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가히 책 쓰는 기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슬라보예 지젝의 최신작이다. (2020년 7월 1일 출간) 작년 12월 시작된 코로나19는 전세계로 급속히 퍼져 나갔고 글을 쓰고 있는 오늘까지도 그 기세는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개인적으로 겨울만 지나면 사그라들 것이라는 굳은 희망이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한 감기일 뿐이잖아?), 이제 계절의 변화가 이 불청객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 확실해진 상황에서 장기적인 공존 방안의 모색은 필수가 되었다.
이미지로 보다시피 ‘바이러스’ 자체는 RNA, DNA 같은 핵산으로 구성된 화학적 단위에 불과해 생물이 아니며, 숙주를 통해서만 자가증식이 가능한 하나의 메커니즘 (산 주검 living dead) 에 불과[1]하다고 한다. 인간이 그의 복사기로 기능하는 가운데 이미 전 세계로 확산돼 버렸기 때문에 백신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니 백신이 나오더라도 이미 코로나 바이러스의 30% 가량이 변이 징후를 보이는데 전파력은 6배나 강해져[2] 온전한 대응이 가능할까 싶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이 책의 등장은 분명 의미 있는 일이다. 올해 출간된 책이 올해 번역되어 한국에 출간될 만큼 긴박감을 드러내기도 하면서, 책의 인세를 모두 ‘국경없는의사회’에 기부한다고 하니[3] 본인이 추구하는 가치를 세상과 이보다 더 잘 나눌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유의(?)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이 책은 그의 이전 저작들에 비해 상당히 평이한 문장으로 쓰여졌다는 점이다. 아무래도 시국이 시국이다보니 그가 주장하는 ‘지구적 연대 의식’을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바람이지 않았을까?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그의 사유의 원동력인 칸트, 헤겔, 라캉, 셸링은 여전히 그의 길을 밝혀주지만 사실 까메오 수준에 불과할 뿐, 주로 인용되는 이들은 대부분 현대 학자들이다. 따라서 지젝의 깊이 있는 사유 방식이 좋아서 찾으셨던 분들이라면 적잖은 실망을 할 수도 있을 듯 싶다. 필자의 경우에도 늘 새로운 통찰을 더해주던 그의 메시지가 좋아서 읽어왔던 것이기에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다만 중요한 관념은 꼭 어려운 용어로 전달되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지젝의 가치관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는 중요한 계기도 되었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지금 어디쯤 와 있을까?
지젝은 불치병을 대하는 인간의 모습을 다섯 단계의 도식으로 압축한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의 이론을 통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를 이야기 한다. 다만 아래의 단계는 죽음, 이혼, 약물 중독 등 인간이 겪는 모든 파국적 형태에도 적용 가능하나 이 단계들이 같은 순서대로, 또 모든 과정을 반드시 거치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4]
부인 → 분노 → 타협 → 우울 → 수용
어쩌면 다양한 상실의 순간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어디쯤 와 있을까? 이미 코로나 시국을 충분히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을까? 저자가 희망하는 바를 유추해보자면 우리는 아직 분노와 우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최초 중국만의 문제라 여겼던 ‘부인’에서 신천지로 인한 ‘분노’, 그리고 지역에 국한된 문제로 여기는 ‘타협’을 넘어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에 ‘우울’해하고, 부주의로 인해 다시 환자가 급증하면 ‘분노’하는 식으로 말이다. 필자가 느끼기에 온전한 ‘수용’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아마도 저자의 주장처럼 오늘날의 문제를 넘어서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할 때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2. 코로나 시대에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
코로나와 관련해서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제란 무엇일까? 지젝이 비판했던 감염병을 무시하는 태도 (본문에서도 트럼프는 여지없이 비판의 대상이다) 도, 코로나가 곧 물러날 것이라는 생각이 망상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도,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안전하다는 생각[5]들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이란의 보건부 차관이 대규모 격리가 불필요하다는 회견을 하려다가 그 자신이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돼 바이러스는 ‘민주적'[6]이라는 명언을 남기는 촌극이 벌어진 것도 뉴스를 통해 지속적으로 최신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미국에서 백신이 개발(7월 14일, 임상 실험 대상자 45명 전원에 항체 형성됐다는 보도)되었다[7]는 반가운 소식도 들린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변이 가능성(30%)이 너무 높기 때문에 한 가지 종류의 백신으로 코로나를 얼마나, 또 언제쯤에나 극복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2.1. 믿음이 부족한 죄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뒤따를 자본의 문제보다 어쩌면 훨씬 더 중요한 문제. 수많은 과학자들이 수 년에 거쳐 경고했지만 이 지경에 이르기까지 어떤 의미있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믿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지젝은 이것이 히치콕의 영화 <사이코>에서의 형사 살인장면 (예상된 죽음이었음에도 놀라게 된) 과 비슷하다고 꼬집는다. 그런 일이 닥칠 것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놀랐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는 믿지 않고 있었다는 것이다. 감염병학자들이 매우 정확하게 예측했고, 과학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이야기 한 그레타 툰베리의 말 또한 분명 옳았지만[8] (인간의 매우 중요한 특성이기도 한) 눈 앞에 닥치기 전까지는 여전히 우리 얘기가 아니었다. 게다가 논의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저자가 브뤼노 라투르를 인용해 언급한 것처럼 코로나19는 그저 앞으로 다가올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예비훈련’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확산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식습관 같은 인간의 문화적 선택, 경제와 세계무역,복잡한 국제관계 네트워크,공포와 공황 상태의 이데올로기적 메커니즘 같은 변수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 연관성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 그 길은 브뤼노 라투르가 제시한 바 있다. 그가 코로나바이러스 위기를 두고 앞으로 다가올 기후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총연습”이라고 강조한 것은 옳았다. 이 기후 변화는 “다음번 닥쳐올 위기로서,우리 모두는 생존조건들의 재설정이라는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일상적 생존을 위한 모든 세부사항 역시 세심하게 정리하는 법을 터득해야 한다.”
