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은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하는 상징적 은유에 대한 탐구이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사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글인데 그 이유는 정작 라깡 이론에 대한 설명보다 이를 토대로 한 가부장제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정리하는데 더 오랜 시간을 할애했기 때문이다. 고민의 배경이 됐던 것은 성장판 단톡방에서의 논의가 결정적이었다. 가부장제가 문제다라는 점에 모두가 동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내 생각과 다른 분들의 생각이 미묘하게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충분하게 전개하지 못했던 생각을 나부터 먼저 정교하게 다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이번 장을 만난 것이 좋은 계기가 되었다. 물론 이 글이 관점에 따라 많은 분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필자가 의도하는 바가 어떤 것인지 알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공유하게 되었다. 모쪼록 더불어 성장하는 밑거름으로써 이 글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으로 비록 한 권의 책에 불과하지만, 담고 있는 내용들을 가볍게 훑고 넘어가기 아쉬워 시작된 분할 서평이 마치 QT (특정 구절을 깊이 묵상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 것) 처럼 생각을 풍성하게 해 주어 감사한 마음이다.
1. 아버지 이름의 은유
거울 단계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로 잠시 돌아가 보자. 자신의 신체를 자신의 몸과 분리된 것으로 여기던 아이는 상호작용을 통해 점차 거울 속 타자가 이미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후 그것이 자신의 것임을 자각하는 내적 통합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이 상태는 여전히 어머니 욕망에 종속된 상태로 오이디푸스의 첫 단계에 머물러 있다. 두 번째 단계의 시작은 자신만을 바라보는 줄 알았던 어머니에게 다른 욕망의 대상이 있음을 ‘예감’할 때 찾아온다. 아이가 이때 느끼는 감정은 어머니라고 하는 실재적 대상이 상상적으로 아버지에게 향해 있음을 깨닫는 좌절(거절로 번역된 frustration)이다. 이로 인해 심리적 동요가 발생한 아이는 존재론적 질문(나는 팔루스인가 아닌가)을 던질 수 있게 된다. 그 이전까지 자신이 어머니의 팔루스임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에서 이처럼 의미 있는 질문이 출현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타자(autre)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한편 아이는 이미 소유론적 질문(팔루스를 소유한 자는 누구인가)의 단계에 있는 어머니와 동일화해 같은 질문으로 나아가게 되고, 실재적 아버지가 팔루스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돼 상징적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종결되는 것은 아버지를 존경(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의 지위 유지)하는 어머니를 통한 법의 상징화가 이루어지는 때이다. 즉, 상상적 대상으로서의 팔루스가 상징적으로 아버지의 소유가 되어 그 법에 복종해야 함을 인정하는 거세가 완성되는, 어머니를 둘러싼 경쟁이 종식되는 때인 것이다. 그럴 때 어머니의 욕망(S1/s1)은 아버지 이름이라고 하는 기표 아래에서 무의식이 되어 원초적으로 억압되며, 이를 결코 명명할 수 없는 언어적 한계로 인해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인 욕망을 구성하게 된다. 아버지 은유의 과정을 도식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어머니의 욕망을 담지한 아버지의 이름은 은유의 도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어머니의 욕망을 바라보는 아이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팔루스를 소유한 자로, 즉 순수한 아버지의 의미(s2)는 무의식적이 돼 상징으로써만 아버지를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프로이트의 포르트-다(fort-da) 놀이[1]는 이러한 기표의 대체를 설명하는 훌륭한 사례로써 어머니의 부재와 돌아옴을 놀이로 승화(상징화)시켰음을 의미한다. 라깡의 말처럼 사물은 대리되기 위해 상실되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상실을 감당할 수 있으려면 그것을 대신할만한 무언가가 반드시 필요하다.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 부재의 아픔은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가 있다는 짐작만으로도 견딜 수 있을만한 것이 되고, 아버지는 그렇게 나에겐 없는 무언가(팔루스)를 갖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팔루스를 가지고 있는 아버지라는 참조점, 즉 상징적 아버지를 불러냄으로써 아이가 어머니의 부재의 원인을 지칭 혹은 명명할 수 있을 때 아이는 기표적 관계를 만들어 낸다. 달리 말하면 바로 여기에서 아버지가 체현하는 상징적 법과 결합되어 있는 아버지의 이름이 개입한다. 아버지의 이름은 하나의 명칭[이다], 즉 법이 행사될 수 있도록 해주는 장소에 위치하고 있는 상징적 기능에 대한 인정에 근거하는 하나의 명칭[명명, designation]이다. 명칭은 은유의 생산물이다. 아버지의 이름은 아이에게 어머니의 욕망의 기표를 대체한 새로운 기표(S2)이다.
