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보시기 전에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을 설명한 아래 글을 먼저 읽어보시기를 추천 드린다.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 한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
여러분은 ‘신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다. 초자연적 힘이나 현상들을 ‘신’과 연관시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지어낸 이야기[1], 또는 과거에는 종교였으나 더 이상 섬김을 받지 않는 종교[2]라는 표현도 적절할 듯 싶다. 과거에는 종교적 역할을 감당했을지 몰라도 오늘날과 같은 합리주의 시대에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 즉 소설 정도로만 치부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느닷없이 신화 이야기로 글을 시작하게 된 것은 오늘 설명할 라깡의 이론이 신화에 토대를 둔 프로이트 이론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본능 이론은 신화다. 본능은 신화적 실체고, 모호하기 때문에 장엄하다. 환자를 치료할 때 우리는 잠시도 본능을 무시할 수 없지만, 우리가 본능을 분명하게 보는 것인지 모르겠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1897년 플라이스에게 보낸 편지
프로이트는 솔직하고 명확하게 자신의 정신분석 이론이 신화를 바탕으로 함을 인정했다. “모호하기 때문에 장엄하다”는 문구에 특히 주목해야 한다. 신화는 그 표현이 구체적이지 않기에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신화는 장엄하기에 계속 열려 있고, 성장하며, 새로운 통찰을 낳는다. 이 모든 것은 관찰자가 경험적 진술에 갇혀 있으면 경험할 수 없다. 따라서 신화는 영감을 준다. 신화의 드라마는 끊임없이 의외의 해석과 새로운 신비,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다. 합리주의자들이 신화의 약점이라고 비판하던 것이 신화의 가장 큰 강점임이 밝혀졌다.
롤로 메이, 『신화를 찾는 인간』, p. 85
개념이 추상적일수록 (모호할수록) 그것이 포괄하는 범주는 넓어지게 마련이다. 오늘날은 그 어느 때보다 구체성이 각광받는 시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추상성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일상의 미세한 선택을 결정짓는 것은 삶의 방향이다. 삶의 방향이 나를 얼마나 설득시키느냐에 따라 일상의 충실도가 달라지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앎을 향한 인간의 호기심이 구체성을 향해 있지만 이를 본질적으로 추동하는 것이 추상성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정신분석학자인 롤로 메이는 이런 차원에서 신화의 중요한 가치를 설명했다. 오늘날 우리가 내면의 신화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삶의 일관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이라고 말이다. 분명 인간의 상상력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그것이 주는 의미, 즉 동기를 무시해서는 인간 내면의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 잘 알다시피 오이디푸스는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후 진실을 알고는 두 눈을 찌른 뒤 방황 끝에 삶을 마감한 비운의 주인공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한 여정을 위해서는 가족 내 삼각관계적 투쟁 속에서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부모에게 저항해야만 한다. 프로이트가 선택한 오이디푸스 신화는 인간 삶의 보편적인 성장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대표성을 지닌 은유였던 것이다.
1. 팔루스의 우위
흔히 남근(남성의 성기)으로 해석되는 팔루스 또한 예외가 아니다. 비록 프로이트의 설명적 한계로 인해 충분히 정의되지 못했지만 그럴 수 밖에 없었던 한계,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결코 입증할 수 없지만 환자들의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힘의 실체였다. 저자가 예로 든 프로이트의 제자인 존스(E. Jones)는 남근과 팔루스를 사실상 같은 것으로 보는 실수를 저지를 만큼 혼란을 불러일으킨 개념이었다.
유아의 생식기 조직화의 주요 성격은 어른의 확고한 생식기 조직화와는 구분된다. 하지만 양성[남자와 여자]에서 유일한 생식 기관인 남자의 기관만이 역할을 한다는 점은 여전히 남는다. 따라서 생식기의 우위가 아니라 팔루스의 우위만이 존재한다. 10) – S. Freud, 『유아의 생식기 조직화 (Die infentile Genitalorganisation)』(1923), G.W., XIII, p. 114
p. 117 에서 재인용
환자들의 언어를 통해 압축되는 문제를 살펴보면 남아는 그것(성기)이 있음으로 인해서 (거세 공포), 여아는 그것이 없음으로 인해서 (남근 결여) 고통받는다. 분명 생물학적 차이에 따른 인식을 기반으로 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최초 실재적 성 차이를 통해 남녀 모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음’을 느낀다. 프로이트 이후 많은 이들이 오해했던 부분이자 라깡이 바로잡고자 했던 것은 팔루스가 ‘남근’이라는 생물학적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결여를 실행했다고 가정된 힘의 상징, 즉 기표라는 점이다. 물론 프로이트가 구체화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가 팔루스의 우위라는 관념을 결코 수정하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다른 차원, 즉 라깡에 의해 정의된 상징적 차원을 전제한다는 점에서였다.
