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오의 라캉 강의] 2강. 무의식의 이해, 『자끄 라깡 핵심이론과 임상』

readelight

무의식 구조의 은유

주요 문장들

  1. 무의식은 언어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진실 (향락의 시니피앙) 을 드러내는 반복의 구조이다.
  2. 구조는 반복 (환유) 되지만, 내용은 갱신 (은유) 된다.
  3. 대상은 인식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
  4. 성장은 시니피앙 (충격) 과 기호 (해석) 의 끝없는 순환 작용이다.
  5. 분석가는 반복과 시니피앙의 교체를 촉진시키는 조력자이다.

인간의 내면 세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는 아마도 빙산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사실상 수면 아래의 영역 (무의식) 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빙산이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뤄진 정신의 모형은 보여줄 수 있지만,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까지는 알려주지 못한다. 이번에 소개할 나지오 박사의 두 번째 강의는 무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한 내용으로, 앞으로 내면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는 데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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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 마음의 지형학적 모델 (의식 / 전의식 / 무의식) (* 출처 : verywellmind[1])

1. 무의식의 정의

1.1. 언어처럼 구조화 된 어떤 지식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 된 어떤 지식이라는 명제는 앞서 나지오 박사가 정신분석의 두 기둥 중 하나라고 설명한 핵심 문장이다.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와 표현 방식이 모국어를 받아들여 체계화 되어있기 때문인데, 환유 (언어의 결합) 와 은유 (새로운 언어로 대체) 의 방식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 나간다. (* 참고글 : 무의식을 구조화한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

1.2. 언어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등장하는 진실

다만 여기에서 ‘어떤 지식’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등장하는 진실 (향락을 나타내는 시니피앙)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꿈이나 어떤 환상의 내용보다는 이를 표현하는 방식 (이야기, 말 실수, 세부 묘사, 몸짓, 음성, 침묵 등) 을 통해 드러나는 것으로, 주체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올바른 순간에 불쑥 올바른 말을 하게 된다.

1.3. 반복을 강요하는 운동

한편 무의식은 동일한 말을 다른 곳에서 반복하도록 강요하는 운동 자체이기도 하다 (해석되지 않은 증상은 다른 곳에서 반복된다. 우리가 흔히 운명, 또는 팔자라고 여기는 그것이다). 정리하자면, 무의식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지점 (직접 파악 불가능) 에서 반복적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어떤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분석가의 역할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은, 자신의 증상을 반복하는 분석수행자 (환자) 에게 고통의 원인을 자문하게 하고, 그 원인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짐으로써 알지 못했던 무언가에 대한 탐구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1.4. 분석치료 내부에만 존재

앞선 강의에서 설명한 무의식의 다양한 정의들을 바탕으로, 저자는 무의식이 정신분석적 치료 환경에서만 존재한다는 명제로 두 번째 강의를 시작한다.

“저는 관찰의 영역인 분석상황에서만 정신분석이 효과적이라고 말했어요” 라고 하던 어떤 대화자의 언급에 라깡은 다음과 같이 답했었죠: “그게 정확히 내가 말하려던 바입니다. 우리에겐 정신분석의 외부에 무의식이 존재하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 자끄 라깡의 『Scilicet 6/7』, Seuil, 1976, pp. 25.
장 다비드 나지오, 『자크 라캉 핵심 이론과 임상』, p. 83 에서 재인용

물론 라캉은 (무의식이 분석 환경 외부에 존재한다는) 판단을 유보하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나지오 박사는 자신의 라캉 독서 결과 정신분석 외부에는 무의식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무의식이 실제로 없어서라기보다는 있어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이다. 무의식을 최초로 정의한 것은 프로이트였지만, 무의식의 내용은 이미 증상을 통해 인류 역사와 함께하고 있었다. 하지만 무려 1900년에 이르기까지 그 실체를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증상의 원인을 알 길이 없었고, 이러한 미지의 원인에 무의식이라는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새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 수 있었다. 인류의 발전에 도움을 준 다양한 이론들이 학자들의 명명 행위를 통해서야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 처럼 말이다.

