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질서지어지지 않은 존재가 있을까? 불규칙하거나 우연히 형성된 듯 보이지만 사실상 정교한 원리 하에서 작동하는 세계를 바라보며 새삼 놀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마 애초에 이렇게 완성된 질서가 없었다면 과학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질서를 그저 발견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를 만든 질서와 만들어 낼 질서를 아는 것, 라캉의 평생에 걸친 이러한 작업은 ‘수학소’라고 하는 내면세계의 형식화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를 통해 접하게 되는 수많은 도식, 공식들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생물학적이고 상상적인 것으로 파악된 거울 단계가 질서의 의미 (상징계) 를 보충하게 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인간이 상상적인 것만으로 반응하지 않는다는 것, 더 나아가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도 대타자의 질서에 종속되어 있다는 이해는 다양한 이론들과의 만남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오늘은 ‘거울 단계의 이론적 배경’을 살펴본 지난 글에 이어, 상상계에 속한 거울 단계가 어떻게 상징계를 포괄할 수 있었는지, 또한 이런 관점이 어떻게 다른 주장과 맞서면서 입장을 분명히 했는지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이전 글 : 1. 거울 단계의 이론적 배경)
1. 상징적 의미가 강화된 거울 단계
1949년 논문에서 동물, 인간이 거울 이미지를 볼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50년대부터의 거울 단계는 사실상 상징적으로 중개된 사건으로 조정된다. 즉, 1949년 논문만 봤다면 특정 시점의 신체, 생리적 발달 과정으로 여길 수 있을 거울 단계의 의미가, 이후 세미나를 통해 심리학적인 차원을 넘어 인간 발달의 근본 원리라고 하는 법칙 (수학소) 으로 격상된 것이다. 여기에는 대타자의 개입이 절대적이다.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볼 때 아이가 느끼는 것은 정확히 대타자의 누적된 반응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라캉이 1960년경 거울과 대타자를 사실상 동일시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으며, 이는 1953년 『세미나 1권』에서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타자의 목소리가 평면거울에 대한 매혹을 지배한다. – J. Lacan, The Seminar. Book I: Freud’s Papers on Technique, p. 140
p. 165
이처럼 상징적인 것이 상상적인 것을 통제한다고 본 거울 단계는, 아이가 바라보고 있는 것 자체에서도 왜곡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라캉은 이를 확장시켜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도 대타자의 말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볼 수 있음을 이야기 한다. 단순히 시각적 자극을 넘어 대타자의 반응을 통해 스스로를 바라보는 내면 세계의 형성을 강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1966년, 거울 단계 경험을 “상상적인 것과 상징적인 것 사이의 분포 코드” 라고 정의한 것을 보면, 그것의 이중적인 의미를 염두할 수 밖에 없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라캉이「거울 단계」의 세 번째 논문을 통해 기존 내용을 정정하려고 하진 않았다. 이미 1949년 논문에서 상징적 차원을 고려했음을 언급함으로써 이를 일갈했기 때문이다. 0년대 들어 상징적 차원을 이야기한 것은 새로운 개념을 덧붙인 것이 아니라 강조점을 옮긴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였다.
2. 라캉이 비판한 이론들
한편 거울 단계 이론이 정교해지는 과정에서 발판이 된 이론 (이전 글) 도 있었지만, 비판을 통해 그 차이를 분명히 하는데 도움을 준 이론도 있었다.
2.1. 게슈탈트 심리학 적용의 반대
게슈탈트는 독일어로 형태, 생김새를 의미하는 단어다. 심리학적으로는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 즉 눈으로 들어온 정보를 단순히 받아들이기보다 일부를 수정, 보강해 지각하는 것을 뜻한다. [1] 책에서는 이를 요약해 ‘개체가 지각 기능의 조직을 통해 형태를 형성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라캉은 「거울 단계」 논문에서 암컷 비둘기와 이동 메뚜기에 대한 생물학적 실험을 예로 든다. 암컷 비둘기의 경우 다른 (암컷 또는 수컷) 비둘기의 모습이 보이기만 해도 배란이 진행된다고 하는데, 거울 이미지만으로도 같은 반응이 나타난다고 한다. 또한 이동 메뚜기 한 마리가 어떤 시점에 비슷한 종의 다른 메뚜기와 마주치면, 또는 생기를 띤 시각적 이미지만으로도 독특한 군생 유형 (군집 생활에 적합한 형태) 으로 변한다고 한다.
