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서는 프로이트와 라캉의 욕망에 대해 살펴볼 수 있었다. 아이에게 만족을 제공하는 어머니의 사랑을 통해 프로이트는 아이가 이전의 충동 만족을 다시 경험하고자 하는 것을 욕망이라고 봤다. 반면 라캉 관점에서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 정확히는 최초의 대타자인 어머니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 (대타자의 욕망) 이다. 자신에게 만족을 제공한 어머니의 방식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이미 그녀의 욕망에 종속되어 있음을 증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초의 욕구를 만족시키고자 하는 요구 (언어 또는 행동) 는 표현의 한계상 반드시 잔여물을 남길 수 밖에 없다. 이와 같이 욕구에 대한 요구의 잔여물을 라캉은 욕망이라고 부른다.
한편 이번에 정리해보고자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욕망이다.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욕망이 주로 아이 또는 환자를 향해 있다면, 그 반대편에서 타자의 욕망을 다루는 분석가의 욕망은 과연 무엇일까? 간단히 생각해 본다면 환자가 자신의 증상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욕망을 찾아나서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욕망을 찾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인데, 타인의 욕망 탐구를 돕는다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이 때문에 라캉이 분석가의 욕망을 공식화하는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1. 분석가의 욕망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한 대타자들
이 논문의 저자인 카트리엔 리브레히트에 따르면, 분석가의 욕망에 대한 라캉의 관심은 1958년, 「치료의 방향과 그 힘의 원리」 에서 처음 언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후 1964년, 『세미나 11권: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 개념』 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발전하며, 마침내 1969년 그의 유명한 네 담론 (주인 담론, 대학 담론, 히스테리 담론, 분석가의 담론) 으로 공식화 되어 완결짓게 된다. (네 담론에 대한 내용은 필자의 다른 글을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무려 10년이 넘는 기간을 통해 개념을 완성시켜 가는 동안 그가 중요하게 참고한 학자들 (대타자들) 이 있다.
1.1.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라캉이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주창할 만큼 가장 중요한 참조점이었다. 라캉은 프로이트가 기성 의학 질서에 맞서 자신의 욕망에 따라 무의식과 기표의 정체를 드러낸 것을 칭송한다. 그리고 정신분석의 원인이 된 프로이트의 욕망을 무의식적 욕망에 관한 진리를 알고 싶은 욕망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60년대에 들어 ‘지식을 통해 진리를 추구하는’ 프로이트의 방식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그가 보기에 정신분석의 본질이자 분석가의 욕망은 욕망 그 자체, 즉 욕망을 위한 욕망으로만 규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분석가의 욕망에 있어서 프로이트를 참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의식을 향한 그의 욕망을 대할 때 뿐이었다.
1.2. 산도르 페렌치
페렌치의 경우, 라캉이 분석가의교육 원리를 세울 때 많이 참조했다고 한다. 특히 분석가의 자아는 스스로를 지워야 한다는 그의 제안을 중요한 원리로 받아들여 자아의 죽음, 즉 분석가는 모든 객관적 지식을 보류해야 한다고 규정 짓는다. 극단적으로, 분석가가 가질 수 있는 지식이란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것 뿐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죽음을 향한 존재(being for death)’는 기표로 인한 상징적 죽음 (아버지 은유를 통한 거세) 이 더해지며 ‘두 죽음 사이의 존재’로 그 의미가 새로워지게 된다.
1.3. 소크라테스
욕망과 죽음의 복잡한 관계는 소크라테스를 참조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플라톤 『향연』 에서 에로스를 예찬하는 변증을 통해 소크라테스의 욕망을 밝혀낸 것인데, 이를 통해 라캉은 욕망이 제자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탈장소성) , 즉 두 죽음 사이의 공간에는 (욕망의) 텅 빈 자리만 남을 정도로 정화된다고 하는 그의 개념을 받아들인다 (충동이 그 자체의 일주운동이고, 욕망의 대상만을 그 대상으로 갖는다고 하는 라캉의 욕망에 대한 이전 글을 참고해 보면 도움이 될 듯 싶다) .다만 환자와 상호작용을 해야하는 분석가에게는 무의식의 정화가 환자를 향한 열린 태도로 기능해야 한다. ① 환자의 욕망의 자리는 반드시 대타자가 차지해야 한다는 것과, ② 환자 자신의 욕망을 깨달을 가능성을 위해서 말이다. 분석은 어디까지나 환자와 분석가가 ‘함께 짜는 것’이기 때문이다.
