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이 완성한 ‘욕망의 그래프’ – 『에크리 읽기』, 브루스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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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욕망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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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정리할 내용은 평소 알고 싶었지만 쉽게 엄두내기 어려웠던 라캉의 욕망의 그래프이다. 원래는 『라캉 · 세미나 에크리 독해』 를 참고했으나 내용이 만족스럽게 와닿지 않아 브루스 핑크의 저서를 주로 참고하게 되었다. 또한 이전에 고정점에 대해 다뤘던 적이 있지만, 그래프 자체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이번 글을 통해 욕망의 그래프의 전반적인 내용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 고정점 참고글 언어적 주체와 고정점 (누빔점))

1. 욕망 그래프의 탄생 배경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지어져 있다’ 즉, 언어가 무의식의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라캉 이론의 핵심 전제라고 할 수 있다. 언어에 대한 전통적인 인식 방법은 사물에 이름 붙이기 (언어적 통일성) 였다. 소쉬르는 이를 기표 (청각 이미지) 와 기의 (개념) 로 세분화 해 소리에 대한 심리적 각인 (표상) 이라고 하는 결정적인 힌트를 라캉에게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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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의 “하위구획delimitation” 도식 (『강의』, 146), (출처 : p. 207 직접 그림)

라캉은 이 도식을 각 절이 갖는 의미의 임의적 결합 (a+b+c) 이 하나의 청각영상 (표상) 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봤는데, 그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언제나 문장의 마지막에 가서야 정확한 의미가 완성되는 언어의 사후적 성격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C절을 ‘건강이 나빠졌다’라고 한다면, ‘철수는 기름진 음식 때문에 ( ).’ 라는 문장에서 C절이 들어와야만 그 의미가 정확해진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기표와 기의는 바로 그 순간에 고정되는 것이다. 욕망의 그래프가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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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그래프 1, (출처 : 조엘 도르, 『라깡 세미나 · 에크리 독해 1』, p. 67)

기표 / 기의라고 하는 언어적 구조 위에 시간이라는 변수를 도입시켜 완성한 위 그래프는 우리의 의사소통 방식, 더 나아가 언어를 통한 주체의 도래라는 특성을 잘 설명해 준다. 브루스 핑크의 설명을 빌자면 여기에서 S→S’는 말의 벡터 (벡터 : 크기, 방향 갖고 있는 양, 힘, 속도, 가속도 등을 의미) 를, △→$ 는 주체성의 벡터를 의미한다. 즉, 언어(SS’)로 인해 유기체적 인간(△)이 분열된 주체($)가 되는 것을 묘사한 것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동물적 존재였던 우리가 언어를 통해 사회적 존재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언어화의 결과로 진정한 나는 소외되지만, 바로 그 결여로 인해 욕망이 탄생하면서 (분열된) 주체가 되는 것이다.

2. 욕망의 그래프 2 – 타자의 주체되기 (주체의 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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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그래프 2 (시니피앙은 기표를 의미한다, 출처 : YES24 블로그[1])

s(A) : 대타자의 기의 (주체의 요구에 대해 대타자가 받아들인 의미)
A : 대타자 (Autre)
m : 자아 (moi)
I(a) : 소타자 (타자 이미지)
I(A) : 자아 이상

욕망의 그래프 2 (합리적인 담화의 순환운동) 는 1과는 좀 다르다. 그래프 1이 언어를 통한 주체의 탄생을 요약해서 보여준다면, 그래프 2는 분열된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아 이상으로 향하는 여정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래프 하단 벡터 $ → I(a) → m→ I(A) 는 거울단계를 나타낸다. 거울단계는 6~18개월에 속하는 아기가 대상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획득해가는 단계로 아직 상상계 속에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이 때의 아이는 대타자의 반응을 통해 그녀/그의 눈에 이상적인 것 (욕망의 대상) 이 되기 위해 애쓰게 되는데 (자아 이상을 향해 나아감 I(A)), 다시 말해 어머니 욕망에 종속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 거울단계 참고 글 : 라캉의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간단히 살펴보기)