하지만 주체의 변형과정, 즉 거울 이미지와의 동일시라고도 볼 수 있을 이런 게슈탈트적 원리에 대해 라캉은 인간의 거울 단계를 설명하는데는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다. 거울 이미지가 아이에게 게슈탈트로 작용하긴 하지만 이미지를 구성한 것은 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게슈탈트적 관점을 따른다면 아이의 통합된 ‘내’가 거울 단계를 구성했다는 얘기가 되므로, 거울 단계를 자아 통합을 향한 출발점이자 원인으로 구성하고자 했던 라캉의 시도와는 정반대의 결론을 얻게 된다. 앞선 글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인간의 조산성 즉, 미성숙하고 의존적이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특성상 이는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 라캉은 두 번째 「거울 단계」 논문을 발표한 1949년 이후 1953년에 이르기까지 거울 이미지를 통해 아이에게 형성되는 ‘나’라는 심리적 구축물을, 동물에게 적용되는 게슈탈트적 효과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앞의 예처럼 동물들은 단순한 시각적 자극만으로도 매혹되어 성적 행위가 유발되는 반면, 아이의 경우는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능동적으로 인식하고 구별해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은 상상적 이미지만으로도 효과가 나타나는 동물에 비해 인간에게는 상상적인 것이 쉽게 자리잡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후에 실재계와 상징계의 보충으로 이끄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2.2. 사르트르의 존재철학에 대한 비판
거울 단계의 핵심은 아이의 존재적 결여 (조산성, 이유 컴플렉스 등 주체를 분열시키는 요소들) 를 극복하기 위한 욕망의 발현이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 자아와 동일시함으로써 아이는 환희 (아하-체험) 를 경험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상상 속의 완벽한 나’와 동일시하며 기뻐하는 동안 사실상 ‘현실 속의 나’는 소외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적 한계로 인해 욕망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진정한 자기 이해에 도달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 라캉이 ‘나’를 프로이트처럼 현실을 대표하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오해, 인식의 실패인 오인이라고 본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자기인식의 근본적인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라캉은 인간을 향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자의식을 무능력한 것 (무無) 으로 본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비판하며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실 자기이해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의 ‘나’라는 존재는 궁극적으로 무능력하다고 봐도 무리가 없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라캉이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은 것은 자의식이 결코 무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가 자의식을 무로 (존재에 무를 부여), 외적 대상을 존재로 간주한 것에 반해 라캉이 자의식, 혹은 ‘나’를 존재로 보고 (무에 존재를 부여), 그 외 대상을 ‘무’로 간주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라캉은 ‘무’라는 개념을 ‘나’ 너머의 심리적 구성 요소, 파악하기 어려운 요소를 가리키기 위해 주로 사용했다고 한다. (신생아의 서투른 움직임처럼 말이다.)
2.3. 시간의 흐름을 넘어선 거울 단계
이제까지의 설명을 통해 거울 단계를 연대기적으로 생각해 보면 ① 인간의 때 이른 출산 (조산) 의 외상성, ② 이유 컴플렉스의 갈등, ③ 거울 단계를 통한 완화 (해결), ④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통한 거세와 주체의 탄생으로 정리해 볼 수 있을 듯 싶다. 자기 인식의 출현에 결정적인 거울 단계가 발생하는 시기가 연령상 6 ~ 18개월이라고 본다면 분명 발달심리학적으로도 타당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1950 ~ 6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라캉이 거울 단계를 언급한 수많은 주석 중 발달심리학적 틀로 해석한 경우는 ‘없다’고 단언한다. 그 이유는 라캉이 ① 거울 단계를 특정 시간의 틀 안에 가둬두지 않았기 때문이고, ② 환자의 행복과 이웃 사랑을 목표로 삼는 정신분석의 윤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2.3.1. 발달심리학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
먼저 거울 단계가 비단 6 ~ 18개월만의 일이 아니라고 본 것 (비연대기적) 은 실질적인 자의식의 형성이 거울 경험 이후의 사건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즉, 단순한 이미지에도 반응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상상적 반응 배후에 실재적, 상징적인 구조가 자리잡고 있어 거울 단계가 아이에게 의미할 바를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러니 특정 시기에 아이의 자의식 형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일이다.
2.3.2. 자아심리학에 대한 비판
오랜 기간 증상의 원인을 탐구해 온 정통 정신분석에 있어 원인에 대한 이해는 증상 해결의 가장 중요한 열쇠라고 할 수 있다. 자연히 인간은 과거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에서 과거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된다. 즉, 현재의 증상을 형성한 억압적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함을 통해 환자가 자아를 재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현재완료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같은 관점을 통해 정신분석은 환자의 현실 적응력에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라캉은 이러한 입장과는 정반대의 주장을 펼친다. 개인사에서 실현되는 것은 무엇이 있었다 (과거 완료형) 도 아니고, 무엇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 (현재 완료형) 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진리는 미래로부터 오는 것이다. ‘전미래 시제 시간구조’라고 명명한 이러한 관점은 인간이 과거와 미래 모두를 스스로 결정한다는 믿음에 근거한 것이다. 인간이 증상 속에 머무는 것조차 자신의 욕망을 상연하는 것일 수 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결국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아심리학의 방식처럼 과거의 진실을 대면하도록 이끌게 되면 (자기-인식을 고무시키면), 남는 것은 나르시시즘, 경쟁, 공격, 질투심 등의 부정적 감정을 강화시키는 일 뿐이다. 이로 인해 자기에 대한 더 깊은 소외, 외부 세계를 향한 더 심한 적대적 관계로 이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고 말이다. 라캉이 분석가의 위치를 영원한 수수께끼인 x로 , 단지 욕망의 원인 (a) 으로 둬야 한다고 이야기 한 것은 바로 이런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결코 환자의 행복, 이웃 사랑이라는 목표조차도 함부로 제시해 분석가라는 대타자에 종속되도록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1] 나무위키, 게슈탈트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 본문 이미지 출처 : replus1541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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