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의 기독교 옹호 – ③ 조화를 추구하는 이교, 분열시키는 기독교,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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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진 쇠사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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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의 기독교 옹호’에 대한 이전 글들
① 포스트모더니즘과 뉴에이지의 문제
② 욕망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3. 조화를 추구하는 이교, 분열시키는 기독교?

3.1. 이교적 지혜

기독교 이전 시대의 종교들 (이교) 은 ‘지혜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지젝은 이야기 한다. 유한한 인간은 무한한 행복을 제공하는 신을 위해 현실적 쾌락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세계는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의 계층, 각자의 자리에서 질서정연하게 조화를 이루는 우주적 균형 상태를 이루고 있다. 카스트 제도로 실현된 고대 힌두교 우주론이 이러한 세계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최고의 선은 지구적 균형 원리이며, 악은 이런 균형을 깨뜨리고 교란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악의 처벌을 통해 질서를 회복시키는 순환 과정이 이교적 세계를 유지시키는 방법으로, 결국 요약하자면 ‘반대의 합일’이 이러한 ‘인간적 지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지젝은 여기에 더해 이런 사회 질서, 기관 간의 조화가 오늘날 뉴 에이지 접근 방식에서 다시금 부활했다고 본다. 그러나 여기에서 핵심적이지만 충격적이라 할만한 부분은, 이 같은 세계관에서 그리스도가 악의 핵심 인물을 맡는다는 점 때문이다.

<스타워즈>의 이데올로기적 우주는 뉴 에이지 이교의 우주이기 때문에 악의 중심적인 인물이 그리스도를 반영한다는 사실은 상당히 중요하다. 즉 이교의 지평 안에서 그리스도 사건은 궁극적인 수치이다. 더 나아가 헤겔의 노선을 따라 아나킨이 운명적인 오해가 아니라 올바른 통찰력으로서 힘의 균형을 회복할 전조를 받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질식하게 하는 이교의 우주 특성이 이교의 우주는 명백히 급진적인 악의 차원을 결핍하고 있다는 사실에 놓여 있다면,즉 그 우주에서는 균형저울이 선에 훨씬 더 우호적이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후기 로마제국의 창백하고 빈혈증상의, 자기 만족적이고 관용적인 평화로운 일상적 삶을 탈선시켰던 것이 급진적 악(전대미문의 부정성의 힘)의 간섭이었던 한에서 그리스도교의 출현이 어느 정도 효과적으로 힘의 균형을 회복시키는 일을 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셸링이 자신의 『세계시대』에서 그리스도의 출현을 이교의 우주적 균형,즉 모든 차이들이 궁극적으로 똑같은 심연 속으로 집어삼켜지고 마는 우주의 영원한 소용돌이의 균형을 방해하는 결심의 사건(차별화하는 결정)으로서 해석하였을 때一적어도 함축적으로一이것은 셸링의 논제가 아니었던가?
pp. 178 –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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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가 세상에 화평이 아닌 검을 주러 왔다는 의미가 바로 이런 차원이었을까? (출처 : 비즈니스 인사이더[1])

본문에서 지젝은 이교의 질서는 우리를 숨막히게 (질식하게) 한다고 설명한다. 왜일까? 조화롭게 균형잡힌 세계가 우리의 이상향이지 않나? 여기에서 본질적인 문제는 이런 이교적 질서가 ‘하나의 원리 (선)’ 만 지나치게 주장한다는데 있다. 지구적 균형이라는 선을 이루기 위해 악은 제거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인간의 교만으로 인해 오늘날의 지구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 자연의 처분에 조용히 순응해야 한다는 뉴 에이지의 태도와, 그리고 이를 위해 그릇된 것으로 여겨지는 욕망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불교적 세계관이 고스란히 연결되게 되는 것이다. 이 같은 태도는 신적 은총의 가능성은 상실된 채 우리가 영원히 선택된 질서, 행위에 고착되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구성원들을 질식시키는 것이 되고 만다. 그렇다면 이교적 관점에서 악의 상징인 그리스도 사건은 과연 무엇이 다른 걸까?

3.2. 인간 창조의 이유

여기에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신에 대한 우리의 생각인데, 무신론자들 사이에서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신을 창조했다’는 주장은 여러모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지젝은 위 본문에도 언급된 셸링을 통해 이런 생각을 흥미롭게 반박한다. 무엇보다 이러한 입장이 철저히 인간적인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이 요지로, 인간에게 신이 어떤 의미인지, 인간 역사를 설명하기 위해 신이 필요하다거나, 환상의 투사지 않느냐는 질문이 잘못된 것임을 꼬집는다. 오히려 반대로 셸링의 관점은 절대자 자체인 신을 향해 있다. 즉, 신의 관점에서 인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출현이라는 것이 신의 삶에서 무슨 역할을 하며, 어떤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해야만 했는가? 라는 것. 질문 자체가 상당히 신선한데, 사실 이곳이 셸링이 설명하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실재의 지점이었다. 하지만 지젝이 높이 평가한 것은 이러한 실재의 곤궁을 심리적으로 파악하고자 하는 그의 시도에 있었다.

