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이상스와 4가지 증상과의 관계,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딜런 에번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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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워하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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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주이상스 개념의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초기 순수한 쾌락만을 의미(1953~56)했던 것에서 성적 쾌감(오르가슴)을 포함(1956)하게 되고, 마침내 고통까지 품게 되면서(1960) 보다 높은 차원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 말이다. 이것은 주이상스가 결여된 대상을 추구하는 욕망을 유지시키는 지지자(1958)였던 것에서, 그 자체로 욕망의 대상으로 전환되는(1963) 역설적인 변화의 연속이었다. 쾌락을 추구하는 결과주의에서 이를 향한 고통까지도 감내할 수 있게 되는 과정주의로의 전환이라고 소개한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번 글에서는 딜런 에번스가 주이상스를 다양한 증상들과 연관지어 설명한 부분을 소개하고 다른 저자의 연구로 넘어가고자 한다.

1. 여성적 주이상스 맥락에서의 불감증

먼저 살펴볼 증상은 불감증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이상스의 ‘여성적 차원’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1958년의 불감증과 1973년의 불감증은 주이상스 개념의 변화처럼 완전히 다른 것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차원의 여성적 주이상스는 대타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 내면에서 완벽한 쾌락을 향유하는 주체를 의미하는 대타자는 분명 상상적인 것이지만, 라캉은 여성이 남성보다 이 영역으로 더 깊이 나아간다고 이야기한다. (여성적 주이상스는 남성의 것보다 크다, 1963)[1] 성적인(팔루스적) 주이상스가 남녀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라면, 이러한 신체적(보충적) 주이상스는 다분히 여성적인 것이라는 뜻이다. 이 영역은 언어화가 불가능한 곳으로 신비한 황홀경, 또는 물(物)과 관련된 은유로도 묘사[2] 된다.

라캉의 불감증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1958년의 정의가 ‘성적 욕구에 적절한 만족의 결핍’이었다면, 1973년에는 ‘알 수 없는 것'(불감증 자체를 의문에 부침[3])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무려 72세가 되어서야 여성이 알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시인한 셈이다. 따라서 명백히 성적인 불감증을 앓고 있는 여성에게조차도 함부로 증상의 이름을 붙일 수는 없다. 그 여성이 아무리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해도, 본인도 전혀 알지 못하는 주이상스를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감증 자체, 즉 고통을 토로하는 것 자체를 통해 말하기의 욕망, 또는 위로받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감증의 원인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경우 거세되지 않은 남성에 대한 질투[4]를 언급했지만, 라캉은 오히려 성관계를 맺는 남성이 상징적으로 거세된 존재여야만 자신의 환상의 대상(몽마, 꿈에서 나타나는 악마)과 성적인 만족을 누릴 수 있다고 봤다. ‘성관계는 없다’는 명제로 요약할 수 있을 이러한 설명은 아마 다른 책을 통해서 좀 더 깊이 다룰 기회가 있을 듯 싶다.

2. 주이상스와 증상과의 관계

2.1. 정신병

정신병적 범주에 속하는 편집증과 분열증은 대타자 주이상스의 대상으로 머물러 있는 상태이다. 아버지를 전혀 바라보지 않는 어머니(대타자)로 인해 모든 향락이 아이에게 향해있는, 진정한 융합 관계에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향한 과도한 주이상스의 투여는 불안을 유발하고,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반복 습관(증상)을 만들어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라캉은 정신병 중 특히 편집증에 높은 관심을 보였다고 하는데 박해자의 형태로 등장하는 대타자, 프로이트의 환자였던 슈레버의 경우 스스로를 하느님의 성적 대상으로 삼았던 것[5]이 그 예라 할 수 있다.

2.2. 도착증과 초자아

한편 도착증은 대타자 주이상스의 도구라고 한다. 정신병적 주체가 대타자에게 소유된 상태라고 한다면, 도착증적 주체는 소유 상태는 벗어났지만 자신의 삶을 대타자를 위하여 헌신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은유의 관점에서 정신병은 거세 자체가 폐제된 것이라면, 도착증은 거세를 알지만 부인하고 있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라캉은 사디즘, 동성애 등이 해당 범주에 속해있는 것으로 보는데, 그들의 심상에서는 여지없이 초자아가 강력한 기능을 한다. 자아에게 사디즘적으로 행하는 초자아는 주체가 순응할수록 더욱 잔인[6]해진다. 죄책감 없이 즐기라는 명령, 이미 명령 자체로 인해 즐기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어 버리는 최고로 잔인한 형벌이 가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이를 다시 불감증과 연결 짓는다. 상대가 절정에 도달할 것을 요구한다는 생각만큼 오르가슴을 방해하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2.3. 신경증, 그리고 증상의 해소

또한 다양한 의미의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상 주이상스는 모든 분석가들이 마주하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신경증의 핵심 역설을 주이상스의 역설적 성격과 동일한, 고통스러운 쾌락, 쾌락적 고통사이에서의 갈등[7]으로 압축한다. 분명 자신의 증상이 고통스러워 분석가를 찾지만, 이미 증상이 제공하고 있던 만족감으로 인해 분석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시점이 되면, 환자가 증상을 통해 누리고 있는 주이상스를 깨닫게 해줘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앎을 통해서 비로소 조금 덜 괴로운 방식을 찾아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러한 앎이 분석적 해석을 통해 증상을 없애는 것에 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50년대의 라캉이 프로이트를 따라 증상을 해독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70년대 초에 이르러서는 증상과 병증(sinthome)을 구분해 병증을 쾌락의 핵, 즉 상징적인 효과가 불가능한 분석 너머의 자리에 위치시켰기 때문[8]이다.

저자는 이 연구를 통해 라캉의 이론이 단절이 아닌 연속선상에 있음을, 또한 지나치게 이론적이기만 하다는 오해를 풀어주고 싶었다고 한다. 아마 지난 글과 오늘의 글이 그의 두 의지치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앞서 설명한 증상들은 제목처럼 임상에서의 주이상스와 관계맺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킨 것이어서 구체적인 이해를 통한 개운함을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앞으로 읽어나갈 다른 책들을 통해 오늘의 아쉬운 점들을 채워간다면, 마치 페인트를 덧칠하듯 알게 모르게 명료해지는 경험으로 내면 세계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넓혀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1] p. 28
[2] p. 30
[3] p. 37
[4] p. 36
[5] p. 39
[6] p. 40
[7] p. 40
[8] p. 33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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