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삶이라는 건 참 어렵다. 유교적 전통은 형식적인 차원에서 이미 그 수명을 다했고, 종교계를 잠식한 물질 만능주의는 세상과는 다른 길을 제시해야 할 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듯 보인다. 한편으로 기성 질서에서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워진 개인은 이를 만끽할 겨를도 없이 황량한 광야에 홀로 내던져져 버렸다.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건가? 아니, 어쩌면 질문은 단 하나만 남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라고 말이다. 행복은 돈으로 가질 수 있는게 아니라고 공공연히 이야기 하지만 이를 믿는 사람들이 설 자리는 계속해서 줄어들고 있다. 돈이 있어야 마음의 여유를 갖고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잔인한 현실 공식이 철 없는 이상주의자들의 입을 점점 더 강하게 틀어막고 있기 때문이다. 금수저를 제외하고 자신의 힘으로 큰 부를 일군 사람들은 부 자체가 목적이 아닌 자신만의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여 왔다는 미담을 수도 없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에게는 해당되지는 않는 얘기라고 여겨 선뜻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남 이야기인 척 말하지만 실은 필자의 이야기다.
이 책, 『참된 삶』은 바로 이런 인식을 꼬집는다. 다름아닌 근대성과 자본주의 조합의 참혹한 결과를 말이다. 비록 지구 반대편 프랑스 노학자의 분석이지만 점점 더 단일화 되어가는 세계 시장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의 지적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바디우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 인구의 10%가 가용 자본의 86%를 소유하고 있다고 한다. (1% 인구는 46%의 가용자본 소유) 그리고 우리나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속해있을 40%의 사람들은 나머지 14%의 자본을 소유하고 있다. 그럼 나머지 50%는? 자본으로 환산할만한 것이 없는, 사실상 무소유의 삶을 살아간다. [1] 10명 중 1명이 9개의 빵을 차지하고 4명은 1개의 빵을 나눠 먹을 수 있지만 5명은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 아마 각 나라 안에서도 비슷한 비율로 부는 분배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킬’ 철학자의 의무(소크라테스의 죄목이었다)란 이와 같은 현실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진지하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에 있었다.
1.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무엇일까?
1.1. 전통적 입문의례의 붕괴
바디우가 보기에 오늘날 젊음의 특징은 ‘전례 없는 자유로움’에 있다. 하지만 기꺼이 따를만한 새로운 이념과 관련된 자유가 아닌 단지 전통 질서, 즉 특정한 금기가 붕괴된 것에 불과해 방황이 불가피하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전통의 질서라는 것은 언제나 위계에 따른 분리에 있었기에 중요한 단계별 입문의례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전의 나와 앞으로의 나를 ‘명확히’ 분리시키는 종교적으로 마치 ‘세례’와도 같은 이러한 의식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나마 우리나라는 의무적으로 군복무를 하고 있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프랑스는 이미 2세기 전부터 군복무가 폐지되었는지 입문의례라고 할만한 의식은 사실상 일자리를 갖는 정도만 남은 상태다. 이렇듯 두 존재(청소년과 성인)를 명확하게 분리시켜주던 구분선이 희미해지면 서로의 정체성이 뒤섞이게 마련이다. 이러한 뒤섞임이 새로운 결과를 낳았다면 좋았겠지만 어느 한 쪽으로 쏠리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자본주의라는 이념 하에 성인의 유소년화, 즉 유년기의 연장에 불과한 모습으로 우리의 삶의 가치가 전반적으로 낮아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이를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물질에 대한 추종, 바디우가 재미있게 표현한 더 크고 많은 장난감(우리의 경우 대표적으로 아파트)을 살 수 있는 것에 치중된 소위 사춘기적 욕망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존재의 뒤섞임은 청년의 때를 늘려주었고, 넘쳐나는 물질들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젊음의 시기를 찬양하는, 다시 말해 노년의 가치가 상실되는 청춘지상주의를 강화시켰다. 저자는 이를 단순화시켜 노년의 ‘지혜’, ‘정신’에서 젊음의 ‘물질’ 숭배로 가치의 우선순위가 역전되었음을 지적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는 기술 앞에서 노인들의 경험을 통해 얻은 삶의 지혜가 그 권위를 인정받기란 너무나도 어려운 상황 – 젊은층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산된 기술 민주주의의 영향으로 – 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러한 젊음의 두려움,특히 통속적으로 퍼져 있는populaire 젊음의 두려움은 우리 사회에 매우 특징적이다. 그리고 이 두려움에는 더 이상 [이를 제어할] 어떠한 균형추도 없다. 예전에도 젊음의 두려움이 있었는데, 이는 늙음이, 곧 늙은이들에게 전해진 지혜가 젊음을 억제하고 지배하며 젊은이들에게 장벽의 식별을 부과한다는 의미에서 그랬다. 그러나 오늘날 훨씬 더 걱정스러운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젊음의 방황에 대한 두려움이다. 우리가 젊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바로 젊음이 무엇인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며, 젊은이들이 어른들 자신의 세계에서 내부적인 동시에 전혀 내부적이지 않고 타자 아닌 타자가 되기 때문이다.
