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조금 살펴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필자는 책벌레다. 비록 글 쓰는 시간이 오래걸리다 보니 (주제를 잘못 잡았나 싶고..) 보다 많이 읽고 더 자주 쓰지는 못하지만, 글을 완성해가는 이 모든 순간들이 내게는 아주 큰 의미로 다가온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오랜 기간 해결되지 않았던 내면의 갈등들을 이해하고 해소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던 것이 바로 정신분석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가치있는 지식이 있다는 것을 잘 알리고 싶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바로 그런 경험 덕분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기껏 감탄하며 읽었던 책의 내용이 돌아서면 희미한 윤곽만 떠오를 뿐 사실상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책이 정말 좋았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어떤 부분이 좋았냐고 물으면 말문이 막혔다. 이런…
나는 대체 책의 어떤 내용이 좋았던 거지?
결국 이렇게 누적된 고민은 필자를 글쓰기의 세계로 이끌어 주었다. 적어도 잊어버리고 싶지 않은 내용들만큼은 몇 번이고 곱씹어서 소화시키고 언제든 꺼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블로그는 그런 배움의 과정을 기록한 작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상 일반적인 의미의 서평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그저 학생의 관점에서 새롭게 알게 된 것을 신중히 기록하고 나누는 것에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가 너무 좋아서 정리하기 시작한 글들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간접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물론 여전히 작성한지 오래된 글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 문제가 반복되고 있지만, 이미 글로 남겨두었기 때문에 약간의 시간만 들여도 당시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려낼 수 있다는 상당한 장점이 있다. 기록의 위대함을 새삼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뜬금없이 블로그의 설립 이념(?)으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오늘의 주제인 변증법에 대한 좋은 설명적 예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변증법이란 이성적 주장을 통해 진리를 확립하고자 하는,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두 명 이상의 사람들 사이의 담론이라고 한다. 대화법, 문답법 등 모순을 통해 진리를 찾아내는 철학 방법을 일반적으로 지칭[1]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화를 통해 진리를 찾는 방법을 뜻하는 것이다. 다만 오늘날 잘 알려져 있는 것이 헤겔의 변증법이고, 라캉의 주체 개념 또한 여기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나 칸트의 방법이 아닌, 저자인 조엘 도르의 설명을 빌어 헤겔의 변증법을 먼저 탐구해 보고자 한다.
1. 헤겔의 변증법
1.1. 즉자적 상태
메타인지와 관련한 김경일 교수의 설명에서 필자가 겪었던 어려움을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이 있다. 첫 번째는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은 있는데 설명할 수는 없는 지식이고 두 번째는 내가 알고 있다는 느낌뿐만 아니라 남들에게 설명할 수도 있는 지식이다. 두 번째 지식만 진짜 지식이며 내가 쓸 수 있는 지식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또 다른 지적 능력 메타인지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은 사실상 알고 있는 지식이 아니다. 하지만 모른다는 것도 모르니 분명 아주 큰 문제이지만 본인은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 첫 번째 지식이 바로 즉자적 상태 (다른 말로 정립, 또는 긍정) 라고 볼 수 있겠다. 책이 좋았다는 느낌은 가졌지만 정작 무엇을 아는지도 몰랐던 무지, 즉 발전되기 이전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1.2. 대자적 상태 – 의식
그러다 나의 무지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온다. 필자의 경우처럼 다른 사람에게 설명해야 되는 때가 오는 것이다. 자신이 받았던 느낌을 상대방에게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은 그제서야 알게 된다. 이 때가 의식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간주하고 거리를 둔 ‘자기 객관화 (앞서 예로 든 메타인지)’, 즉 대자적 상태 (다른 말로 반정립, 또는 부정) 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설명하지 못한 것을 그저 ‘알게’ 됐다고 한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상태는 단지 설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저 인지하는데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상태에서는 그저 ‘설명이 잘 안됐네’라고 여기고 가볍게 넘어갈 수 밖에 없다. 대자적 상태에 머무르는 것이다.