1.5. 집단의 무의식

이런 이유 때문에 분석가의 개입이 아니고서는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을 인식하고 원인에 대한 탐구를 시작할 수 없다. 언어가 실패하는 지점에서 탐구를 시작하는 라캉 정신분석의 특성상, 다른 존재 (분석가) 의 무의식의 청취와 인식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저자는 무의식을 프로이트처럼 해석을 기다리는 숨겨진 심급이 아니라, 무의식적 행위를 인식할 때 비로소 생성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분석가와 분석수행자 두 사람 사이에서 공유되는 단 하나의 구조라고 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무의식적으로’라는 표현에는 ‘나도 모르게’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프로이트 이래로 무의식의 장소가 개인에게 있음을 받아들여 왔던 셈이다. 그러나 분석 파트너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구조라는 결론은, 무의식의 장소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게 된다. 분석가가 분석 외 장소에서 자기도 모르게 분석수행자의 제스처를 따라함으로써, 또는 분석수행자가 분석가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중요한 결정들을 선택함으로써 무의식이 시간과 공간, 개인의 고유한 차원을 넘어 두 사람의 전이 관계 (분석가가 분석수행자 증상의 일부이자 원인이 됨) 속에 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2. 무의식에 이르게 하는 언어

앞서 설명한 것처럼 무의식은 두 사람의 대화 (언술행위)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여기서 말해진 언어를 랑그라고 표현하는데, 저자는 이를 ① 무의식의 중요한 효과이자, ② 무의식 구조에 접근하기 위한 가장 좋은 기회이며, ③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라고 설명한다. 프로이트가 꿈을 통해 무의식에 접근하고자 했던 반면, 라캉은 다양한 과학적, 수학적 자료들을 기반으로 언어를 통해 무의식에 접근하고자 했던 중요한 이유였던 것이다.

프로이트라캉
무의식의 장소개인집단
분석 방법환자가 해석 기다림 (수동적)환자(분석수행자)와 함께 해석 (능동적)
무의식에 이르는 왕도랑그
주체 탄생 설명 방식신화논리

2.1. 지식의 문을 여는 감각 언어, 라랑그

특히 분석 상황에서 등장하는 언어는 각 개인마다 고유한 어머니의 말인 라랑그로, 라캉이 언어학적 랑그와 구분짓기 위해 이름붙인 개념이라고 한다. 라랑그가 특별히 중요한 것은 어머니와의 긴밀한 신체적 접촉을 통해 획득한 향락의 언어라는 점에 있다. 우리가 젖을 빨듯 모국어를 받아들여 성장했기 때문에 아무리 단순한 표현이라도 그 언어는 의미로 가득 차 있으며, 이러한 신체적 감각을 통해 경험된 대상들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대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유지시켜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즉 지식과 연결될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폴 발레리는 “우리는 신체의 문턱을 거쳐야만 지식으로 들어간다.” 라고 말했어요. 나도 이 문구를 내 것으로 삼고 싶습니다.
장 다비드 나지오, 『자크 라캉 핵심 이론과 임상』, p. 91

물론 지식으로 향하기 위해서는 초기의 만족 경험이 거세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되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라캉은 헤겔의 변증법 (지식에 이르는 신체적, 상상적 과정에 대한 기초를 세움) 을 따라 모든 지식이 편집증적 (중심 기제가 의심인 증상) 이라는 개념을 확립하게 된다. (* 참고글 : 라캉의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간단히 살펴보기)

2.2. 무의식을 언어로 설명한 이유

위와 같이 라캉이 무의식을 언어적 틀에서 이해하고자 했던 것은 소쉬르의 구조주의 언어학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구조주의는 사회의 다양한 현상들을 개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각 요소들이 기능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하나의 구조 (상위 개념) 를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철학적 사조로, 같은 관점에서 구조주의 언어학은 언어의 의미가 사회적 관습 (구조) 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는 이론이다.