최초 어머니의 관심을 듬뿍 받는 아이는 자신을 팔루스로 여기는 존재론적 상태에 머물러 있다가, 어머니의 관심이 자신만을 향하고 있지 않음 (아버지를 향함) 을 깨닫고 누가 팔루스를 갖고 있는가라는 소유론적 상태로 넘어가게 된다. 달리 말해 상상계 속에 머물던 아이가 상징적 의미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버지의 금지를 통해서라는 것이다. 따라서 라깡에게 있어 팔루스는 어머니, 아이, 아버지로 구성된 오이디푸스 삼각형 속에서 욕망을 대신하는 원초적 기표로 상상 속에서 기능하게 된다.
2. 거울 단계
라깡이 제시한 거울단계는 어린 아이가 자신의 육체를 분리된 것이 아니라 통일된 것으로 인식하는 과정을 설명한 이론이다. 자신의 육체 이미지를 정복하게 되는 근본적인 동일화 경험을 의미하는 거울단계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와 시작을 함께한다. 거울 단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아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기 자신임을 알기까지의 과정에서 착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라깡은 이 과정을 세 시기로 요약한다. 첫 단계는 자신과 타자를 혼동하는 단계로 이는 상상적 상태에 아이가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자신의 육체가 자신의 것이라는 인식이 아직 없는 상태로 아이 자신이 붙잡으려하는 대상과 동일한 수준으로 스스로를 지각한다. 꿈이나 정신병적 파괴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상태이기도 하다. 두 번째 시기는 거울 속의 타자가 실제로는 이미지임을 발견하게 되는 때이다. 지속적인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타자의 이미지와 현실을 구별 가능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앞선 경험들을 변증법적으로 통합한다. 즉, 거울에 비친 것이 이미지라는 것과,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최초로 자신의 정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는 거울 단계는 그러나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아이의 성장이 자기 육체에 대한 특별한 지식을 갖게 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3.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거울 단계가 끝나 주체로서 모습을 드러낸 아이는 여전히 어머니와 거의 융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달리 말해 아이의 욕망이 어머니의 욕망에 종속되어 있는 팔루스적 동일화 상태인 것으로 제 3자의 개입을 통한 거세가 발생되지 않는다면 다른 상태로 나아가지 못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도 거울 단계와 마찬가지로 세 단계로 구분되는데 첫 번째 계기는 기본적으로 거울 단계의 모든 상태를 포괄한다. 자기를 의식했지만 어머니의 욕망 대상에 동일화 (팔루스적 동일화) 하고자 애쓰는 아이는 어머니에게서 결여되었다고 가정되는 대상인 팔루스를 점차 인식하기 시작한다. 상상적 동일화 속에서 아이는 온전히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다. 이러한 생각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은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예감을 통해서이다. 이것이 오이디푸스의 두 번째 계기로 어머니가 누군가의 법을 인정한다는 예감을 통해서만 아이는 비로소 존재론적 질문(나는 팔루스인가 아닌가)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아이가 갖는 하나의 추정에 불과할 따름이다.
아버지는 여기에서 방해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이는 단순히 아버지가 자신의 풍채로 [아이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이 금지하는 것 때문에 방해자가 된다. 그는 무엇을 금지하는가?…… 우선 그는 충동(impulsion) 의 만족을 금지한다…….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가 금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시작한 지 점,즉 어머니로 다시 돌아가 보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속해있지 아이에게 속해있지 않다……. 아버지는 아이로 하여금 어머니를 단념 (frustration) 시킨다. – J. Lacan,『세미나 5권: 무의식의 형성물들』,op. cit., 1958년 1 월 22일 세미나.
p. 132 에서 재인용
아버지의 본격적인 등장으로 인해 삼각형 구조 속 오이디푸스 운동은 비로소 역동성을 갖게 된다. 상상적 만족을 깨는 외부의 침입, 즉 아버지의 중재는 박탈의 방식으로 어머니로부터 아이를 분리시킨다. 아이에게는 그것이 금지와 거절이라고 하는 무자비한 질서로 경험된다. 자신이 팔루스가 아님을 이미 알고 있는 어머니는 이미 소유의 변증법 (팔루스를 갖고 있는 자는 누구인가) 에 속해 있기 때문에 자연히 아이 또한 같은 질서로 인도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런 이유로 법을 만드는 아버지, 법의 대리자로 등장하는 실재적 아버지는 팔루스를 가졌다고 가정된 자라고 하는 상징적 아버지로 그 지위가 승격되게 된다.
