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의 모순을 시차적으로 극복한 바디우의 철학, 『투사를 위한 철학』, 알랭 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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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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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평소 빈번하게 사용하고 있으면서도 그 뜻을 정확히 알고 있진 못했던 것 같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철학은 고대 희랍어의 필로소피아(지혜에 대한 사랑)에서 파생된 단어로 세계와 인간의 삶에 대한 근본 원리, 즉 인생관, 세계관 등을 탐구하는 학문[1]이라고 한다. 사실 철학에 대한 이같은 정의는 이전에 읽었던 소크라테스의 삶 [2] 그 자체였다. 아마 인간성에 대한 부분만 떼놓고 보자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적절한 표현일 듯 싶다. 그렇다면 인간성 탐구라는 측면에서 바디우가 말하는 철학은 무엇일까? 그것이 이번 글의 중심내용이자 책을 읽는 가운데 가장 인상깊었던 부분으로, 사실 바디우의 주체를 알기 위해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철학에 대한 그의 강의는 이를 잠시 미뤄둘만큼 매력적이었다.

1. 바디우의 철학은 무엇인가?

1.1. 드러난 진리를 사유하는 것

바디우를 진지하게 접했던 것은 그의 책 『사도바울』 [3] 을 통해서였다. 당시 깊이 와닿았던 부분은 진리는 주체적인 것이라는 그의 설명이었다. 사건에 대한 믿음을 선언하고 이에 충실한 것, 비기독교인 철학자가 바라본 바울의 주체적 진리란 그런 것이었다. 이번 책을 통해서는 여기에 한 문장이 더해졌다. 철학은 진리의 출현 이후에 도래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바울의 주체성과 교리를 철학적으로 재해석한 그의 방식처럼, 이미 드러난 현상을 두고 깊이 사유함으로 깨달음을 얻는 것이 그의 철학이었다. 진리의 출현은 바디우가 ‘조건들’이라고 명명한 원인, 즉 과학, 정치, 예술, 사랑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철학은 이들 조건들에 철저히 ‘의존적’이다. (『조건들』이라는 그의 책은 이후에 다뤄볼 예정이다.) 바디우는 이러한 철학의 특징을 헤겔을 빌어 날이 저문 후에 날아 오르는 지혜의 새 ‘올빼미’에 비유한다. 경험, 앎, 삶이라는 낮을 지나 밤의 시작과 함께 도래하는 학문이라는 의미에서 말이다.

철학이 비철학적인 어떤 영역들에 의존한다는 말에 완벽하게 동의한다. 그리고 나는 이 영역들을 철학의 ‘조건들’이라고 부른 바 있다. 단지 나는 철학의 조건들을 과학의 변전에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나는 과학뿐 아니라 정치, 예술 그리고 사랑이라는 네 가지 다른 유형에 속하는 조건들로 구성된 더 광범위한 집합을 제안한다…. 따라서 철학의 미래는 이 조건들의 변화에 대한 철학의 점진적인 적응 능력에 달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경우에 철학은 언제나 두 번째로 도래한다고,철학은 비철학적인 새로움들이 나타난 이후에 도래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p. 36 – 37

철학이 진리를 드러내는 최선의 방법 중 하나라고 믿고 있던 필자로서는 놀랄 수 밖에 없는 설명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에 이르기 위해 철학을 했던 게 아니었나? 철학자가 자신의 결론을 굳건히 믿고 이를 세상에 드러내면 그 또한 진리가 되는 것인가? 문득 ‘진리는 주체적인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을 수 밖에 없는 부분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웠던 것은 이러한 의구심이 글을 읽는 동안 충분히 해소되었다는 점이다.

1.2. 개념의 분리

날로 새로워지는 기술에 맞춰 필요한 법안을 마련하는 오늘날의 입법 행위처럼, 새로운 진리의 출현은 이를 정의하기 위한 새로운 개념을 요구하기 마련이다. 이는 철학이 진리의 출현 이후에 도래하는 것이라고 하는 앞의 내용과도 연결되는 부분이다. 소크라테스의 경우, 자신이 가장 지혜로운 자라는 신탁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통해 다른 이들의 지혜의 정체를 파헤치는 산파술을 창안하게 된다. 이 덕분에 자신이 지혜에 대한 기존의 정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예술가, 정치인, 장인 등) 와는 다른, 그의 표현을 빌자면 ‘인간적인 지혜’를 갖게 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지혜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정의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탐구로 인해 분열되어 새로운 질서로 나아갈 수 있었다. 바디우의 설명은 철학의 그러한 특성을 잘 보여준다.