p. 36
1.2. 방황하는 아들들의 문제
근대성을 전통으로부터의 이탈[2]로 정의하는 바디우는 이로 인한 영향을 자녀들, 곧 남자와 여자의 경우로 나누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전통의 질서가 각자를 어떻게 다스렸는지를 알아야 그것에서 벗어난 효과를 보다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1.2.1. 아들들의 입문의례
엄격한 질서가 존재하는 아들들의 세계에서는 법으로써의 상징인 아버지를 상대하는 일련의 과정이 존재한다. 프로이트가 헤겔로부터 차용해 제시한 세 가지 아버지의 상징은 그 자체로 입문의례의 과정을 보여준다. 먼저 ① 향락적 아버지는 모든 여성을 소유한 폭군, 즉 직접적인 공격성을 의미하며, 아들들은 힘을 합쳐 그런 아버지를 살해(구체적인 반항)한다. 이후 그들은 빼앗은 권력을 평등하게 관리하기 위해 협의를 거치게 되며, 이 과정에서 죽은 아버지로부터의 정당성과 권위를 인정받기 위해 그를 승격(유일신화)시킨다. 그렇게 ② 상징적 아버지로 부활한 아버지는 살아있을 때보다 더욱 강력한 법의 복종을 요구하며 아들들을 구석으로 몰아 붙인다. 상징화 된 법은 이를 따르는 이들에게는 고난이자 죽음의 여정이 된다. 하지만 극복된 고난이 소중한 추억이 되듯, 이를 가능케 한 대상은 영광스럽게 높여지게 마련이다. 그렇게 내재화 된 법은 과거 아버지의 존재를 희미하게 하며 이는 마지막 단계인 ③ 상상적 아버지의 시기, 즉 아들의 무대를 본격적으로 도래하게 이끈다. 이 세 단계의 변증법적 과정인 ① 도착, ② 고난, ③ 순응을 통해 아버지와 아들은 비로소 화해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아들이 마침내 아버지와의 완전한 화해가 달성되는 장소 – 아버지와 공共 실체적인co-substantiel 아들, 아버지의 권한을 차지하는 아들 등 – 에 이른다면, 오직 세 단계를 거친 끝에서야 그럴 수 있다. 즉, 직접적이고도 폭력적인 공격성의 단계, 법에 대한 복종이라는 상징적 단계 그리고 공유된 사랑이라는 마지막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이다. 법이라는 매개를 통해 살해를 대신하는 대체물로서의 사랑, 그런 것이 아들의 운명이다. 구체적인 반항, 추상적인 복종, 보편적인 사랑이 바로 아들이 따라가야 할 운명인 것이다.
p. 70
이러한 상징은 기독교에서 고스란히 재현된다. 반항적 선악과 사건, 율법적 구약, 사랑의 예수를 통해서 말이다. 모든 기능 전수를 위한 훈련 과정이자 성장의 밑거름인 이러한 과정으로서의 입문의례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사실상 붕괴되었다. 즉, 고난을 통한 고양의 의미가 상실된 채 향락과 상상만이 존재하는, 바디우의 표현을 빌자면 신없는 기독교적 승리[3]만 남게된 것이다. 분명 아들들의 승리는 존재한다. 다만 상업적 근대성의 시기에서 소비적 표상만 남게 되어 주체로 세워져야 할 신적인 상징적 질서는 말그대로 폐기처분 되어 버렸다. 그렇게 영원한 젊음의 찬양 앞에서 아버지는 철저히 소외된다.
