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오의 라캉 강의] 5강. 주체적인 행복을 찾기 위한 신체의 의미, 『자끄 라깡 정신분석 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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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적 행복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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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지오 박사의 다섯 번째 강의에서는 ‘신체’를 다룬다. 이전 강의에서 인간의 욕망이 어떻게 신체적 특성에서 비롯되는지 – 돌출했거나, 움푹 들어간 부위들이 욕구를 자극해 대상 a 의 중요한 참조점이 된다는 것 – 에 대해 설명했다면, 이번 장에서는 보다 이론적인 관점에서 신체를 바라본다.

1. 정신분석에서 신체의 의미

정신분석은 자칫 인간의 내면만 다루는 듯 보이지만, 애초에 신체를 빼놓고는 정신분석의 개념을 논할 수 없다. 다양한 증상이 정신 활동의 결과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체적 추동이 정신 운동을 자극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형성 과정 (욕구 – 요구 = 욕망) 이 이를 잘 보여준다. ‘욕구’라고 하는 신체의 신호는 울음, 언어적 표현 등을 통해 문제 해결을 ‘요구’하게 만들지만,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잔여물이 언제나 남아 이 대상 (대상 a) 을 끝없이 갈구 (욕망) 하도록 이끈다. 요구의 잔여물을 반복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알 수 없는 만족감을 향유 (향락) 하게 되는 것이다. ‘대상 a’가 ‘잉여 향락’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 (욕망의 대상 추구 과정에서 획득한 미지의 만족) 라고 할 수 있다.

나지오 박사는 정신분석의 핵심 탐구 대상 (매개변수) 을 말parole과 성sexe이라고 설명한다. 첫 강의에서 이미 라캉의 유명한 명제를 정신분석의 두 기둥이라고 –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 (말), 성적인 관계란 없다 (성) – 표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결국 신체가 발화점이 되어 이를 언어로 표현해 내거나, 표현 못한 잉여물을 환상으로, 또 증상으로 감당해 나가는 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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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구조 (p. 19, 스캔)

외과의사는 환자의 말과 향락, 즉 정신과 신체간의 상호작용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신체를 주로 유기체적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이다. 반면 분석가는 대화 속에서 마주치는 (비언어적 표현을 포함한) 모든 내용이 말과 성이 뒤엉킨 결과임을 안다. 성적인 신체들간의 상호작용의 결과가 인간이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정신분석은 신체로 드러난 증상의 이면, 즉 지극히 주관적인 신체의 의미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사물을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언어’라는 제한적인 수단을 통해서만 현실을 이해한다. 라캉의 탁월한 표현을 따라 내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한 채 신체로 말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신체는 언제나 내가 말하는 것 이상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체 > 언어 > 지각)

2. 신체에 대한 위상학적 관점

말과 성으로 특징지어진 정신분석적 신체는 라캉의 위상학적 관점과도 정확히 들어 맞는다. 말은 기호의 법칙인 상징계로, 성은 미지의 추동력인 실재계로, 대상 속에서 발견하는 유사한 타자의 이미지는 상상계로 바라보는 식으로 말이다.

2.1. 실재로써의 신체 (성)

라캉 정신분석은 기본적으로 분석수행자의 증상을 통해 향락을 이해한다. 증상은 해석 불가능한 시니피앙적 사건들의 연쇄로, 고통 속에서 주체가 찾아낸 해결책 (향락) 을 반드시 내포하게 마련이기 떄문이다. 향락하는 신체는 모든 목표가 성적으로 변하게 되는데, 설령 성적인 부위가 아니더라도 프로이트의 지적처럼 리비도가 다량으로 투과되면서 성적인 기능을 감당하게 된다. 이렇게 성화된 신체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방식이 행위 (직접 표현) 와 환상 (간접 표현) 이다.

