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슬라보예 지젝의 책만 보고 글을 쓰다보니 그의 화려한 수사학에서 살짝 거리를 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밥만 먹고 살 수 없다는게 여기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듯 싶은데, 마치 라캉이 ‘프로이트로 돌아가라!’고 외쳤던 것처럼 지젝의 정신적 스승인 라캉 탐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던 것이다. 아마 본 블로그의 카테고리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필자가 탐구하고자 하는 영역은 크게 ‘서양 철학’과 ‘정신분석’이다. 사실 헤겔과 라캉을 통합한 지젝 뿐 아니라 많은 서양 철학자들이 라캉의 정신분석을 기본적으로 참고하고 있기에 어쩌면 두 영역은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라 봐도 무방할 듯 싶다.
한편으로 한동안 바디우의 저서들을 읽다 지젝을 지나 라캉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한 조엘 도르의 책 『라깡 세미나 · 에크리 독해 1』 이 결여의 지점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무려 작년 11월을 끝으로 정리를 더 이상 이어나가지 못한 것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라캉 이론의 역사와 핵심이 되는 개념들을 매우 상세히 설명해 준 입문서인 그의 책을 토대로, 다른 학자들을 통해 읽는 라캉이 아닌 『에크리』를 통해 직접적으로 만나보겠다는 다짐이 차일피일 미뤄지는 상황이 내심 속상했다.
이전에 정리했던 글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무의식을 구조화한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
2. 팔루스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3. 아버지의 은유로 살펴본 가부장제의 의미
라캉을 직접 대면하기 위해 단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않겠다는 마음에서 중요한 부분들을 나누어 정리한 글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어서 작성할 ‘주체의 분열’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앞서 정리한 내용들을 복기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기억이 거의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서론이 많이 길어졌지만… 이전 글들을 읽으면서 우리의 정신 구조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과정들을 조금 더 간결하게 요약해 공유해 보고자 한다. 다만 ‘언어로 구조지어진 무의식’이라고 하는 라캉의 핵심 명제 또한 중요하게 알아야 하는 부분이니 위의 첫 번째 글만 참고해 보시면 좋을 듯 싶다.
1. 거울단계
거울단계는 어떤 정체성도 갖지 않고 태어난 아이의 ‘최초의 정체성’이 탄생하는 시기이다. 초기에 자신의 신체조차도 인지하지 못하던 것에서 거울에 비치는 자기의 모습이 실재가 아닌 이미지라는 것을 깨닫고, 그 이미지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의미한다. 다만 이 시기의 깨달음이라는 것이 지식을 통한 이해의 진보가 아니기에 아직 상상 속에 머물러 있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연령 상 6 ~ 18개월[1]에 속하는 이 시기는 잘 아시다시피 어머니와의 유대 관계가 절대적으로 중요한 시기이다. 자신의 욕망을 채워주는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초점이 어머니로 향해 있는 융합된 상태며, 아직 ‘주체’라고 불릴 수는 없는 상태이다.
2.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어머니와의 2자 관계에서 아버지라는 제 3의 존재를 인식하고 어머니의 욕망이 실은 아버지를 향해 있다는 슬픈 진실을 확인한 뒤, 그러한 결여를 받아들이는 (거세) 일련의 과정이 바로 ‘근친상간 금지’라는 신화적 은유를 차용한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이다. 초기는 여전히 어머니와 융합되어 있는 상태지만, 각각의 계기를 통해 아버지라는 존재가 보다 선명하게 각인된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아버지는 여전히 어머니를 매개로 인식되는 상징적 존재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욕망을 소유한 자’라는 의미를 지닌 기표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어머니가 존경하는 아버지’를 통해 아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팔루스였음을 결국 포기하고, 이러한 근원적 결여 (원초적 억압) 를 안은채 팔루스를 찾아 삶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그 출발점이 언어를 통한 요구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요구가 어떤 식으로도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담을 수 없음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분열될 수 밖에 없는 (끝 없이 욕망할 수 있는) 주체가 탄생하게 된다.
이제 잊혀져 있던 기억을 어느 정도 되살렸으니, 다음 글을 통해서는 주체의 분열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이 책이 마무리 되는대로 『에크리』를 직접 읽어가면서 그 과정도 꾸준히 공유해 드릴 예정이다. 물론 그렇다고 라캉만 살펴보겠다는 건 아니고, 중간 중간 다른 책들도 접하면서 꾸준히 책을 통한 기쁨을 나누어 볼 작정이다. 🙂
[1] 자크 라캉, 『에크리』, p. 114
* 표지 이미지 출처 : zuzanamihalecho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