1.2.2. 몸으로써의 아들들
그렇다면 입문의례가 사라진 자리에서 아들들은 어떤 문제를 겪게 될까? 여기에서도 세 가지 방향이 제시되는데 이념이 사라진 주체적 삶이라는 점에서 이러한 선택은 ‘몸’으로 표현된다. 먼저 ① 도착된 몸의 관점이 있다. ‘변태 성욕’이 아닌 몸이 주체가 존재하는 공간이 되지 못하는, 무주체적 성적 태도(포르노그래피적)를 의미한다. 상징적 입문의례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를 대체하기 위한 방법, 즉 이전 변증법의 종말을 나타내는 흔적을 남길 필요가 있다. 몸에 구멍을 내거나 약, 또는 소음 등에 도취되거나 문신을 하는 행위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상흔을 남기는 행위는 전통적인 성인식과 형식만 닮았을 뿐 이념적 기능은 존재하지 않으므로 무한한 사춘기의 부동성에 머무는 허무한 입문의례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② 희생된 몸의 관점이 있다. 이러한 선택은 절망적인 방식으로 전통으로의 복귀를 실현하는 것으로 테러리스트적 주체가 여기에 해당한다. 상징적 아버지의 절대성을 위해 아들은 희생되어도 상관없는, 죽음 그 자체만 남은 자의 모습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③ 능력있는 몸의 관점이 있다. 오늘날 가장 많은 이들이 선택하고 있는 길로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거래될 자격을 갖춘 대상’이 되는 중간적 훈육을 수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차원에서의 ‘경력’은 그저 젊음의 평온한 기능이자 무의미의 대체물로 저자가 소크라테스를 인용해 주장하는 ‘삶을 쌓아올리는 열정[4]’에 다름 아니다. 기존 질서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것은 기존 권력에 대한 보수적인 숭배를 유발하며, 필연적으로 우리 사회에서도 지독하게 겪고 있는, 능력있는 몸이 되지 못한 존재들에 대한 차별 문제가 벌어지게 된다. 나머지 몸들은 마지막 몸을 위해 경찰들에 의해 감시, 또는 분리 수용되어야 하며 사회는 이들 제도에 순응한 자들을 통해 허약한 삶을 연명하게 된다. 하지만 승리를 향한 열정만으로는 그 허무함을 감당할 수 없다. 이념이 너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열정마저도 매일 이어지는 동일한 과제의 반복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1.3. 조숙한 딸들의 문제
그렇다면 여성들이 겪는 문제는 무엇일까? 바디우에 따르면 19세기 말 이래 여성주의적 저항은 단 하나의 문제로 귀착된다. 여자는 남자에게 의존하지 않고 실존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것[5]이다. 한마디로 ‘자율적 존재되기’라고 일컫는 여성들의 주체적 삶을 향한 시도는 이념과 입문의례가 배제된 사회 속에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입문의례를 통한 의무 부과가 사라진 아들들이 유소년기에 머무는 방황적 삶을 살게 되었다면, 여성들을 남성에 예속되게 만들었던 결혼적 틀(지켜져야 할 처녀성)이 점차 거두어지는 현대에서 여성들은 오히려 성인 여성들과의 차이가 없는 어른-여성되기만 남는다고 본다. 