철학은 새롭고 거대한 규범적 분리를 제안함으로써 모든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경험들을 재조직하는 행위인데, 이러한 분리는 기존의 지적 질서를 뒤집고, 진부한 가치들을 넘어서는 어떤 새로운 가치들을 격상시킨다. p. 46

1.3. 논리적 반란

철학은 대상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기존의 방법, 또는 관념을 새롭게 하는데 이를 수 있는 진리 이해를 위한 방법론이다. 이를 통해 새로운 진리로 나아갈 수 있게 됨은 물론이고 말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이 같은 분리는 기성 질서와의 대립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개개인이 믿고 있는 논리 체계는 정신의 골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를 변경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이미 많은 내용물들이 그 구조를 전제로 배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구조가 오래될수록, 안에 담긴 내용물이 다양하고 복잡할수록 새로운 개념이 주는 충격은 크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철학이 혁명, 반란, 봉기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이유로, 바디우는 이러한 철학적 행위에 대한 좋은 정의를 시인 랭보를 빌어 ‘논리적인 봉기들’ 이라고 이야기 한다.

소크라테스가 사형 선고를 받았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요컨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는 것’은 철학적 행위를 지칭하는 데 매우 적절한 이름이다. ‘타락시킨다’는 의미를 잘 이해한다는 조건하에서 그러하다. 여기서 ‘타락시킨다’는 것은 기존의 의견들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전적으로 거부할 가능성을 가르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락시킨다는 것, 그것은 청년들에게 사회적 규범에 대한 의견을 변화시키는 어떤 수단, 모방과 찬양을 토론과 합리적인 비판으로 대체하는 어떤 수단, 그리고 심지어는 원칙의 문제가 중요시될 때 복종을 반란으로 대체하는 어떤 수단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반란이 모두의 토론 속에서 제안된 원칙과 비판의 결과인 한 그것은 충동적이지도 공격적이지도 않다.
p. 44

1.4. 창조적 반복

바디우가 알튀세르를 통해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철학은 언제나 같은 것이다. 그것은 철학의 원형이 반복적으로 순환한다는 뜻으로 이를 줄여 철학의 미래는 그것의 과거와 동일하다고까지 표현한다. 물론 이는 지향점이 유사하다는 차원이지 그것의 내용마저 동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첫 부분에서 밝혔듯 바디우는 철학이 각 시대마다 발견된 진리를 통해 새롭게 재해석 되어 왔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의 출현은 곧 욕망의 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철학자들을 자극하는 이들 진리로 인해 철학의 역사는 지속적으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많은 철학자들이 오늘날 플라톤 또는 라이프니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하이데거 또는 비트겐슈타인에게 있어 겉보기에 비슷한 강도를 갖는 지점들보다 훨씬 더 흥미롭고 자극적인 지점들이다. 그것은 철학자 자신들의 원형이 대체로 플라톤 또는 라이프니츠가 가진 원형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철학은 그 행위의 반복이라는 그 사실만이 철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내재적 유사성을 설명한다. 라이프니츠, 스피노자와 함께하는 들뢰즈, 데카르트 그리고 헤겔과 함께하는 사르트르, 베르크손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하는 메를로-퐁티, 플라톤 그리고 헤겔과 함께하는 나 자신 [바디우], 칸트 그리고 쉘링과 함께하는 슬라보예 지젝. 그리고 어쩌면 거의 삼천 년 동안 모든 철학자와 함께하는 모든 철학자.
p. 47

2. 모순의 문제

앞서 살펴본 것처럼 철학이 사유로 나아갈 수 있는 이유는 새로운 진리의 출현 덕분이다. 그러한 진리는 비철학적 조건에서 연유한 것이며 이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해석, 새로운 언어의 탄생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새로운 언어를 통한 개념의 분리는 기존 사유 질서에 대한 투쟁이자 상실로 사회 속에 자리매김 한다. 이러한 철학의 과정은 필연적으로 두 관념을 충돌시키게 마련인데, 그것은 다름아닌 자유와 평등(정의)이다. 이를 대표하는 방식은 의견(자유)과 진리(평등)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자유는 철학의 출발점에 있어서 필연적이다. 논리적 봉기를 가능케 하는 현존하는 최선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때 개개인의 의견은 자유의 이름 아래 온전히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철학적 과정 이후, 합의된 규칙에 도달한 이후에는 더 이상의 자유는 불가능하다. 오직 가능한 것은 이에 대한 복종 뿐이기에 민주주의는 철학의 원점에서는 필연이지만, 철학의 종점에서는 난점[4]이 될 수 밖에 없다. 이 문제가 철학사의 반복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고대 그리스에서 상대주의(자유)를 주장하던 소피스트에 반대해 보편주의(진리)를 내세운 소크라테스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이 두 개의 관념은 여지없이 우리를 고민에 빠뜨릴 것이다. 개인 욕망의 자유로운 확장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피해와 마주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개의 관념 사이에서 우리가 더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하는, 특히나 사회 전반적으로 타인의 의지에 예속되는 경향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자유의 관념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싶다. 필자 또한 우리는 결국 법칙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러한 진리는 자유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해 은연중에 자유를 평등보다 중요시했던 것 같다. 소신있는, 솔직한 표현에 열광하는 오늘날의 사회 분위기는 개인의 자유를 갈망하는 약자들의 의미있는 항변으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플라톤과 함께하는 바디우는 ‘자유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이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는다. 그것도 평등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하면서 말이다.