2.2. 상징으로써의 신체 (말 건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의사소통 방식에는 크게 언어적 표현과 비언어적 표현이 있다. 언어적 표현은 인류가 발명한 최고의 상징체계인 언어를 말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의 의식과 무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비언어적 표현은 무의식에 보다 가까운, 자기도 모르게 하는 행동, 말실수, 제스처 등을 뜻한다. 여기에서 신체의 상징적 역할은 비언어적 표현에 해당되는 것으로, 특별히 상대방에게 신체적 특징이 다르게 와닿는 순간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와 관련해 분석의 특정 회기에서 환자의 눈이 돌출된 듯한 느낌을 받아 외과 진료를 추천했고, 덕분에 종양을 발견해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던 사례를 언급한다. 어떻게 보면 당시 환자의 눈이 증상을 인지해 주길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니피앙적 사건들의 종합인 신체가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것, 간단히 해석을 요구하는 순간이라고 볼 수 있는 신체의 메시지는 분석가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게 어떤 행동을 하도록 이끌어내게 된다.

2.3. 상상으로써의 신체 (이미지)

한편 상징으로써의 신체가 증상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상상으로써의 신체는 증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자신이 동일시하는 대상, 특별한 감정을 일으키는 의미있는 사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함부로 건들거나 빨아서도 안되는 아이들의 애착 인형이나, 사랑했던 사람이 남긴 유품들처럼 말이다. 이런 대상들은 나의 향락을 함축적으로 둘러싸고 있어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저자는 이런 대상들을 신체의 연장이라고 표현했으며, 향락적 신체가 외부에서 끌어오는 이런 이미지의 외장들 밑에 언제나 숨겨져 있다고 이야기 한다.

3. 부분에 특권을 부여하는 정신분석

이처럼 신체의 정의를 확장하고, 그 의미를 다각도로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론적 개념틀은 매우 유용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정신분석은 신체의 극히 일부만을 다룬다는 점이다. 라캉 정신분석의 관심 대상인 ‘향락’은 신체의 일부가 극도의 긴장 속에서 역설적인 만족을 누리는, 정확히 말해 ‘국소 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무용수의 긴장을 최대치로 지탱해 내는 발이나 관음증 환자의 눈처럼 말이다. 이와 같이 모든 향락은 신체에서 출발하지만, 지극히 부분적인 곳에 에너지가 응축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체와 분리된 것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라캉이 1967년 세미나에서 두 개의 명제로 표현했던 것처럼 말이다.

① 오직 신체의 향락만 있다. (신체 = 신체의 일부)
② 향락은 신체와 분리되어 있다. (신체 = 유기체적 신체)

신체의 향락만 존재하는데, 그 향락이 신체와 분리되어 있다고 하는 일견 모순된 표현이지만, 저자의 독해를 따라 신체를 서로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두 명제는 양립 가능하게 된다. 이처럼 부분적인 것이 무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점 때문에 정신분석은 부분에 특권을 부여할 수 밖에 없다. 향락은 실재적으로 조여지는 신다의 특정 부위로까지 축소되고, 상상적으로는 건물 등 특정 대상의 한 측면에만 해당되며, 상징적으로도 신체의 일부, ‘돌출된 눈’처럼 단 한 곳에서 의미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물론 부분에 대한 요구가 강렬할수록, 결여된 전체성에 대한 욕망 또한 강해지기 마련이다. 상황이 괴로운 만큼 이를 벗어날 유토피아를 꿈꾸기 마련인 것처럼, 온전한 삶을 향한 갈증이 커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딘가에서, 또 누군가가 누리고 있을 최대한의 향락, 즉 대타자의 향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에서 전체성은 허구 (상상) 속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그럼에도 너무 경멸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런 상상이 상상계의 필수 조건이고, 상징계의 모체임과 동시에 실재계와 함께 라캉 정신세계의 종합을 이루는 요체가 된다는 점에서다. 세 축의 어느 한 쪽이 깨어지면 매듭 전체 (정신세계 전체) 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 참고글 : 라캉이 말하는 글쓰기의 가치, 보로메오 매듭)

