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지오 박사의 네 번째 강의에서는 ‘환상’을 다룬다. 라캉이 $ ◇ a 로 정의한 환상은, 자신의 요구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해 분열된 주체($)가 잃어버린 욕망의 대상이자 원인(a)에 동일시(◇)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환상을 구성하는 핵이 대상 a라는 의미로, 이전 강의에서 다뤘던 대상 a 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참고글 : 대상 a와 지식의 가치)
1. 환상의 원인, 대상 a
대상 a 는 내 안에 남아있는 표현 불가능한 무언가 (잉여향락) 로, 실재를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언어의 한계로 반드시 실패할 수 밖에 없는 요구의 잔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요구의 실패로 등장하는 욕망과 그 대상(a)은 환상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그 대상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수는 없지만 다양한 관점을 통한 조망은 가능하다.
1.1. 대상 a 로의 접근 방법
① 형식적 관점에서 대상 a 는 언어처럼 구조화 된 무의식의 기표사슬에서 예외의 자리 (구멍) 를 상징한다. 다만 구멍 자체의 의미는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며, 구멍의 테두리 (꿈, 환상, 말실수 등으로 드러나는) 를 통해 짐작만 가능할 따름이다. 기표 사슬은 구멍을 향해 끊임없이 이동하는데, 구멍으로 빨아들이는 힘 (어떤 행동을 유발하는 힘) 을 향락이라고 한다.
② 이러한 무의식을 에너지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대상 a는 우리 안에 남아있는 에너지인 잉여 향락을 뜻한다. 프로이트가 이드 (욕동의 저장고인 본능) 로 정의한 에너지원을 라캉은 세 가지 심역으로 구분한다. 절대적 대상이 누릴거라 가정한 쾌락인 대타자 향락 (상상계), 인식 및 제어 가능한 남근적 향락 (상징계), 그리고 남근적 향락의 예외에 속하는 잉여 향락 (실재계) 이 그것이다. 물론 대상 a 를 실재계의 일부라고 설명하긴 했지만, 상상계와 상징계에도 속해있어 이해 불가능한 자리를 굳건히 지키게 된다.
③ 한편 욕망의 대상의 관점에서는 주로 신체를 표상한다. 신체의 모든 부위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젖가슴과 입, 통증 등 신체의 접점을 통해 – 욕구, 요구, 욕망의 방식으로 – 대상과의 관계를 반복하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④ 마지막으로 임상 진료 관점에서는 분석가 역시도 대상 a 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안다고 가정된 주체 (S2) 의 알지 못하는 듯한 태도 (a, 외장) 만이, 환자가 극단적으로 경험한 트라우마를 중화시켜 좌절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기 ($) 때문이다. 언제나 놀라움에 마음을 열고 미지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 그러면서도 환자의 무한한 가능성을 기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분석가의 대상 a 적 태도라 할 수 있다.
1.2. 정신분석과 다른 관계와의 차이
저자는 환상 강의에 앞서 대상 a 로서의 분석가만의 차별점에 대해 언급한다. 의식의 수준에서 성도의 고해성사를 듣는 사제의 예를 들며 사회적 유대관계와의 차이를 밝힌 것인데, 다른 강의에서 언급한 정신치료와의 차이도 함께 소개해 본다.
1.2.1. 정신치료와의 차이 – 전이
나지오 박사는 책의 초반부에서 라캉 정신분석의 두 기둥으로 무의식과 향락을 꼽은 바 있다. 언어처럼 구조화 되어 있는 무의식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건 (시니피앙적 사건, 트라우마) 이 가해졌을 때, 곤궁에 빠진 주체 (분열된 주체) 가 고통을 승화 (향락) 시킨 것이 증상이기 때문이다. ^6f9e0d
굳게 묶여있어 주체를 압박하는 정신의 실타래를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외상이 된 사건을 분석의 자리로 불러낼 수 있어야 한다. 이때 분석가가 나의 치부를 감당할 수 있을만큼 신뢰할만한가가 결정적이 된다. 나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사건을 애도하는 것에 동참할 수 있는가 (전이) 즉, 분석가가 증상의 일부이자 심지어 원인으로 기능할 수 있는가가 정신분석과 다른 정신치료를 구분짓는 핵심 요소라는 것이다.
1.2.2. 사회적 유대관계와의 차이 – 무의식과 향락에 대한 이해
그렇다면 환자의 고통에 공감하면서 그들을 위로하는 사회적 유대 관계 (전이관계) 와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기에서도 무의식과 향락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환자가 자신의 고통을 이야기할 때 일반적인 청자는 그의 언어 (의식) 에 집중할 수 밖에 없지만, 분석가는 오히려 언어가 실패하는 지점 (시니피앙적 사건, 무의식) 에 초점을 맞춘다. 말 실수나 침묵, 꿈, 환상, 행동 등 다양하게 드러나는 그의 무의식이 증상의 원인에 대한 경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가서 경직돼 있던 무의식의 움직임을 재활성화시키는 것은 분석가가 분석수행자 (환자) 의 욕망의 대상 (대상 a) 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있다. 이 근본 원리를 이해했을 때, 즉 청취할 준비가 되었을 때 분석 관계 안에서 시니피앙적 사건과 무의식이 작동하며 사건을 재구성 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게 된다.