1.3. 즉자대자적 상태 – 자기의식
하지만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두 번째 움직임인 대자즉자 (다른 말로 종합, 또는 부정의 부정) 로 나아가려면 나와 관련된 깨달음이 더해져야만 한다. 이 운동은 즉자로의 복귀, 즉 반성적 운동[2]이기 때문이다.
이 상태가 바로 내가 무지의 상태에 있었음을 깨닫게 되는, 달리 말해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복귀가 끝나야만 의식은 비로소 자기의식 (자기와 자기라는 대상에 대한 의식) 이 된다. 자기 객관화를 통해 즉자인 동시에 대자 (즉자 상태로 존재하는 대자) 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상태는 객관성이 결여된, 철저히 주관성에 머무른채 스스로를 속이는 (기만적) 의식일 뿐이다. 자기의식은 자기가 무엇인지 여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1.4. 즉자대자적 자기의식의 상태 – 이성
주관성으로 등장한 자기의식의 객관화를 위해서는 앞선 과정 (정반합의 이중적 운동) 을 반복해야한다.
세 번째 운동을 통해 대자는 주체의 의지, 즉 주관성을 의식하게 되고, 다시 네 번째 반성 운동을 통해서 보다 객관성을 확보한 주관성이 성립된다. 다시 말해 ‘나는 왜 설명을 잘 못하지?’라고 하는 문제 인식을 넘어 방법을 찾아 시도한 뒤 결과를 재인식하고 (3), 문제의 원인을 다시 나에게 적용해 개선 방법을 찾는 (4) 과정을 통해서만 이성이 실현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헤겔이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 사유의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유, 그것은 대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다른 자기 속에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서, 자기 자신 앞에 자신을 위치시키려는 끊임없는 활동이다.”
p. 215에서 재인용
즉자적 상태, 즉 의식에 머물러 있던 내가 자기 객관화의 관점을 수용해 자기의식이 되고, 즉자인 동시에 대자인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주체적 태도를 갖는 것이 이성, 즉 사유하는 자의 삶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다.
2. 라캉의 변증법
1930년대 파리에서 열린 알렉상드르 코제브(Alexandre Kojève)의 헤겔 강의에 영향을 받은 라캉[3]은 의식의 변증법을 욕망의 변증법으로 발전시킨다. 상호승인의 과정을 통해 이성의 단계로 나아가는 헤겔의 경우처럼, 라캉의 경우도 타자의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욕망하는 것 (타자의 욕망의 욕망) 을 통한 주체적 삶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최초의 대타자인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욕망의 대상이라는 것을 느껴야만 삶을 살아나갈 수 있다. 다시 말해 타자인 어머니가 나를 인정한다는 것이 내 안에서 받아들여져야만, 어머니의 그런 인정을 바탕으로 나를 인정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타자가 내 속에서 이미 자기 자신을 인정한다는 것을 내가 인정할 때만, 나는 그 대타자로서의 나[타자, Moi Autre] 속에서 나를 인정할 수 있다.
pp. 217 – 218
이러한 설명은 앞서 설명한 헤겔의 변증법적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즉자의 상태였던 아이는 어머니의 반응(대자적 경험)을 통해 어머니가 욕망하는 대상이 나라는 것을 알게 되고(자기의식), 이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신의 표현을 드러내며 점차 어머니가 알도록 의도하는데까지(이성) 나아간다. 아이 나름의 변증법적 성취를 이뤄가는 것이다. L도식 또한 주체의 상호주관적 이해를 잘 보여주는 예이지만, 한편으로 이러한 변증법적 인식의 한계 또한 분명히 보여준다. 주체는 철저히 자아(a)와 소타자(a’, 닮은사람)의 상호관계를 통해서만 자신을 바라보는 상상적 관계에 머무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이 헤겔과 라캉 변증법이 차이를 보이는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적 한계로 인해 분열된 주체는 영원히 대타자의 팔루스를 찾아나서는 욕망의 존재로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헤겔의 경우에서와 같은 ‘절대지’, 곧 ‘완전한 종합’은 달성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라캉의 변증법과 헤겔의 변증법 사이에는 또한 중요한 차이가 있다. 라캉에게는 헤겔의 절대지(絶對知)의 개념에서 나타난 것과 같은 최종적인 종합 같은 것이 없다 ; 무의식의 환원 불가능성은 그런 어떠한 절대지의 불가능성을 나타낸다.
