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오의 라캉 강의] 1강. 증상이 드러내는 무의식과 향락, 『자끄 라깡 핵심이론과 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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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비치는 유리 앞에서 밖을 보는 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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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장 다비드 나지오 박사의 라캉 이론 강의 모음인 『자끄 라깡 핵심 이론과 임상』 의 여섯 강의 중 첫 번째 강의를 정리한 내용이다. 정신분석의 기본 개념과 임상 사례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던 지난 번 책에서처럼, (참고 글 : 50년 경력의 정신분석가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법) 여지없이 감동으로 다가왔던 그의 강의를 지속적으로 정리해 보고자 한다.

무의식을 빼놓고 정신분석을 설명할 수 없는 것처럼, 향락을 빼놓고는 라캉 정신분석을 이해할 수 없다. 두 개념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핵심 요소로써 기존 이론들과 가장 큰 차이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지오 박사는 이 개념들을 설명하기 위해 라캉의 유명한 명제 두 가지를 먼저 언급한다.

①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② 성적인 관계라는 것은 없다.

이 두 가지 원리, 곧 무의식과 향락을 정신분석의 근본 원리라고 소개한 저자는, 이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인 ‘증상’에 대한 설명으로 강의를 시작한다.

1. 증상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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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과 지식과 향락 (p. 19, 스캔)

일반적으로 증상은 고통을 일으키는 장애라고 할 수 있다. 정신분석에서는 이를 무의식의 발현으로 보는데, 개인의 의지나 지식을 초월해 등장하는 비자발적 행위 (메타정의) 라는 점 때문이다.

1.1. 증상의 특징과 전이와의 관계

저자는 이런 증상의 세 가지 특징을 소개한다. 방금 언급한 것처럼 ① 내 고통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점과, ②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분석수행자가 구성한 이론이라는 것, 그리고 ③ 분석가가 증상의 일부가 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에 대한 이유를 스스로 인식하고 그 원인에 대해 자문하지 않으면 분석에서 고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개인적으로 감탄했던) 저자의 아리송한 표현이다. 실상 분석수행자[1]는 자신의 증상이 이미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 원인과 해결 방법을 모르겠어서 상담 자리에 나오는 것 아니었나? 하지만 육체적 통증처럼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고통과 달리 정신적 고통은 스스로 무엇인가 잘못 되었다는 인식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 꼭 임상적으로 접근하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이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데 정작 본인은 그런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주변에 적어도 한 명 쯤은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독 정치판에 그런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주어진 환경에 적응한 최선의 방법 (증상) 을 문제라고 여기는 인식은 상당한 수준의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증상을 고통으로 받아들였다면, 자연스럽게 원인에 대한 갈증을 느낄 수 밖에 없어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방식 (이론) 을 가지고 상담 자리로 나오게 된다. 그렇게 분석가에게 자신의 고통을 설명해주기를 기대하고 요구 (전이)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이 때부터 증상은 분석수행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그리고 만약 분석수행자가 고통의 원인에 대한 생각이 없다면, 분석가는 환자 자신에 대한 질문을 유도해 이론이 출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증상과 고통에 대한 해석이 점차 달라지게 되면서 분석가가 증상의 수취인 자리를 넘어 증상의 원인으로까지 추정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 부딪쳤을 때 떠오르는 누군가가 증상의 수취인 자리를 차지했다고 보면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울 것이다.

이러한 증상의 세 번째 특징이 바로 우리가 분석에서 전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정신분석을 다른 모든 정신치료로부터 구분해 주는 것입니다. 더 정확히 말해, 여러분이 정신분석의 전이에 대해 묻는다면 한 가지 가능한 대답으로 나는 분석가가 환자의 증상의 일부가 되는 분석관계의 특별한 순간으로 전이를 규정하게 될 겁니다. 이것을 라깡은 알-것으로-가정된-주체 (sujet-supposé-savoir: S.S.S.로 약칭. 우리말로는 ‘알가주’로 사용 – 역주) 라고 부릅니다.
p. 21

1.2. 증상에 접근하는 두 가지 방법, 기호와 시니피앙

분석수행자가 자신의 증상을 표현할 때 정신분석에서 관심을 갖는 것은 기호보다는 시니피앙 (간결하게, 의식보다는 무의식)이다. 기호는 의식의 수준에서 자신의 상태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면, 시니피앙은 ‘뭔가 그런 것 같은’ 것처럼 결코 손에 잡을 수 없고,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무언가를 뜻한다. 실언이나, 꿈,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된 세부사항, 몸짓, 음성, 침묵 등 그 자체로는 꼭 집어서 표현할 수 없어 주변 요소들을 통해서만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는 것들 말이다.