본래 이중적 존재로서 (대표적으로 미혼모 – 어머니이기에 딸이 아니고, 결혼하지 않아 어머니 아니며 여전히 딸인) 진리를 드러내왔던 여성들은 이미 자신에게 요구되는 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자신이 이미 어떤 존재인지, 무엇이 필요하고 이를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내면 이해의 길을 연 정신분석이 탄생하게 된 것이 근대 사회의 억압,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히스테리적 증상을 통해 우회적으로 드러낸 여성들을 통해서였음을 생각해 본다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진실을 드러낼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여성들은 자본주의 조건 하에서 남자들보다 더 현실적이고 감각적이기에 타인의 마음을 보다 잘 살 수 있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바디우는 여성들이 남성들보다 모든 일을 더 잘할 수 있다고까지 이야기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이념없는 사회 속에서는 삶을 쌓아올리는 열정 이상의 것이 되지 못한다. 단지 남성에서 여성으로 대체되었을 뿐.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자본주의의 신, 일자가 된 여성들은 언제나 예외를 통해 진리를 드러내었던 그들 안의 이중성이 결여되는 위험을 안게 된다는 점이다.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끊임없이 분열됨으로 드러나는 여성의 난해함은 수많은 문학 작품들을 통해 그 신비로움을 드러내왔다. 하지만 유적인 존재인 여성만의 위험한 유혹, 사랑의 선물, 숭고한 신비의 성격은 자본주의 하에서 계약적 지식으로 화석화 된채 하녀의 자리에 머물게 된다.
2. 이런 문제를 있게 한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가 보기에 근본적인 원인은 무너진 전통질서의 대를 이을 새로운 이념의 출현에 실패한 것이다. 그나마 냉전 시대에는 자본주의의 탐욕적인 팽창을 견제할 (비록 전체주의 국가의 이념적 하수인 노릇에 불과했지만) 공산주의라는 평등주의적 이념이 존재했으나 오늘날에는 모두가 알다시피 지리멸렬한 상태다. 자본-민주주의 국가에서 탐욕적 부의 차별적 지위를 완화시킬 방법이 있을까? 일반적으로 종교가 부과하던 전통적 이념이 사라진 곳에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 상대적 차원에서 각자의 자유로운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 중요하기에 기준이 될만한 이념 또한 강요할 수 없어 결국 어떠한 상징적 기능도 제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잘 다져진 토양 위에 뿌려진 자본주의의 씨앗은 결국 돈만이 유일한 보편적 이념이 되도록 만들어 버렸다. 다시 말해 다원화를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 사회를 움직이는 내재적 원동력이 ‘모두 같아졌다’는 것이다. 무엇을 위하여? 돈을 위하여!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일과 필요와 만족으로 이루어진 ‘동물의 삶’이다.[6] 전통 사회가 네 아버지와 같은 남자, 네 어머니와 같은 여자가 되고 이념을 잃지 말라고 명령했다면, 오늘날에는 하찮은 욕망들로 가득하며 어떤 이념도 없는, 너 자신으로서의 인간 동물이 돼라[7]고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결국 위계 있는 상징화(전통 사회)를 무로 돌린 오늘날의 삶이란 나침반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가 되었다. 위계 없는 상징화 창조에 실패한 세계엔 자본의 탐욕만이 남는다. 그렇게 소년은 이념적 이상으로서의 남자가 결핍되어 청소년기에 머물게 되고, 모든 금기가 해제된 곳에서 욕망의 추구만이 유일한 선이 된 세상은 딸들의 것이 된다.
아들이 이념 없이 살게 된다면 사유가 성숙해짐mûrissement을 견뎌내지 못했던 탓이라 하겠다. 이에 반해 딸이 이념 없이 살게 된다면 너무 조속히 그리고 매개 없이 헛된 만큼이나 야심적인 성숙함maturité을 유지했던 탓이다. 소년[아들]은 남자Homme의 결핍으로 이념을 결여하며, 딸은 여자Femme의 과잉으로 이념을 결여한다.