딜런 에번스, 『라캉 정신분석 사전』, p. 146
3. 알랭 바디우의 반변증법
이처럼 헤겔과 라캉의 주체화는 반복되는 상호과정을 통한 성장의 과정을 설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런 ‘정반합의 과정을 통한 모순의 종합’에 근거하지 않는 주체화의 가능성을 깨닫게 해준 것은 알랭 바디우의 『사도바울』에서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는데 앞장섰던 바울의 극적인 회심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벌어진 일에 대해 ‘개종’이란 말을 쓰는 것이 합당한가? 그것은 하나의 청천벽력이었으며 중간 휴지였지 변증법적 전도는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주체를 세울 것을 요구하는 요청이었다…. 나는 바울의 입장은 반변증적이며, 죽음은 어떤 식이든 부정성의 내재적 힘의 불가피한 행사가 결코 아니라고 주장할 것이다. 따라서 은총은 절대자의 ‘계기’가 아니다. 그것은 예비적인 부정이 없는 긍정이다. 그것은 율법이 중단되면서 우리에게 도래하는 것이다. 은총은 순수하고 단순한 만남이다.
알랭 바디우, 『사도 바울』, pp. 39, 128
바디우에게 있어 주체란 사건을 통해 극적으로 변화된 존재를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분명한 예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고 말이다. 최근 읽고 있는 책에서도 그는 같은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는데, (아마 다음 글을 통해 소개할 수 있을 듯 싶다) 이는 앞서 설명한 헤겔, 라캉의 주체화 개념과는 완전히 상반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변증법을 처음 이해한 것이 바로 이 책을 통해서였다. 바울의 극적인 회심을 설명한 반변증법을 통해, 그의 반대 개념으로 변증법을 논리적 설득 과정이라 어림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담이긴 하지만 사실 필자의 경우는 두 가지 입장에 모두 긍정적이긴 하다. 물론 진정한 주체 개념이 무엇이냐라는 물음에만 한정한다면 바디우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크지만, 바울이 극적인 회심을 할 수 있었던 것과 기독교를 세울 수 있었던 배경을 무시해서는 결코 안되기 때문이다. 바울이 신약의 2/3를 저술하고 기독교의 교리를 분명히 세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변증법적으로 준비된 학자였기 때문이다. 날 때부터 바리새인이자 로마인으로서 섭렵했던 당대의 지식들이 무력화 되는 것은 분명 그가 경험한 사건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세상의 지혜를 부정할 수 있었던 것은 누구보다 세상의 지혜에 충만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구원이 세상의 지혜에 있지 않다고 여기는 바울의 이러한 주장에만 집중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붙잡고 있던 수많은 율법의 강령들이 예수 부활 사건에 대한 믿음이라는 그의 핵심적인 깨달음 앞에서 무기력해진다는 것을 절절히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다른 제자들이 상대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반변증법적 기회는 누구에게나 도래할 수 있지만, 그 효과를 극대화시키는 것은 분명 변증법적 전제를 통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1] 위키피디아, 변증법
[2] p. 213
[3] 딜런 에번스, 『라캉 정신분석 사전』, p. 145
* 표지 이미지 출처 : Unsplash
『라깡 세미나·에크리 독해 I』 이전 글 목록
1.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 한 라깡 이론의 형성 배경
2. 거울단계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관통하는 팔루스
3. 라캉의 ‘아버지의 은유’와 가부장제의 의미
4. 라캉의 거울단계,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간단히 살펴보기
5. 라캉적 분열의 의미와 공포증 사례 분석
6. 언어적 주체와 고정점 (누빔점)
7. 말하기(언표행위)의 중요성과 분석가의 개입 8. 주체와 자아의 차이, L도식