4. 분석가의 역할

4.1. 정신분석에서 이론의 중요성

살펴본 것처럼 분석가는 분석수행자의 말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한다. 물론 진실을 직접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의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말이다 (쉽게 말해 주체에게 진실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을 뜻한다 – 대상 a 로서의 분석가). 하지만 ‘모르는 것 (무지)’과 ‘모르는 척하는 것 (외장)’이 전혀 다른 것처럼, 이론이 있을 때에만 적절한 시기까지 기다리며 최적의 시점에 효과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빈약한 잔소리만 일삼거나 제한없는 허용 (무절제한 공감) 만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나지오 박사는 특별히 임상가라면 이론을 단순히 흥미 수준이 아니라 매우 열정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① 열정이 있어야만 이론을 현실에 정교하게 적용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학습한 개념들이 주체적인 진실로 작용할 때까지 공부한 내용을 곱씹고, 비틀고, 신체로 텍스트를 재탐구하며, 궁극적으로 자기도 모르게 반응하는 데까지 나가지 못하면 이론의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물론 이론이 중요하지 않은 학문 분야는 없지만, 특별히 정신분석에서 이론이 중요할 수 밖에 없는 것은 ② 문제 해결도구가 전적으로 언어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③ 언어로 표현 불가능한 영역을 두고 과학적 추론을 이어가기 때문에 이론이 없이는 사실상 단 한 걸음도 전진하기 어렵다. 저자는 여기에 ④ 이론이 치료 방식과 효과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점을 믿을 때에만 진실의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며 쐐기를 박는다. 이론에 대해 스스로 확신을 가질 정도가 되어야만 분석수행자에게 진실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머리부터 가슴까지의 거리가 가장 멀다고 하는 것처럼, 이론을 깊이있게 경험해보지 않으면 이에 대한 진심어린 믿음과 활용 능력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설픈 전문가들의 진단이 허공에서 멤도는 것처럼 그저 허울 좋은 소리에 그칠 뿐이다. 분석가와 분석수행자 간에 전이 관계가 형성된 가운데서, 어떤 사건이 벌어지고, 여기에 환자의 깊은 이해와 맥락이 부합된 해석이 더해지지 않는다면, 그 어떤 내용도 가치를 전달할 수 없다. 분석수행자가 무의식의 효과에 종속되는 것처럼, 분석가는 진실의 효과에 주체적이고 열정적으로 종속되어야만 한다고 강조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4.2. 분석가의 역할

그렇다면 분석수행자의 언어적, 비언어적 표현을 참조해, 진실을 말하기보다 진실의 기능을 감당해야 한다는, 대상 a로서의 분석가의 역할은 무엇일까? 저자가 말하는 분석가의 핵심 역할은 사건이 의미를 지닐 수 있게 하는 것에 달려있다. 즉, 새로운 해석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복합적인 믿음의 총체인 나는 어느 지점에선가 실재적 불일치로 인해 소통이 막혀있는 상태, 즉 증상에 머무르게 된다. 첫 번째 이미지에서 증상에 대해 ‘고통의 원인에 대한 이론’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같은 관점에서 증상은 그 자리에서 새로운 믿음 (이론) 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연히 발생한 사건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하고 해석하는 것, 바디우의 표현처럼 드러난 진리를 사유하는 것 (철학의 정의) 을 통해 실재를 기호로, 즉 우연적인 사건을 예정된 사건으로 여길 수 있는 힘을 기를 수 있게하는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서 설명한 종양의 경우처럼 실재계의 과도한 침범은 당장의 해석으로 감당해 낼 수 없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는 나지오 박사는 먼저 병원에 가볼 것을, 그리고 의사에게 직접 연락해 경과에 대한 공유를 요청해, 의사로부터 놀랍다는 반응을 받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것이 정신분석가가 의사와 직접 연결되는 경우도 드문데다, 본인이 아닌 관련자가 보고를 요구한다는 것은 상당한 수준의 ‘개입’으로 여겨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문에 대해 저자는 둘 중 하나의 자세 – 순전히 분석가로 머물거나,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것 – 를 고수해야한다는 편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못박는다. 오히려 정신분석이야말로 다양한 입장을 통합할 수 있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분석 치료 특유의 일관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개입은 매우 특수한 경우기 때문에 고민이 된다면 절대 개입하지 말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불가피한 상황에서 주인 담론 (행위 지시) 의 역할을 수행했지만, 분석가의 기본 입장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분석가 담론에 굳게 자리잡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5. 주체적 행복을 위하여

