노자를 빌어 ‘존재 속에서 머무르다’라고 표현한 것은 단지 존재 자체만으로 특별한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가 키르케고르의 헤겔 비판 – 헤겔이 언어를 통해서만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한 것 (언어적 지배로 인한 개인의 해체) 을 비판하고 개인 자체의 고귀한 가치를 세우기 위해 신학적 맥락에 위치시킨 것 – 을 예로 들어 비판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주체 철학은 주체와 개인을 엄밀히 분리하기 위해서만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2.4. 절대자와 절대성의 구분

그렇다면 헤겔은 어떻게 바라볼 수 있을까? 변증법의 과정에서 대자적 경험 (반反, 또는 부정) 을 하나의 외적 사건으로, 그 과정을 반복하는 것을 주체적 운동으로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 앞선 정의에 따라 주체를 변증법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분명 가능하지 않을까? 바디우 스스로도 헤겔의 부정 작업이 개인이 스스로를 뛰어넘는 경향을 가질 수 있었다고 밝혔던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책을 읽는 중에 필자가 가졌던 의문이자 상대 대담자인 페터 엥겔만의 질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여기에서 바디우가 문제 삼는 것은 주체성의 순수한 차원이다. 헤겔의 관점에서는 절대자가 이미 개인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 즉 부정의 계기가 이미 내재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변증법의 과정이 분명 외부로부터의 반영이기는 하지만 이를 변증화하는 원동력이 내재돼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개인과 주체의 융해라는 차원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있어 개인은 절대자로부터 버려져 있는 존재다. (참고로 그는 무신론자로 절대자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하지만 절대자의 부정이 절대성의 부정으로 이어질 수 없는 것은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수학과 학문, 예술, 사랑, 정치 (진리의 조건들이라고 이름 붙인) 를 예로 든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인간은 그 자체로 유한하지만, 무한으로 향하는 통로를 갖고 있다는 것 말이다. 평범한 소시민이 권력의 폭력에 저항하는 투사가 되고, 그런 주체가 되기 전까지 자신이 그런 사람이 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 정치적 차원에서의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무신론자임에도 절대성을 옹호할 수 있었던 것은 보편성이 가능하다고 여기는 그의 신념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신을 거부하면서 거기에 속한 절대자, 주체의 구원, 좋은 일을 행하고 소망하는 능력, 신비주의까지 거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신이 없다는 건 그저 가능한 한 편안하게 사는 것이 전부인 세상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는 절대자와 절대성을 동일시하는 부정적 무신론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문제를 분석하지 않은 채 그저 하나의 나쁜 대상으로 환원시켜 버리는, 여전히 반대의 문제를 안고 있는 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관점에서는 “신이 죽으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고 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발언도 절대성, 즉 주체성을 상실한 인간의 동물적 추락을 통해 지극히 제한적인 것들만 가능하게 될 뿐이다.

2.5. 무한함과 유한함

한편으로 절대성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자연히 무한함과 유한함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우리를 이끌어 준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유한함과 무한함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유한함이 무언가 눈에 보이고 한계가 명확한 어떤 것인 반면 무한함은 끝이 보이지 않는, 도달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을 듯 싶다. 하지만 바디우는 이를 뒤집어서 생각해야 된다고 이야기 한다. 무슨 말일까? 무한함이 멀리 떨어져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실은 우리가 무한함에 둘러싸여 있다 (무한함이 실재이다) 는 것, 그리고 유한함이란 늘 무한함의 결과, 작품이라는 것으로 말이다. 따라서 주체가 된다는 것은 공존하고 있던 무한함과 접촉한 순간을 의미하며, 이런 경험을 통해 유한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앞서 예를 든 정치적 주체 뿐 아니라, 예술 작품, 학문적 깨달음 등이 모두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바디우가 1997년 『사도 바울』을 통해 구체적으로 밝혔던 것처럼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충격적인 깨달음, 곧 우리 또한 죽음의 상태(유한함)에서 부활(무한함)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통해 바울은 주체성에 있어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바디우는 ‘주체가 된다’는 표현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그의 개인성을 유지한 상태로 무한함과 접촉하게 되므로 ‘주체의 영역에 편입된다’고 설명하고 있었다. 오늘날 모든 개인이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차원을 바디우식으로 풀어보자면 모든 개인이 무한한 가능성과 마주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내용을 대화에서 밝힐 수 있다는게 놀라울 따름인데 (이 책은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출판한 것이다), 마무리 짓는 차원에서 바디우의 주체에 대해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자.

절대자로부터 버려진 상태의 개인은 그 자체로는 동물적 인간에 지나지 않지만, 어떤 외적인 사건, 즉 이미 도처에 널려 있었던(?) 무한함과 접촉함을 통해 주체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그렇게 새롭게 깨닫게 된 진리(이념)가 개인을 사로잡았기 때문에 그는 반복적인 운동으로 가시적인 (유한한) 창조물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는 결코 내부적 운동을 통해 발생할 수 없는 것이며, 우연한 기회라는 제약을 통해서만 주체성이 드러날 수 있게 된다.

무엇보다 개인의 가치를 순수한 육체적 무의미의 차원으로 전락시키고 (그럼에도 무한한 가능성은 포기하지 않는다), 무신론자임에도 불구하고 유신론자보다 더 정교하게 절대성의 진리, 은총의 진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에 대해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이념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는지에 대해 보다 정교하게 알 수 있었고, 그의 생각에 충분히 공감이 갔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변증법적인 누적 이후 반변증법을 만났을 때 보다 의미있는 주체가 탄생할 수 있다는 입장에 대해서는 여전히 변함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따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지 바디우도 분명 비슷한 생각 – 절대성이 배제된 상태에서 개인의 변증법적인 성장 – 을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어쩌면 학자로서 개념의 명료성을 지키기 위해 단지 선을 긋기만 했던 건 아니었을까?

한편 주체에 대한 개인적인 정의에 있어서도 수정이 불가피하게 됐다. 단순히 ‘이념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이념적 삶의 존재’가 되는 것, 진리를 깨달은 자로서의 삶을 살아내는 존재만이 주체의 과정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인이 주체라고 불리더라도 지속적인 운동이 없이는 개인의 자리에 머물 수 밖에 없다. 오늘날 기독교가 수많은 비판에 직면한 것도 어찌 보면 많은 경우 ‘이념을 가진 존재’에 머물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예수 이름을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명제를 입술로 시인해 구원 받은 주체라 불리게 됐지만, 그런 믿음을 살아내는데 충실하지 못했던 것은 아닐지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 일인 듯 싶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21절 (KRV)


[1] 주체와 관련된 이전 글들
1. 주체화 과정을 설명하는 변증법과 반변증법, 『라깡 세미나 · 에크리 독해 1』, 조엘 도르
2. 나를 ‘고유한’ 존재로 만드는 것, 『도래하는 공동체』, 조르조 아감벤
3. 의미있는 삶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이념, 『참된 삶』, 알랭 바디우
4. 무신론자인 철학자가 바울의 주체성에 주목한 이유, 『사도 바울』, 알랭 바디우
5. 인간 소크라테스 이해하기,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명』
6.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소크라테스의 변명』, 플라톤
7.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소중한 이유, 『개인』, 알랭 르노

바디우적 주체에 동의할 수 밖에 없는 개인적인 고백
8. 진정한 회복탄력성은 지지경험을 통해 완성된다, 『회복탄력성』, 김주환

[2] 위키백과, 알랭 바디우

* 표지 이미지 출처 : Pexe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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