p. 151
한편 어머니의 욕망 또한 아이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하나의 기표로 작용($1/x)하고 있다. 여기에 은유화 된 아버지가 더해짐으로써 어머니의 욕망은 아버지 이름 하에 억압(원초적 억압)되어 대타자(Autre)의 현존인 무의식(I)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처럼 소외된 근원적 욕망은 아이로 하여금 그것을 끊임없이 되찾도록 애쓰게 만든다. 아이가 언어를 받아들이는 것도 이때이며, 그러나 잘 알다시피 우리는 그 경험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다. 최초의 인류로 상징되는 아담과 하와가 유일하게 금지된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다시는 에덴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소유의 욕망을 위해 억압된 존재의 욕망은 아이로 하여금 이제부터 잃어버린 대상을 대체하는 대상들의 영역에 자신[아이]의 욕망을 투여하도록 만든다. 이를 위해 욕망은 요구(demande) 속에서 자신[욕망]을 전개시키며 말(parole)로 자신을 표현하게 된다. 하지만 요구하기 위해서 욕망은 담화의 기표 사슬 속에서 점차적으로 자신[욕망]을 상실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욕망은 항상 계속적으로 무수히 많은 대체물을 발견하며, 동시에 이 대체물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무수히 많은 기표들을 계속적으로 찾는다고 말할 수 있다. 주체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최초의 욕망을 지칭[명명,designer]하기 위해 집요하게 노력한다는 것이다.
pp. 153 – 154
언어의 등장과 함께 요구가 출현한다. 하지만 요구는 욕망이 아니다. 요구는 잃어버린 욕망에 대한 서투른 언어화로 부분적으로만 이를 표현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 어떤 정확한 표현을 찾는다 하더라도 언어는 원래의 경험을 다시금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이처럼 언어가 욕망을 ‘대체’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는 향후에 설명하겠지만 성장의 여정이 욕망의 은유, 환유가 될 수밖에 없음을 증언하게 된다. 하지만 이 같은 상실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욕망과 추동력을 확보할 수 있으며, 이것이 곧 최초의 주체의 탄생이 된다.
2. 아버지 이름의 배척 : 정신병
라깡에 따르면 구조적 교차로로서의 아버지 이름의 은유는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그것의 실패는 [아버지 은유가 도입되지 않으면] 정신병적 과정을 도입한다. 그리고 그것이 성공하면 [아버지 은유가 도입되면] 언어[언어행위]의 차원에서 주체의 욕망을 소외시켜 주체적 분열(Spaltung)의 구조를 형성시킨다.
p. 155
원초적 억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무언가가 있다면 기표의 대체인 아버지 은유는 나타나지 않는다. 아버지를 바라보지 않는 어머니에게는 아버지의 그 어떤 메시지도 전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원초적 억압을 방해하는 심리적 메커니즘을 라깡은 ‘배척(forclusion)’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당시의 난제였던 신경증과 정신병의 메타심리학적 구별을 가능케 한 독창적인 공헌이었다고 한다. 정신병이 신체 기관에서 유래한다는 기관발생론적 가설에 이어 당시 정신의학에서는 심리발생론적 병인론이 정설로 자리 잡는다. 즉 현실에 대한 상실된 감각이 망상적 상상을 일으킨다는 것으로 둘의 (암묵적으로 용인된) 인과론적 결합은 단지 망상이 출현하는 것만으로도 정신병이라고 진단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에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을 통해 구조적으로 둘을 구분 지으려 했으나 앞서 이야기한 정신병에 대한 상투적 정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비록 그의 말년인 1938년에 자아 분열 개념을 토대로 신경증은 현실 회피이며, 정신병자는 현실 부인으로 정의 내릴 수 있었다고 하나 구별을 위한 기준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나아가는 아버지 은유 작용의 실패, 즉 대타자의 자리에서 배척된 아버지 이름이라는 라깡적 설명을 통해서만 원인을 기준으로 한 명확한 구분은 가능할 수 있었다. 상상 속에 머물러 있는 정신병은 아버지를 배척한 어머니와 그녀의 아이가 태곳적 조직화에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한다. 거세를 통한 주체의 분열, 이로 인한 욕망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한 채 어머니의 욕망의 욕망(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욕망하는 것)에 머물러 있는 자궁 속 태아의 현현인 것이다.