시니피앙은 오로지 다른 시니피앙들에 대해서만 시니피앙일 뿐이다. – 라캉
p. 26 에서 재인용

기호의 수준에서는 인과관계에 대한 파악 (왜라는 질문) 이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물론 욕구를 온전히 담을 수 없는 그릇 (언어) 의 한계로 인해, 또한 정교하고 복잡해진 사회의 발전이 갈수록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찾을 수 있다는 희망 만큼은 붙잡을 수 있다. 하지만 언어가 실패하는 영역에서 등장하는 시니피앙의 경우에는 원인에 대한 답변을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애초에 설명이 불가능한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무한한 가설일 뿐이기 때문이다. 우주 공간에서 빛이 없는 영역을 통해 블랙홀의 존재를 추정만 할 수 있는 것처럼, 시니피앙의 중심은 철저히 비어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상관성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가)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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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홀 추상도 (출처 : BBC NEWS 코리아 [2])

결국 소수의 인과성과 다수의 상관성 (또는 우연성) 으로 이루어진 세계에서 시니피앙적 사건 (S1) 은 매우 빈번하게 반복되며 우리를 놀라게 만든다. 하지만 ①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고, ② 의도된 적도 없지만 (비자발적), ③ 분명 무언가 존재한다고 느껴지는 이런 경험들이야말로 우리의 무의식 구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훌륭한 도구가 된다.

이처럼 반복되는 시니피앙적 사건은 라캉 반복 개념의 핵심으로, 꾸준한 관찰을 통해 일정한 패턴 (일자라는 형식적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것) 을 발견할 수 있다. 개별적으로는 모든 증상이 서로 다르지만, 구조적 (형식적) 인 측면에서는 비어있는 일자의 자리를 번갈아 가며 차지한다는 점에서 모든 증상은 동일하다고도 볼 수 있다. 증상을 있게 한 것은 항상 우리를 넘어서 있는 무의식적 활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2.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된 (반복의) 지식이다

위와 같이 무의식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시니피앙적 사건들을 통해 끊임없이 증상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런 점에서 저자는 무의식을 주체가 알지 못한 채 운반하는 어떤 반복에 대한 지식, 또는 그런 반복을 보장하는 운동이라고 설명한다. 항상 일자의 장소를 새로운 시니피앙이 차지할 수 있도록 움직임을 이끌어내는 불가항력적인 힘이라는 뜻이다.

충동을 일으키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무의식을 라캉 정신분석에서는 조금 더 독특하게 받아들인다. 개인의 차원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무의식을 집단의 차원으로 끌어 올린 것이다. 분석가와의 관계 속에서 분석수행자의 표현들 (현행진술) 은 분석가의 반응을 통해 점차 영향을 받게 된다. 앞서 언급했던 전이의 경우처럼 분석가가 증상의 일부이자 원인이 됨으로써 무의식은 분석가와 분석수행자 사이를 가로지르는 공동의 영역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3. 성적인 관계라는 것은 없다. (향락)

이처럼 시니피앙적 사건에서 비롯된 증상은 자아에게 고통으로 감각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무의식의 관점에서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알 수 없는 고통에 대항하기 위해 찾아낸 자아 나름의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고통스럽지만 (더 큰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선택한 증상의 이러한 이중성은 향락에 대한 정의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 무의식이 증상을 향유 (향락) 한다는 것은 오르가즘적 쾌락과는 거리가 멀다는 뜻에서 말이다. (* 참고 글 : 라캉 주이상스(향락) 개념의 변화 과정)

향락, 그것은 인간이 큰 실수를 저질러서 무의식을 실행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같은 것을 다른 두 가지 각도에서 말하는 겁니다: 무의식의 작업은 향락을 연루시키고, 향락은 무의식이 작업할 때 풀려나오는 에너지다.
p. 51

3.1. 프로이트의 정신 에너지

프로이트는 인간이 불가능한 목표 (절대행복) 를 이루려는 열망 (욕망) 이 신체의 성감대에서 태어나 정신적 긴장을 일으키고, 이를 억압함으로써 더 커져 두 가지 경로 (배출과 보유) 를 선택한다고 보았다. 억압을 뚫고 나오는 ① 배출 에너지는 무의식의 발현물인 꿈, 실언, 또는 증상으로 나타나고, 억압을 넘지 못한채 ② 보유하는 에너지는 성감대를 과도하게 자극시켜 심리적인 긴장 수준을 높인다. 한편으로 잔여물이 남아있다는 것은 ③ 완전한 배출을 욕망하도록 이끌어 세 가지 결과물로 남게 된다.