한편 아이의 의사 표현은 그래프의 상단으로 우리의 관심을 옮겨 놓는데, 이 때 두 개의 교차점 s(A), A 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첫 번째 교차점인 A는 언어적 질서가 부여된 장소, 즉 코드 (코드 : 정보의 표상, 전달 역할을 하는 기호와 상징의 총체) 의 장소이자 대타자의 장소이다. 아이는 대상과의 반복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언어를 습득한다. 즉, A는 대타자가 반복적으로 전달했던 방식을 나름대로 이해한 아이가 대타자의 방식에 맞춰 자신의 욕구를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부터 연결된 s(A)는 타자에 의해 받아들여진 ‘의미’를 뜻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는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상단의 화살표처럼 A → s(A) 로의 직접적인 이동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화살표를 브루스 핑크는 ‘요구’라고 표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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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한계로 인해 등장하는 욕망 (출처 : p. 217 직접 그림)

보다시피 아이는 대타자와의 동일시 (거울단계) 속에서 자신의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현하지만 자신이 전달한 의미가 끝없이 우회할 뿐임을 경험하게 된다. 이제 내가 진짜로 원하는게 무엇인지, 결여를 채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할 때가 온 것이다.

3. 완성된 욕망의 그래프 – 자신의 주체되기 (주체의 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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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욕망의 그래프. 라캉의 모든 도식이 그렇듯 그냥 보면 무슨 암호문 같다. (출처 : YES24 블로그[1])

S(/A) : 대타자 속 결여의 기표 = -∮ (마이너스 파이)
($◇D) : 충동 (분열된 주체와 타자의 요구 사이의 갈라진 틈)
($◇a) : 환상 (분열된 주체와 욕망의 대상 사이의 갈라진 틈)
d : 욕망

앞선 그래프 상단에 등장하는 욕망 d 은 주체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준다. 이제껏 타자의 욕망의 욕망, 즉 타자의 욕망의 대상되기를 욕망했던 주체가 새로운 질문과 대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욕망 d 을 경유해 드러나는 환상은 타자가 주체에게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드러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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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그래프의 윗 부분, (출처 : p. 219 직접 그림)

타자의 욕망을 알기 위해 탐구하던 주체는 “Che vuoi? 당신은 무엇을 원합니까?” 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하지만 분석 상황에서 환자의 이러한 요구 (분석가가 타자의 욕망을 알려줄 것이라는 요구) 는 좌절되어 주체에게 되돌아가야만 한다. 이로 인해 주체는 고뇌에 빠지게 되지만, 이를 통해 비로소 소외에서 분리로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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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그래프의 윗 부분에 나타나는 경로, (출처 : p. 220 직접 그림)

위 경로는 신경증 환자들이 일반적으로 따르게 되는 경로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대타자의 결여의 기표 S(/A) 일 것이다. 이 지점에서 주체가 만나게 되는 것은 타자의 근본적인 결여일 뿐이기 때문이다. 즉, 이제껏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던 것에서, 타자도 자신처럼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애초에 불가능했던 시도를 해온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다. 앞서 분석가의 질문에서처럼 진정으로 홀로서기를 해야할 시기를 받아들일 때가 온 것이다. 라캉은 이런 진실과의 대면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신경증 환자의 욕망은 신이 존재하지 않을 때 태어나는 것이다. – 라캉, 세미나 VI, (1959년 6월 24일)
브루스 핑크, 『에크리 읽기』, p. 224에서 재인용

그래프 아랫 부분에서 (기의로서의) 대타자 s(A) 는 주체의 요구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대상이었다. 하지만 윗 부분의 (기표로서의) 대타자 S(/A) 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제시하지 않는다. 더 이상 타자에 의해 이상, 해답, 보장이 제시되지 않는 가운데 책임이 전적으로 주체에게 옮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여의 기표 S(/A) 는 철저히 주체의 진리를 위해 자신의 자리를 비워놓아야만 한다. 이 근본적인 결여의 자리는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그것은 어떤 객관적 현실도 환자가 말하는 것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것 (환자의 이해에 따라 왜곡될 수 있음), 따라서 인간의 주체화에는 어떤 합리적 언어도, 메타 언어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철저히 그것들 너머에 있다는 것이다. 오직 유일하게 보증할 수 있는 것은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는 담론 그 자체 – 말하는 과정, 말하는 행위 자체 – 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환자의 말하기를 통해 진실을 드러낸 정신분석의 중요한 결론처럼 말이다. 브루스 핑크는 이런 두 그래프의 차이를 기막히게 요약한다. 언어가 인간을 동물과 다르게 만드는 것 (그래프 2) 이라면, 주이상스는 인간을 기계와 다르게 만드는 것 (그래프 3) 이라고 말이다.