우리가 주장하려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어머니가 아버지라는 인물을 받아들이는 방식[어떻게 받아들이는가]만이 아니라 어머니가 그의 말(parole), 정확히 말하면 그의 권위,달리 말하면 법의 출현에서 그녀[어머니]가 아버지 이름을 위해 유보해 놓은 자리를 얼마나 존중하는가라는 것이다. – J. Lacan, 「정신병의 가능한 모든 치료에 대한 예비적 문제에 관하여」, in Écrits, op. cit.,p.579. 강조는 조엘 도르.
p. 162 에서 재인용
3. 아버지의 은유로 바라본 가부장제
요즘은 가정의 질서 운운하면 가부장적이라는 평가를 넘어 비판을 받는 시대다. 물론 인류사를 통틀어 그 이름 하에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자행되고 또 끔찍하게 정당화되어 왔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이는 지극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82년생 김지영』이 한국을 넘어 중국, 일본, 동남아시아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는 점은 보편적 인권에 대한 자각이 얼마나 뒤늦게 일어났는지를 새삼 깨닫게 한다. 물론 피해의식이 집중적으로 부각되어 여성인권운동을 대표하는 페미니즘에 대해 왜곡된 시각을 갖게 한 문제도 있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물학적 성 차이를 넘어 가부장제의 차별적 질서에 오랜 기간 예속된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존중과 평등의 길로 한걸음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드는 한 가지 의문이 있다.
3.1. 가부장제는 정말 폐기되어야 할 시대착오적(구시대적) 유물에 불과한 것일까?
일단 필자의 입장을 밝히자면 ‘아니오’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 봤을 때 여성과 아이, 즉 가정의 상대적 약자들에 대한 존중이 진지하게 논의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라 할 수 있다. 가히 절대적이었던 아버지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수 있었던 배경은 오늘날 전 세계가 나름의 평화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전쟁의 포화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곳들이 존재하지만 국지전 형태의 상대적으로 소규모 갈등으로 (설명을 위해 고통의 참화를 가벼운 것처럼 표현함을 부디 용서해 주시길..), 한국 전쟁 이후로 다수의 국가가 사력을 다해 전쟁을 치르는 일은 아직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런 일이 다시는 벌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필자가 보기에 죽음의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나 개개인이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랜 기간 힘의 표상으로 자리 잡은 절대권력자로서의 아버지의 이름이 약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 쉽게 말해 안전함에 대한 신뢰가 의문을 품을 수 있는 삶의 여유를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또 다른 차원의 생존의 어려움이 존재하겠지만, 적어도 직접적인 생명의 위협에 만성적으로 노출될 만큼의 취약성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 더해 특정 집단에게 전유돼왔던 권력이 고도화된 시스템으로 점차 분산, 이양되면서 그 힘의 약화가 가속화된 것도 중요하게 언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오늘날 힘의 소유자, 곧 지도자로 예표 되는 아버지라는 존재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위기를 맞았고, 이는 피할 수 없는, 한편으로 인류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갔다는 방증이기에 좋은 현상임에는 틀림없는 일이다. 그렇게 개인의 삶의 존중을 통한 주체성 발현의 출발점에 선 것이 오늘날의 시류를 바라보는 필자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구시대적 제도가 붕괴됨으로 인해 모두가 살만한 시대가 도래할 수 있게 됐는데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가? 상대적으로 힘을 잃은 남성들의 입장을 한 줌이나마 대변하기 위해서인가? 물론 비록 30대이긴 하지만 혜택을 누려본 적도 없는데 상대적으로 빼앗기는 느낌만 든다는 20대 남성들의 울분에도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이보다는 좀 더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3.2. 생물학적 차이에서 비롯된 심리적 애착관계
앞서 언급한 정신분석에서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부모와 자녀 간의 상호적 (정신적) 죽임의 은유이다. 어머니와의 융합된 구조 속에서 다른 대상으로 눈을 돌릴 수 있는 틈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버지를 통한 거세의 좌절이 필수적이다. 그렇게 욕망의 여정을 시작한 아이의 부모 거부 또한 불가피한 것이고 말이다. 물론 라깡이 말하는 아버지는 실재가 아닌 상징으로 작용하는 하나의 자리이자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을 독립적으로 세우는 힘으로서의 질서, 어머니를 대신해 그 역할을 감당하는 누군가에게 아버지의 은유가 덧입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르겠다. 질서를 존중하는 차원이라면 성차별적인 가부장제로써가 아닌 가장제로 그 호칭을 바꿀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말이다. 실제로 받았던 질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이기도 한데 필자는 이에 대해서도 입장을 바꿀 생각이 없다.