p. 135
분명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세계의 대응은 그야말로 낙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언론을 틀어막은 중국은 가장 중요한 초동대응의 실패를 야기시켰고, 미국과 유럽은 강 건너 불 구경하듯 짐짓 거만한 태도로 동아시의 분투를 지켜보다가 자신들의 무능력을 더욱 극적으로 드러내 보였다. 이는 분명 전례 없는 상황, 한 지역의 문제가 더 이상 지역만의 문제로 머물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며, 최근 사상 최악의 폭우로 깊은 몸살을 앓고 있는 중국과 일본의 상황[9]을 그저 남의 나라 이야기만으로 넘겨서는 안된다는 점 또한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에게 성금을 보내자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이 방법은 서로에게 적절치 않으며, 현 시점에서는 정부 차원의 재해복구 지원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라 생각한다.)
2.2. 자본주의로 인한 신계급주의
앞서 언급한 것 못지 않게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는 바로 ‘신계급주의’이다. 그 중에서도 자택에서 근무를 할 수 있는 노동자들이 아닌, 업무 자체가 감염의 위협을 무릅 쓸 수 밖에 없는 – 요양보호사, 식당 종업원 등 – 노동자들이 그의 관심 대상이다. 여기에서 그는 한병철이라고 하는 철학자의 『피로사회』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며 그를 비판한다. 피로사회는 오늘날의 개인들이 성과와 최적화의 강박적 추구 (내적 한계와 자기 규제에 예속) 로 인한 자기착취자(성과주체)가 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여기에 대해 지젝이 비판하는 것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외부의 시스템이 이미 주체성을 좌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한병철이 정의한 ‘자기착취를 경험하는 주체’는 일부 선진국형 노동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주체이다.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생산단가가 저렴한 개발도상국들로 이양된 곳에서의 노동자들은 단순 업무의 소모적인 반복으로 지쳐가며 주인도 노예도 되지 못한다. (자기착취자들은 주인인 동시에 노예인 자들이라고 한다.) 이들은 모두 작업 일선에서 외부로부터의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데 감염보다 중요한 것은 생계이기에 작금의 상황을 감당할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사실 노동 착취라는 점에서는 그에 못지 않은 사례가 우리나라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대표적으로는 최일선에서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는 간호사들을 꼽아볼 수 있을 것이다. 자본에 의해 비용으로 판별된 간호사들은 최소한의 인력으로만 유지되며, 위급 상황에서 시스템의 부재를 말그대로 일당백으로 틀어 막는다. 한국이 자랑스럽게 선전한 K-방역도 실상은 그들의 헌신을 넘어선 과도한 희생을 딛고 올라선 어쩌면 피로스적 승리 (막대한 손해를 입어 패배나 다름없는 승리) 에 불과한 일이지 않을까? (이 문제를 적나라하게 다룬 좋은 영상이 하나 있어 아래에 소개해 보고자 한다. ‘한국 의료계의 진짜 현실’ [10]) 분명한 것은 시장의 논리만으로는, 욕망을 향하는 자본만으로는 이러한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는 점이다.
