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적으로 리뷰 중인 『라깡 세미나 · 에크리 독해 1』 의 독해가 중반을 넘어 가면서, 한편으로 해당 책에서 다루지 않은 라캉을 보다 깊이 탐구하기 위해 다른 책을 찾아 나설 필요가 있었다. 이 책은 그러던 중에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으로 여지없이 절판된 상태였는데, 뜻밖에 쿠팡에 재고가 남아있어 주문하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교보나 YES24에서 품절된 책들을 최근 두 권이나 이곳에서 구입할 수 있었는데 혹시나 찾고 계신 책이 품절됐다면 쿠팡에서도 한 번쯤 찾아보시길 추천 드린다.
이 책은 8명의 학자들이 3가지 기준[1]을 갖고 선별한 라캉의 중요한 개념을 깊이있게 탐구한 연구 모음집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을 전체적으로 개괄하는 일반적인 입문서들과는 다른 방향에서, 그의 이론이 시기에 따라 분열되고 단절되었다는 오해를 풀기 위해 (지속적인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이해한 분트의 신화의 성격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터부에 의한 금제가 악마의 권역에서 신들에 대한 믿음의 권역으로 이식되는 과정… 한 단계가 다음에 오는 더 강력한 단계에 의혜 극복되고 그래서 격퇴 되는데도 불구하고 다음 단계에도 열등한 형태로 다음 단계와 나란히 끈질기게 존속하게 되고, 바로 이 때문에 숭배의 대상이 기피의 대상으로 변전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신화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 지그문트 프로이트.「토템과 터부」,『종교의 기원』, 프로이트 전집 13,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3, p.64
p. 10에서 재인용
이번 글에서는 책의 첫 번째 연구자인 딜런 에번스의 ‘주이상스 탐구’ 중 ‘변화의 과정’에 대한 부분을 먼저 다루고자 한다.
주이상스 개념의 변화
흔히 ‘향락enjoyment’이라고 직역되는 주이상스는 라캉 개념들 중 가장 중요하기도, 또 가장 복잡하기도 한 용어이다. 하지만 단순한 쾌락 외에도 성적인 만족인 오르가슴을 뜻하기도 해 프랑스어를 그대로 차용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라캉의 이론 자체가 정교해지면서 주이상스 개념도 변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는데, 저자는 이를 하나의 개념으로 ‘종합’해 독해하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라캉은 자신의 용어를 고정시키려 의도하지 않았고, 오히려 다양한 의미를 발전시키고 심지어 충돌시키기까지 해왔기 때문[2]이다. 따라서 저자가 추천하는 방식은 연대 별로 다른 뉘앙스를 지닌 주이상스의 개념을 각 시기적 맥락에 위치시켜 바라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 1953 ~ 56년 : ‘쾌락’의 주이상스
라캉의 주이상스는 1953년 강좌에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그가 1901년생[3]임을 감안했을 때, 무려 52세가 되어서야 이 개념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그 중요성에 비해 (저자는 라캉의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주이상스와 대상 a 를 꼽는다) 이론화가 상당히 늦었다고 볼 수 있다. 주이상스는 30년대 코제브의 헤겔 강의에서 차용한 것으로, 노예가 주인만이 소유하고 즐길 수 있는 대상을 생산해 주인은 노력 없는 향락(쾌락)을 얻는[4]다는 내용을 통해서였다. 다만 당시에는 사용 빈도도 낮았고, 성적인 의미는 없는 순수한 쾌락을 의미했다고 한다.
2. 1956년 ~ : ‘성적 쾌감’의 함의
저자는 이후 주이상스가 성적인 의미를 획득한 것이 (라캉은 인정하지 않지만) 조르주 바타유의 영향이었다고 본다.
우리는 길을 잃거나 위험에 처한 느낌을 지나치게 불안해하지 말고 견디면서 즐겨야〔jouir〕한다. – G. Bataille, “Histoire de l’érotisme” (1957), Œuvres complètes, vm, Paris : Gallimard, 1976, p. 89.
p. 22에서 재인용
바타유의 필연적으로 과도할 수밖에 없는 관능적 희열, 즉 죽음 같은 전율로 표현되는 오르가슴의 역설은 고스란히 라캉의 주이상스에 기입된다. 1958년 불감증을 ‘클리토리스 주이상스의 결핍’[5], 같은 해 다른 논문에서 ‘성적 욕구에 적절한 만족의 결핍’[6] 이라 정의한 것이 적절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3. 1958년 : 주이상스와 욕망의 구분
주체는 단순히 욕망을 만족시키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욕망하기를 즐긴다〔jouit〕. 이것이 바로 그의 주이상스의 핵심 차원이다. – J. Lacan, 1958년 3월 26일 세미나.
p. 23에서 재인용
1958년 강의에서 처음 욕망과 주이상스를 구분지은 라캉은 생물학적 욕구 만족를 넘어 영원히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등장시킨다. 욕망이 만족될 수 없는 것은 대상이 없기 (결여) 때문으로 그저 욕망하는 것 자체가 즐거운, 즉 욕망을 유지시키는 것이 주이상스가 된다. [7]
4. 1960년 : 주이상스와 쾌락의 대비
이전까지의 주이상스가 ‘쾌락적 감각’만을 의미했다면, 1960년 『세미나 7권: 정신분석의 윤리』 부터는 정반대, 즉 ‘신체적, 정신적 고통’도 함께 의미[8]하는 중요한 전환기를 맞는다. 모순적일 수 밖에 없는 이런 개념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했다.