상황을 약간 과장해보자. 이 조건들에서 세계는 어떻게 되리라 여겨지는가? 출세 지향적이며 교활한 여자들이 통솔하는 멍청한 사춘기 소년들의 무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제공된 불분명하고 폭력적인 세계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무엇을 얻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이념을 대신하여 그저 사물들만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p. 111
3. 저자의 해결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는 서구 철학자들의 길을 밝히는 등대인 듯 싶다. 그의 삶과 죽음 그 모든 것이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소크라테스이고 소크라테스는 철학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소피스트들의 탐욕적 상대주의에 맞서 보편적인 진리가 존재할 수 있음을 끝없이 사유한 그의 삶은 ‘숭고한 가치를 담은 이념’을 상실한 오늘날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모든 철학자의 아버지인 소크라테스는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해 사형선고를 받았다. 철학의 공식적인 최초 수용은 매우 심각한 고발의 형태를 취한다. 이를테면, 철학자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고발이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을 받아들인다면, 내가 할 말은 상당히 간명하다. 나의 목적은 젊은이들의 타락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것은 – 그리고 당장의 나는 그저 그를 따라갈 뿐인데 – 우리가 참된 삶을 얻기 위해 선입견, 인정된 관념, 맹목적인 순종, 정당화되지 못하는 관습, 무한정한 경쟁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것은 오직 단 하나를 의미한다. 바로 젊은이들이 이미 뚫려 있는 길로 접어들지 않게 하는 것, 도시cité(국가)의 관습에 대한 순종에 간단히 바쳐지지 않게 하는 것, 그들이 무엇인가 발명할 수 있게 하며 참된 삶과 관련하여 다른 방향을 제안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pp. 10, 18
바디우가 후대에 바라는 바는 결국 주어진 길에 대해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유를 지속하라는 것이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구조가 은연 중에 우리를 어떻게 예속시키는지 주의깊게 관찰해볼 필요가 있다. 의미있는 공동체를 위한 평등주의적 상징화의 발명은 민주주의의 낮이 저문 후, 철학의 밤을 통해 그 실체를 찾아나설 수 있다. 붕괴된 전통의 이념적 질서를 대체할 무언가를 위해, 방황하는 젊은이들과 소외된 노인들은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오늘날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주류 세대를 향해 의미있는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세대를 뛰어 넘는 연대는 아들들의 변증법을 회복시킬 새로운 규율, 즉 이념을 창조해낼 수 있을 것이다. 무의미에 희생된 젊은 아들들은 재발명 된 사랑의 손내밈을 통해 도착된 몸의 형상을 벗어버리고, 왜곡된 방향으로 삶을 소진하는 희생된 몸에서, 그리고 정반대의 노력으로 경쟁우위에 서려는 능력있는 몸으로부터 벗어날 실마리를 찾게될 수 있을 것이다. 여성들에게 있어서도 전통의 삶의 종말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충실한 하수인이 되는 것을 경계할 새로운 법이 필요하다. 단지 번식적 동물성에 국한된 모성이 아닌 다른 차원의 여성성을 찾아내야 한다. 이들이 진리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폭력이 탄생해야만 한다.
철학, 그것의 주제는 바로 참된 삶이다. 참된 삶이란 무엇인가? 그런 것이 철학자의 독자적인unique 질문이다. 그러니까, 젊은이들의 타락이 있다면, 이는 결코 돈이나 쾌락이나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젊은이들에게 이 모든 것보다 우월한 무언가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바로 참된 삶이 있음을 말이다. 그것은 노력할 가치가 있는, 살아갈 보람이 있는, 그리고 돈이나 쾌락이나 권력을 훨씬 능가하는 무엇이다…. 철학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 어떻게든 가르치려 노력하는 것은 참된 삶이 언제나 현존하지는 않더라도 마찬가지로 결코 완전히 부재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참된 삶이 어느 정도는 현존한다는 점, 그것이 바로 그 철학자[소크라테스]가 보이고자 하는 무엇이다. 그리고 그는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 그들에게 거짓된 삶fausse vie, 곧 황폐한 삶이 있음을, 이 거짓된 삶이 권력이나 돈을 얻기 위한 격렬한 싸움으로 사고되며 실행되는 삶이라는 점을 보이려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pp. 17 – 18
결국 참된 삶, 곧 진정한 주체를 찾아나서는 과정이야 말로 철학의 이유이자 중심 주제가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물론 철학만의 질문은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한 다양한 대답들을 우리는 매우 손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전술한 것처럼 그 모든 구슬들을 가로지르는 이념의 실이라는 기준을 갖게 될 때에만 우리에게 진정한 보배로서 그 가치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4. 나를 붙잡고 있는 이념은 무엇일까?