3. 코로나 시대의 공산주의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지젝은 공산주의자다. 하지만 구시대적 유물로써의 공산주의가 아닌 오늘날의 상황에 적합한 공산주의를 창안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코로나 사태가 공산주의의 형태를 이끌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골고루 비판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자본주의가 ‘재난부양책’을 무기로 더욱 강고히 복귀할 것이라는 믿음 [11] 때문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3.1. 공산주의 국가가 있기는 한가?
하지만 지젝의 생각은 다르다. 공산주의라고 다 같은 공산주의가 아니기에 러시아와 중국의 공산주의는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보편성을 향하는 그의 희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마오쩌둥의 “인민을 믿어라”에 정확히 역행하는, 중국의 공산당에게 가장 불온한 일은 국가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진지하게 믿는 일[12]이라고 조롱할 정도로 말이다. 중국에게 시급한 것은 건강한 사회를 위해 다른 목소리가 나올 수 있는 틈을 열어주는 것이다. 꼭 다당제 민주주의가 아니더라도 비판적 반응을 나눌 수 있는 공간이면 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민과 정부가 상호 신뢰의 길로 나가야 하지만 그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3.2. 지젝이 바라는 공산주의는?
사실 이 책에서 지젝이 이야기하는 공산주의는 엄청나게 급진적이라거나, 어떤 숭고한 차원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다. 어쩌면 오늘날을 경험하고 있는 많은 분들이라면 누구나 생각했을 법한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더 이상 국수주의에 머물러서는 초국가적으로 연결된 세상에서 겪는 어려움을 결코 해결할 수 없다는 것. 따라서 음모론, 인종차별주의, 개인적 차원으로의 도피가 아닌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세계적인 위기의 ‘첫’ 사례를 경험했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하며, 지구의 어느 한 지역이 붕괴되어 다른 세계에 연쇄적 파국 효과를 일으키지 않도록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자원들을 시장의 논리를 뛰어넘어 직접 배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의 예로, 특정 국가에 의료붕괴가 발생했다면 바이러스의 항구성은 더욱 짙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이를 위해 WHO등 UN산하의 많은 기구들이 존재하지만 우리가 익히 봐왔듯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최근 미국의 행보는 그런 점에서 특히 극단적이다.) 코로나19를 동아시아만의 문제로 바라보고 있던 서방 세계는 그 결과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물론 우리도 함께) 인민과 과학에 대한 신뢰를 바탕에 둔 공산주의란 바로 그런 점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필요한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포괄적 접근법은 단일 정부기구를 훨씬 넘어서서 확장되어야 한다. 그 접근법은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있는 주민들의 지역 내 통제뿐만 아니라 강력하고 효율적인 국제 협조와 협력을 두루 아울러야 한다. 수천 명이 호흡기 문제로 입원하게 된다면 엄청나게 많은 인공호흡기가 필요할 것이며,그것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수천 정의 총기가 필요한 전시 상황에 개입할 때와 마찬가지로 국가가 직접 개입해야 한다. 국가는 또한 다른 국가들과의 협력도 추구해야 한다. 군사작전 때와 마찬가지로 정보가 공유되어야 하고 계획들은 충분히 조정되어야 한다. 이상이 내가 오늘날 요구되는 ‘공산주의’라는 말로 뜻하는 모든 것이다. 혹은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월 허튼의 지적을 참고해도 좋다.
위기와 괜데믹에 취약한 규제 없는 자유시장식 지구화의 형태는 지금 확실히 사멸하고 있다. 그러나 상호의존과 증거에 기초한 집단 행동의 우선성을 인정하는 또 다른 형태의 지구화도 생겨나고 있다.
p. 88
우리는 늘 그렇듯, 하지만 더욱 긴박한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다. (지젝은 바이러스가 적이라는 주장에 비판적 – 의지를 가진 생물이 아니기 때문에 – 이지만) 연대하여 적을 물리칠 것인지, 분열되어 서로의 어려움에 쾌재를 부를 것인지. 지젝 식으로 말하자면,
야만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재발명 된 공산주의로 갈 것인가?[13]
[1] p. 101
[2] YTN 뉴스, 공포의 ‘변종 코로나19’…”약 30% 돌연변이·전파력 6배”
[3] 교보문고, 해당 책 북카드
[4] pp. 67 – 68
[5] 한겨레, 미국 30대 남성 ‘코로나 파티’ 갔다가 사망…“내 실수” 유언
[6] p. 58
[7] 동아, 모더나, 코로나 백신 실험대상자 전원에게 항체 형성…27일 임상3상 시작
[8] p. 143
[9] 한겨레, 중국 홍수 피해 14조·이재민 3800만명…장시성 “전시 상태”
[10] 씨리얼, 한국 의료계의 진짜 현실
[11] p. 121
[12] p. 25
[13] p. 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