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남성과 여성으로 엄연히 이분화되어 태어난다. 자신에게 주어진 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심리적인 것으로 이 논지를 벗어나는 일이다. 성장하면서 신체적인 차이 또한 두드러지며, 일반적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육체적으로 힘이 센 것 또한 사실이다. 물론 신체 단련을 통해 일반적인 남성보다 힘이 센 여성이 분명 존재하지만, 동일한 조건의 남성과 비교할 경우 그 차이는 다시 벌어지게 마련이다. 대부분의 프로 경기에서 남성과 여성의 경기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이는 차별인가? 오히려 신체적 차이를 존중한 구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 차이를 부정하고 평등이라는 이름하에 양성이 함께 경기를 치르게 하는 것이 차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갖게 될 때 10개월 간 아이를 뱃속에 품는 것은 여성이다. 임신 기간 동안 아이는 어머니와 한 몸이 되어 그녀의 영양분을 섭취하고, 감정을 공유하며 교감하는 과정을 경험한다. 정신분석에서 출산을 몸의 일부였던 아이가 떨어져 나가는 최초의 심리적 외상으로 바라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곁에서 바라보기만 하는 남성으로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동일화 경험인 것이다. 출산 이후에도 수유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아이와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어머니는 자연스럽게 세상을 바라보는 아이의 관념을 1차적으로 지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필요하다고 표현할 때마다 나타나 만족감과 편안함을 주는 – 어머니 몸의 일부임을 지각하지 못한 사물로써의 – 젖가슴, 자신의 요구가 대상을 창조했다는 상상 속 만족감과 전능감) 이처럼 명백한 생물학적 차이로 인해 발생되는 심리적 애착의 차이는 부정할래야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아이의 심리내적 여정은 어머니와의 깊은 육체적 관계를 통해 시작된다. 아이와 동일시 해 온전히 대상을 향하지 않는 어머니는 아이를 병리적으로 이끌 수밖에 없다. 이를 분리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존재는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역할)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부모와 아이의 삼각관계 하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질서를 밝혀낸 것은 정신분석의 인정된 공헌이며, 이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바로 정신분석과 언어학, 철학을 통합시킨 라깡이다. 법의 집행자는 분명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자이다. 생물학과 직결된 정서의 분리는 아버지라는 이름의 상징이 담당한다. 인류가 전혀 새로운 종으로 변이 되지 않는 한 이는 우리 안에서 언제나 유지될 구조적 질서이다. 엄연히 존재하는 구조는 부정한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명백한 한계이기 때문이다.
3.3. 욕망을 창조하는 금지의 법
한편 아무리 사회와 가정에 지은 죄가 많다 하더라도 가부장제의 구조를 지켜야만 하는 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이러한 대립적 이항 구조만이 욕망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융합된 상태에 머물러 있던 상상계적 아이는 아버지의 거세를 통해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을 포기 (원초적 억압) 하고 팔루스를 찾기 위한 여정 (진리의 아버지 찾기) 을 시작하게 된다. 다시 말해 욕망은 결여에서 오는 것이며, 결여를 일으키는 것은 금지라는 것이다. 바꿔 말해 금지는 욕망의 원인이 된다. 좌절을 겪지 않은 아이가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갈등 상황에 처하지 못해 자신의 삶을 추동하는 욕망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깡을 통해 현대화되었지만 사실 이러한 점을 앞서 증언한 것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함이니라
바울, 로마서 7:7-13, 개혁한글판
율법은 의무이다. 즉,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의 나를 타인의 방향에 맞춰 이끄는 금지를 통한 억압이다. 하지만 금지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이유일 것이다. 신약에서 예수가 정식화한 것은 율법이 서로 사랑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음을, 그것이 율법의 완성임을 증언하는 것으로 그 의미는 비로소 완결될 수 있었다. 율법이 없으면 우리는 무엇이 상대에게 해를 끼치는 것인지, 즉 죄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 채 각자의 감정과 충동에 따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라고 하는 구절이 바로 금지를 통해 욕망이 생성됨을 이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우리가 율법으로 인해 행동의 제약을 받아 만성적인 욕망과 죄의 상태에 빠지게 되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바울이 분명히 밝혔던 것은 그것은 ‘선한 것‘이라는 점이다. 여기에 아버지 이름의 기표가 어느 방향을 향해 나아가야 하느냐에 대한 실마리가 담겨 있다. 아이와 어머니가 바라보는 아버지 이름의 기표는 선한 법을 향해 있어야만 한다. 유대의 율법은 하나님과 사람, 이웃과 이웃 간의 규율뿐 아니라 노예와 과부 등 당시 외면당하기 쉬운 약자들에 대해서도 사랑의 보살핌을 강제하고 있다. 아버지의 법, 즉 위임받은 힘으로서의 권위는 소외됨이 없는 공동체 전체를 향한 것이어야 한다. 아버지 또한 진정한 팔루스를 바라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3.4. 욕망을 유지시키는 대립 구조