바디우가 그의 책 『사도바울』 – 슬라보예 지젝이 바울 탐구의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고 극찬했던 – 을 통해 밝혔던 것은 신념에 목숨을 건 주체가 불러 일으킨 역사적 반향이었다.[8]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순수한 우연적 사건, 오직 그 사건 하나로 하나님 율법의 종이었던 그는 아들 예수의 종으로 극적인 회심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보상적인 것도, 내세적인 것도 아닌 이미 명백히 세상 앞에 드러난 부활의 희망 그 자체였다. 바디우의 글에 매료되었던 것은 한 인물을 전혀 다른 관점(주체)에서 해석해 낸 그의 안목과 학문적 깊이에 있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그는 무신론자이고, 바울은 예수 부활 사건을 증언하며 기독교를 세운 인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개인의 주체성을 탐구하는데 있어서 종교의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가 바라본 것은 그저 주체적 신념과 그 신념이 얼마나 보편적 진리를 드러내는지를 아는 것에 있었고, 바울의 구별 없는 사랑의 외침과 실천은 그런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던 것이다. 그렇게 진리의 출현 2000년 이후 열린 철학의 밤은 매우 성대하게 치뤄질 수 있었다.
그렇다면 주체적 인물이었던 바울처럼 나를 사로잡고 있는 이념은 무엇일까? 나는 정말 그 이념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살아가고 있는 걸까? 이념을 간단하게 ‘내가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는 무엇’이라고 정의해 본다면 이러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를 생각해볼 수 있겠다. 나는 왜 이토록 비효율적인 작업을 엄청난 시간을 들여가며 하고 있는 걸까? 컨셉, 브랜딩 따위와는 관계없이 그저 이런 책을 읽는 것이 좋았고 그것을 잘 설명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필자의 오랜 심리적 어려움을 해소시킬 수 있었던 것은 상담을 받는 가운데 함께 읽었던 정신분석 관련 책들 덕분이었다. 내가 가진 감정의 이유와 그러한 곤궁을 해소시킬 수 있는 힘은 이론(책)과 실재(상담)의 조합에 있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지식이 더해지지 않으면 감정의 해소도 제자리를 맴돌 수 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자기 이해를 넘어 자기 분석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은, 공감만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뜻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식으로 나아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이해 덕분에 상대주의, 민주주의만으로는 우리의 삶이 나아지기 어렵다는, 평등을 위한 철학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 바디우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말 감사하게도 필자의 경우는 이 두 가지 과정을 병행하면서 비로소 삶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바울의 회심 사건은 필자에게 그렇게 와 닿았다. 날 때부터 기독교인(정확하게는 개신교인)이면서도 교회를 통해서는 의미있는 회복을 경험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여전히 교회가 이 땅의 희망이 될 가능성이 있음을 믿고 있었기에 지금의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해 보였다. 필자가 글을 쓰는 이유란 그런 것이다. 일종의 성장의 기록처럼 나에게 의미있는 일에 충실하면 무언가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될거라고 믿고 걸어가는 것, 삶의 희망이 가능함을 증언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요약해서 은총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는 것, 바디우가 이야기하듯 진정한 사유는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했기에 전하지 않고서는 못배길 상태가 되어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물론 아직 턱없이 부족하지만 반복의 원동력을 갖게 되었으니 앞으로 어떤 길을 열어주실지 기대감을 갖고 그 과정을 나눠가고 싶다.
[1] p. 43
[2] p. 41
[3] p. 73
[4] p. 21
[5] p. 99
[6] p. 124
[7] p. 110
[8] 필자의 리뷰 : 무신론자인 철학자가 바울의 주체성에 주목한 이유,『사도 바울』, 알랭 바디우
* 표지 이미지 출처 : FEE Stori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