2. 환상 ($◇a) 의 개념
프로이트가 정신형성물, 라캉은 무의식의 형성물, 나지오는 대상 a의 형성물로 점차 구체적으로 정의한 환상은 욕망과 동시에 탄생한다. 아이가 배고픔(욕구)을 울음(요구)을 통해 충족시키더라도 빠는 행위 자체를 통해 만족시켰던,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욕망)는 결코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라캉의 대상 a 가 주로 신체적 조건에 기인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라고 할 수 있다. 돌출되어 있어 잡아 당기거나 빨고 싶은 것, 혹은 찔러보고 싶은 구멍, 그리고 이중의 요구 (아이와 엄마가 서로에게 요구하는 상호작용) 등 충동을 자극하는 신체 부위와 이들 대상의 접촉, 상실이 환상의 기폭제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환상은 신체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잉여향락 (대상 a)을 중심으로 세워진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2.1. 임상에서의 환상
환상은 주체와 대상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시니피앙), 이를 묘사하는 이미지들로 이루어져 있다. 환자는 임상 상황에서 반복되는 이야기, 꿈, 몽상, 행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환상을 표현하지만, 주로 알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여겨지는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의지와 관계없이 불현듯 떠올라 외부에서 이식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환상은 네 가지 구성요소들이 도착적 시나리오처럼 꾸며지는데 (환상을 실현하는 도착증 환자와는 다르다), 생생한 그림, 또는 정지화면에 가까운 장면으로 묘사된다. 특히 이 환상의 시나리오는 주로 환자의 부끄러운 경험을 묘사하기 때문에 분석 과정에서 뒤늦게 보고되는 것이 특징이다. 무의식과 향락을 이해한 분석가가 모든 편견과 선입견을 배제한 채 환자의 감정을 담아낼 때 (전이) 비로소 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2.2. 환상을 분별하는 방법
이처럼 부지불식 간에 등장하는 환상을 분별할 수 있는 방법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① 첫 번째는 이야기 속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동사에 주목하는 것이다. 중심적인 움직임에 대한 묘사가 당시의 외상적 상황을 상징적으로 재연하기 때문이다. 구절 속에서 동사는 주체와 대상 사이의 단절, 즉 시니피앙의 기능을 한다.
② 등장인물들 사이의 긴장과 감정 (정동) 을 탐색하는 것도 중요하다. 동사로 묘사된 사건의 원인 또는 결과를 유추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버렸다’는 묘사와 ‘분노’라는 감정이 뒤섞여 있다면 당시에 환자가 어떤 경험과 감정을 느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③ 환상에서 자주 등장하는 신체 부위도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향락과 직결되는 신체의 특성상 환자가 어떤 방식으로 갈등을 해소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든 요소를 고려하더라도 환상의 형성물은 매우 다양하기에 징후를 해석하기까지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이 잃어버린 대상을 욕망하는 것 이라는 환상의 표준 정의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던 것처럼 (참고글 : 타인의 환상을 열린 마음으로 대해야 하는 이유), 저자 또한 분석에서 등장하는 환상이 다양한 조건에서 형성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특정 상황, 또는 특정 분석 회기에만 해당될 수도, 외상적 의미를 함축하지 않은 사랑에 대한 요구 자체일수도 있기에, 예를 들어 구강적 대상을 찾는 행동을 단순히 구강기에 고착되었다는 식으로 해석할 경우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3. 향락의 장소로서의 신체
살펴본 것처럼 라캉에게 있어 신체는 향락 에너지가 순환하는 공간이다. 물론 감정에 따른 호르몬 변화 등 생물학적, 생화학적인 에너지의 흐름이나 철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표현하는 소통 방식에 관심을 한정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설령 특정 감정을 일으키는 화학적 기원이 밝혀지더라도, 상실 관계를 검토하고 고통을 나누며, 이를 떠나보내는 (애도) 상징적인 처리 과정은 여전히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환자만의 이런 향락 방식을 이해한다면 정신분석은 신체가 자신의 고통을 어떻게 승화시키는지 (어떻게 향락 – 진실의 만족 – 하는지), 더 정확하게는 신체의 어느 부분이 향락하는지를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 나지오 박사가 발레리나의 향락 대상이 관중들의 ‘시선’이 아닌 ‘발’에 있음을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다.
3.1. 향락과 쾌락의 차이
라캉의 향락 (주이상스) 개념은 처음 단순한 쾌락에서, 성적 쾌감으로, 그리고 고통을 뛰어넘은 만족감으로 정의가 바뀐 바 있다. (참고글 : 라캉 주이상스 (향락) 개념의 변화 과정) 나지오 박사는 그의 마지막 정의를 따라 향락을 최대한의 긴장으로, 쾌락을 긴장의 감소로 간결하게 규정한다.
