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화의 한계와 치유로써의 이야기, 『서사의 위기』, 한병철

readelight

모닥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147. 서사의 위기 150 2

한 때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던 때가 있었다.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해 시청자를 단순화 시킨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상매체는 어느덧 모두의 손에 들어와 OTT1인터넷을 통해 방송 프로그램, 영화, 교육 등 각종 미디어 콘텐츠를 제공하는 서비스 – 위키백과, OTT 서비스, 일상, 업무 관련 다양한 서비스와 통합되면서 ‘스마트한 도구‘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한국 스마트폰 보급률은 23년 기준 97%2한국갤럽, 2012-2023 스마트폰 사용률 & 브랜드, 스마트워치, 무선이어폰에 대한 조사, 세계적으로도 70%3GII, 세계의 스마트폰 시장(2023-2030년)에 달한다).

『피로사회』로 유명한 한병철 교수의 신작 『서사의 위기』는 이처럼 스마트폰이 몸의 일부가 된 포노 사피엔스4휴대전화를 뜻하는 ‘포노’(Phono)와 생각·지성을 뜻하는 ‘사피엔스’(Sapiens)의 합성어. 스마트폰을 24시간 손에서 놓지 않는 신인류 뜻함 – 한겨레, 카톡 마비와 ‘포노 사피엔스’의 혼란 / 유선희 시대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존재의 많은 부분이 데이터화 되어 삶의 이야기를 잃어가는 오늘날의 위기를 진단하고자 한 것이다. 책의 내용은 쉬우면서도 어려웠다. 이야기와 정보의 특성을 일관되게 비교해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기는 쉬웠지만, 두 개념이 수 많은 갈래로 뻗어나가 아우르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당 부분 공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생각을 최대한 정리해 보았다.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문제점
각 시대의 문제점 (?)

1. ‘서사의 위기’의 의미

서사는 이야기에 내재된 전승적 지식으로, 서사의 위기는 역사성을 가진 이야기 전달 방식에 문제가 생겼음을 뜻한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수신만 받던 것에서 개인의 이야기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크리에이터 전성 시대가 되었는데 이게 무슨 뜻일까? 심지어 위기 극복 스토리로 자신을 알리는 셀프 브랜딩이 대세가 되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바로 이 점이 서사의 위기를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지적한다. 신자유주의5(작은 정부, 큰 시장) 시장 자유 경쟁이 최선의 결과를 낳는다는 이념 – 매일노동뉴스, <신자유주의> ‘신자유주의’란를 만나 날개를 단 자본주의, 여기에 급속도로 전개된 디지털화가 체제를 위한 서사 즉, 개인의 이익에만 충실한 인류의 탄생을 가속화시켰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의 기초가 되는 서사는 공동체 형성 자체를 방해한다. 신자유주의적 성과 서사는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한다. 모두가 다른 사람과의 경쟁 속에 존재한다. 성과 서사는 사회적 응집성, 즉 우리를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연대뿐 아니라 공감까지 해체한다. 자기 최적화, 자기실현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서사 또는 진정성은 사람들을 고립시킴으로써 사회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자기 자신에 대한 숭배를 좋아하고 스스로가 지도자인 곳, 모두가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공연하는 곳에는 안정적인 공동체가 형성되지 않는다. 『서사의 위기』, 한병철, 밀리의 서재, 81%

결국 저자가 말하는 서사의 위기란 ‘우리만의 이야기가 사라져가고 있음’에 대한 위기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2. 이야기란 무엇일까?

그런데 ‘이야기’라고만 하기에도 너무 막연해 책의 1/3이 지날 때까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이 어려움은 적절한 예시를 통해 해소될 수 있었는데, 큰 틀에서 정의해 보면 우리 마음을 사로잡은 의미있는 경험이라고 부를 수 있을 듯 싶다. 이런 정의는 저자가 소개한 폴 마르 (아동문학작가) 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는 소년의 이야기>라는 글에 잘 담겨 있다.