오늘날은 금지가 갈수록 약화되는 시대이다. 그것이 합의를 통한 갈등의 해결에서 온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새로운 갈등을 향해 나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자가 느끼기에 이런 과정에 신경증적 거부가 더 크게 자리하고 있는 것 같아 보여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바뀌어야 할 쪽은 힘을 가진 쪽이다. 힘의 차이가 극대화될수록 미치는 영향력이 지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이를 대하는 부모의 지식이, 국민을 대하는 국가 권력의 역할이 지극히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아직 힘을 가진 자가 그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경우를 충분히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는 분명 누군가에게 선배인 모두의 잘못이며 가부장제가 그토록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이유이다. 그러나 권위주의를 타파하자고 누군가가 반드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권위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된다. 너도 옳고 나도 옳다는 입장에 숨겨진 갈등의 회피, 진리의 외면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질서 안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지식을 탐구해 더 나은 합의의 길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과학과 인문학은 계속해서 그 질서를 이해해 가는 중이다. 그것이 우리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자 필자가 이렇게 글을 쓰게 된 이유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간과했던 것은一표준적인 데리다의 용어들로 서술하면一생산력의 완전한 전개의 ‘불가능성 조건’으로서의 이러한 내재적 장애물/역설은 동시에 ‘가능성 조건’이다. 만일 우리들이 자본주의의 내재적 역설인 장애물을 철폐한다면, 우리들은 최종적으로 장애물로부터 해방된 생산력을 향한 완전히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욕동을 갖지 못하고, 우리들은 자본주의에 의해서 산출되어지지만 동시에 방해받는 것처럼 보였던 이러한 생산력을 잃어버린다. 만일 우리가 장애물을 제거하면,이러한 장애물에 의해서 방해받은 바로 그 잠재력은 사라진다….
슬라보예 지젝, 『무너지기 쉬운 절대성』, p. 34
지젝에 따르면 자본주의의 내재적 역설은 다름 아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이다. 자본주의의 결여를 지적함으로 출발한 자본주의의 환상이자 장애물인 공산주의는 역설적이게도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유지시키는 결정적인 잠재력이다. 이를 정신분석적으로 해석해 보면 갈등 상황으로 연출된 내면의 감정적 동요는 나의 무의식의 한계를 알려주는 중요한 신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무의식은 외부에 있다’는 라깡의 표현으로 정식화된 것으로 앞서 좌절 없이 욕망을 획득할 수 없다고 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갈등을 통해서만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진정한 페미니즘의 도래를 위해서는 진정한 가부장제에 대한 논의 또한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서로는 서로의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1]“어느 날 나는 내 견해를 확인시켜주는 관찰을 하게 되었다. 아이는 실이 감겨진 나무로 만든 실패를 가지고 있었다. 이전에는 예를 들면 자동차 놀이를 하기 위해 실패를 끌고 다니는 일은 결코 하지 않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커튼을 쳐놓은 침대 가장자리 너머로 아주 능란하게 실이 묶인 실패를 던지고, 그 실패가 사라지면 동시에 의미가 풍부한 ‘오-오-오-오[2]’라는 소리를 냈다. 그런 다음 그는 실을 다시 잡아 당겨 침대 밖에 있는 실패를 끌어당기고는 기쁨에 넘쳐 ‘다[3]’라고 외치며 실패의 출현을 환영했다. 이것은 사라짐과 되돌아옴을 의미하는 완벽한 놀이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끊임없이 반복하는 첫 번째 행위[사라짐]에만 의미를 부여했다. 하지만 가장 큰 기쁨은 두 번째 행위[되돌아옴]에 있다는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놀이의 해석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아이가 획득한 문화적 질서의 중요한 결과, 즉 그 아이가 충동 만족의 포기를 달성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그리하여 아이는 어머니의 외출을 반대하지 않고 허락할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아이는 자기가 손에 잡을 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사라짐-돌아옴’을 무대화함으로써 자신을 보상했다.” – S. Freud, 『쾌락원리를 넘어서(Jenseits des Lustprinzips)』(1920), pp. 52 ~ 53.pp. 145 – 6 에서 재인용
[2] 독일어로 ‘포르트(Fort)’는 ‘가버렸다’ 혹은 ‘사라졌다’를 의미한다(원주).
[3] 독일어로 ‘다(da)’는 ‘왔다’,‘여기 있다’를 의미한다(원주).
* 썸네일 이미지 출처 : maka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