4.1. 쾌락만 존재하는, 대타자의 주이상스
개개인마다 갖고 있는 궁극의 환상이 있다. 온전히 행복하고 증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라캉은 이런 환상을 대타자만이 접근 가능한 과도한 주이상스라고 설명[9]하는데, 그 기원을 최초의 대타자인 어머니와의 경험에서 끌어온다. 자신이 없이도 행복해 보이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아이는 이런 어머니의 주이상스를 동요시키기 위해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것이 성공해야만 자신의 욕망을 발전시킬 수 있게 된다. (물론 이는 거울단계에 한한 이야기로 아버지 은유를 통해서는 역으로 이러한 바람이 거부(거세)되어야만 자신의 욕망을 찾아나설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아이는 대타자의 주이상스가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지만, 다른 대상을 향해 있는 어머니를 바라봤던 첫 충격은 환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처럼 대타자의 주이상스는 60년대 이전, 쾌락만을 향해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4.2. 고통을 감내하는, 주이상스와 마조히즘의 차이
한편 쾌락과 고통이 함께한다는 정의는 마조히즘을 떠올리게 하는데, 주이상스와는 분명한 차이점을 갖고 있다. 마조히즘에서의 고통은 쾌락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따라서 고통과 쾌락의 구분이 매우 모호하다. 반면 주이상스에서는 고통이 쾌락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물론 고통을 통해서만 쾌락을 얻을 수 있으나 둘은 명백히 별개의 것으로 남아있다. 아마 목표를 이루기 위한 훈련 과정을 연상해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4.3. 고통을 뛰어넘는, 주이상스가 윤리적인 이유
라캉은 칸트가 『실천이성비판』 에서 예로 든 윤리적 실험의 의미를 설명한다. 한 남자가 가장 욕망하는 여성과 성관계를 맺을 기회가 주어졌지만 그럴 경우 처형될 것임을 아는 상황에서, 칸트는 잠재적 고통과 잠재적 쾌락을 비교하는 통상적인 계산을 무시하는 행위만이 윤리적이라 불릴 수 있다고 결론[10]짓는다. 고통과 쾌락의 비교, 즉 합리적인 비용-편익 분석에 따라 행위를 결정짓는 것은 프로이트의 쾌락원칙(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얻기 위해 행동 결정하는 주체의 타고난 경향[11])에 해당하는 것으로 주이상스와 명백한 대조를 이룬다. 주이상스는 쾌락 원칙 너머에 무엇인가 있다는 것, 즉 죽음을 감내하고라도 욕망을 이루려고 하는 (죽음충동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있다는 것, 다시 말해 합리적인 세계가 완전히 지배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 1963년 : 욕망의 종착지로서의 주이상스
63년은 60년 주이상스와 쾌락의 역설적인 관계를 정립한 이후, 주이상스와 욕망의 관계가 뒤집어지는 중요한 시기다. 이전 시기까지 주이상스가 욕망을 지속시켰다면, 이제는 반대로 욕망이 주이상스를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욕망은 주이상스에의 의지로 현상한다. – J. Lacan, Le SéminaireX, L’angoisse,1963년 2월 27일 세미나.
p. 24 에서 재인용
욕망이 주이상스를 향한 의지로 드러난다는 것은 결국 결핍된 욕망의 대상이 주이상스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후 라캉의 후기 저작들에서 지배적인 정의로 사용되게 된다. [12]
한편으로 저자는 분명 반대했지만 글을 쓰고보니 정리되는 생각을 종합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정리된 내용을 토대로 후반기 라캉의 개념을 요약해 보자면 고통을 감내하는 것을 통해 얻어지는 쾌락을 추구하는 주이상스야말로 우리가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욕망의 지향점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앞서 살펴보았듯 라캉은 이러한 결론에 결코 한 번에 다다르지 않았고, 굳이 종합하고자 애쓰지도 않았다. 그의 개념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교해져, 달리 말해 모순적이 되었다. 고통과 쾌락의 양면성을 품었고, 욕망과의 인과 관계는 전복되어 버렸다. 모호하다는 비판에 공감이 갈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분명 라캉의 후기 개념을 이해하고 발전시켜야겠지만, 그의 글을 읽을 때 만큼은 당시의 범위 안에서만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엄밀함도 갖춰야 할 듯 싶다.
[1] ① 라캉 고유의 개념, ② 라캉 강의에 지속적으로 등장, ③ 다양한 범주 (사회문화, 이데올로기, 철학 등) 에 적용 가능
[2] p. 19
[3] 위키피디아, 자크 라캉
[4] p. 20
[5] J. Lacan, “Propos directifs pour un congrès sur la sexualité féminine” (1958), Ecrits, p. 727. p. 21에서 재인용
[6] J. Lacan, “The Signification of the Phallus” (1958), Ecrits- A Selection, trans. A. Sheridan, London: Tavistock, 1977, p. 290p. 21에서 재인용
[7] p. 23
[8] p. 24
[9] p. 27
[10] p. 26
[11] p. 25
[12] p. 24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잘 읽었습니다.
말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