네 명의 가족 중 이야기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들 콘라드가 있었다. 그의 세계는 사실로만 이뤄져 있어 열거만 가능할 뿐, 자신만의 이야기로 의미있게 엮어내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 여동생이 이를 돕기 위해 “어느날 쥐 한 마리가..” 라고 말문을 열면, 콘라드는 말을 자르고 쥐의 종류 (설치류 둘로 나눌 수 있는데, 땃쥐인지, 생쥐인지, 들쥐인지) 를 물어보는 식이다. 아들이 이야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부모는 자신에게 이야기 방법을 가르쳐 준 무제 씨에게 콘라드를 보내게 된다. 그곳에서 아이는 분명 2층이었던 계단이 끝없이 이어지다 처음 장소로 되돌아 오는 등 마법같은 경험을 여러 번 하고는, 흥분한 채 돌아와 ’자신이 무슨 일을 겪었는지 모를거‘라며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부모는 웃으며 콘라드를 이야기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주었다는 내용이다.

2.1. 이야기와 정보의 차이

저자는 이런 이야기를 정보와 비교하면서 각각의 특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디지털화의 핵심 요소인 정보는 시대적 키워드인 효율성을 대변하는 것이다. 실시간 (무간격성) 으로 기록된 데이터는 켜켜이 쌓이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계산, 분석 돼 우리를 그 누구보다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의 흔적은 스마트폰을 통해 갈수록 촘촘히 수집되고 있지만, 행동의 이유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이야기를 할 수 없었던 콘라드처럼 중요도 없는 단순 나열 (상관성) 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빅데이터 시대, 인공지능의 발전은 그런 이론이 등장할 필요도 없게 만들어가고 있다. 데이터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정반대의 성격을 갖는다. 감정적으로 충만하게 경험되지만 그게 무엇이었는지는 쉽게 설명하기 어렵다. 이야기의 핵심 요소는 환상, 즉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베일 뒤에 남겨져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콘라드의 충격 경험처럼 의미있는 사건으로 기억되었다가, 시간의 여백을 통해 또 다른 사건과 이어지면서 새로운 의미로 재창조 된다. 결말 없는 소설이 긴 여운을 주며 오랜 기간 회자될 수 있는 이유이다. 저자는 이 둘의 차이를 포르노와 에로티시즘으로 적절히 비유한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이다. 사물을 감싸는 껍질, 베일만이 설득적이고 서사적이다. 껍질 벗기기나 베일로 감싸기는 본질적으로 이야기에 필수적이다. 포르노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에로티시즘이 사소한 것에 집중하는 동안 포르노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서사의 위기』, 한병철, 밀리의 서재, 44%

147 3. 650px DALL·E 2023 12 03 07.53.45 A conceptual illustration depicting the contrast between information and narrative. On one side show a myriad of data points and streams symbolizing 1 1
현존이 거세된 정보와 충만한 이야기

2.2. 이야기를 잃어버리게 된 과정

이야기 상실에도 일련의 과정이 존재한다. 그가 주로 인용한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 몰락의 최초 징후는 (1) 근대 초기 소설에서 나타났다고 한다. 기존에는 풍부함 경험, 지혜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조언해주는 이야기 공동체가 형성 돼 왔으나, 근대로 접어들면서 고립된 개인의 깊은 답답함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야기의 최종 몰락은 소설이 아닌 (2) 자본주의 사회에 등장한 정보를 통해서였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새로운 정보 전달 방식 (언론) 의 등장은, 기존 방식 (소설) 을 대체해 시민계급을 지배하는 핵심 도구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래도 이때까지는 새로운 세상이 가능하다는 혁명에 대한 믿음이 존재했다. 기존의 사회 질서를 강제로 전복시킨 공산당 선언 등 초심자의 기분이 만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벤야민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 (3) 후기 근대에는, 대안이 사라져 탈진한 상태에 빠졌다고 진단한다. 갈망, 비전, 장기적 지식 등의 가치가 오롯이 돈으로 환원되어 개인적인 미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에 새로운 존재, 지배 방식으로 등장한 디지털화는 우리를 더욱 교묘하고 강력하게 구속하게 되었다.