인간의 삶이란 무엇일까? 나만의 행복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가치 판단을 잠시 내려놓고 살펴보면, 행복은 편안함과 즐거움이 교차하는, 만족스럽게 이완된 상태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때의 기분은 오래가지 않겠지만, 기억의 여운 만큼은 은은하게 남아 우리의 마음을 채워줄 것이고 말이다. 오늘날 이런 삶을 산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일까? 생존에 치여 사는 우리나라에서 과연 부자 (경제적 자유를 이룬 사람들) 외에 다른 존재를 상상해 볼 수 있을까? 행복은 돈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고, 일정 수준 이상의 부는 행복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아무리 설파해 봐야, 모든 가치가 돈으로 환원되는 오늘날에는 또 하나의 낭만주의에 불과할 따름이다. 돈으로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들을 고민없이 사고 싶은 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간절하게 누리고 싶은 것은 시간을 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아닐까. 길어야 100년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을 노동 임금에 저당잡힌 채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말이다. 시간으로 돈을 버는 게 아니라 돈으로 시간을 버는 것,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의 새로운 이념이 된 경제적 자유는 사실상 행복의 필수 조건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은 결국 타자를 행복하게 해준 대가라는 점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먼저 행복하게 해줘야만 하는 것이다. 타자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는 그들의 어려움을 잘 이해하고 적절한 해결책을 찾아내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 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불편함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일텐데, 그 고통을 경험해 보지 않으면 해결을 위한 간절함이 생기기 어렵다는 점에서 고통을 감내했던 경험 또한 필수적이다. 결국 처음으로 돌아와서, 남을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잘 알아야만 하는 셈이다. 고통이 문제해결의 강한 동기가 되어, 이를 해결해 가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쌓아올린 경험치가 있어야만, 같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주고, 결과적으로 행복을 선물해 줄 수 있다.

사실 이를 실행에 옮기기에 너무 좋은 시기이긴 하다. 나를 무조건적으로 희생하는 억압적 헌신의 시대는 오래지 않은 기간동안 눈 녹듯 허물어져 버렸고, 자기 감정에 충실한 개인이 존중받게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스스로를 솔직하게, 또 잘 알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마땅히 따라야 할 이념의 빈 자리를 자본주의가 독차지하게 되면서, 모든 선택은 경제적 가치 한 가지로 평가받게 되고, 아무리 좋아하고 의미가 있어도 돈이 되지 않으면 관심을 지속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게다가 발전하는 기술은 부의 성공 사례나 잘 사는 사람들을 넘치게 엿볼 수 있게 해주어 상대적 열등감 또는 박탈감에 기름을 붓고 있는 상황. 그야말로 기술이라는 대타자가 나의 소신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로 내몰고 있는 것이다.

라캉이 “당신의 욕망을 포기하지 말라”고 한 것은 주체적 삶을 제한하는 대타자를 향한 저항의 몸짓을 지켜내라는 것을 의미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경구와 동일한, 그러니까 소크라테스를 사형에 이르게 한 죄목인 “젊은이들의 타락”을 다시금 추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의 타락은 방탕한 길로 이끌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은폐된 진실을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것, 전부라고 여겼던 것이 ‘아닐 수도 있음’을, ‘새로운 길이 가능함’을 깨닫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 정리해 본 ‘정신분석의 신체’는 이를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양하게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아마도 진실의 기능으로서의 분석가란, 부모란, 리더란, 지도자란 이처럼 스스로를 알아갈 수 있도록 독려하고 새로운 자극을 불어넣는 역할을 하는 존재여야 할 것이다. 기술 자본에 마비된 신체로 인해 행복이라는 도피처를 증상적으로 찾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여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누리는 주체적 만족이 되기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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