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 뭐가 문제야?,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슬라보예 지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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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여성
실재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50 1

오늘날 우리가 추구하는 삶은 무엇일까? 어쩌면 너무 뻔한 질문일까? 이에 대한 뻔한 답은 아마 경제적인 성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경제적 부 자체만을 원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부를 통해 원하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는 것, 이러한 경제적 자유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믿음, 그러니까 행복을 위한 최고의 수단이 경제적 성공이기에 그런 삶을 원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흔히 이야기하듯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고는 하지만, (일단 넉넉히 가져본적이 없다보니 가진 자의 기분이라는게 어떤 것일지 너무 궁금하긴 하다) 현실적으로 일정 수준의 삶이 유지될 수 있어야만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지 않을까. 최근 부동산 문제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러한 삶과의 거리가 더욱 빠르게 멀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 분들이 정말 많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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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을 이렇게나 잘 표현해 주신 사진작가 분께 감사한 마음이다 (출처 : pixabay [1])

하지만 한편으로 이처럼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것에 문제는 없을까? 어쩌면 우리는 무언가를 놓친채 행복감이라고 하는 감정적 상태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자본주의라고 하는 이데올로기 안에서 그렇게 강제되어 버린 것은 아닐까? 앞에서 ‘실재’에 대한 생각을 먼저 정리해 보긴 했지만, (실재라는 이름의 십자가) 행복에 대한 지젝의 설명은 사실 책의 내용 중 가장 인상깊었던 (충격적이었던) 부분이었다.

1. 행복이란 이름의 거짓말

행복과 관련해서 지젝의 입장은 매우 단호하다. 행복을 욕망의 배반이라고 본 것이다. 왜일까? 우리는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고 (욕망하고) 있지 않나? 아마 필자의 이전 글(라캉적 분열의 의미와 공포증 사례 분석)을 보신 분들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결코 알 수 없다는 라캉의 견해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다. 잠깐 짚어 보자면,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를 바라보는 어머니를 통해 ‘어머니의 욕망(팔루스)을 가지고 있는 자’라는 뜻을 갖게 되는데, 단어 자체는 ‘아버지’이지만 의미는 ‘팔루스를 가진 자’를 뜻하는 이같은 불일치를 우리는 경험 속에서 끝없이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를 감안해보면 우리가 ‘행복을 원한다’는 ‘보편적인 대답’이 그야말로 위선적이라고 하는 지젝의 주장 또한 이해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해 우리는 (우리의 욕망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행복은 그저 사람들로 하여금 더 많은 것을 요구하도록 이끄는 힘인 욕망이 가져올 결과를 마주하지 못하게 만드는 일종의 억압적인 기표로 기능할 따름인 것이다.

주체가 자기 욕망의 불일치 안에 고착되어 있는 것이 행복의 대가이다.
p. 89

2. 이교적인 행복

그렇지. 물론 한 마디로 퉁쳤으니 당연히 정확하지 않을 수 밖에 없겠지. 그렇다면 행복을 바라는게 정말 잘못되었다는 건가? 행복을 바라는 우리의 무엇이 문제라는 걸까?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문제의식도 이전 책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과 상당 부분 연결되는 바가 있었다. 아마 큰 틀에서 보면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을 듯 싶다. 이교적 상대주의가 아닌 기독교적 보편주의 (절대주의) 라고 말이다. 사실 바로 이런 점에서 지젝과 바디우는 비슷한 입장을 보이는데 마치 소피스트의 상대주의에 맞선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같달까?

어쨌거나 앞서 언급한 행복에 대해 지젝은 이교적 (오늘날 뉴에이지로 부활한) 범주에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교적 범주란 무엇일까? 이전 책에서 지젝이 지적한 부분은 ‘조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조화를 핵심 원리로 둔다는 것이다. (관련된 글은 조화를 추구하는 이교, 분열시키는 기독교?를 참고하시면 좋을 듯 싶다.) 상징적 질서인 조화를 이상향으로 제시하기 때문에 이에 반하는 세력은 제거해 본래의 질서를 회복시키는 과정을 (지젝이 악순환이라고 표현하는) 거쳐야만 한다. 지젝이 바라보는 것은 이러한 이교적인 조화의 상태가 바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여기는 상태라는 것이다. 지젝은 1970년대 말 ~ 1980년대의 체코슬로바키아(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기 전의 사회주의 국가)가 바로 그런 상태였다고 이야기 한다.

① 물질적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고,
② 매우 중요한, 비난할 타자가 있어 개인이 책임질 필요가 없으며,
③ 다른 장소인 소비주의 사회가 가까이에 있는 상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상태가 결코 오래 유지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민주화를 향한 ‘욕망’ 때문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바디우를 빌어) 결코 진리가 아니라고 단언한다.

3. 그것이 감추고 있는 것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은 욕망으로 인해 발생되는 갈등을 외면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상징화에서 거부된, 하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실재의 외면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만족인 행복에서마저 굳이 진리라는 잣대를 들이댈 필요가 있을까? 물론 그렇진 않다. 지젝이 염려하는 것은 우리의 관심이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다는 것, 또한 오늘날 자본주의적 추동으로 인해 더욱 더 생각하기를 어렵게 만드는 것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지적 말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로 드는 것은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는 오늘날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념의 문제점이다. 이 부분 또한 바디우를 인용해 설명하는데, ‘타자에 대한 존중’이라는 공식은 ‘선악에 대한 진지한 정의’ 즉 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관념은 전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지난 세기를 통해 어렵게 성취한 너무나도 소중한 유산이지 않나? 이는 분명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여기서 바디우와 지젝이 하고 싶었던 얘기는 그럼에도 ‘모든 타자’를 섣불리 언급하는 것은 갈등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시도라는 것, 즉 히틀러의 인격의 심연을 존중할 수 없듯 (우리가 손정우를 덮어놓고 용서할 수 없듯이) 엄밀한 윤리적 판별을 통해서 타자성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타자에 대한 존중이 때로는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러한 비판적 과정 없이 개념을 무조건적으로 수용했을 때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윤리적 시험은 희생자들을 기꺼이 구하려는 태도뿐만은 아니며, 어쩌면 그들을 희생자로 만드는 자들을 가차없이 제거하려는 태도가 더욱 진정한 윤리적 시험일지도 모른다.
p. 100

이를 행복에 적용시켜 보면 어떨까? 범접할 수 없는 절대적 자유의 영역이 된 행복은 그 자체의 쾌락주의적 성격을 제어하지 못한다. 이념이 없는 자유는 그 자체로 방향성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자는 마약을 하는 순간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이들의 행복을 존중해 줘야 할까? 지젝이 끊임없이 비판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자유주의, 민주주의의 위선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와중에 민주주의가 민주진창이라는 번역이 특히 와닿았다.) 상대주의라는 허울 아래 진실을 향한 외상과도 같은 도전을 모두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하라는 주문을 끝없이 세뇌시키고 있는 오늘날에는 지젝을 따라 이교도의 악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를 다시금 소환할 필요가 있다. 다양성의 행복이라고 하는 단조로움에 마비된 사회에 열정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보편적 실재의 침입 말이다. 판단은 어떠한 선입견도 없도록 신중해야 하지만, 행동이 필요할 때는 위험을 무릅쓰고 적극적으로 뛰어든 뒤 일이 잘 되길 희망하라는 것 (서양 공리주의적 실용주의와 동양 숙명론의 결합), 그것이 바로 행복을 바라는 우리를 향한 지젝의 주문이었다.


* 표지 이미지 출처 : pixabay
[1] 이미지 출처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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