3.2. 정신 에너지와 향락과의 관계

나지오 박사는 프로이트의 정신 에너지가 라캉의 세 가지 향락 방식과 개념적으로 일치한다고 설명한다. 긴장을 배출함으로써 얻게 되는 충족은 ① 남근적 향락으로, 보유함으로써 얻는 충족은 ② 잉여향락, 완전한 배출이라는 환상은 ③ 대타자 향락에 각각 상응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유와 관련해 라캉은 측정이 불가능한 향락의 특수성 탓에 (측정 가능한) 에너지와 관계맺을 수 없다고 봤지만, 저자의 경우 향락이 행동을 추동시킨다는 관점에서 상호 연결이 가능하다는 설명을 덧붙인다. 참고로 여기에서 향락을 남근적이라 부르는 이유는, 배출을 통제 (프로이트의 억압) 하는 것이 남근의 역할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배출된 에너지는 실언, 환상, 증상으로 드러나거나 (남근적 향락), 신체에 머무르며 깊이 패인 곳들 (입, 항문, 질 음경 등) 의 긴장감을 높여 성감대를 자극 (잉여향락) 하게 된다.

한편 긴장의 완전한 배출을 ‘가정’하는 대타자 향락은 그것이 긴장의 완전한 중단 (강박신경증) 이든, 완벽한 향락을 향한 최고조의 긴장 (히스테리) 이든, 욕망을 유지시키는 매혹적이고 기만적인 신기루라는 특성을 갖게 된다. 이런 신기루 (환상) 를 유지시켜주는 그 어떤 대상 (어머니, 신, 전능 환상 빠진 주체 자신) 도 대타자가 될 수 있으며, 완벽한 만족이라는 점에서 성적이고, 불가능한 지식의 장소로서 실재적으로, 이 지점에서 정신분석은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3.3. 당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

저자는 강박증, 히스테리로 대표되는 신경증 환자를 절대적인 대타자 향락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반대로 도착증의 경우에는 대타자 향락의 몸짓을 가장 가깝게 모방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겉으로 드러난 증상 (배출 = 남근적 향락) 과 내면의 환상 (보유 = 잉여 향락)은 이런 향락을 부분적으로 처리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설명을 통해 저자는 라캉의 유명한 명제에 대한 일반적인 오해를 꼬집는다. “당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는 제언은, 이상향을 향한 기대를 거두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그러니까 그것 (절대 향락) 에 저항하기 위해 형성한 자신의 환상과 증상을 결코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말이다.

분명 증상은 환상만으로 해소하지 못한 과도한 향락을 제한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게 한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증상을 형성하지 않고서는 절대 향락의 과도한 침범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증상이 끊임없이 유지될 수 있도록 욕망을 버리지 말라니 이게 대체 무슨 뜻일까? 이는 라캉 정신분석의 역사와 관계가 깊다. 초기에는 프로이트를 따라 증상을 제거해야 할 정신적 문제로 바라봤던 것에서, 후기로 넘어가면서 무의식의 알 수 없는 만족 (향락) 이 환자를 지켜주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신성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이자 최후의 방법이라는 점에서 대타자 향락에 저항하는 욕망은 끊임없이 욕망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은 반드시 실패를 동반할 수 밖에 없으며, 바로 그 과정 (실패의 반복) 을 통해서만 긍정적인 창조성을 기대할 수 있다.

3.4. 쾌락과 향락의 차이

라캉에게 있어 최초의 향락은 쾌락과 동의어였으나, 만족을 주지 못하는 고통마저도 감내하는 (피학적 쾌감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마조히즘과는 다른) 개념으로 점차 변화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오히려 명확해졌다. (* 참고글 : 라캉 주이상스(향락) 개념의 변화 과정)

쾌락과 향락을 간단히 구분하면 감소된 긴장 (쾌락) 과 최대의 긴장 (향락) 이라고 할 수 있다.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면 이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나서기 마련인데, 이것이 향락이 행위로 드러날 수 밖에 없는 이유 즉, 행위로의 이행이다. 라캉이 ‘신체가 모든 것을 인수한다’고 언급한 것처럼, 향락이 나 자신의 말과 생각을 넘어 어떤 행동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흔히 이성을 잃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모든 곳에 시니피앙적 사건, 또는 향락의 지배를 받았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향락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우리 안의 어떤 것이 우리를 넘어 향락하기 때문이다. 이런 향락을 나타내는 시니피앙을 찾는 것 역시 불가능하며, 프로이트의 반복강박처럼 무언가를 해소하려는 하나의 완강한 성향으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드러내게 된다.


[1] 수동적으로 분석을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분석가와 함께 주체적으로 분석을 수행한다는 라캉 정신분석에서의 환자
[2] BBC NEWS 코리아, 블랙홀 최초 사진… ‘괴물급이다’ 영상 중 일부 화면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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