아버지는 실재적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무엇인가? … 아버지는 하나의 은유이다. 은유란 무엇인가? … 그것은 다른 기표의 자리에 오는 기표이다…. 아버지는 다른 기표와 대체된 하나의 기표이다. 그리고 그것[기표]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안으로 개입하는 한에서 아버지의 원동력, 본질적이고 유일한 원동력이 존재한다. – J. Lacan,『세미나 5권: 무의식의 형성물들』,op. cit., 1958년 1월 15일 세미나.
p. 123 에서 재인용
법의 상징화, 이것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세 번째 계기이자 쇠퇴기로 사실상 어머니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팔루스적 경쟁이 종식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자신이 어머니 욕망의 대상(팔루스적 대상)이라는 확신이 동요된 아이는 법의 상징화(거세)에 순응한 채 그 결여를 채우기 위한 삶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어머니의 팔루스가 되는 것을 거부한 남자아이는 아버지와 동일화하게 되며, 여자아이의 경우 어머니와 동일화 (팔루스를 소유하지 않음) 해 팔루스를 위해 아버지로 가야함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신화가 갖는 주체성의 은유로, 그것이 성공적으로 완수될 때 비로소 원초적 억압이 자리잡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4. 대상의 결여
한편 결여와 관련해 중요한 문제가 남아 있다. 그것은 결여에도 다양한 차원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앞서 잠깐 언급했던 프로이트의 제자 존스의 경우, 팔루스에 대한 생물학적 오해 뿐 아니라, 정서적으로 어머니로부터 아이를 빼앗는 ‘박탈’이 문제가 되는 곳에서 ‘대상이 부재’하다는 이유로 거세라고 오해한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따라서 어머니와 아이의 서로 다른 내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명확한 구분 방법이 필요한데, 아래 그림이 이를 설명하는 도식이다.
두 개의 삼각형이 합쳐진 다윗의 별 모양에 결여의 특수한 형태인 거절(Frustration), 박탈(Privation), 거세(Castration)을 대입하고, 라깡적 심상의 세 구분을 배열하면 각각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거세는 상상적 대상의 상징적 결여이다.
여기에서의 상상적 대상은 ‘팔루스’이다. 아버지의 금지는 최종적으로 근친상간 금지라고 하는 상징적 법을 통해 거세로 완결된다. 존재에서 소유로 질문을 이동시키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의 마지막 단계 말이다.
거절은 실재적 대상의 상상적 결여이다. (아이의 관점)
어린 아이에게 있어 여성의 성기는 남성의 그것처럼 있어야 할 것이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현존하는 사물을 매개로 했다는 점에서 이 대상은 철저히 실재적이며, 아이는 이를 거절로 경험하게 된다. 다른 설명을 보태자면 아버지의 금지를 통해 어머니라고 하는 ‘실재적 대상’에 대한 욕구로 인해 상상적 행위인 ‘거절’로 경험하게 된다.
박탈은 상징적 대상의 실재적 결여이다. (어머니의 관점)
한편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아버지가 자신의 팔루스(자신의 욕망 대상으로서의 아이)를 빼앗아 (박탈해) 간다고 느낀다. 이는 상징적으로 의미화 된 아이에 대한 실질적인 상실로 어머니에게 와닿게 된다.
5. 두 번째 공유를 마치며
글을 쓰면서 항상 느끼는거지만 고통과 기쁨은 지극히 동반자적이다. 이 글도 원래는 2부 전체 요약을 목표로 삼았었지만 그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을 뿐더러, (부끄럽지만 힘들어서 딴청을 피웠던 시간도 상당하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내용들도 너무 많아 그렇게 하지 못했다. 분명히 이해하고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읽어보면 전혀 새롭게 와닿는 부분도 부지기수였고, 글을 써내려간 이후에도 내 생각이 잘못됐음을 드러내는 내용이 발견돼 부랴부랴 수정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설명을 위한 글로 추리고 정리해 나가면서 내 생각이 보다 명료해졌다는 점이었다.
보통 책을 쓴 저자들은 중심이 되는 개념들을 다양한 사례에 적용하며 자신의 논지를 펼치기 때문에 주의깊게 읽지 않으면 그것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나마 이론에 대한 입문서로 각각의 개념들로 범주를 좁혀서 설명하고 있는 이 책도 탁월한 글솜씨를 지닌 저자의 충동을 온전히 제어하긴 어려웠던 것 같다. 본래 독자보다는 자신의 충동을 우선시 한 글쓰기를 해 불친절하다는 평가를 받는 프랑스식 화법이 그대로 녹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의 개념에 대해 하나의 표현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은 새로운 깨달음을 위한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다. 필자가 라깡에 매료되었던 것도 감탄을 불러 일으키는 표현의 탁월한 어려움(?) 때문이었다. 어찌보면 변태적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독해하는 재미가 쏠쏠했던 것이다. 역자가 이야기하듯 이 책은 현존하는 라깡 입문서로서 최고라고 하는 극찬이 무색하지 않은 그런 책이다. 언젠가 흙 속의 보석을 이물질이 묻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캐낼 수 있도록 이 책을 소화하는 과정을 거쳐 지식의 망망대해로 나갈 그 날을 꿈 꿔 본다.
* 이미지 출처 : lawliber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