2.3. 스마트한 지배자

전통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신자유주의와 정보의 빠른 파급효과로 인해 나타난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런 흐름에 합류한 IT 기술의 정보 수집 방식도 억압이나 명령, 금지가 아닌 유혹의 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사용자들도 처음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했지만, 서비스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조치들 (작성 빈도, 피드백에 비례한 노출, 수익화 등) 이 소통 강박을 이끌어 선택의 자유가 철저히 혹사 당하게 된 것이다. 유혹의 기술은 스마트한 지배자인 플랫폼 기업들이 자신을 드러낼 필요 없이 ‘매우 효율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독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Chat GPT를 비롯한 인공지능 기술을 우리는 얼마나 주체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3. 이야기의 효과

이처럼 디지털, 즉 현실의 데이터화는 우리를 더 정교하게 알게 해주었지만, 그만큼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전쟁의 참상마저도 더 이상 큰 충격을 주진 못하며, 더 많이 연결된 듯 하지만 피상적이고, 더구나 자기 판매 시대와 맞물려 타자는 수익화의 도구로 그 의미를 더해가고 있다. 그러면 저자는 이야기의 어떤 면이 우리를 회복시켜 준다고 봤던 걸까?

3.1. 연결을 통한 의미 형성

프로이트는 의식의 주요 역할이 자극의 수용보다 주체 보호에 있다고 봤다. 침투하는 자극을 허용하면 의식 속에 자극의 자리를 지정하는데, 이 작업이 성공하면 충격적인 영향을 덜 받게 된다. 정신의 심층에 도달하는 것을 막아 준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 실패하면 외상을 입게 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꿈, 기억 작업이 진행된다. 부족했던 자극 처리 시간을 확보해 사건을 경험으로 감쇄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의식이 주어진 자극에 자리를 지정하는 것이 바로 이야기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내면에 유입된 다양한 사건들을 직조해 우연으로 가득한 텅 빈 시간에 의미를 부여해주기 때문이다.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생기는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 혼란을 진정 시켜주고 희망을 갖게 해주는 것. 이 역할을 가장 잘 감당해 왔던 것이 종교적 서사인데, 오늘날 그 의미가 갈수록 퇴색되는 것은 서사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3.2. 감정을 통한 행동 유발

개별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은 이야기를 통해 의미가 부여된다. 바로 이 때 일어나는 감정은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작게는 깨달음의 감동에서부터, 세상을 변화시키는 정치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위에는 이야기가 전제되어 있다. 이유를 설명해 주는 맥락이 우리를 감정적으로 몰입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야기는 어떠한 행동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가 계속해서 분열과 갈등을 경험하는 것도, 우리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줄 의미 있는 서사가 없기 없기 때문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3.3. 치유와 회복 일으킴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우연성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 저자에 따르면 치유의 과정은 크게 세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① 이해를 통한 치유

저자는 빅데이터의 확률 분석이 우리 존재를 보다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줌으로써 이야기를 필요 없게 만든다는 인상적인 문제제기를 한다. 데이터의 높은 정확성, 투명성이 우리의 상상력을 불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론은 조각난 사건들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고차원적인 질서이다. 이런 이론은 상상에서 출발해 다양한 사례와 시간을 통해 검증되면서 신뢰성을 확보해 나간다.

이론이 이야기라는 점은 프로이트를 보면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는 환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정신분석 서사에 적용해 신경증, 정신병 등의 증상과 행위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치유 과정은 그가 환자에게 제시하는 서사, 즉 해석에 동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다. 조각나 있던 환자의 일화들이 프로이트의 서사적 맥락에 포섭되어 의미있는 행위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② 대화를 통한 치유

모든 것이 낯선 아이들에게 엄마의 이야기는 불안을 달래주는 치유의 근원점이다. 긴장되고 막힌 상태를 풀어주어 경험이 이어질 수 있도록 돕기 때문이다. 대화는 이야기하는 사람의 과거를 구제하는 효과가 있는데 여기서도 정신분석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심리적 장애를 막힌 이야기라고 본 프로이트는, 치유의 과정이 환자 스스로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면서 가능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경청만으로도 치유가 가능한 것은 분석가의 우호적이고, 때로는 사려 깊은 침묵이 혼자서는 도달 불가능했을 생각으로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영감은 자신이 존중받고 있다고 느낄 때, 즉 공명할 수 있는 공간 속에서만 움틀 수 있다. 행복이 구원과 공명한다고 본 것은, 이야기가 함께한 사람들과 과거, 현재를 이어주고 소생시켜주는 장력이 있기 때문이다.