그가 인류학적 주제들(또는, 오히려, 인간 정신에 대한 통찰)을 그의 가장 추상적인 신지학의 숙고를 설명하는 ‘실례’ 또는 은유로서 불러 냈을 때 一(말하자면 신의 쇠약한 광기의 교착 상태를 해소하는 신의 말씀 선언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가 갑자기 ‘올바른 말을 찾는’ 행위가 이전의 오래된 무능력한 우유부단을 해소하는 방법에 관한 일반적인 심리학적 경험을 불러냈을 때)一 그 결과는 진정 깜짝 놀랄 정도로 대단하다.
p. 155

결국 신에게 있어서도 심연 속으로 (하나로) 집어 삼켜지는 광기의 교착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내린 ‘결심’이 기독교적으로 ‘빛이 있으라’는 말씀으로 선언되며 세상은 창조될 수 있었다. 애초에 인간이 신의 형상을 닮았다고 하는 것은 창조의 적절한 이유가 되지 못한다.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우리가 신의 삶의 일부라는 것, 즉 신이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 신이 되어야 가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알다시피 기독교는 죽을 운명을 수용한 신, 즉 예수의 성육신 사건에 대한 믿음이 영원한 진리이자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가 진정으로 ‘사랑의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이처럼 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지닌 유한한 인간을 유한한 시간 속에서 선택해 전적으로 집중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해 창조의 이유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꿔본다면, 인간을 향한 그 숭고함이 한층 더 의미를 더할 수 있지 않을까?

3.3. 봉합할 수 없는 분리

그렇다면 이런 사랑의 행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왜 지젝은 이교적 세계관에서 이러한 사건을 악으로 규정한다고 본 것일까? 그것은 기독교적 사건이 이교적 우주질서가 결코 수용할 수 없는 분열의 원리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교적 지혜의 핵심이 ‘반대의 합일’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이들 구조의 차이점은 너무나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가복음 14장 26절
p. 176

아마 우주적 균형을 위한 이교적 질서에 있어 이 정도로 반동적인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지젝은 여기서 미워한다는 것은 잔인하고 질투심 많은 신이 요구하는 증오가 아니라 각자의 결정된 장소, 바디우식으로 (보편적이지 않은) 특수한 공동체를 의미한다고 설명한다. 우리나라식으로 혈연, 지역, 학연으로 연결된 이 같은 특수한 공동체의 네트워크를 벗어나 진정으로 평등한 존재를 세우는 아가페를 등장시키고자 하는 메시지였던 것이다. 아가페는 유기적 공동체에서 우리를 뽑아버리도록 분부하는 사랑 그 자체[2]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념을 통해 기독교인에게는 남성, 여성, 유대인, 그리스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구별되지 않는 개인이 됨으로서 우리 모두는 비로소 보편적 질서 (열반, 성령, 인간의 권리, 자유) 로 직접적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된다. 신을 위한 중재자인 제사장이 필요했던 구약에서 만인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비밀은, 이처럼 이교적 질서가 유지해왔던 기원전 시기를 단절시키는 과격한 차이점의 침입, 즉 사라지는 중재자의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가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을 통해 우리가 회심하게 될 경우, 영원히 질식한 상태로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우리는 스스로를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교적 영원성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게 된다.

3.4. 떼어내기

관용, 화합, 균형을 다지는 이교적 메시지는 매우 그럴듯 해 보이지만 이 당연한 것에만 함몰 (저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악으로 여기는) 되어 있을 경우, 구성원들은 그 어떤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적대성도 표출할 수 없게 된다. 인류 역사 속에 만연해 있던 이러한 숨 막히는 질서를 깨뜨린 것이 그리스도 사건이 갖는 무엇보다 중요한 의미였음을 지젝은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리스도가 당시 천대받던 세리와 창녀, 사마리아인들에게 다가가 그들의 삶에 참여했던 것은, 이들이 당시 시대가 부정했던 악, 이물질, 즉 실재 그 자체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은 이렇듯 사람을 무조건적 대상(물, 物) 의 자리에 놓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수용은 필연적으로 우리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어떠한 이질감, 지젝이 헤겔을 인용해 표현한 ‘목안의 뼈’처럼 매우 껄끄러운 감정을 느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러한 어려움을 어떠한 유령적 환상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간격을 이해로 채워 대안적 공동체 창조의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기독교는 우리가 태어난 질서체계와 강제적으로 동일시하도록 구속하는 이러한 타성에서부터 반복적으로 벗어나야 하는 힘겹고 험한 떼어내기 작업[3]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위대한 혁신은 기존에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근본적으로 의심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것을 통해 나오기 마련이다.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거침없이 극복해 나가는 수많은 위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두려움이 많은 필자도 직간접적으로 접하게 되는 이러한 메시지들 덕분에 조금씩 용기를 내고 있는 중이다 (좀 더 극적으로 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긴 하지만). 앞으로의 삶이 어떻게 이어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소비되는 가벼움이 더해가는 오늘날에 있어서 의미있는 외침이 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당장은 묵묵히 글을 써나가고 싶다. 어쨌거나 이런 가운데서 지젝을 통해 오늘날의 주요 사상적 사조, 동양, 그리고 이교적 질서에 이르기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 한 가지 더 남아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기독교 자체 내의 모순,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 근본주의적 입장을 살펴보는 것이다. 다음 시간에는 이러한 기독교의 궁극적 모순점인 유대교를 정리해 보는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다.


[1] 이미지 출처 : businessinsider [2] p. 177 [3] p. 188

* 표지 이미지 출처 : 3diassoci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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