쾌락을 넘어서 극한 시련에 노출된 신체, 프로이트 식으로 최고의 긴장이자 신체적 소진 (죽음 충동) 에 가까운 이러한 향락은 고통을 직접적으로 느낄 때 쾌감을 경험하는 마조히즘과는 다른 것으로, 주체는 자신의 무엇이 만족하고 있는지 결코 알지 못한다. **주체는 향락에서 철저히 배제되기 때문이다. 반면 쾌락은 아무 것도 잃지 않고 최소한으로 소비함으로써 존재를 이완시킨다.
3.2. 신경증과 도착증
앞서 환상이 도착적 시나리오에 따라 구성된다고 설명한 바 있는데, 그것이 임상적 도착증과 다른 점은 환상의 실행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아무리 변태적이고 관음적인 상상을 빈번하게 하더라도 이를 현실에서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는 도착증을 흉내내는 신경증 환자라는 것이다.
라캉의 에너지 구조로 설명하면, 절대적 쾌락을 가정한 대타자 향락이 불가능함을 인정 (거세)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신경증 환자는 이러한 만족이 불가능함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도착증 환자는 이것이 가능하다고 여기며 현실화에 끝없이 집착한다. 그리고 자신의 도착적 행위가 들통나고 창피를 당할 때 최고의 긴장 상태 – 모든 것을 잃을 정도로 소모됨 – 에 이름으로써 향락을 경험하게 된다. 관음증 환자가 모두 피학적 환자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4. 나의 환상을 마주하며
최근들어 나를 강하게 사로잡은 환상은 우리나라의 부정적인 미래상에 대한 지독한 염려였다. 한결같이 악화일로만 걷고 있는 출생률 문제, 오랜 전쟁으로 인한 자원 무기화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금리인상, 대러 경제제재로 인한 경제 블록화, 그리고 최근 글에서처럼 갈수록 우리의 일자리를 위협할 기술 (특별히 인공지능) 의 발전에 대한 염려가 첫 번째였다. 이 염려를 분노로 바꿨던 것은 무능력한 전 정부와 여당, 거기에 자격없는 인물을 지지율 하나만 보고 후보로 올린 인물들, 그리고 감정적으로 무조건 반대 세력에 투표한 사람들과 대통령 본인이었다. 한마디로 현직 대통령을 세우는데 기여한 모든 사람들을 향한 분노였던 것이다.
우리와 관계 없는 지역에서 벌어진 전쟁이 우리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을 경험하면서, 특히나 자원이 부족해 수출로 경제를 지탱해야 되는 나라에서 대표자의 중요성을 굳이 강조할 필요가 있을까. 정치가 중요하지 않았던 시기는 없었지만, 갈수록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자본 – 민주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심각한 경고 신호를 보내고 있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그 어느 때보다 능력있는 정부와 지도자들의 중요성이 커졌지만 우리나라는 오히려 그 수준이 퇴보하는 듯 보였다. 어쩌면 정치인들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지만, 우리의 눈높이와 기대치만 높아져 욕망의 간극이 더욱 커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별로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이제는 K-정치인이 좀 나올 때도 되지 않았나?).
어쨌거나 좌절된 요구로 인해 한층 강렬해진 욕망, 더불어 부풀어 오른 환상은 한동안 나와 우리 가족을 괴롭혔다. 지금은 그나마 조금 차분해지긴 했지만, 염려 그 이상의 일들이 벌어지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참담한 마음은 여전한 상태다. 그나마 회사도 잘 성장하고 있고, 아내와 아이들과도 잘 지내고 있어 너무나도 감사하지만 공동체가 무너진 다음에야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때문에 인공위성 발사 성공, 국산 초음속 전투기의 초도비행 성공, 방산업계 대규모 수출 타진 소식 등이 뜻 밖의 많은 위로가 됐다. 나라의 위기를 극복했던 건 언제나 국민들의 몫이었음을 다시금 상기시켜줬기 때문이다.
그런데 갑자기 당황스러운 상황이 벌어졌다. 여기까지 쓰는 중에 갑자기 눈물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뭐지? 안도의 눈물인가? 사실 별 다른 감정이 없는 상태였어서 왜 이러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썼던 글을 다시 읽어봤다. 희한하게도 ‘무너진 공동체’ 부분을 읽으니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아, ‘무너짐’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무언가가 있었구나. 저자의 가르침을 떠올려 보면 지금 이 순간이야 말로 시니피앙적 사건 (이해 불가능한, 예기치 못한 사건 에 해당되는 일이었다. ‘무너지다’라는 시니피앙 (동사인 ‘기표’) 은 나의 환상의 핵 (대상 a) 을 구성하는 무언가일 것이고 말이다. 험난했던 필자의 가정사와 그 고통에 연결되어 있었을 환상의 핵은 글을 쓰는 중에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소환되었다. 글쓰기를 통한 자기분석 경험. 매번 글을 쓰면서도 놀라게 되는 것은 언제나 예상치 못하게 등장하는 이런 깨달음에 있었다. 이번 글도 어떻게 마무리 지을지 고민하며 써 내려가던 차에 마주한 상황이다 보니 “글쓰기가 실재를 지탱한다”는 라캉의 금언이 더 깊이 와 닿았다. 나의 글쓰기는 분명 효율과는 전혀 거리가 먼 과정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나를 진실되게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의 향락의 도구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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