③ 접촉을 통한 치유

저자는 접촉도 이야기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접촉을 촉각적 이야기라고 설명한 것이다. 접촉하는 손은 이야기하는 목소리와 동일한 효과를 발휘해, 긴장과 불안을 덜어주고 내면에 웅크리고 있던 자아를 밖으로 이끌어 준다. 오늘날 디지털화를 통해 타자와 더 많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는 것이 착각이라 일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아무리 메시지를 잘 전한다 해도 대면적 상호작용을 대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네트워킹 되어 있을 뿐, 연결돼 있는 것은 아닌 것이다.

4. 우리만의 새로운 서사를 위하여

오늘날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이야기는 무엇일까? 환경에 적응하는 종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종은 도태되어 사라진다는 뜻의 적자생존6나무위키, 적자생존이지 않을까? 더불어 잘 살자는 공존공영의 구호는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만 소환되는 공염불처럼 여겨진지 오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이 자연스러운 야만의 상태. 세대 간의 갈등을 이어주는 서사도, 남녀 간의 깊은 골을 메워주는 서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개인의 생존이 최우선이 된 사회에서 돈을 쫓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서로를 돌보지 않는 공동체에서 돈마저 없다면 위기 상황을 버텨낼 재간이 없기 때문이다.

요즘 MZ, 알파 운운하며 젊은 세대가 받은 만큼만 주려고 하고, 끈기 없고 이기적인 세대라고 비판 받지만, 이 땅에 과연 그렇지 않은 세대가 있는지 되묻고 싶어진다. 좋은 의미에서 성공해 다른 이들을 돕고, 그들에게 귀감과 영감을 줄만한 인물을 손에 꼽기 어려운 가운데, 다음 세대에게만 공동체적 세계관을 요구하는 것이야말로 권위적 이기주의 아닐까? 물론 이런 이유가 서로를 탓하는 것에 머물러 있도록 내버려두어선 안 될 것이다. 서로에게 무책임하다고 스스로에게까지 무책임해서는 정말 다 같이 망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상은 공평했던 적이 없었지만, 단 한 사람이라도 나를 진실 되게 받아줄 수 있다면 이런 현실을 극복해 나갈 힘을 얻을 수 있다. 더 나은 삶, 더 나은 세상을 상상하는 것이 이야기에서 비롯될 수 있음에 공감하는 이유이다.

하지만 책을 덮으면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저자를 향한 원망이었다. 세상이 갈수록 위태로워지고 있는데, 문제를 나열하는데만 그쳐 전문가로서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록되고 누적되어 의미를 직조하지 못하는 정보의 문제를 비판하면서, 저자 본인도 선 (서사) 과 악 (정보) 의 특징들만 열거한 게 아닌가 싶은 불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은 글쓰기를 고심하던 중 서사적 여백이 저자가 의도한 바였음을 깨닫게 되면서 다행히 해소될 수 있었다. 여느 사회과학 연구처럼 데이터를 통한 정교한 현실 분석은 애초에 이 책의 취지와는 맞지 않는 일이다. 이런 연구는 다른 학자들에게 맡기고, 저자는 철학자로서 각각의 개념을 정교하게 파고들어 문제의식을 고취시키는 방법을 선택한 것으로 이해 되었다. 사실 저자에게 문명 이전시대로의 회귀 (감상주의) 를 원하는 것이냐고 반문해도 크게 이상할 것은 없다. 저자는 철저히 각각의 장단점만 설명할 뿐 서사의 회복을 위한 어떤 주장도 펼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저자가 우려한 서사의 위기는 갈수록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저자가 묘사한 것처럼 정보가 무조건적으로 나빠서라거나, 정보과포화가 근본 원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오히려 수단에 불과한 정보를 주체적으로 다룰 수 있는 역량이 매우 부족하다는 것, 심지어 그 능력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부활 (절망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 믿음) 이 가능하다고 믿는 종교적 서사가 힘을 잃어가는 가운데, 브레이크가 망가진 채 내달리고 있는 기술과 자본, 그리고 이를 소수가 독점해 벌어지는 양극화는 이미 현재 진행중이다. 상상력의 토양이 갈수록 척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고통의 순간에, 정확히는 고통 해소의 순간에 아로새겨지는 의미의 힘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 공동체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빛을 발해왔던 극복 서사가 오늘날의 어려움을 자양분 삼아 새롭게 회복될 수 있기를, 그렇게 각자도생의 망령을 역사의 뒤안길로 흘려 보낼 수 있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 본문 이미지 출처 : DA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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