구조에 영향을 받는 구성요소들에 대한 관심은, 일생동안 타자의 영향에 관심을 가져왔던 라캉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나지오 박사는 여기에 언어 자체의 구조적 탁월성에 대한 설명을 덧붙인다. (1) 시니피앙들 (기표들) 의 연쇄인 언어는 (2) 환유 (결합) 와 은유 (대체) 라고 하는 이중의 움직임이 (3) 끊임없이 활성화되는 운동이다. 시대 별로 동일한 단어, 문장의 의미가 끊임없이 변화되었던 것처럼, 시니피앙의 집합인 무의식 또한 향락의 힘으로 끝없이 갱신되며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이다.

2.3. 구조를 통한 개념의 통합

이와 같이 대상을 구조의 일부로 바라보는 관점은 전혀 다른 개념들을 통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준다. 우리가 성장하면서 받아들이는 수 많은 기표들을 통해 무의식의 내용은 끊임없이 갱신 (새로운 것으로 대체) 되는데, 이것을 라캉의 반복 개념 (동일한 요소의 재출현) 과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무의식의 내용은 늘 새로워지지만 (개별성), 새로운 내용을 불러오는 형식 (보편성) 은 언제나 동일하다. 다음 무의식의 구조를 통해 살펴보겠지만, 라캉 정신분석에서 반복되는 것은 일자 (시니피앙의 장소) 뿐이다. 여기에 더해 무의식은 환유적 활동 가운데서는 무한히 활성화 되지만, 생성된 은유에 따라 활동이 제한되게 된다. 무한한 동시에 유한한 것이다.

3. 무의식의 구조

드디어 서문에서 언급했던 무의식의 구조를 그려보는 시간이다. 일단 설계도면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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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의 모체 : 집합, 구멍, 그리고 일자 (p. 101, 직접 스캔)

무의식은 다양한 기표들의 연쇄 (언어의 그물망) 로 이루어진 집합체로, 집합 내에는 반드시 하나의 구멍이 존재한다. (언어가 존재를 온전히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려 보자.) 언어화 (해석) 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지점, 즉 아무리 정교하게 해석하더라도 반드시 남을 수 밖에 없는 어떤 여백의 자리 (구멍) 로 인해 기표 사슬은 끊임없이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알 수 없는 만족감인 향락이 에너지원이 되어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데, 그 과정 속에서 기표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되며 (환유작용) 하나의 의미있는 메시지를 획득하게 된다. 깨달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이러한 주관적 사건이 결여를 채울 수 있다고 여겨지지만, 비어있는 공간은 온전히 채울 수 없으며 기껏해야 구멍의 테두리 정도만 덧댈 수 있다. 이렇게 새롭게 일자의 자리를 차지한 기표는 은유 작용을 통해 무의식 집합의 테두리에도 위치하게 되며 (외존) 무의식의 주체를 표상하는 시니피앙이 된다.

3.1. 외존하는 일자의 의미

구조를 유지하기 위해 어떤 것은 반드시 외부에 존재해야 한다. 달리 말해 나의 특성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단어가 나의 정체성을 구성하게 된다고 표현할 수 있을텐데, 나지오 박사는 이런 상징화의 적절한 예로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 의 내용을 언급한다.

부족의 아들들은 부족으로 ‘구성되기’ 위해 원초적인 아버지를 죽이고 격식을 갖춰 그를 먹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보호 하에 모두 함께 살아남기 위해 그 일자를 바깥에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런데 배제된 사람이 바로 아버지이고, 아버지의 형상이 배제의 가장 뚜렷한 원형 가운데 하나입니다. 배제된 아버지 자리인 부성기능을 아버지가 맡기에 일반적으로 아주 어려운 것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장 다비드 나지오, 『자크 라캉 핵심 이론과 임상』, pp. 102 – 3

이 설명을 기독교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예수의 제자들이 주체적인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수가 반드시 사라질 필요가 있었다. 실상 제자 중 일부인 가룟 유다는 예수를 (팔아) 먹었으며, 다른 제자들도 예수가 십자가에 달리는 결정적인 순간에 배신함으로써 사실상 여기에 동참했다. 그럼에도 예수는 제자들을 다시 찾아 위로하고 사라짐으로써, 그리고 부성기능을 대체한 성령의 등장으로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기독교를 전하는 삶을 살게 된다. 기독교의 일자 자리를 점유했던 십자가 구원 사건은 이후 2000년 넘게 유지되며 기독교의 정체성 (외존) 으로 전승되게 된다.