2. 욕망에 대한 관점의 변화
2.1. 1950년대 중반 : 환자 욕망의 원인 탐구
1950년대 라캉의 관심은 주로 환자의 욕망을 향해 있었다. 라캉의 주요 개념들은 이 시기에 정립되었다고 한다. 『세미나 1권』 (1953 ~ 54년) 에서 타자 (other) 의 욕망을 언급한데 이어, 『세미나 2권』 (1954 ~ 55년) 에서 대타자 (the Other) 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 반드시 두 타자, 적어도 두 가지 타자를 구분해야 한다. 대문자 O로 쓰인 대타자와 소문자 o로 쓰인 타자, 즉 자아를 말이다. 이 중 발화 기능과 관련된 것은 대타자이다.” – J. Lacan, The Seminar. Book II: The Ego in Freud’s Theory and in the Technique of Psychoanalysis, p. 236
p. 294에서 재인용
코제브의 헤겔 독해에서 끌어온 이와 같은 욕망의 정의 (인간의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이다) 는 결국 타자의 승인을 요구하는 인정 욕망으로 요약된다. 상호주체적 변증법인 L도식을 통해 공식적으로 소개된 이러한 욕망은 이후 논문 「무의식 속에서 문자의 심급 혹은 프로이트 이후의 이성」 (1957) 에서 항상 ‘무언가’를 향해 있다고 하는 환유적 특성을 덧입게 된다 (존재 결여의 환유). 이는 무의식을 사로잡고 있는 기표의 두 가지 형식인 은유와 환유가 등장함으로써 가능하게 된 설명이다. 이 덕분에 분석의 목표는 더 이상 인정에 할애되지 않고, 욕망의 판독과 해석에 맡겨지게 된다 (인정 욕망에서 욕망의 환유로의 이행).
2.2. 1950년대 말 : 대타자로서의 분석가 욕망의 등장
라캉이 분석가의 욕망을 처음 언급한 것은 1958년, 「치료의 방향과 그 힘의 원리」를 통해서였다고 한다. 1955년 분석가의 자아는 스스로를 지워야 한다는 페렌치의 원리를 통해, 환자가 요구하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다른 욕망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분석가의 역할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1950년대 말까지 라캉은 분석가의 위치를 큰 타자의 위치와 동일시했을 뿐 아니라 분석의 목표를 큰 타자의 욕망으로서 분석행위자의 욕망의 실현으로 정식화했다. 이는 욕망의 근본 조건과 함께 분석가의 위치가 중요함을 강조한다. 욕망은 언제나 큰 타자를 포함한다.
p. 121
※ 이 책에서는 the Other(대타자)를 큰 타자라고 번역했다.
이러한 정의는 라캉이 1964년 프랑스 정신분석 학교(EFP)를 세우면서 발표했던 「창립 성명Founding Act」 에서의 교육 분석의 목표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분석가가 되고자 하는 교육생의 요구는 분석의 종결 시점에 드러나는 그들의 동일시와 이상화를 통해 판별할 수 있다. 교육생은 이상적인 분석가 (의 이미지) 에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분석가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모든 성장 과정에 대한 일반화라고도 볼 수 있는 이러한 관점은 분석가 교육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환자(교육생)의 욕망은 결국 대타자로서의 분석가의 욕망에 종속된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있어서도 라캉만의 중요한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국제정신분석학회(IPA) 소속 정신분석 단체들이 분석행위자(환자)와 교육생을 엄격하게 나눴던 반면 (출발점에서 명확하게 구분), 라캉은 정반대, 그러니까 치료가 종료되는 시점에 분석가 여부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분석가가 되려고 하는 요구를 하나의 증상으로 본 라캉은 자아의 요구 너머에 있는 욕망을 알고자 했다. 분석 과정에서 환자가 분석가 되기를 욕망한다는 것을, 또는 교육생이 전혀 다른 것을 욕망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육생이든, 환자(분석행위자)든 중요한 것은 분석의 시작이 아닌 분석의 종결에 있었다.
2.3. 1960년대 초 : 분석가의 주체적 죽음
『세미나 7권: 정신분석의 윤리』 (1960) 에서는 분석가의 욕망을 경험된 욕망이라고 이야기 한다. 분석의 종료 시점에서 제기되는 욕망의 문제, 즉 분석가의 한계를 깨달았다는 점에서 말이다. 앞서 페렌치의 예를 들었던 것처럼 주체의 죽음 (분석가는 최고선이 아니며, 행복을 제공해줄 수 없다는 것) 을 통해 비로소 자신의 욕망을 발견하는 것이 분석의 관건이 된다. 한편 『세미나 8권: 전이Transference』 (1960~61) 에서 라캉은 분석가 또한 환자의 상상적 유혹 (전이) 에 대해 무관심한 상태를 유지하는 더 강력한 욕망에 사로잡혀야 함을 이야기 한다. 분석가 또한 죽음을 향한 욕망을 가져야 한다고 본 것이다.
2.4. 1964년 이후 : 욕망을 넘어 충동으로 ($ → a)
「프로이트의 ‘충동Trieb’과 정신분석가의 욕망」 (1964) 은 분석가의 욕망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점이 되는 논문이라고 한다. 이 시기에 라캉은 대타자의 욕망과 사물에 관련된 충동으로 둘을 명확히 구분 짓는다. 이 구분이 중요한 것은 분석가의 욕망을 더 이상 욕망이 아닌 충동에 위치시키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욕망은 대타자의 상징적 법에 종속됐을 때만 등장 (분열된 주체 $) 한다. 반면 충동은 욕망을 넘어 어떤 금지에도 얽매이지 않는다. 또한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순환 운동이기에 언제나 주이상스를 확보할 수 있어 욕망의 원인인 대상 a를 가리키게 된다.