우리는 평등과 보편성이 철학 영역에서 유효한 정치의 특성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 있다. 그것을 위한 고전적인 이름은 정의이다. 정의는 보편적인 것으로 요구되는 평등의 규범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상황을 검토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우리는 정의의 이념 속에서 평등이 자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다. 그리고 보편성은 특수성, 자기동일성 또는 개별성에 비해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를 통상적으로 개인적 자유의 대표자로 정의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이유이다. 리처드 로티는 “민주주의가 철학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정치적 원칙을 통해 로티는 실제로 문화상대주의 속으로 철학을 해소시킬 것을 준비한다. 그러나 철학이 시작되던 당시 플라톤은 정확하게 반대로 말했다. 철학은 민주주의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그리고 만일 정의가 집단적인 진리로서 정치가 갖는 철학적 이름이라면 정의는 자유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p. 61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개인의 자유를 누려야 된다는 것은 상식처럼 여겨진다. 즉, 개인의 자유가 정당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것이 타인의 자유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주여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평등을 자유보다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물론 고대 아테네 소피스트들의 주장처럼 개개인은 모두 다르고 이들을 평등하게 대하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위해 고심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각자의 생각을 존중한다고 하는 것이 여러모로 간편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고민할 필요 없이 모두의 생각이 옳다고 여기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태에 머물러서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 또한 자명하기에 우리는 내적인 갈등에 놓일 수 밖에 없게 된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3. 시차(時差)적 해결

중요한 것은 바디우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1.2. 개념의 분리) 중요도와 그 실행 방법을 구분지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인간 공동체의 공정한 삶을 향한 이념은 다른 어떤 가치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란 그러한 구조 안에서만 온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의 자유라는 것은 철저히 개인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드러나지 않고서는 외부에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문제가 있다. 결국 이를 위해 필요한 최선의 방법은 민주주의이다. 우리가 온전한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견의 전적인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열린 소통이 가능해야 한다. 이러한 자유의 낮이 충분히 도래한 이후에, 우리는 철학의 밤을 열어야 한다. 하나의 지향점 아래 서로 다른 순서로 최선의 방법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최선의 해결 방법을 찾기 위해 어떠한 판단 없이 아이디어를 모으고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채택하는 우리의 다양한 기획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소위 발산 후 수렴이라고 하는 훌륭한 방식은 둘 사이의 철저한 양립을 요구한다. 둘은 어떠한 경우에도 공존해서는 안되며 그 순서가 뒤바뀌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이미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이러한 방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체감하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인 듯 싶다. 높은 곳에 계신 등 따시고 배부른 분들은 타협을 향해 나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이는 비단 정치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성과가 생존과 직결된 일부 기업들 안에서의 몸부림에 그치고 있진 않은지 생각해 볼 일이다.

모든 해방의 정치는 철학을 위해 보이건 보이지 않건 실제로 그 보편성을 완수하는 모토를 담고 있다. 그 모토는 다음과 같다. 모두가 함께이기에, 결국 모두는 공산주의자들이다! 그리고 모두가 공산주의자들이기에, 모두는 철학자들이다! p. 69

바디우는 공산주의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해방의 집단적 행동이 철학이 요구하는 사유의 규약들과 구별되지 않는 주체적 상태’[5]라고 이야기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상당히 파격적이면서도 위험한 표현이긴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개념이 보편적 평등이라는 정의를 함의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틀 안에서 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절대성이 부정되는 상대주의의 시대에 그 상대성을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더욱 엄밀한 법이 필요하다.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고 하는 인권 선언 하에서 우리는 분명 개별성을 존중할 수 있는 보편성을 향해 끊임없이 고민하며 나아가야 한다. 거기에 더해 공동체의 보편적 행복을 고민하고 있다면 이미 우리 모두는 철학자라고 하는 그의 외침은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 분과가 우리 곁에서 멀리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가르쳐 준다. 바디우가 책의 제목을 통해 투사라고 지칭한 것은 이러한 이들, 삶을 충실히 살아내는 가운데 공동체의 문제 해결을 위해 고뇌하는 ‘철학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 사유하는 일반인이 보다 많아지고 생각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을 때 우리의 자유는 분명 더욱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서구 철학을 연 것은 소크라테스(보편주의)였지만, 소크라테스를 있게 한 것은 소피스트(상대주의)였다는 점이다. 언제나 진리는 비철학적 조건으로부터 출현하니까.


[1] 위키피디아, 철학
[2] 필자의 리뷰, 소크라테스가 서양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이유, 『소크라테스의 변명』 [3] 필자의 리뷰, 무신론자인 철학자가 바울의 주체성에 주목한 이유, 『사도바울』
[4] p. 57
[5] p. 68

* 표지 이미지 출처 : portalnovos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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