3.2. 구조의 움직임

이런 무의식 구조의 움직임을 한 번 그려보자. 기표 사슬이 끊임없이 구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모습 말이다. 무의식 사슬은 천천히 이동하다 그 구멍을 가장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어떤 기표가 구멍의 테두리를 경계짓고 (환유작용의 결과), 곧이어 무의식 집합의 가장자리도 두르게 된다 (은유작용). 그러나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구멍은 남아있는 기표 사슬을 계속해서 자신을 향해 이동시키게 되고, 선명하게 각인되었던 일자의 자리는 다시금 다른 기표로 대체되는 결과를 낳는다. 새로운 시니피앙이 일자의 자리에 위치할 때마다 구멍과 무의식의 테두리가 반짝하고 마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기표들의 질서는 주체와 개별적으로 움직인다는 점이다. “하나의 시니피앙은 다른 시니피앙들을 향해 주체를 표상하는 것”이라는 라캉의 명제는 이런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무의식의 운동 가운데서 어떤 기표가 주체를 표상하게 될지는 (주체가 무의식적으로 선택하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4. 성장의 과정

4.1. 시니피앙의 기호화

살펴본 것처럼, 기표의 순환 작용을 통해 우리의 내면은 지속적으로 성장해 간다.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 속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어떤 사건들이 등장하지만 (시니피앙적 사건), 어떤 방식으로든 이해되거나 (기호화) 알 수 없는 것으로 남으면서 우리의 기억 너머로 사라지게 된다. 무의식의 구조에 있어서 시니피앙과 기호의 관계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어로 표현 (기호화)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시니피앙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시니피앙조차도 그것이 정교한 해석을 통해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 기호로 전환되며, 그럼에도 남아있는 무언가가 무의식의 운동을 지속시키게 된다.

4.2. 분석가의 역할

이렇듯 시니피앙은 모든 의미화에 저항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이런 질문이 생긴다. ‘어차피 무슨 짓을 해도 시니피앙은 남아있게 될텐데 해석이 무슨 소용이며, 분석 치료는 가능한 것이냐’고 말이다. 여기에 대해 나지오 박사는 이제까지의 설명을 종합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시니피앙은 (나에게 와닿은) 기호를 통해서만 등장하는 것으로, (2) 우리는 무의식을 드러내는 시니피앙적 사건을 (경악 – 충격, 침묵, 당황한 모습 등) 경험하면서, (3) 지속적으로 해석해내야 한다고 말이다. 물론 해석이 언제나 불충분하다는 점에서 도돌이표 같지만, 반복적인 의미화 작용을 통해 보다 정교화 된 이해는, ‘거짓에 속은 나’가 아닌 ‘(진실된)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격언처럼 스며들듯 우리에게 되돌아오게 된다. 여기에서 분석가의 역할이란 (1) 반복의 운동성 (욕망) 을 유지시키고, (2) 일자 장소를 점유하고 있는 시니피앙의 교체를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두 사람이 전이 (사랑) 관계 안에 있을 때, 그리고 환자를 깊이 공감하는 가운데서 등장하는 해석이 의미있게 다가갔을 때임은 물론이고 말이다.

“증상-시니피앙이 가장 올바른 해석을 포함한 모든 의미에 저항하고 모든 도달거리 바깥에 유지된다면, 어떻게 우리가 환자에게 조금이나마 증상 완화를 기대해 볼 수 있겠나요?” 나는 증상-시니피앙을 다루는 방식은 다른 시니피앙으로 이것을 대치하는 것이고, 분석가가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석은 결코 그것이 드러내는 의미에 의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점유하는 시니피앙의 장소에 의해 작용하는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분석가한테 일어나는 경악이 환자의 증상이 분석가에게 가하는 유의미한 충격의 지표가 되는 것처럼, 환자한테서 일어나는 경악도 분석가의 해석이 환자에게 미치는 유의미한 충격의 확실한 지표가 되지요.
장 다비드 나지오, 『자크 라캉 핵심 이론과 임상』, p.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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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이미지 출처 : [1] verywellmi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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