여기에서 라캉이 주의깊게 탐구해 온 전이와 역전이의 관계도 재조명 된다. 분석가가 자신의 욕망을 이뤄주길 바라는 요구 (전이) 는 그와 동일시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한다. 단순히 상호주체적인 관계가 아닌 대타자, 즉 환자와 그로부터 사랑받는 대상으로서의 타자와 관계 맺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이 사랑할만 하지 않으면 전이관계는 형성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한 분석가의 민감한 반응이 바로 역전이로 드러나는데, 그 부정적인 인식으로 인해 분석가의 무의식의 불완전함, 또는 둘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된 감정으로 여기는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라캉은 역전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오히려 전이 상황에서 반드시 필요한 분석가의 개입이라고 여긴다. 동일시를 통해 주체를 완성하고자 하는 그의 요구는, 근본적 결여와 만나 좌절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분석가의 제자가 될 것이 아니라면, 이러한 이상화는 반드시 피해야만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이의 작동과 조작은 주체가 자신을 사랑받을 만하다고 여기는 지점[동일시 지점]과 주체가 자신을 a로 말미암은 결여라고 여기는 지점, 즉 a가 주체의 근본적inaugural 분열[$]로 구성된 틈을 채우는 지점 사이의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규제되어야 한다. – J. Lacan, The Four Fundamental Concepts of Psychoanalysis, p. 270.
p. 133에서 재인용
2.5. 1969년 : 분석가 담론의 공식화
결국 라캉의 분석가의 담론 공식은 위와 같은 연구의 과정을 거쳐 완성시킨 고도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늘 놀라게 되는 것은 그의 난해한, 어찌보면 자유로워 보이는 사고체계 속에서 핵심을 탁월하게 관통 (공식화) 하는 능력이다. 필자도 그렇지만 많은 지식인들이 그를 중요한 참조점으로 여기는 것도 그의 이론의 뛰어난 압축 능력에 매료되어서이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정립되는 주체의 특성을 담은 담론의 원리는 분석가와 환자의 관계에 대한 핵심적인 메시지를 제공한다. 각각의 위치는 크게 주체 (좌) 와 객체 (우) 로 나뉘며, 주체에서의 행위자가 타자에게 요구 (→, 말 건넴) 하는 방식을 띈다. 요약하자면 어떤 의도 (진리) 를 가진 행위자가 타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면 반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생산된다고 볼 수 있다.
S1 :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주인 기표
S2 : 체계적인 지식
$ : 분열된 주체
a : 잉여 향락
담론은 『세미나 17권: 정신분석의 이면』 (1969) 에서 공식화 된 것으로, 주체가 분석가를 향해 있기 때문에 분석 담론이 아닌 분석가의 담론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여기서 분석가는 대상 a의 위치, 즉 환자의 욕망의 원인으로 자리매김 해야 한다. 또한 분석가가 갖고 있는 지식(S2)은, 프로이트처럼 그 자체를 진리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기능만을 추구하는 지식 (반만 말하기) 으로 분석가 주체는 여전히 비워져 있어야 한다.
2.6. 분석가의 욕망
결론적으로 분석가의 욕망이란 대상 a, 즉 욕망의 대상의 위치를 확립하고 유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이를 통한 사랑의 요구, 그리고 그런 욕망과 주체를 지탱하고 있는 근본적인 환상의 주이상스를 드러내도록 이끄는 것 (환상 가로지르기) 을 통해서 말이다. 요구를 넘어선 욕망, 그리고 욕망을 넘어선 충동의 경험에까지 다가갈 수 있도록 자극하는 수수께끼로서 자신을 위치시키는 것만이 진정으로 라캉적 분석가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욕망과 충동의 분리는 분석가의 욕망의 본질상 치료가 동일시에서 벗어나 환상의 횡단과 주이상스의 폭로를 향하도록 이끄는 욕망이라는 사실을 선명히 해준다. 동일시를 피하기 위해 분석가의 욕망은 본질상 수수께끼로 남아야 한다. 다시 말해, 분석가는 그 어떤 주체적이거나 특수한 개입도 원하지 않는다.
주체로서의 분석가의 특수성과는 대조적으로, 기능으로서의 분석가의 욕망은 보편성을 지닌다. 1967년의 『제안』에서 라캉은 이 기능을 방정식 ‘x’라는 수학 용어로 기술했다. 분석가의 욕망은 그것이 ‘x’의 위치에 자리할 때에만 작동 가능하다. 1) – 1) J. Lacan, “Proposition of 9 October 1967 on the Psychoanalyst of the School,” p. 7.
pp. 134 ~ 135
결국 이런 과정을 통해 분석이 종결되는 시점에 환자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진정한 결여 (실재) 이다. 이제껏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불가능성에 대한 진실을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가 아버지의 은유를 통한 상징적 거세로 욕망의 사람 (주체) 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분석의 과정 또한 잃어버린 아버지를 회복시키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 간격을 유지할 것이냐일 것이다. 환자의 주체적 공간을 열어주면서, 어린 시절 외면 당했던 충동을 자연스럽게 드러낼 수 있을 때, 그의 삶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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