한편, S(/A) 는 근본적인 결여의 기표, 주이상스를 금지시키는 아버지의 은유와도 연계될 수 있다. 대상이 상실되어야만 욕망할 수 있다는 것은 대상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만 상징화가 가능함을 의미한다. 동물은 배고픔이 충족되면 곧 잊게 되지만, 우리가 ‘배고픔’이라고 이름을 붙인 순간부터 그 단어를 통해 당시의 상태와 감정을 다시 불러올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향유 (주이상스) 에서 거세로 향하는 벡터 S(/A) → $◇D 를 통해 주체는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함께 경험하게 된다. 대타자의 결여 (마이너스) 를 통해 상실감을 경험했지만, 여전히 충동을 통한 만족 (플러스) 가운데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상 가운데 머무르는 것 자체가 환자의 충동이 일정 부분 만족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환자들은 증상으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벗어나고 싶어하면서도 막상 변화를 위한 시도에는 저항하기 때문이다 (사실 환자들 뿐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상단의 그래프는 세미나 XI를 통해 라캉이 가장 근본적인 환상을 가로지른 주체가 어떻게 충동을 견뎌낼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요구의 너머에서, 주이상스 금지, 타자 속 결여의 기표를 대면한 주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동의 만족을 통한 쾌락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세가 완성되어도 쾌락은 지속 가능하다.


[1] YES24 블로그, 프로이트와 라깡의 ‘충동(Trieb)’에 관한 18개의 텍스트

* 표지 이미지 출처 : pxhere

4 thoughts on “라캉이 완성한 ‘욕망의 그래프’ – 『에크리 읽기』, 브루스 핑크”

  1. 너무 간단하고 명확한 정리 감사합니다! 하지만 결론은 같겠지만, 표현은 약간 달리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A가 s(A)를 직접 받아들이는 것은 가능하되, 단지 s(A)가 나타나는 방식이 거울단계의 목표인 I(A)로 연결되지 않는 (헤겔적으로 말하면) ‘매개적’인 구조 (대타자 시점 A > i(a)~m > s(A), 주체 시점 $ > i(a)~m > s(A)) 이기에, 요구가 잔여로 I(A)를 남기는게 아닐까요? 제가 제대로 이해한건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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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좋게 봐주시고 의견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제가 아는 선에서 답변 드리자면, 아이가 대타자(A)의 의중(s(A))을 읽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언어라는 것도 우리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복합적인 현상을 부분적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 처럼요. 다만 말씀 주신 것처럼 대타자 관점과, 주체 관점의 근본적인 불일치가 자아이상과 욕망이라는 결과로 드러난다고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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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환상을 가로지른 뒤 S(/A)가 환상을 통해 보충된 것이 s(A)임이 사후적으로 밝혀지고 이에 따라 소급적으로 진실이 구성되어 s(A)에 대한 요구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음이 비로소 알려지는 것 같습니다.
        상상계 자체로는 이러한 구조가 밝혀지지 않는 즉자적 구성을 띄므로 자아는 끊임없는 Che voui?의 긴장(요구의 반복)에 놓이게 되는 것이고요.

        상상계의 즉자적 상태를 넘어서야만, 곧 상징계에서 환상을 가로질러 남근이 결여의 기표임을 확인한 이후에야 비로소 대타자는 Che voui?에 대한 답이 전무하다는 것(혹은 그 응답이 ‘그것은 없다無’는 것)을 알 수 있기에, 아이는 ‘어머니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지?’라고 묻는 것에 대한 응답을 받을 수 없는 것이군요.

        즉, 외부의 관점(사후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아 이상을 향한 아이의 몸부림은 근원적으로 s(A)가 불가능하다는 것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어머니 자신도 욕망하는 바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와, 진짜 심오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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